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들의 나라(상) ㅡ 1 의문의 여인
아내들의 나라(상) (원제:역사에 없는 나라) - 이상우 1.의문의 여인 2.사라진 사모님들 3.오후의 정사 4.백산공사 5.두터운 비밀의 커튼 6.호반의 공포 7.또 하나의 반정부 단체 8.짙어지는 안개 9.연기처럼 사라지다 10.민독추의 최후통첩 11.첫 번째 희생자 12.공포의 시간 13.수치의 시간 14.첫 대면 15.한 가닥 단서 {{}} 작가소개 종로구 중학동 14번지에 가면 그를 만날 수 있다. 한국일보 신관 6층 일간스포츠 편집국 부사장실. 그곳에서 그는 매일같이 어떤 기사가 독자를 재미있게 할까 고민한다. 그는 우리가 가장 많이 읽는 스포츠 신문 마케팅의 귀재라고 부르는 이도 있다. 요즘 젊은이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직종인 기자를 수습에서 편집국장, 이사, 사장까지 모두 경험한 그는 부러움의 대상이다. 가끔 우리는 그를 50대 신세대라고 부른다. 그러나 30여 년 동안의 기자 생활만큼이나 그의 삶에서 중요한 테마가 있다. 바로 추리소설 집필이다. 1961년 대구일보에<新임꺽정전>을 연재하면서 시작된 그의 글쓰기는 오랜 기자생활에서 단련된 문체와 다양한 주제의식을 바탕으로 지금까지 100여 권에 이르는 작품을 탄생케 했다. 그의 작품 중에서도 특히 유명한 <추경감 시리즈>는 지금도 많은 독자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다. 그의 주요 작품으로는 <불새, 밤에 죽다> <악녀 두 번 살다> <안개도시> <악녀시대> <파혼여행> <모두가 죽이고 싶던 여자> <여자는 눈으로 승부 한다> <북악에서 부는 바람> 등이 있다. {{}}1.의문의 여인 후덥지근한 여름이 고비를 넘기고 있었다. 이제 얼마 가지 않아 땡볕도 기가 꺾이고 아침저녁으로 제법 선들한 바람이 불 것이라고 추병태 경감은 생각했다. 더위가 가기 전에 꼭 며칠동안 휴가를 다녀오리라고 해마다 생각해왔으나 언제나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금년에는 모든 크고 작은 사건들을 외면하고 고향을 한번 다녀와야겠다고 단단히 별렀다. 그러나 좀체 손을 뺄 수 없고 여름은 지나가고 있었다. 더 버티다가는 남들이 다 지나간 바캉스의 그림자나 밟게 될 것 같아 무작정 서울을 떠난 것이다. 경북 월성군 별다리 마을. 이 곳을 추병태는 고향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실제로 추병태가 태어난 곳은 여기가 아니고 평북 정주였다. 시인 김소월의 고향으로 유명한 정주는 추병태가 11세때 아버지에게 손목이 잡혀 피난길을 떠난 이후 한번도 가볼 수가 없었다. 11세 때부터 외가 고장인 경북의 이 별다리마을에서 자랐기 때문에 이곳은 제2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자랄 때인 40여 년 전과는 너무도 달라졌다. 마을 앞 별다리라는 조그만 나무다리도 없어지고 그 밑에 있던 물레방앗간도 없어졌다. 겨울이면 아버지가 만들어준 앉은뱅이 스케이트를 타던 미나리강도 없어지고 팽이를 돌리던 동네마당도 없어졌다. 추병태가 살던 초가집도 헐어내고 슬레트 2층집이 들어섰다. 동네아이들과 함께 병정놀이를 하며 드나들던 우거진 대숲도 이젠 흔적만 남아있었다. 별다리 마을이 옛 모습을 모두 잃어버린 건 온천이 발견된 것과 때를 같이 하여 레저개발 붐이 불었기 때문이다. 아무 쓸모 없던 땅이 백 배, 2백배로 값이 오르고 밭떼기는 모두 여관과 유흥시설로 변했다. 인구도 갑자기 13배로 불어나 이곳 토박이들은 어디에 섞였는지 찾기 힘들게 되었다. 그러나 마을 앞에 세워져 있는 돌장승은 아직 그대로 서 있고 거기서 바라보던 앞산의 기괴한 모습은 그대로 남아있었다. 앞산은 아침, 한낮, 저녁, 달밤 등 시간에 따라 그 모습이 변했었다. 앞산의 주봉인 별산봉은 아침에는 쪽지은 여자의 머리처럼 보이다 한낮이 되면 그림자의 장난으로 곰 엉덩이처럼 보였다. 저녁때는 뿔난 도깨비처럼 보이고 달밤에는 사모 쓴 신랑처럼 보였다. 