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우좡 여행7 - 심청을 보고는 운하를 따라 북쪽으로 걸어 쌍교를 구경하다!
2023년 10월 28일 수향 마을 퉁리(同里 동리)에서 30분을 달려 저우좡(주장 )에 도착해
沈廳檢票口 (심청검표구) 에서 표를 사서 운하를 구경하는데 관광객들이 어찌나
많은지 홍예교인 부안교 다리를 넘어가니 中市街(중시가) 거리에도 인산인해를 이룹니다.
미로와 도교사원에 박물관과 북문에 장청을 구경하고 호텔로 돌아와 맡긴 배낭을 찾아 체크인
하고는 다시 운하로 호숫가에 南湖秋月(남호추월)을 구경하고 올라오다가 심만삼의
저택인 선팅(沈廳 심청) 에서 꽁시파차이 (恭喜發財 공희발재) 와 滿財而歸 (
만재이귀)를 보고는 사마천(司馬遷) 의 사기(史記) 중에 “화식열전(貨殖列傳)” 을 생각합니다.
운하에서 황금색 붉고 노란 비단으로 덮힌 희한한 배를 보고 더 걸으니 운하변에는 나이든 여자분들이 춤이
한창인데... 중국은 공원에서도 전축을 틀어놓고 단체로 지루박이나 블루스를 추는 모습을 자주 봅니다.
그리고 좀더 걸어 올라가니 홍예교 다리 밑으로 마침 관광객을 태우고는 노를
젓는 여자 사공이 옛 노래를 구슬프게 부르며 지나가는 모습을 봅니다.
여기서 운하가 서로 교차하니 옆의 운하에도 홍예교는 아니고 보통의 다리가 보이니
그럼 2개의 다리가 있다고 해서 여기를 쌍교(雙橋) 라고 부르는 모양입니다?
푸안차오(부안교) 와 솽차오와 사이 수로변 양안이 원래 저우좡의 중심지이니 14개의
아름다운 석교가 유명한데, 솽차오에 원형의 세덕교 그리고 사각형의 영안교가
“ㄱ 자” 형으로 배치되어 물에 비치면 마치 열쇠와 같은 모양으로 보인다고 합니다.
사면이 모두 물로 둘러싸여 있어 마치 한 떨기 수련처럼 보인다고 하며 그리고
4개의 소하천 (北市河, 後巷河, 油車瀼河, 中市河) 이 井 자 꼴을 이루고 있고
하천을 골격으로 하여 마을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집들은 물가에 붙어 있습니다.
하천이 도시를 가로, 세로 지나가고 있으므로 필연적으로 많은 교량이 필요하다. 그리고 하천이 수운을
맡아 도로 역할을 한다.특히 유명한 교량은 영안교와 세덕교로 이루어진 쌍교이다. 세덕교는
둥근 아치 모양의 곡선형 다리이고, 영안교는 사각형태의 직선교이다. 이들은 17세기초 명(明)나라 때
만들어졌으며, 모양이 옛날 중국열쇠를 닮았다 하여 “열쇠다리, 즉 월시교(鈅匙橋)” 라고 부르기도 한다.
17세기초 명(明)나라 때 만들어진 쌍교가 세계에 알려지게 된 것은 상해출신으로서 미국에 머물고
있던 중국 반체제 화가 천이페이(陳逸飛 진일비)가 1984년 쌍교(雙橋)를 유화
(油畵)로 그려 <고향의 추억>이란 이름으로 뉴욕 Armond Hammer 화랑에 출품 하면서 부터 입니다.
미국 서부석유회사 사장 Hammer 씨는 그림을 비싸게 사들였고, 그가 사장 자격으로 중국을
방문했을 때 중·미 양국우호협력의 상징으로 이 그림을 등소평에게 선물하였으며
이듬해 1985년 UN개막을 기념하는 우표도안으로 이 그림이 채택되어, 주장의
쌍교는 세계적인 이목을 끌었고 등소평의 관심이 커져 마을이 잘 보존되었다고 합니다.
물과 배는 저우좡(주장) 의 생명입니다. 파란색 천으로 덮인 나무배를 타고, 사공의 힘찬
팔과 어깨로 노를 저을 때 배가 내는 리듬감 있는 소리, 간간이 들려오는 뱃사공의
아름다운 전통가락인 곤곡과 호수가 어울려 역동적이면서도 차분한 사랑의 노래가 됩니다.
여기 운하에 遊船码头 (유선마두) 라는 간판이 보이고 그 아래에 계단이 보이니
이런데서 관광객들이 나룻배를 타는 모양인데 밤에도 배가 운행하는가 보네요?
운하 한가운데 돌로 만든 등 탑이 보이니 아마도 저 나룻배들이 여기까지 와서는
저 등대 같은 역할을 하는 등 탑을 돌아서 내려 가는 것 같습니다.
여기 운하에서 북쪽으로 보니 불빛이 화려한 건축물이 보이는데...
