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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수 | 날짜 시간 | 모임 장소 | 갈 곳 | 산 행 길 | 기타 |
874 | 7월5일 10시 | 우이동 120번종점 앞 | 대동문 | 우이동 –진달래능선-대동문-칼바위능선- 419탑 | 중식지참 |
875 | 7월12일 07시 | 롯데 후문 사무실앞 | 설악산 금강굴 | 사무실앞-신흥사입구- 비선대- 금강굴 -역순위하산 동해안 해변 경유 | 중식지참 회비 3만원 |
876 | 7월 19일 10시 | 당고개역 | 수락산 | 은류폭포 -금류폭포-정상-기차바위-성림사-장암역 | 중식지참 |
877 | 7월26일 10시 | 서부역 공항철도앞 | 호용곡산 | 거잠포구-대무의도-하나께구름다리-호용곡산-정상-하나께해수욕정입구-대무의도 해변 | 중식지참 |
성(聖)스러움의 산(山)
설악산 금강굴(雪嶽山 金剛窟)을 가다!
▲설악산(雪嶽山)
강원도 속초시 설악동에서 시작되는
짧지만 감동적인 설악산(雪嶽山) 등산 코스가 있다. 바로 금강굴 코스다.
숲의 기운을 듬뿍 받으며 길을 이어가다 숲보다 더 푸른 계곡물에 감탄하고,
계곡 사이 기암절벽에 넋을 놓고 걷다 보면 금강굴에 오르는 전망대에 도달한다.
굴로 향하는 가파른 계단에서 아무리 식은땀을 흘려도 23.1㎡ 남짓한 금강굴(金剛窟)에 이르면
그 성스러운 기운에 ‘인생사 새옹지마’를 깨달을 수밖에 없다.
고작 1시간 30분 만에 천년만년 이어져야 할 이 경이로움과 마주할 수 있음이
그저 감사하고 또 감동인 이유다.
▲ 설악산 전경
●경건한 마음의 신흥사(神興寺)
1984년 6월 2일 강원문화재자료 제7호로 지정되었다.
《사적기(寺蹟記)》에 따르면 653년(신라 진덕여왕 7) 자장(慈藏)이 창건하고
석가의 사리(舍利)를 봉안한 9층사리탑을 세워 향성사(香城寺)라고 불렀다.
고기(古記)에 자장이 637년(선덕여왕 6) 왕명으로 당(唐)나라에서 불도를 닦고
귀국하여 건립한 사찰이라고도 전한다.
이 향성사는 701년(효소왕 10) 수천칸(間)의 대사찰이 하루 아침에 소실되고
앞뜰의 9층석탑도 화재로 파손되어 3층탑만 남았다.
그후 의상(義湘)이 이곳 부속암자인 능인암(能仁庵) 터에
다시 절을 짓고 선정사(禪定寺)라고 하였다.
선정사는 1000년간 번창했는데,
조선 중기 1644년(인조 22)에 다시 소실되고 말았다.
선정사가 불타자 많은 승려가 떠났으나 운서(雲瑞)·연옥(連玉)·혜원(惠元) 세 승려만은
유서 깊은 절이 폐허가 된 것을 가슴 아프게 여겨 재건을 논하던 중,
하루는 세 승려가 똑같은 꿈을 꾸었는데,
꿈에 향성사 옛터 뒤의 소림암(小林庵)으로부터 신인(神人)이 나타나
이곳에 절을 지으면 수만 년이 가도 삼재(三災)가 범하지 못할 것이라
말하고 사라졌다.
그래서 다시 절이 세워졌으며,
신의 계시로 창건하였다고 하여 신흥사라 부르게 되었다.
불상은 선정사 때 봉안된 것으로 의상이 직접 조성한 3불상의 하나이다.
당시 지은 법당·대웅전·명부전·보제루·칠성각 등의 건물이 현존한다.