동네 노인들은 옛날 옛적 이곳에 한 식구처럼 어울려 살던 신랑각시와 도깨비, 곰 등이 인간에게 쫓겨나 저 별산봉으로 갔기 때문이라고 했다. 어릴 때를 회상하며 가는 여름을 혼자 아쉬워하리라고 생각한 추병태는 너무나 변한 모습에 실망했다. 새로 지은 여관에서 하룻밤을 자고 나자 비가 억수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추병태경감은 몇 년만에 잡은 여름휴가가 이렇게 비맞은 휴지처럼 구겨지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비가 온다고 여관방에 우두커니 앉아 있기에는 시간이 너무 아까웠다. 추병태경감은 우산하나를 여관집에서 빌려들고 밖으로 나갔다. 어릴 때 엄격한 아버지에게 꾸중을 들을 때면 늘 혼자 올라가 울던 동산으로 가보았다. 그곳은 너무나 변했다. 그때의 나지막하던 동산은 간 곳이 없고 어마어마한 시설이 가득한 유기장으로 변해있었다. 공중으로 올라갔다 내려오는 놀이용 유.에프.오, 간이 떨어지게 하는 하늘열차, 쇠로 만든 회전목마, 요술궁전 따위가 펼쳐져 있었다. 비가 억수로 쏟아진데다 아직 이른 아침이기 때문에 사람은 그림자도 없었다. 빗소리만이 우렁찬 박수 소리를 내듯 쏟아지는 유기장을 추병태경감은 천천히 혼자 걸었다. 한참 걷던 그는 이상한 장면과 부딪쳤다. 모든 놀이시설이 정지한 채 비를 맞고 있는데 오직 한가지 둥그런 회전 그네만이 혼자 비를 맞으며 돌고 있었다. 관리인이 스위치를 끄지 않고 돌아갔기 때문에 혼자 돌고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회전 그네는 물레방아처럼 생겼는데 수평으로 되어있지 않고 밑에서 위로 올라가는 원형으로 되어있었다. 아마도 한꺼번에 20명은 탈 수 있게 되어있는 것 같았다. 그 큰 회전그네가 삐걱거리는 금속성을 내면서 빗속에 혼자 돌고 있는 모습은 어쩐지 섬뜩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 유기장에 설치된 수많은 놀이기구들은 모두 꼼짝 않고 쏟아지는 빗속에 괴물처럼 서있었으나 오직 회전그네만이 돌고 있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 풍경이었다. 추병태경감은 혼자 돌고 있는 회전 그네 가까이로 가보았다. 아무래도 관리인이 동력스위치를 끄는 것을 잊어버리고 돌아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회전 그네의 높이는 7층 빌딩 높이쯤 되는 것같았다. 수십 개의 그네가 계속해서 삐걱거리는 금속성을 냈다. 그네 하나 하나가 추병태경감의 눈앞으로 다가왔다 사라지고는 했다. 그 처량한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그는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모두 비어있는 그네 속에 한 곳에만 사람이 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추병태경감은 그네 앞으로 더 다가가 그 이상한 그네가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하늘 높이 솟구쳤던 그네가 돌아서 눈앞으로 다가왔다. 아니 저건... 추병태 경감은 분명히 그 그네에 사람 같은 형태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그네가 다시 눈앞으로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그네가 다가오자 이번에는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사람이었다. 그것도 젊은 여자였다. 분홍빛 스웨터를 입고 있는 그 여인은 비에 젖어 머리가 목덜미까지 늘어진 채 피부에 붙어있었다. 이봐요! 여보세요! 추병태 경감이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여자는 아무 대꾸도 않고 그네에 실린 채 다시 하늘로 솟구쳤다. 그렇구나! 