140. 효자(孝子) 효부(孝婦)의 효행
체(10세) | 부자 복수전, 광중 (no.16) |
광재(16세) | 아버지는 문정공파조 태현이다. 아버지가 별세하자 여묘(廬墓: 산소 곁 에 움막을 짓고 보살핌) 3년을 마치니, 효행으로 정려(旌閭)를 내리고 그가 사는 곳을 영창방 효자리로 명하였다. |
가고(19세‧문민) | 효행으로 정려를 명받았다. |
허(20세‧척약) | 척약제공파조 약항(청백리, 문온공)의 아들로 중국 운남성에서 죽은 아버지의 시신이 없자 유의장(죽은 사람의 옷)으로 장사지내고, 시묘 살이를 하며, 효경의 상례장을 벽에 써 붙이고 날마다 읽으며 눈물을 흘렸다. |
허씨(20세‧관찰) | 관찰사 약채의 며느리로 관향은 양천이며 열부로 남편은 검열 문(問)이다. 허씨 부인은 17세에 남편을 여의고 홀로 되었을 때 친정부모가 개가를 시키려 하자, 죽기를 맹세코 부모의 명을 따르지 않고 아기(철산: 광서부원군)를 업고 개성에서 시가가 있는 연산까지 수 백리 길을 걸어왔다. 낮에는 사람의 눈길을 피해 숨어 있다가 밤에만 거동하였다. 걸어오는 동안 호랑이가 호위해 주었다고 전하며 지금도 범넘이 재가 있다. 손자 국광(22세)이 좌의정까지 올라 광김 문호의 초석을 닦았다. 종신토록 수절하니 조정에서 정려를 내렸다. 정려각이 지방문화재 19호. |
태정(21세‧전리) | 3년 동안 친상을 당하여 수질과 요대를 벗지 않았다. |
기서(22세‧전리) | 12살에 어머니가 병이 드니 분뇨를 맛보고, 주야로 하늘에 빌었다. 아버지가 운명할 적에 손가락에 피를 내어 3일간 연장시켰다. 시묘 살이를 하고, 글은 반드시 성리서와 효경만 읽으니 향중이 사당을 세웠다. |
공의(22세‧삼사) | 왜란 때 어머니를 모시고 호악산에서 숨어살다가 왜적을 만나 어머니를 업은 채 살육당하니 후세인이 동명을 부모동(負母洞)이라 불렀다. |
호문(22세‧퇴촌) | 아버지 병환에 손가락에 피를 내어 소생시키고, 상중 시묘 3년 동안 피눈물을 흘렸다. |
23세
의경(삼사) | 부친상에 3년간 죽만 먹었다. |
순(삼사) | 정려를 명받았다. |
경희(전리) | 아버지의 병환에 손가락을 잘라 주혈하고 양친 상사에 3년 시묘를 살았다. |
24세
경운(삼사) | 시묘 살이 3년을 하던 중 죽으니 동네 이름을 효려라 하였다. 정려를 받다. |
보원(삼사) | 의병장으로 순절하기 전 양친 상사에 죽을 먹고 시묘하였다. |
성씨(삼사) | 남편이 임진난 때 진주성 싸움에 전사하자 장례 3일 뒤 입절하였다. |
수연(사온승) | 다섯 부자와 김씨 부인과 며느리가 순절하니 선무원 종훈에 책록되었다. 삼강행실도에 등재되고 삼강비가 있다.(no.73) |
응기(예조) | 선조 때 효행으로 참봉에 제수되고, 조세를 면제받고 정려를 받았다. |
해(밀직) | 새벽에 일찍 일어나 세수하고 의관을 정제한 다음 사당에 배알하고 계모와 백모에게 매일 문안을 거르는 일이 없었다. 제사 때에 아무리 추운 겨울이라도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었으며 종일토록 꿇어앉아 신명을 대하듯 하였다. |
애윤(공안) | 효도가 특출하여 추우나 더우나 잠자리를 깔아 드리고 새벽문안을 궐하는 일이 없었다. |
표(직제) | 영동 현감의 임기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공의 나이가 많을 때 어머니 상을 당하였다. 시묘 3년을 살면서 집에 한 번도 들리지 않았다.(no.68) |