중요문화재로 보물 제443호인 향성사지 삼층석탑과
그 밖에 순조의 하사품인 청동(靑銅)시루와 범종(梵鐘), 경판(經板) 227장,
사천왕상(四天王像) 등이 있다.
국립공원 입구 앞 매표소에서 입장료를 내고 안으로 들어서면
주차장에서부터 보이던 설악산의 위용에 한 발 더 다가서게 된다.
수많은 인파 가운데 신흥사 통일대불이 설악산 입산을 가장 먼저 반긴다.
이 청동 불상은 높이 14.6m에 좌대 높이 4.3m, 좌대 둘레 13m의 초대형 석가모니불이다.
민족통일의 비원을 안은 통일대불은 1987년 8월 공사를 시작해
1997년 10월에 완공되었다.
불상 뒤편에는 불상 내부에 조성된 내법원당이라 불리는 법당이 있다.
내부는 사진 촬영이 불가능하다.
경건한 마음으로 둘러보고 조용히 나오는 것이 좋다.
강원도 속초시의
대한불교조계종 제3교구 본사 설악산 신흥사입구에 안치한 통일대불전은
지난 1987년 착공하여 11년간의 대작불사 끝에 1997년 10 25일 봉안하였다.
통일대불전은 설악산 신흥사 일주문 앞
9천9백㎡ 부지에 대불높이 14.6m, 좌대높이 4.3m, 좌대직경 13m, 광배높이 17.5m
, 광배폭 14m의 규모로 청동좌불로는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거불(巨佛)이다.
또한, 좌대에 통일을 기원하는
16나한상을 조각했으며, 총 1백8톤 분량의 청동이 소요됐다.
이 통일대불은 90년과 92년에 회향된 속리산 법주사의 청동미륵불(높이 33m),
대구 동화사 석조약사여래불(높이 17m)과 더불어 3대 통일기원불상이다.
▲통일대불( 統一大佛)
통일대불( 統一大佛)을 지나
직선 방향으로 길을 이어가면 신흥사(新興寺)로 들어서는 사천왕문에 도달한다.
속초 신흥사는 1984년 강원문화재자료 제7호로 지정된 사찰이다.
신라 진덕여왕 때 향성사(香城寺)라는 이름으로 창건되었다가
화재로 소실된 후 선정사(禪定寺)라는 이름으로 재건되었다.
선정사는 천년의 시간을 버티다가 조선 중기인 1644년에 다시 소실되고 말았다
. 당시 이를 안타까워하던 몇몇 스님들이 같은 꿈을 꾼 뒤
그 터에 사찰을 재건하고, 신의 계시로 창건했다는 뜻에서 신흥사(神興寺)라 부르게 되었다.
이후 영동 지방의 불교를 새로 일으킨다는 기원을 담아
1995년부터 ‘새로울 신(新)’을 넣은 신흥사(新興寺)로 고쳐 부르고 있다.
경내에는 통일신라시대 양식을 따르는 향성사지 삼층석탑과
조선시대 건축술을 보여주는 극락보전, 목조아미타삼존불좌상
, 경판, 보제루, 부도 등 문화재가 보존되어 있다.
▲신흥사 전경
●전설이 흐르는 계곡, 와선대(臥仙臺)와 비선대(飛仙臺)
신흥사(新興寺)에서 돌아 나와
설악산의 주봉인 대청봉으로 향하는 다리를 건너면 비선대(飛仙臺) 자연관찰로에 들어선다.
널찍한 흙길 중간 중간 숲의 생태를 설명해주는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다.
참나무, 굴참나무, 소나무, 개옻나무, 산뽕나무
그리고 산죽이라고도 불리는 조릿대 등 다양한 식물들을 관찰할 수 있다.
신흥사(新興寺)로부터 2km, 왼편으로 흐르는 천불동계곡이 깊고
넓어질 때쯤 도달하는 곳이 와선대다.