추병태 경감은 오랜 직업에서 온 직관으로 그 여자가 죽어있다는 것을 알았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빈 그네를 혼자 타다가 죽었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추병태 경감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네를 멈추게 하는 동력 스위치를 찾았다. 그러나 알 수가 없었다. 그는 놀이장 건너편에 있는 조그만 건물로 갔다. 아직 이른 아침이라 인기척이 없었다. 그는 뛰어서 관리실 건물로 들어갔다. 웬일인지 문이 열려 있었다. 여보세요. 누구 없어요! 추병태 경감이 고함을 질렀다. 그래도 인기척이 없었다. 그가 다시 문 하나를 열고 들어가자 소파에 늙은이 한사람이 자고 있었다. 술냄새가 확 풍겼다. 탁자 앞에는 화투 한모가 흩어져 있고 소주병이 뒹굴었다. 밤새 고스톱이나 치다가 모두 돌아가고 혼자 술에 떨어져 자고 있는 노인이 이곳 관리인 인것 같았다. 이봐요. 일어나요. 정신 좀 차려요. 추병태 경감이 어깨를 흔들자 노인이 부시시 일어났다. 뉘시요? 그는 느릿느릿한 말로 되물었다. 저기 저것 봐요. 저 회전 그네를 좀 멈추게 해요. 그가 창 밖을 가리켰다. 어어? 저게 웬 일이야? 어떤 녀석이 스위치를 넣었어? 노인은 보기 보다 훨씬 재빨리 비옷을 걸치더니 회전 그네 쪽으로 뛰어 갔다. 뛰는 걸음도 노인답지 않게 재빨랐다. 추병태씨가 그곳에 도착했을 때 그네는 이미 멈추어져 있었다. 이것 봐요. 추병태 경감은 그네에 실려 밤새도록 오르내리던 여자의 모습을 가리켰다. 아이구! 이게 무슨 변이야. 죽었잖아. 노인은 여자의 모습을 보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하얗게 핏기 없는 얼굴에 꼭 다문 입과 비에 젖어 더욱 까맣게 보이는 흩어진 머리카락이 그를 섬뜩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여인은 30대 초반 정도로 보였다. 얼른 보아도 예쁘고 단정한 얼굴이었다. 아이구 이일을 어떡하우? 난 이제 망했다 망했어. 뒈질려면 제 집구석에서 뒈질 일이지 하필 여기 와서...... 아이구 이젠 난 망했다 망했어. 노인은 비틀거리며 일어서서 그네를 붙들고 중얼거렸다. 영감님 전화가 어디 있지요? 저 사무실에..... 그는 방금 나온 건물을 가리켰다. 추병태씨는 현지경찰에 알려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관리실로 들어갔다. 모처럼 별러서 온 휴가가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시체를 만나게 되었는데, 난 휴가 왔으니 모르겠다하고 빠질 수도 없게 되었다고 그는 생각했다. 자기 관할 지역은 아니지만 그는 하는 수 없이 수사관 추경감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현지 경찰서의 초동 수사반이 도착한 것은 그날 정오께였다. 추경감은 월성 경찰서 수사팀에게 변사체만 인계하고 손을 뗄 수도 있었으나 그의 직업의식이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문제의 유원지는 경북 월성, 경주 일대에 불어닥친 개발붐을 타고 이룩된 레저시설의 일부였다. 갑자기 땅값이 수백 배로 뛰어오르고 두더지처럼 농사만 짓던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벼락부자가 되는 이변이 이곳 저곳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그날은 월요일이라 유원지가 노는 날인데다 비가 억수로 쏟아졌기 때문에 그렇게 북적대던 인적이 뚝 끊어졌었다. 죽은 여인의 신원은 곧 밝혀졌다. 별다리 마을에 사는 주민은 아니었다. 그곳에서 20여킬로 떨어진 연하라는 곳에 사는 여자였다. 연하는 장미사라는 한적한 사찰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마을로 아직 레저바람이 미치지 않은 곳이었다. 