조씨(삼사) | 정려 |
강(밀직) | 효행으로 찰방제수 |
호(밀직) | 효행으로 충순위를 제수 |
대성(삼사) | 부친상사에 3년을 피눈물로 통곡하고 상을 마치고 1년간 고기를 먹지 않았다.(no.84) |
개(의정) | 부친상시 시묘 3년 |
순선(삼사) | 효행으로 공조참판 추증, 정려 |
시성‧시척 (사온직) | 왜란 때 어머니를 구하려다 3모자가 함께 죽었다. 왕명으로 삼강행실록에 등재되고, 충효의 정려를 받고, 승정원 좌승지 추증 |
덕숭(예조) | 효행으로 참봉제수 |
구(사온직) | 부모의 산소에서 통곡을 하다가 기절까지 하고 여막을 지어 조석으로 통곡함에 풀이 말라죽었다. 이로 병을 얻어 돌아가셨다. |
인경(공안) | 아버지 상에 시묘 3년을 살면서 어머니의 문안을 드리는 일 외에는 집에 내려오는 일이 없었고 어머니 상사에 너무 슬퍼 병이 되어 상을 마친 뒤 두 달 만에 죽었다. |
양씨(삼사) | 아들과 함께 삼양포에서 죽으니 정려를 명받았다. |
영남(직제) | 어머니가 거처하시는 방문 앞은 노복을 시키지 않고 손수 쓸어서 별명이 소설옹(no.77) |
언박(퇴촌) | 종신토록 혼정신성을 폐한 일이 없다. |
전씨(문민) | 정려 |
통첨(문민) | 효생-섬첨, 선교랑 |
25세
갑(사온직) | 왜란 때 적을 만나 어머니를 보호하려다 함께 죽었다. 정려, 사헌부 지평에 추증 |
종익(총제) | 흉년에 가난한 이를 구제하니 향인이 송덕비를 세웠다. |
득려(퇴촌) | 친상 시묘 3년 |
나씨(예조) | 정절로 정려 |
성하(퇴촌) | 정려 |
인우(녹사) | 시묘 3년 |
명(퇴촌) | 효행으로 세금을 감면 |
영우(판도) | 아버지 임종시 배를 구해드리지 못해 평생 배를 먹지 않았다. 사계 선생과 기암 선생에게 글을 배우고 두 선생의 기제때 죽을때까지 나물밥만 먹었다. 흉년에 원근에 곡식을 나누어주고 받지 않으니 조정에서 10년 면세를 해주었다.(no.89) |
익(퇴촌) | 시묘 3년 |
난(전리) | 효행으로 참봉제수 |
질(전리) | 6월 5일 진주성 싸움에서 사태가 위급하자 말안장에 옷과 편지를 넣고 집으로 보내고 전사하였다. 말이 집에 도착하자 부인 박씨는 옷과 신을 무덤에 묻고 초혼장을 지냈다. 부인은 대‧소상을 마친 후 곡기를 끊고 10일 만에 졸하였다. |
서(밀직) | 충효로 증 참의 |
성화(문민) | 정려 |
언우(녹사) | 시묘 3년 |
장씨(의정) | 임진난 때 자부 홍씨와 함께 강물에 투신자결 |
익종(전리) | 흉년에 인근의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니 향인이 송덕비를 세웠다. |
덕신(공인) | 혼정신성을 다했으며 즐겨 드시는 음식을 항상 갖추었다. |
헌(직제) | 부모가 주무실 때 벌레를 제거하고 요강 씻는 일은 손수하였다. 아버지가 병이나 유자를 원했으나 계절이 아니라 구해 드리지 못하여 눈을 가리고 우니 주위의 사람들이 차마 보지 못하였다. |
공휘(의정) | 백성들이 성묘하는 것을 보고 부모를 추모하는 마음이 간절하여 임기 전에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왔다. |
26세
27세
성후(전리) | 효행으로 현종 때 세금을 면제받고, 숙종 때 자헌대부에 추증 |
세광(판도) | 정려 |
신행(공안) | 효행으로 별검-증 |
김씨(의정) | 사계선생 후실로 정려(no.100) |
언림(화평) | 효행으로 참의 추증 |