아마도 여기 저우좡(주장)의 북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운하를 구경하다가 문득 이준식 성균관대 교수가 동아일보 ‘이준식의
한시 한수’ 칼럼에 실린 “버들의 의미” 라는 글이 떠오릅니다.
장대(章臺)의 버들, 장대의 버들이여. 지난날 푸르름이 지금도 여전한지?
그 긴 가지 옛날처럼 드리웠대도, 분명 남의 손에 꺾여 들어갔으리.
(章臺柳, 章臺柳. 昔日靑靑今在否. 縱使長條似舊垂, 也應攀折他人手.)
― ‘장대류·유씨에게 보내다(章臺柳·寄柳氏)’·한굉(韓翃·당 중엽·생졸 미상)
장안의 버들은 예전처럼 푸르름이 살아 있을까. 길게 늘어뜨린 그 멋진 모습을 간직
했다면 누군가가 이미 꺾어가진 않았을까. 절도사의 막료로 요령(遼寧)
지역에 머물던 시인은 안사의 난으로 혼란에 빠진 장안의 소식이 너무나 궁금했다.
버들의 안부를 반신반의하며 불안을 떨구지 못한다. 버들이 지금껏 푸르름을 간직했으리라는
믿음과 함께, 바로 그 푸르름 때문에 남에게 쉬 꺾일 수도 있다는 아찔한
모순. 한데 시인은 왜 한갓 버들에 이토록 조바심을 칠까. 애첩의 성이 ‘버들 유(柳)’―유 씨였다.
난리 통에 장안에 혼자 남은 여자의 안위 걱정에 하루하루 끌탕을 하며 지낸 그였다. 당시 유 씨는
비구니로 가장해 절에서 지내다 반란 진압을 도우러 온 오랑캐 장수 사타리(沙吒利)에게
끌려갔고, 시인은 이 일로 심한 속앓이를 하고 있던 차였다. 그래도 요행을 바라는 심정
으로 시인은 인편에 여자에게 시를 보낸다. 낙담과 희망 사이를 오가며 아슬아슬 기대를 품은 채.
여자는 어떻게 반응했을까. ‘뭇꽃들의 향기가 물씬한 이 계절, 아쉽게도 버들가지는 해마다 이별의 선물로만
쓰이지요. 버들잎 바람에 날리는 가을 오면, 그대가 오신들 더 이상 꺾을 거리는 못 되겠지요.’(‘양류지·楊柳枝’)
버들은 뭇꽃 사이에서도 유독 소외된 존재. 더욱이 잎조차 말라버린다면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을
거라는 탄식이다. 낙담 속에서 여자는 자포자기했지만 시인은 상관을 통해 덕종(德宗)의
마음을 움직였고 둘은 재회에 성공했다. 둘의 애정담은 소설과 실기문학집(實記文學集) 등에 전한다.
그러고는 다시 운하를 따라 한참이나 내려와서는 이번에는 선팅(심청) 못미쳐 좁은
골목길로 드렁가서 통과하니 바로 우리 호텔이 있는 거리이니 그럼 지름길이라....
그리고 또 한수.... 망향의 노래입니다.
새해 들자 더욱 간절해진 고향 생각, 하늘 끝에서 외로이 눈물짓는다.
늘그막이라 매사 남보다 뒤지는 터, 봄조차 이 몸보다 먼저 고향에 가 있으리.
산속 원숭이들과 아침저녁을 함께 보내고, 강 버들과는 바람과 안개를 같이 나누지.
장사부(長沙傅)처럼 멀리 쫓겨난 처지, 앞으로 몇 년이나 더 버텨야 할는지.
(鄕心新歲切, 天畔獨潸然. 老至居人下, 春歸在客先. 嶺猿同旦暮, 江柳共風煙. 已似長沙傅,
從今又幾年.) ―‘새해에 쓰는 시(신년작·新年作)’·류장경(劉長卿·709∼789)
타향에서 새해를 맞는 시인의 고적(孤寂)을 담은 노래. 세밑이나 새해, 새봄, 초목 조락(凋落) 등 계절의 변화
에 민감해질 계기가 되면 고향 생각이 더욱 간절해지는 건 인지상정. 게다가 지금 시인이 머무는
곳은 대륙 최남단 광둥(廣東) 지방, 장안에서 수천 리 떨어져 있어 오랑캐 땅으로 치부되던 오지 중의 오지였다.
모함을 받아 좌천된 처지라 시인의 향수는 더 각별했을 터. 옛사람들은 새해를 봄의 시작으로 여겼다.
새해를 상징하는 입춘(立春)이 대개 음력으로는 섣달이나 정월에 드는 것도 그 증거다.
새해가 되자 자연스레 고향의 봄을 떠올린 시인, 자신은 ‘하늘 끝에서 외로이 눈물짓지만’ 고향엔
이미 봄이 왔으리라 어림한다. 봄이 되도록 고향을 찾지 못하는 건
늘그막이라 동작이 굼뜬 탓도 있지만, 궁벽한 곳으로 밀려난 말단 관리의 구속감 때문이기도 하다.