그곳에 있는 국민학교 교사인 그 여인은 국민학교에 다니는 아들 하나를 데리고 혼자 살고 있는 여자였다. 조은하, 나이 38세, 독신. 초동수사를 맡았던 월성경찰서의 하경감이 그 여자의 신원을 알려주었다. 하경감은 인천에서 추병태경감과 함께 근무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잘 아는 사이였다. 자네가 변사체의 첫 발견자이기 때문에 진술을 좀 해주어야겠어. 추경감은 속으로 역시 휴가는 망쳤다는 생각을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추경감은 그 여자, 즉 조은하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상한 호기심이 발동하기 시작했다. 호기심이라기 보다는 수사관으로서의 본능적 욕구가 발동되었다고 하는 것이 옳을지 모른다. 조은하의 사인은 교살이었다. 그가 목에 두르고 있던 여름용 스카프로 목이 졸려 숨졌으며 그 스카프는 그대로 그녀의 목에 걸려있었다. 그녀는 다른데서 살해되고 그 빈 그네로 옮겨진 뒤 밤새도록 그네를 타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었다. 사망시간은 전날 밤 10시에서 12시 사이로 추정되었기 때문이다. 피살된 조은하는 나이가 30대 후반임에도 얼른 보기에는 20대 후반이나 30대 초반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피부가 곱고 상당히 미인 축에 드는 여자였다. 시체를 발견한 사람이라는 이유 외에도 추경감은 그 살인 사건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혼자 사는 미인이 기괴한 방법으로 살해되었다는 것이 어쩐지 그냥 지나치고 싶지 않은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추경감은 닷새 남은 휴가를 하경감과 함께 보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책임 있는 수사관이 아닌, 국외자의 입장에서 수사에 훈수를 둔다는 것은 참으로 해볼만한 일이라고 추경감은 생각했다. 조은하는 원래 이곳이 고향은 아니었다. 서울서 태어나고 학교도 다녔는데 10여년 전 이 곳 교사로 왔다가 전근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남아있었다. 조은하가 처음 연하에 올 때만 해도 이곳은 무의촌으로 오지에 속했다. 국민학교 교사도 의무적으로 배치했을 뿐아니라 오더라도 1,2년을 못 견디고 그만두거나 다른 도시로 전출되었다. 그러나 조은하는 오히려 이곳에 남겠다고 해서 그냥 있었다. 깔끔한 미모에 혼자 산골에 와 있었기 때문에 그녀에 대한 여러 가지 추측이 많았다. 처음에는 처녀로 알려졌다가 나중에는 이혼한 여자라고 했고, 또 남편이 서울에 살고 있다고도 했다. 이러한 추측은 모두 주위 사람들의 이야기이지 본인은 자신의 신상에 대해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조은하는 늘 조용한 미소만 머금고 있을 뿐 자신의 신변에 관한 이야기는 좀체 하지 않았다. 서울이 고향이고 교육대학을 나온 뒤 벽지를 지원해서 일찍 이곳에 배치를 받았다는 것 외에는 별로 자신을 밝히지 않았다. 연하국민학교는 학생이 10학급도 채 안되고 선생님도 여덟명 뿐이었다. 그중 다섯 명은 남자선생님이고, 세명의 여선생님이 있었는데 조은하 외의 두사람은 나이가 정년에 가까웠다. 연하 일대에서는 예절바르고 예쁜 여선생으로 소문이 나있었다. 몇 사람의 이러저러한 남자들이 접근했으나 모두 실패했다고 한다. 처녀인지 이혼녀인지 모른다고? 그럼 아이는 어떻게 된거야. 국민학교에 다니는 아이가 있다면서? 추경감이 그녀의 신변에 관한 이야기를 듣다가 하경감에게 물었다. 글쎄. 그것도 좀 아리송하단 말야. 몇 년 전 국민학교 입학하기 전에 서울서 데리고 왔다더군. 동네 사람이나 학교 동료 교사들도 그 아이에 대해서는 잘 몰라. 어떤 사람은 고아원에서 데리고 왔다고도 하고 어떤 사람은 서울에 두고 온 자기 아들을 뒤늦게 데려왔다고도 하고...... 