신길(공안) | 어머니가 위독하자 단지주혈로 회춘하게하고, 시묘 3년, 사헌부 집의 추증 |
윤(문민) | 정려, 향인이 팔현사를 세워 향사 |
선일(퇴촌) | 효행으로 공조참판 추증 |
연년(의랑) | 효행과 예학으로 어사와 도백이 포천, 수직-정랑「용원사」에 배향, 화산예집 |
유해(공안) | 효행으로 지평에 추증 |
자용(총제) | 효행으로 호조참의 추증 |
이성(전리) | 친환에 손가락을 잘라 주혈로 연명케 하고, 정려를 명받았다(no.79). |
이태(전리) | 친상에 시묘 3년을 할 때 효성이 감천하여 제비가 새끼를 까니 흰 제비가 되어 사람들이 감탄하였다. |
문씨(밀직) | 열행으로 정려 |
초연(판도) | 효행으로 세금 감면 |
진원(사온직) | 효행으로 세자익위사 세마를 제수 받았으나 어머니를 모실 수 없다고 사양하였다. 임금이 여러 번 부르자 어머니를 모시고 가 세마가 되었다. 효자 정려 |
화준(화령) | 문곡 김수항이 효성을 보고 조정에 천거, 포상하고 정려 |
양수(전리) | 효행으로 통정 추증 |
여옥(삼사) | 아버지 참판공이 병이 있어 어육이 아니면 먹지 않으니 몸소 그물로 고기를 잡아 봉양하였다. 관원의 부름을 받던 날에도 미리 돌아올 날을 고하고 기일을 조금도 어기지 않았다. |
김씨(직제학) | 병자호란 때 남편이 죽자 식음 전패하여 9일 만에 죽으니 숙종 때 열부의 정려 |
민씨(밀직) | 시어머니 간병을 하다가 부군이 먼저 사별하였다. 노령의 시부모 때문에 죽지 못하고 친상에 예제를 다하여 향천에 올랐다. |
용(직제) | 혼정신성을 폐한 일이 없고 의복과 음식을 몸과 입에 맞도록 부모생전 하루같이 하였다. |
정립(의정) | 어영 아관으로 있을 때 오랑캐 수백을 죽이고 투구와 철갑을 노획하였으나 친상을 당하여 논공행상에 참여치 않아 훈작을 받지 못하였으나 친상에 시묘 |
주만(화평) | 효행으로 승지 추증 |
발(녹사) | 효자로 통정에 제수 |
벽(퇴촌) | 부모 상사에 애통망극하다 병을 얻어 죽으니 세인이 효자라 칭송 |
서씨(판도) | 남편이 일찍 죽고 어린 자식을 양육하는데, 객지에서 불량배들이 부인의 정절을 유린하려고 하자, 갖은 고초를 이기고 수절하였다. 성균관 대사성 김복한이 묘갈문에 높은 뜻을 찬양하였다. 후인이 정려각을 세우고 그 탁행이 고려 말 허‧유 양원에 비교하였다. |
서씨(의정) | 만중 서포공의 할머니로 강화도로 피난 중 왕후와 세자를 모시고 있을 때 적의 침입으로 위기에 처하자 아들 익겸을 따라 순절하니 영조 33년 정려가 내려졌다. |
장(의정) | 저녁, 새벽 침석과 아침저녁 시중을 몸소 행하며 시동에 맡기지 않았다. 부모상사에 시묘 3년, 사헌부 지평에 추증 |
정망(의정) | 천성이 효성스러워 손바닥에 효우(孝友) 두 글자를 써서 항상 실천하였다. 현종 15년 연산‧은진 두 고을 유생 63명이 맹종과 왕상과 같은 효자라고 관찰사에 상신하니 조정에서 효자의 정려를 내리고 좌승지에 추증 |
규(총제) | 제사 때 아무리 추워도 목욕재계하고 도포를 입었다. |
처자(전리) | 정려 |
률(의정) | 효행으로 증 지평 |
충(총제) | 효행으로 증 참판 |