원숭이나 강 버들과 벗하며 하릴없이 보내는 시간이 얼마나 갈는지 막막
하지만, 지난날의 충신 장사부를 자처하는 것으로 위안 삼는다.
장사부란 장사왕(長沙王)의 태부(太傅·왕의 스승)를 줄인 말. 한 문제를 보필하다
간신배의 모함에 몰려 조정에서 축출되었던 개혁 정치가 가의(賈誼) 를
가리키는데, 중국 역사에서는 핍박받는 충신의 표상(表象)인 양 추존되어 왔다.
우리 호스텔에는 사슴등 그림들이 있어 구경하고는 하룻밤을 잤는데 다음날
새벽에 잠이 깨어 베란다로 나오니 저 멀리 동터는 모습을 봅니다.
그간 여행을 다니면서 일몰 선셋은 수없이 보았지만 이처럼 일출 선라이즈를
보는건 드문 일이라 한참동안이나 베란다에 서서 동녘 하늘을 구경합니다.
그러고는 간단하게 아침을 먹고는 호스텔을 나와 거리로 나서니 이 근처에 작은 호스텔들이
밀집해 있는데..... 欢迎光临(환영광림) 今日有房(금일유방) 이라는 간판을 내걸었습니다.
큰도로인 富貴路(부귀로) 에 도착해 왼쪽으로 걸어올라 가는데..... 도로변에
큰 문을 세웠고 그 옆에 기왓집이 보이니.... 沈萬三園居( 심만삼원거) 라?
어제 저 아래쪽 운하변에 자리한 심만삼의 저택인 선팅(沈廳 심청)을 구경했는데 여긴
그보다 좀 위쪽 평지인데...... 저런 표지판을 세웠으면 원래 집이 여기인가 봅니다?
명말청초에 심만삼(沈萬三) 은 절강성 오흥에서 부친따라저자우좡(주장)으로 이주했는데 중국
역사상 10대 거부에 속하는 전설적인 부자로 그로 인해 저우좡은 더욱 발전했으니
그는 수로로 창장을 통해 난징과 항저우를 오가며 비단과 도자기 및 곡물을
거래해 부를 쌓았으니 원 말에 처음에는 장사성에게 협력했다가 훗날 주원장에 협조합니다.
심만삼(沈萬三) 은 주원장이 명나라 수도로 삼은 남경성의 3분지 1을 자기 돈으로 쌓았는데 화수분 (河水盆
하수분) 과 같은 뜻인 급보분(驟寶盆) 을 묻어 완성된 취보문은 훗날 장개석이 이름을 중화문으로 바꿉니다.
화수분은 전영택이 1925년 1월에 조선문단에 발표한 소설 이름이기도 한데... 그 뜻은
재물이 계속 나오는 보물단지로 그 안에 온갖 물건을 담아 두면 아무리
써도 줄지 않는다는 전설의 물건으로 본디 하수분 (河水盆) 이란 말이었다고 합니다.
진시황 때 만들어진 말인데.... 만리장성을 쌓을 때 거대한 물통을 만들어서 거기에 황하의 물, 즉 하수(河水) 를
담아서 사용했는데 그 물통이 워낙 커서 물을 아무리 써도 전혀 줄어들지가 않는다고 느껴질 정도였고,
이것이 '무언가 써도 써도 마르지 않는 신비한 단지' 라는 뜻을 지니고 화수분이란 말로 바뀐 것이라고 합니다.
고전 문학 작품 및 근대 문학 작품들 사이에서는 간간이 사용되는 용어지만, 현대에 와서는 그냥
잊힌 지 오래다. 그렇다고 아주 사어가 된 건 아니고, 국어시간에 소설을 다루기 때문에
웬만한 사람은 무엇인지 알고 있으며 보통 세계정복을 꿈꾸는 악당들이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심만삼은 급보분(驟寶盆) 등 성을 쌓은 공과 그외에도 병사들에게 줄 은사금을 내놓은 공으로 두 아들은 고위
벼슬을 받았으나 비리에 연루되어 재산을 몰수당하고 손자들은 1393년 토사구팽이라고 2만명의 공신과
관리들이 처형당한 남옥사건에 연루되어 일가는 몰살 당하고 그는 운남 복천상에 귀양 중에 굶어 죽었습니다.
여기 길거리에는 시에서 빌려주는 자전거가 많이 세워져 잇는데
한가지 특색이 자전거 바구니에 헬멧까지 놓아 두었다는.....
그러고는 북쪽 대로인 전공로(全公路)에 도착하기로 좌회전을 해서 좀 걸으니
왼쪽에 어제 걸어다녔던 운하가 나타나고 거기에 큰 홍에교 다리가
보이니 전공교이고 저 운하를 따라 내려가면 어제밤의 그 쌍교가 나타날 것입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걸으니 식당들이 많이 문을 열었는데 朝餐(조찬) 이라는 간판을 내 걸었으니 중국도
베트남처럼 아침을 집에서 해서 먹지 않고 이처럼 식당에서 사먹는 사람들이 제법 많은가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