아이로 봐서는 처녀가 아닐 가능성이 더 크겠군. 추경감은 담배를 꺼내 물었다. 사건 이튿날도 비는 억수로 쏟아졌다. 경찰서 창밖은 대낮인데도 어둠이 밀려오는 것처럼 어두웠다. 장대비가 햇빛을 삼켰기 때문이었다. 추경감은 불이 좀체 켜지지 않는 지포라이터를 계속 철컥거렸다. 그는 불을 붙이려는 것이 아니라 켜지지 않는 지포를 척컥거리면서 즐기는 것 같았다. 미혼모라는 설도 있고 말이야......하여튼 묘한 여자야. 좋게 말해서 신비에 쌓인 여자라고 할까......어쨌던 서울에 조회를 해놓았으니까 자세한 회신이 올거야. 추경감은 남은 휴가를 이용해 그 여자에 관한 것을 좀더 자세히 알아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이번 사건에 대해 좀 알아볼 테니...... 아냐. 자네는 모처럼 휴가온 것이니까 조용히 남은 날을 즐기게. 이건 우리 사건이야. 하경감이 진심으로 말렸다. 아냐. 난 이런 일을 보면 잠이 오지 않아. 내 취미라고나 할까? 내가 이곳저곳을 뒤지고 다녀도 그냥 놔두게, 관할지역 아니라고 쫓아내지 말란 말일세. 하경감은 웃으면서 추경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의 성미를 잘 알기 때문에 더 말리지 않았다. 좋도록 하게. 하경감의 허락을 얻어낸 추병태경감은 경주시내에 조그만 여관방 하나를 얻어놓고 조은하에 대한 개인 수사를 시작했다. 추경감은 우선 조은하가 살해된 시간으로 추정되는 8월3일 일요일 저녁 10시께 유원지 부근의 목격자를 찾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문을 열고 있던 부근의 구명가게와 식당 등을 다니며 탐문 수사를 해보았으나 아무런 단서도 찾지 못했다. 해가 지자 유기장에는 인적이 끊어지고 데이트 나온 남녀만 드문드문 그곳을 다나들었다는 것만 알 정도였다. 그는 다시 조은하가 다니던 연하국민학교로 가보았다. 경찰에서 오셨다구요? 어제 그저께도 오셔서 물을만한 것을 다 묻고 갔는데......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교장은 귀찮다는 듯이 시큰둥하게 대했다. 미안합니다. 몇 가지만 물어보겠습니다. 추경감은 고개를 몇 번이나 숙여 절을 한 뒤 담배를 꺼내 물었다. 여긴 금연구역입니다. 미안합니다. 추경감은 다시 고개를 숙여 사과하고는 담배를 얼른 호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래 뭐가 또 부족합니까? 교장은 공손한 추경감의 태도 때문인지 의자를 권했다. 감사합니다. 그러니까 조은하 선생이 8월 3일날 학교에 나왔었습니까? 교장은 어이가 없다는 듯 추경감을 빤히 쳐다보다가 대답했다. 요즘은 방학이라서 선생님들이 학교에 나오지 않습니다. 더구나 그 날은 일요일이었습니다. 아, 예, 그렇군요. 이거 정말 미안합니다. 추경감은 바보처럼 또 고개를 숙여 보였다. 조은하 선생은 독신었습니까? 말하자면 이혼녀인지, 서울에 남자가...... 이것 보시요! 추경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교장은 소리를 버럭 질렀다. 돌아가신 분을 욕되게 하지 마십시오. 조선생님은 선생님이었습니다. 모범적이고 단정한 선생님이었단 말입니다. 남자가 어쩌구 하는 그런 지저분한 이야기는 입밖에도 내지 마십시오. 교장이 눈을 부라리며 흥분해서 떠들었다. 추경감은 교장의 그런 태도가 조금 이상하게 느껴졌다. <교장 고문식> 책상 위에 놓인 명패는 그렇게 되어 있었다. 추경감은 괴상한 이름도 다 있다고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제 말씀은 그런 뜻이 아니고 남편이 서울에 있었는지 하는 뜻입니다. 조선생은 독신이라고 몇 번이나 설명했어요. 경찰서에서는 형사마다 그걸 캐러 다니나요? 미... 미안합니다 학교에서 친하게 지나는 남선생은... 여보슈. 당신 이상한 사람 아니오? 당신 진짜 형사요? 잡지사서 이상한 스캔들 캐러 다니는 사람 아니요? 교장이 더욱 화를 내는 바람에 추경감은 그 자리를 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 미안합니다. 