극광(삼사) | 효종 5년-영조 원년 생, 벼슬은 통력랑 공의 휘는 극광이요, 자는 현보다. 공은 어려서부터 재주가 있었으며 장성함에 용모가 풍부하고 몸이 거대하고 기국이 진중했다. 천성이 효우하여 아버지가 나이가 높고 병이 잦으니 공은 주야로 부축하였다. 물러가라 명하면 물러나 문밖에 앉아 편히 잠들기를 기다리고 잠든 후에야 물러났다. 상사 때는 슬퍼함이 지나쳐 거의 죽을 뻔 했으며 제사에 정성과 공경을 다하였다. 항상 말씀하시되 가난한 집 제사를 풍성하게 차리기 어려우나 정성과 경건함은 내 스스로 다할 수 있다고 하였다. 또 시제(時祭)에 더 중하게 여겨 널리 예문을 상고하고 그릇과 물건의 도수수를 마련하여 상행하는 규칙을 삼았다. 제사를 모실 때에는 아무리 추워도 목욕재계하고 꼭 도포를 입었다. 일찍이 시험장에 가려다 아우의 병으로 나가지 않으니 사람들이 응시할 것을 권하였으나 공은 말씀하되 과거는 분수 밖의 일이라 어찌 이러한 일에 얽매여 골육의 정을 페할 수 없다며 가지 않았다. 홀로된 누님이 역질로 죽었는데 병들 때부터 염습할 때까지 친히 살폈다. 고아가 된 생질을 데려다가 이웃에 살게 하고 교육하기를 친자식 같이하는 등 여러 가지 일에 대하여 모든 사람이 감탄하였다. 시문이 약간 남아있다. |
28세
식(녹사) | 정려, 제용감 판관에 추증 |
익(공안) | 효행으로 여지승람에 등재 |
주만(화평) | 효행으로 승지 추증 |
중창(의정) | 효행으로 정려 |
서구(밀직부사) | 3년 시묘 후 4개월 만에 졸하니 효상으로 입은 상처가 후세에 본보기가 되었다. |
성일(판도) | 충신 정려, 담양 종암사 배향(no.110) |
승낙(판도) | 아버지 상사에 빈소에 불이 나자 불 속에 뛰어 들어가 아버지의 관을 몸으로 가려 자신은 분사하고 시신을 보존하였다. 정려 |
익경(의정) | 12세에 부친상을 당하여 고기를 먹지 않으니 백씨와 중씨가 민망하여 손을 잡고 권하니 공이 자기 옷소매를 깨물며 먹으려하지 않자 중씨가 당기니 이가 부러졌다.(no.107) |
이씨(전리) | 20세에 남편과 사별하자 시어머니의 만류로 죽지 못하였다. 시어머니를 정성껏 봉양하다 죽으니, 조카를 양자들이고 식음을 전폐하고 죽었다. 열행이 알려지자, 암행어사 어윤중과 관찰사 이서구의 천거로 열녀 정려를 받았다. |
익채(전리) | 효행으로 세금 면제 |
명기(삼사) | 효행으로 정려 |
조씨(의정) | 병자난 때 남편이 순절하자 평생을 앉으나 누우나 북쪽을 향하지 않고 죽으니 향중이 흠모하여 천거하니 정려를 명받았다. |
중기(의정공) | 효행으로 지평 추증 |
중신(삼사) | 정려 |
변씨(문민공) | 임진난 때 남편이 전사하자 전투복과 화살통으로 초혼장을 치르고 따라죽었다. |
태환(공안공) | 아버지가 병들자 하늘에 대신하길 빌었다. 상사를 당하여 집상할 때 상복을 벗지 않았고, 고기도 먹지 않고, 매일 묘소에 올라가 호곡의 구슬픈 소리가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게 하였다. 효행으로 정려 |
성구(판도) | 형 성일과 함께 아버지 원수인 종 김이를 죽이고 자수하였다. 효자의 정려 우암 송시열이 지은 형제 복수전에 전한다. |
윤명(전리) | 효행이 지극하여 어머니 상을 당한 뒤 어머니가 즐겨 심던 쪽을 심고 해마다 어머니를 보듯 가꾸었다. |
29세
만중(의정) | 효자 정려(no.112) |
만식(의정) | 효행으로 상신, 증-의금부사 겸 오위도총부 부총관 |
명기(전리) | 부친이 죽자 3년간 시묘를 살며 매일 구슬피 우니 풀이 다 마를 지경이었다. 3년 상을 마치고 병들어 죽으니 고을 유림이 효행을 천거하여 효자 정려을 받았다. |
최씨(문민) | 효도로 향‧도의 천장이 있다. |