옛날 마고라는 신선이 바둑과 거문고를 즐기며
너럭바위에 누워서 경치를 감상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하지만 전설 속 바위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시간과 계곡물이 흐르고 흘러 그 모습을 지웠기 때문이다.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청량한 계곡물이 옛이야기를 상상하게 해준다.
천불동계곡은 일반적으로
비선대(飛仙臺)에서 대청봉에 이르는 장장 12km의 계곡을 일컫는다.
천불동이란 명칭은 계곡 일대에 펼쳐지는 천봉만암(千峰萬岩)과
청수옥담(淸水玉潭)의 세계가 마치 '천불(千佛)'의
기괴한 경관을 구현한 것 같다고 해서 일컬어지는 말이다.
▲마고선녀가 바둑을 두고 거문고를 타며 노닐었다는 와선대(臥仙臺)
300m쯤 길을 이어가면 와선대에서
풍류를 즐기던 마고 신선이 하늘로 올라간 자리라는 비선대에 닿는다.
계곡물 아래 커다란 바위들과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기암절벽,
몇 백 년 세월을 간직한 나무들이 한데 어울려 절경을 이루고 있다.
예부터 시인 묵객들이 즐겨 찾았던 곳이라 한다.
'비선대(飛仙臺)'라는 글씨를 비롯해 암반 곳곳에 그들의 흔적이 새겨져 있다.
이어지는 길 언덕 위에는 작은 산장이 있다.
수십 년간 이곳을 지키며 숱한 산사람들의 쉼터이자 대피소가 되어준 곳이다.
비선대를 감상하며 간단한 식사를 하거나
잠시 다리쉼을 하며 신선놀음을 즐길 수 있다.
산장을 가로질러 비선대(飛仙臺)계곡 위에 놓인 다리를 건너면
비선대(飛仙臺) 탐방안내소에 다다른다.
대청봉과 마등령으로 향하는 본격적인 등산로가 시작되는 곳이다.
여기부터 금강굴까지는 600m 남짓이지만,
경사가 매우 가파르므로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 비선대(飛仙臺) 위에 있는 장군봉(미륵봉), 형제봉, 적벽
특히 비선대(飛仙臺)에서 대청봉에 이르는 7km에 계곡에는
설악산을 대표하는 와선대, 문주담, 귀면암, 오련폭포, 양폭, 천당폭포 등
유수한 절경이 모두 천불동에 모여 있다.
외설악의 들머리인 비선대(飛仙臺)로 접어들면서부터 천불동계곡은
그 웅장한 모습을 드러낸다. 드디어...
미륵봉(장군봉)이 김암괴봉을 거느리면서 천개의 부처님 상이 펼쳐지기 시작한다.
비선대(飛仙臺)휴게소를 막 돌아서니
바위가 마치 누워 있는 것처럼 보이는 너럭바위 와선대(臥仙臺)가 나왔다.
옛날 마고선(麻故仙)이라는 선인이 여러 신선들과 이곳 너럭바위에서 바둑을 두고
거문고를 탔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선인들은 놀기에 지치면 너럭바위에 누워 설악산의 절경을 즐겼다고 해서
와선대라는 이름이 전해지고 있다.
▲마고선이 하늘로 승천했다는 비선대(飛仙臺)
설악산(雪嶽山)은
매월당 김시습(1435-1493)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가난한 문인의 아들로 태어난 김시습은
세 살 때부터 천자문을 외우고 한시를 짓기 시작했다.
다섯 살에 <중용>과 <대학>을 떼어 천재로 이름을 날렸으며,
세종의 부름을 받고 대궐에 나아가 시를 지어 <오세 신동>이란 별명까지 얻었다.
그는 21세 때 세조가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하자 큰 충격을 받고
사흘 밤낮을 통곡을 하다가 손수 머리를 자르고 방랑의 길을 떠난다.
그는 금강산을 비롯해서 백두산, 묘향산, 오대산, 지리산 등
시인 묵객으로 주유를 한다. 요즈음 말로 표현하지면 그는 조선시대의 저항시인이다.