다음에 다시 오지요. 실례했습니다. 조은하 선생에 대해 나쁜 소문을 내기만 하면 가만두지 않을 거요. 사자에 대한 명예훼손이라는 죄도 있다는 걸 아십시오. 고문직 교장은 추경감의 뒤통수에 대고 퍼부었다. 추경감은 고문직 교장이 지나치게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특히 친한 남자 선생님이 있었냐는 질문에는 더욱 화를 내지 않았던가. 추경감은 교장실을 나오다가 복도끝에 있는 교무실을 발견하고는 그쪽으로 가보았다. 문이 열려있었지만 교무실 안은 텅 비어있었다. 추경감은 안에 들어가 한바퀴 돌아보았다. 책상 여덟 개가 놓여있었다. 교장선생님까지 여덟 명이 있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책상이 하나 남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교사 아닌 서무직원이 한 명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어느 책상이 조은하씨 자리인지 알 수가 없어 두어 바퀴 책상 앞을 맴돌았다. 추경감은 한참만에 책상 위에 놓인 교무일지 같은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책상마다 있었다. 추경감은 조은하라고 쓰인 교무일지가 놓인 책상을 찾아냈다. 다른 책상보다 깔끔하게 책상 위가 정리되어 있었다. 쌓여있는 여나무 권되는 책을 넘겨보았다. 국민학교 5학년 교과서들이었는데 그 속에는 한참 인기가 있는 여류시인의 수필집도 끼어 있었다. 그 외에도 정형외과에 관한 학위논문집 한 권이 있었다. 추경감이 책장을 넘겨보았다. 조은하 누나에게 라고 쓰여 있었다. 책을 쓴 사람은 조준철이라고 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조준철이라는 정형외과 의사가 학위논문으로 쓴 책을 누나인 조은하 선생에게 준 것이다. 강남대학교 부속병원 정형외과. 추경감은 책 뒤에 있는 조준철의 신원을 메모했다. 당신 누군데 남의 책상을 함부로 뒤지는 거요? 그때 등뒤에서 굵직한 허스키 보이스가 들렸다. 추경감이 고개를 돌렸을 때 그곳에는 키가 큰 젊은 여인이 서 있었다. 그녀의 목소리나 말투는 꼭 남자 같았다. 얼굴 생김도 옷차림이나 파마 머리만 빼면 남자로 생각될 정도였다. 이거 미안합니다. 경찰인데...... 추경감이 겸연쩍어 뒤통수를 긁으며 말했다. 경찰이면 남의 사물을 함부로 뒤져도 되는 거요? 추경감은 난감한 기분으로 핀잔을 받으며 책상 위의 책을 제자리에 정리했다. 정형외과 학위 논문집을 제일 위에 얹다가 문득 책표지에 휘갈겨 쓴 숫자를 발견했다. 02-999-4884 추경감은 그것이 서울지역의 전화번호란 것을 금방 알고 머리에 새겨두었다. 미안합니다. 이 학교 선생님 되십니까? 저는 서울 시경의 추병태라고 합니다. 추경감이 허스키여인에게 꾸벅 절을 했다. 저는 이 학교 서무를 보고 있는 추선자입니다. 그러십니까? 이거 추씨를 만나서 반갑군요. 어디 추씹니까? 추경감은 정말 반가워서 함박 웃음을 담았다. 추씨야 함흥 추씨 단일본 아닙니까? 항렬이 병잡니까? 여인은 무뚝뚝하게 사무적으로 말했다. 그렇습니다. 그럼 내가 할머니뻘이군요. 볼일 다 봤으면 가십시오. 조선생 범인은 잡았나요? 아직......평소의 조은하선생에 대한 이야기 좀 듣고 싶은데, 협조해주시겠습니까? 그 여자는 같은 추씨라는 것을 알자 조금 태도가 누그러졌다. 그러나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교장 고문직의 이야기가 나오자 갑자기 긴장한 얼굴이 됐다. 교장은 조은하 선생을 혼자 좋아하고 다녔지요. 어울리지 않게 그 나이에 짝사랑이라니......쯧쯧쯧. 예? 추경감은 뜻밖의 말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아무일도 일어나진 않았을 거요. 조은하 선생은 교장을 거들떠보지도 않았으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