백씨(30세)‧정씨(31세)‧김씨(32세) 백씨 부인은 화재가 나자 가재도구는 태워도 아까울 것이 없으나 조상의 신주만은 태울 수 없다며 불길을 무릅쓰고 사당에 들어가 나오지 못하였다. 자부 정씨가 시어머니를 구출코자 불 속에 들어가 소사하였다. 손부 김씨도 좌‧우 사람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불 속에 뛰어 들어가 3대가 화를 당했다. 경종 임금이 가상히 여겨 정려를 내렸다. | |
천중(삼사) | 효행으로 증-동몽교관 |
성윤(낭장공) | 효행으로 찰방에 제수, 정유재란 때 노모를 업고 모후산으로 피난 갔다가 왜적을 만나 노모를 감싸고 죽었다. 후세 사람들이 그「모후산」을「모호산」으로 불렀다. 서하당 유고 2권 |
중신(삼사) | 효행 정려 |
취징(공안공) | 효행으로 호조 좌랑 추증 |
겸재(문민공) | 효행으로 좌승지 추증 |
오행(의정공) | 효행으로 통정 제수 |
용언(상호군) | 향천에 오르고 조세 감면 |
시택(문민) | 효행으로 향‧도‧유의 추천 |
김씨(문간) | 23세에 남편이 죽자 장사 지낸 후 따라 죽으니 어사의 추천으로 정려 |
응서(공안) | 친환에 단지주혈 |
성원(낭장) | 정유재란 때 노모를 업고 동복 모후산에 피난을 갔다가 왜적을 만났다. 왜적이 어머니를 해치려하자 감싸고 죽으니 후세인이 모후산을 모호산으로 불렀다. |
오복(의정) | 효행 통정제수 |
30세
대삼(밀직) | 정려 |
강씨(문민) | 열녀로 향 도천 |
응려(전리) | 정려, 증 호조정랑 |
성관(문민) | 효행-증-동몽교란 |
희복(공안) | 효행-증-교란 |
이태(녹사) | 효행-증-지평 |
성관(전리) | 효행-증-동몽교란 |
명택(의정) | 효성으로 혼정신성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정려 |
응성(사온직) | 평소에도 효경을 즐겨 읽었다. 시묘 3년을 살면서 소식을 하며, 부부동침을 하지 않았고 출타하는 일이 없으니 세인이「효은대사」라 칭하였다. |
이씨(퇴촌) | 남편이 죽은 후 부덕과 정열을 지키다가 남편의 소상 때 따라 죽으니 향인이 동구에「열행비」를 세웠다. |
진상(의정) | 어머니와 떨어져 살 때 모친의 생각에 밤마다 꿈을 꾸지 않는 날이 없고 늙은 뒤에 부모이야기에 미치면 눈물을 흘렀다. |
이씨(낭장) | 덕령 장군의 아내(no.116) |
재곤(화평) | 부친 상사에 시묘 3년을 하면서 눈물로 통곡하니 초목이 마르고 호랑이가 지켰다. |
광묵(전리) | 14세의 어린 나이에 아버지 병환에 종기를 빨아 낫도록 하였다. 어머니 병환에도 지극한 정성을 다하니, 사림의 칭송으로 여러 번 향‧도천에 올랐다. |
정씨(의정) | 정열-정려 |
임씨(전리) | 남편이 임진난 때 전사하자 강물에 투신-정려 |
필중(삼사) | 효행-증-중추부사 |
상신(문민) | 효행으로 향‧도천에 있다. |
재곤(전리) | 효행을 암행어사가 추천 |
상홍(문민) | 효행으로 향‧도천이 있다. |
주씨(문민) | 열심히 한 병구완에도 남편이 죽자 3년 상을 마치고 따라 죽었다. 향‧도천이 있다. |
광호(화평) | 삼례 찰방(역장)으로 있을 때 흉년에 사재를 털어 주민을 구제하니, 주민이 거사비(벼슬을 떠난 뒤 세워 주는 비)를 세웠다. |
광숙(문간) | 신문고를 울려 아버지의 억울한 한을 풀어주었다. 효심으로 봉양하니 향인이 추증 |
31세
권씨(의정) | 시부모를 봉양하고 유복자를 잘 키우니 정려를 명받았다. |
한명(녹사) | 효행으로 천장 |
봉택(의정) | 효행-정려 |
