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혼자서 여행을 하고 싶었을 겁니다. 마침 제주에 후배가 살고, 고향의 또 다른 후배마저 온다고 하니 잘 되었다 싶었습니다. 전주로 내려 온지 만 5년이 넘어 갑니다. 그래도 타지에서 나이 좀 먹은 사람이 그런대로 잘 적응을 했나 봅니다.
예향의 전주를 늦바람 난 총각처럼 탐닉하며 여기 저기 남도의 문화가 숨 쉬는 곳을 아내와 함께 다녀보기도 했습니다. 자식들이 다 성장하여 집을 나간 후의 부부의 삶은 아마도 허전함과 시원함이 교차하는 듯 하더군요. 그래도 그 중간에 다소의 여유가 생겼다는 것은 우리 세대가 가질 수 있는 아주 작고 소중한 생의 인센티브일 수도 있을 겁니다.
치열했던 고난의 정신적 틀에 약간의 틈이 생긴 겁니다. 알다시피 틈이나 크랙은 처음부터 많이 벌어지지 않지만 일단 그런 조짐이 생기면 시간이 흐르면서 그 간격이 멀어지게 마련입니다. 섬진강의 봄내음과 변산의 여름 그리고 내소사의 가을 단풍을 감상하다 정읍, 고창의 폭설을 겪다보면 그 틈새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생의 한 부분이 되어 어느 새 허전함을 메꿔주는 아주 훌륭한 대체재가 되는 겁니다.
저만 그런 것이 아닌 듯합니다. 여수의 아름다운 카페와 목포의 이름난 맛집에는 우리 세대가 대부분의 좌석을 차지합니다. 인생의 순환이 비슷한 세대일 겁니다. 다만, 남자에게는 때론 무척이나 혼자이고 싶은 본능이 있는 가 봅니다. 간장 게장이 아무리 먹고 싶어도 아내가 싫다고 하면 하는 수 없이 짬뽕을 먹어야 하는 속박에서 언젠가는 벗어나고자 하는 야심(?)이 있는 겁니다.
제주의 검은 바다와 비 내리는 돌담의 민가 그리고 섬 특유의 냄새가 주는 “영혼의 자유”는 꽤나 괜찮았습니다. 바닷가 허름한 횟집에서 뱅애돔을 시켜놓고 한라산 물로 담궜다는 소주 한 잔을 숨도 안 쉬고 삼켰더니 영혼의 자유가 영혼의 맑음으로 금방 진화하더군요. 인간의 영혼이 자유를 얻으면 그 걸로 끝인 줄 알았던 제가 한잔 술에 “영혼의 진화 가능성”을 알았다면 이미 여행의 본전을 뽑은 거 아닌가요? 이래서 여자들은 남자를 가끔은 이렇게 한번 씩 풀어 놓아야 하는 겁니다.
그런데 순조로운 진화의 과정을 밟으며 4일이 지나 5일이 되면서 제주에 난데없는 폭설과 풍랑 경보가 뜨는 겁니다. 육지 촌놈이 태어나서 그렇게 세차고 험악한 파도를 본 적이 없었습니다. 저 멀리 한라산 정상은 구름인지 눈인지 분간 할 수 없는 “하얀”으로 덮여 있고 모든 교통수단이 통제가 되고 말더군요.
아침마다 후배가 직접 만들어다 준 후라이 두 개와 손수 갈아서 타 주던 향기 그윽한 커피 그리고 감미로운 깐쏘네 음악이 주었던 마음의 평화가 다시 불안한 나그네의 영혼으로 돌아오는 겁니다. 그렇게 훌쩍 혼자서 떠나고 싶었던 집인데, 이제는 그 떠났던 집으로 못 돌아갈까 봐 염려가 가득한 겁니다. 영혼의 자유가 다시 불쌍한 영혼으로 복귀하는 겁니다.
후배네 집을 나와 하룻밤을 바닷가 호텔에서 소주 한 병과 맥주 두 캔을 놓고 끝없이 몰아치는 바람과 성난 파도를 바라보았습니다. 하늘과 땅 그리고 인간의 삼각관계가 새삼 다가오더군요. 인간의 영혼 그리고 우리가 갈망하는 그 영혼의 자유도 하늘과 땅이 허락해야 가능한 것인지도 물어 보았습니다.
새벽까지 그 바람과 파도는 멈출 기미가 없더군요. 비행기 세 편을 예약과 취소를 반복하다가 문득 광주로 우회해서 전주로 갈 수 있을 거란 얄팍한 수가 생각났습니다. 군산 공항의 차는 나중에 가질러 가면 되는 겁니다. 다행히 하늘이 저의 이 애처로운 아이디어를 용납하시여 무사히 광주 공항에 내릴 수가 있었습니다. 딸애의 표현대로 쇼생크 탈출 비슷한 겁니다.
더욱 감사한 일은 저의 딱한 사정을 듣고 전주에서 지인이 광주까지 와서 군산 공항까지 픽업을 해 주시고 전주에 입성해서 맛있는 술과 밥까지 사주고 간 겁니다.
인간의 삶이 무엇인지, 내 삶의 어떤 모습이 소중한 것인지가 늘 우리의 사색을 지배합니다. 긴 여행길에서는 더 더욱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촌놈의 모처럼 제주 여행에서 저는 하늘과 땅 그리고 인간의 관계를 여행 끝자락에서 생각해 볼 수 있었습니다. 잠시의 영혼의 자유도 하늘과 땅의 허락이 있어야 되고 곤고한 날의 불안 속에서도 사람의 믿음과 신뢰가 바탕이 될 때 하늘은 다시 자유를 허락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하늘과 땅을 중히 여기며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과의 사랑을 또한 소중하게 생각할 때 하늘은 때때로 우리에게 영혼의 자유를 허락 하는 가 봅니다.
새해 벽두에 공기가 아주 찹니다. 모두 건강하시길 기원 드리며 희망찬 새해가 많은 분들의 가슴에 메아리치기를 또한 기도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