그런 그가 가장 오래 머문 곳은 설악산이다.
그는 설악산 오세암에 오랫동안 머물며 도를 닦으며 시를 지었다고 한다.
신라 선덕여왕 때 자장율사가 창건한 오세암은
원래 <관음암>이라 불렀다.
▲ 우뚝 솟아있는 미륵봉(장군봉) 중간에는 원효대사가 수행을 했다는 금강굴이 있다.
●바위 속 신성한 공기, 금강굴(金剛窟)
강원도 속초시의 서쪽 외설악 미륵봉(장군봉) 중턱에 위치한 동굴이다.
길이 18m의 자연 석굴로 일찍이 원효대사가 이곳에서 수도했었다고 전해온다.
따라서 금강이라는 이름은 원효대사의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에서
유래한 것으로 전해진다.
지금은 신흥사(新興寺)의 부속 암자로 되어 있다.
금강굴(金剛窟)은 경사가 급하여 곳곳에 설치된 부교와 계단을 이용해야 갈 수 있다.
그러나 금강굴에서 내려다 보이는 천불동계곡이 매우 아름답다.
굴의 크기는 23.1㎡쯤 된다.
민속학자 황호근 등이 설악의 기이한 자연현상인 8기(奇)를 정하였을 때,
금강유혈(金剛有穴)이라고 표현하였다.
이는 석산인 미륵봉에 금강굴 같은 큰 구멍이 있는 것이 신기롭고
기이하다하여 붙인 것이라고 전해진다.
와선대(臥仙臺)와 비선대(飛仙臺)를 지나며 멀리 보이는 봉우리가 미륵봉이다.
미륵봉 중턱에 길이 18m, 면적 약 23.1㎡의 자연 석굴이 있다.
언제 형성된 굴인지는 전해지는 바가 없다.
다만 신라시대 원효대사가 이곳에서 수도했다고 전해지며,
원효대사가 쓴 《금강삼매경론》에 따라 금강굴이라 불리게 되었다.
굴의 존재만으로도 신기한 현상이기에 민속학자들은
‘금강유혈(金剛有穴)’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다.
미륵봉 바로 코앞에 도달하면 갈래길이 나온다.
왼편은 마등령 방향이고, 오른편이 금강굴(金剛窟)로 향하는 길이다.
한 차례 깔딱고개를 올라서면 천불동계곡이 내려다보이는 금강굴 입구 전망대가 나온다.
1시간 30분 만에 설악산의 모든 매력을 보여주는 듯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진다.
전망대 뒤로 절벽 위에 부교와 계단이 있다.
아래에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아찔하다.
마음을 다잡고 올라도 온몸에 긴장이 흐른다.
짧지만 어렵게 도착한 금강굴에는 소박한 불당이 마련되어 있다.
내부 촬영은 금하지만 바깥 방향으로의 촬영은 가능하다.
굴 입구에 마련된 나무의자에 앉아 잠시 머물러보는 것도 좋다.
내려오는 계단길은 올라갈 때와는 또 다른 모습으로 이곳까지의 수고를 위로한다.
천불동계곡이 흐르는 설악산의 풍채는 상상 그 이상의 감동을 안겨준다.
사다리조차 없었던 그 옛날,
이 거대한 바위 위 굴 속으로 어떻게 들어설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에 감탄이 배가된다.
▲금강굴 안에서 바라본 풍경
대청봉까지 등산할 요량이라면
금강굴을 보고 비선대 탐방안내소까지 다시 내려와야 한다.
설악산의 많은 등산로는 외길이기 때문에 다른 길로 들어서면
먼 길을 돌아가거나 왔던 길을 다시 내려와야 하는 수고를 할 수 있다.
같은 길을 왕복하는 것이 아니라면 등산지도를 잘 살펴 길을 나서는 게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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