서씨(의정) | 열행-정려 |
송씨(전리) | 열행-정려 |
김씨(삼사) | 열행에 사림이 비를 세워 찬양 |
황씨(낭장) | 정유재란 때 부군의 순절 소식을 듣고 그날로 따라 죽었다. |
광성(공안) | 효행-여지승람에 등재, 증-참판 |
광유(총제) | 효행-향천, 증-교란 |
교택(의정) | 효행-향‧도천 오르다. |
덕호(상호) | 효행-증-참지 |
이교(밀직) | 아버지의 병에 하늘에 빌고, 상을 당하여 집상 때 취침 시 질대를 벗지 않았고 몸이 수척해도 고기를 먹지 않았다. 묘소에 호곡함에 슬피 우는 소리에 듣는 사람도 눈물을 흘렀다. |
이씨(의정) | 경종 3년, 남편이 화를 입자 4월 22일에 자진하니 세칭 여사(女士) 7인이라 했다. 고종 5년-정려 |
중후(퇴촌) | 효행-증-교관 |
두조(전리) | 효행-증-동몽교관 |
정대(전리) | 효자-정려(부여정려각 의산면 전랑리) |
한필(삼사) | 효행-도천 |
하씨(전리) | 남편이 위독하자 단지 주혈로 연명시키다. 향인이 덕을 기려 향천 |
32세
문씨(전리) | 남편에게 온갖 약을 써도 소용이 없자 자결하자 쾌유되었다. 후인이 비를 세워 덕을 기렸다. |
박씨(의정) | 열행-정려 |
재형(전리) | 열행-정려 |
상기(공안) | 시묘 3년을 마치고도 눈비가 와도 성묘를 빠뜨리지 않았다. 증-사후교관 |
성흡(직제) | 효행-정려-증-예조참의 |
현집(직제) | 시묘 3년, 유고집 |
재명(문간) | 13살 때 의주 3천리를 어머니와 함께 운구하여 장사 고종 2년 양헌수의 천거-정려 |
양호(상호) | 어머니 병환에 손가락에 피를 내어 회생시키고, 친상에 시묘하니 범이 인도하였다. 후인이 그 산의 고개를「대호현」이라 하고, 그 마을을 「대행리」라 하였다. 의금부도사 |
상규(의정) | 효행-정려-증-감찰, 국와규고 |
위재(의정) | 노인을 우대하는 은전으로-통정대부 |
김씨(문민) | 남편을 여의고 살다가 남편 제삿날 죽으니-천장에 올랐다. |
김씨(전리) | 효행과 공덕을 찬미하여 향인이 비를 세웠다. |
성재(의정) | 충‧효의 양전이라 일컬었다. |
장씨(의정) | 남편의 병환에 단지주혈로 연명시키고 남편이 죽자 슬픔에 지나쳐 뼈만 남았다. 3년간 웃는 일도 없고 빗질도 하지 않았으나 시부모를 잘 보살폈다. |
제묵(전리) | 효행-향천 |
재용(삼사) | 효행으로 인읍이 칭송 |
승조(전리) | 효행-향천 |
상열(직제) | 효행으로 사림이 추천, 지‧덕‧효우를 포장 |
33세
이씨(전리) | 효열의 기행이 향천에 올라 천장되고「효열각」이 있다. |
기두(전리) | 고종 때-정려 |
기삼(문민) | 효행-유림천장-정려각 |
기성(의정) | 정려 |
덕(의정) | 효행-정려-증-교관 |
기관(문민) | 효행-1888년에 예조의 장계-정려 |
기회(밀직) | 친상에 여묘 |
윤씨(의정) | 효열-정려 |
기범(퇴촌) | 효행-정려(논산, 은진, 정려각) |
기창(문민) | 유림의 천장, 정려각이 있다. |
진경(의정) | 효행-정려 |
기덕(의정) | 효행-정려-증-부솔 |
조씨(사온직) | 남편이 죽고 20년간 시부모를 봉양하며 양상을 치루고 자식을 성취시킨 후 남편 묘소에서 자진-정려 |
기수(의정) | 효행-정려-증-가선대부 |
기희(밀직사) | 어머니가 병으로 고기를 먹지 못하자 물고기를 잡아 봉양했고 친상에 여묘 |
도성(퇴촌) | 천부적인 효심으로 혼정신성과 치상범절을 극준 예법하였다. |
