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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 애국지사 묘역 순례길
호젓한 숲길 거닐며 호국과 조국애 배운다
우리나라 오악(五嶽:백두산․지리산․금강산․묘향산)에 하나로 꼽히는 북한산.
서울의 진산(鎭山)으로 강북구, 성북구, 은평구, 종로구와 경기 일부를 차지하는 명산이다.
백운대(836m), 인수봉(810m), 만경대(787m).
세 봉우리가 삼각으로 놓여 있어 옛날부터 삼각산으로 불렀다.
최근 북한산국립공원 산자락 주변을 수평으로 연결한 길을 열었다.
이름하여 ‘북한산 둘레길’이다.
이 가운데 국립공원관리공단 북한산사무소 수유분소에서 보광사를 지나 우이동 솔밭공원을 잇는 4.4㎞ 구간,
일명 ‘애국선열 묘소 순례길’이 올 초에 개방됐다.
나라의 독립을 위해 재산은 물론 목숨까지 바친 애국선열들의 정신을 높이 받들고 본받자는 뜻에서 붙인 이름이다.
북한산사무소 수유분소- 이준 열사- 김병로 선생- 이시영 선생․광복군 합동묘소- 섶다리- 유림 선생-
김창숙․양일동 선생- 서상일 선생- 김도연 선생- 신숙 선생- 보광사 입구- 4․19묘지 전망대-
우이동 솔밭공원(4.7㎞; 2시간 소요).
대한제국이 강제로 병합(경술국치;1910. 8. 29)한지 100년을 맞이할 즈음
전국대학생 문화연합 동아리가 벌인 설문조사가 눈길을 끌었다.
전국에 거주하는 20대부터 60대까지 총 2010명에게
‘2010년이 한일강제병합 100년인지 아십니까?’라고 물었는데
‘알고 있다(48.8%)’는 대답 보다 ‘모른다(51.2%)’라는 응답이 많게 나온 것.
이는 강제병합에 대한 우리의 역사관이 아직도 많이 부족하다는 결과로 분석된다.
이와는 반대로 최근 일본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아 새삼 주목을 받고 있다.
1995년 무라야마 도미이치 일본 총리가 “통절한 반성”과 “진심으로 사죄한다”는 뜻을 밝힌
이른바 ‘무라야마 담화’를 한 이래 일본정부는 "이를 뛰어넘는 수준의 담화문을 적극 검토 중"
이라는 설이 난무했으나 역시 기대에 미치지 못한 결과에 실망만 컸을 뿐이다.
반면 미쓰비시 중공업은 일제강점기에 강제로 동원된 근로정신대 할머니들에게
늦으나마 피해보상을 위한 재협상에 응하겠다는 뜻을 밝혀왔다는 소식을 떠올리며
북한산 ‘애국선열 묘소 순례길’을 나섰다.
북한산 수유분소 순례길 입구
장마가 잠시 소강상태를 보이는 7월 중순,
지하철4호선 수유역에 내려 1번 출구에서 ‘강북01번’ 마을버스를 타고 종점(통일교육원, 아카데미하우스)에서 내린다.
국립공원 북한산사무소 수유분소 순례길 입구는 평일답지 않게 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다.
‘일성 이준 열사 순국103주년 추념제전’을 올린다는 큰 현수막이 걸려있고, 곳곳에 사람들이 도열해서 길을 안내한다.
하늘을 우러르며 우뚝 서있는 '자유평화수호의 상'
입구에서 약 1백m 떨어진 길 왼쪽에 이준 열사의 묘역을 알리는 쇠로 만든 홍살문[紅箭門]이,
그 옆으로는 열사의 공적을 새긴 ‘위훈비’가 서있다.
아름다운 숲길 양 옆으로 열사가 생전에 남긴 말씀을 동판에 새겨놓은 비석들이 마주하여 사뭇 숙연함을 더한다.
1963년 10월 4일에 세우고 1992년에 보수했다고 전하는 청동제 ‘자유평화수호의 상’이 하늘을 우러르며
우뚝 서있는 길 끝 마지막 계단을 오르면 묘역이다.
커다란 돌 조형물 중앙에 열사의 흉상이 있고, 그 아래 태극기를 조각한 평평한 돌판이
1963년 10월 4일 네덜란드에서 이곳으로 모신 이준 열사의 안식처다.