박씨(삼사) | 남편이 죽자 가업을 이어 중흥시키니 열행을 찬양하여 성균관장이 표창하고 향읍이 뜻을 모아「열녀비각」을 세웠다. |
34세
임씨(의정) | 남편을 따라 죽자-정려 |
이씨(공안) | 「효열각」이 있다. |
성정(직제) | 효행-정려 |
이씨(전리) | 효열-정려 |
강씨(공안) | 효열-향천 |
재주(퇴촌) | 시묘 3년 |
재잠(밀직) | 효성으로 성균관장 표창 |
재우(문민) | 효행-정려 |
재기(전리) | 친상 3년에 술과 고기를 먹지 않았다. |
재철(직제) | 효우와 덕행으로「효열문」에 등재 |
조씨(판도) | 남편의 장삿날에 여필종부라면서 따라 죽었다. 고종이 그 정열을 가상히 여겨 특전을 내리고 참판 신응선이 비문을 찬하고 보령군 청소면 성연리에「정려각」을 세웠다. |
이씨(진사공) | 효열-정려 |
조씨(문민) | 열행-정려 |
육정(직제) | 효행-정려 |
임씨(진사) | 열행-정려 |
이씨(사온) | 홀로 된지 36년 만에 남편 묘소에서 자결 |
재순(전리) | 시묘 6년-호남지 수록 |
재준(퇴촌) | 「효자정각」논산 |
재용(의정) | 효행-증-교관 |
덕려(퇴촌) | 효행-향천 |
조씨(의정) | 열행-정려 |
강씨(전리) | 효열-향천 |
35세
채씨(퇴촌) | 효열이 특이하여 사적이「성적도」에 나타나고 효열「양대비각」이 정읍 이두 두전리에 있다. |
후현(의정) | 친상 시묘 3년 동안 상복과 질대를 벗지 않았다. |
민씨(의정) | 남편의 병구완에 손가락을 잘라서 피로 생명을 연장시켰다. |
박씨(삼사) | 성균관 표창, 읍‧향이 뜻을 모아「열행비각」을 세웠다. |
우현(화평) | 친환에 단지주혈로 6년을 연명케하고, 부모양상에 시묘 6년 |
설씨(판도) | 남편의 병상에 단지주혈로 수명을 연장 |
종현(직제) | 효행-정려-고종 때 증-교관 |
준(녹사) | 효행-천섬 |
최씨(문정) | 성균관 표창「정열비각」이 있다. |
36세
익현(상호) | 시묘 3년 |
정씨(문민) | 효열과 효성-향천-「효열각」이 있다. |
손씨(전리) | 시부모를 잘 봉양하고 남편의 병에 살을 베어 간호하니 향인이 칭송하였다. 모성공회의 찬양문으로 포장되고「효열의적비」를 세웠다. |
영태(퇴촌) | 효성으로「성적도」에 나타나고「효자비」가 있다. |
길현(상호) | 시묘 3년 효행의 찬양문이 있다. |
강씨(퇴촌) | 남편이 죽자 그날따라 죽었다. |
백씨(전리) | 남편이 죽어 3년 잡상하고 대상날 음독 자진 |
오씨(문민) | 남편이 자진하여 죽으니 상을 마친 후 음독 자진하니 유림의 천장이 있다. |
천씨(총제) | 시아버지 병구완을 10년 하니 표창문이 있다. |
성수(예조) | 16살에 어머니 환우가 위중하자 수삭동안 환부를 빨아 치유 |
37세
득수(화평) | 효행과 학행-향천 |
안수(사온직) | 효행-천망 |
임씨(직제) | 시묘 3년, 대사를 마치고 그날 밤 남편 묘소에서 자진 |
의수(의정) | 집안은 가난했으나 어버이를 극진히 봉양하니 고을 원이 식량을 보내어 문병하고 천효라 칭송, 사림이 도와 예조에 천장 |
정씨(문민) | 시부모와 남편의 병환에 정성을 다하니 향천-「효열비각」이 있다. |
채수(화평) | 효행-향‧도천에 올랐다. 송사 기우만과 현산 이현규가 천거하여 「효자문」을 세웠다. |
경헌(비순위) | 시묘 6년 |
이씨(진사) | 왜란 때 남편이 전사하자 강물에 투신-정려 |
엄씨(진사) | 왜란 때 남편이 전사하자 강물에 투신-정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