이준 열사 묘역
1859년 12월 18일 함경남도 북청에서 태어난 일성(一醒) 이준 열사는 태생이 강인 호탕하여 용기가 비범했다.
1888년 북청에서 경학원을 설립, 육영사업에 전력한다.
1895년 법관양성소를 졸업한 뒤 한성재판소 검사에 임용되나
다음해 서재필과 조선독립협회를 조직, 평의장 자격으로 독립운동을 하다가 도일,
와세다대학 법과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독립협회에서 계속 활동한다.
1902년 민민공동회 주최로 내정개혁운동에 앞장서다가 이승만 이동녕 등 17명과 함께 투옥된다.
후에 개혁당을 조직해서 민영환 이상재 등과 활동하면서 한일의정서 반대운동(1904년)을 일으키고
대한보안회 도총무로 일하면서 일본인이 대부한 황지문건(荒地文券)을 환원시킨다.
이후 적십자회, 공진회를 조직하여 의장으로 활동하다가 소인배의 모함으로 황주 철도에 6개월간 정배된다.
1905년 을사늑약의 허구성을 온 세상에 알리기 위해 상해에서 귀국하고, 이듬해 윤효정 장지연들과 자강회를 조직한다.
이외에 만국청년회, 헌정연구회, 국민교육회 회장을 역임하고
보광학교와 서북흥학회, 오성학교를 세워 청년운동은 물론 육영사업에도 힘쓴다.
헤이그에 보낸 고종의 친서가 조각되어 있다
일성은 뜻한 바대로 평리원 검사 및 특별법원 검사로 있으면서 법을 바로 잡는데 노력, 법의 수호신이란 칭호를 받는다.
한편 안창호와는 비밀결사를 조직했으며,
안중근이 설립한 진남포 삼흥학교에서 “일심단결하여 완전독립하자”라는 연설로 애국심을 고취시킨다.
1907년 YMCA강당에서 마지막으로 연설한 ‘생존경쟁’은 청중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으며,
국채보상연합회 회장 시에는 국채보상에 대한 인식을 촉구하며 ‘한국혼 부활론’을 저술, 민족정기를 계도했다.
동년 이상설 이위종과 함께 “을사보호조약은 일본이 강압적으로 체결했기에 전적으로 무효”라고 호소하는
고종황제의 친서를 가지고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2차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한다.
이곳에서 열사는 국권을 회복코자 세계 언론기관에 호소하고 의장단을 방문하여 친서와 신임장을 전달하려 했으나
일본이 교묘하게 방해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자 이에 격분,
1907년 7월 14일, 자결순국 함으로써 한민족 자주독립에 대한 염원과 기개를 온 세계에 떨쳤다.
“땅이 크고 사람이 많은 나라가 큰 나라가 아니고,
위대한 인물이 많은 나라가 위대한 나라가 되는 것이다.”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무엇을 죽는다 하며 사람이 산다는 것은 무엇을 산다 하는가
죽어도 죽지 아니함이 있고, 살아도 살지 아니함이 있다.
그릇 살면 죽음만 같지 못하고, 잘 죽으면 도리어 영생한다.
살고 죽는 것이 다 나에게 있나니, 모름지기 죽고 삶을 힘써 알지어다.”
서둘러 산길을 따라 대동문 방향으로 2백여m 쯤 가면 초대 대법원장을 지낸 가인 김병로(1887∼1964) 선생의 묘소다.
입구에는 안내판이 있어서 선생의 생애를 알 수 있도록 해놓았다.
전북 순창 출신의 법조인이자 정치가였던 선생은 1906년 을사조약에 반대하며 일인보좌청(日人補左廳)을 습격했고
일제 강점기에는 동포들에게 법률적으로 도움을 주기 위해 일본으로 넘어가 법률공부를 했다.
이때 ‘학지광(學之光)’ 편집장으로 계몽운동에 앞장선다.
이후 귀국하여 1927년에는 민족운동단체 신간회의 중앙집행위원장을 지내면서
해방 전까지 독립운동사건이나 독립을 위해 앞장섰던 민족지도자들을 위해 무료변론을 맡았고
광복 후에는 초대와 2대 대법원장을 역임했다.
가인 김병로 선생 묘역 앞을 등산객이 오르고 있다.
하산길을 잡아 2백m쯤 내려오는 길에는 ‘낙엽을 태우면 노란 재를 남긴다’ 해서 노린재나무,
‘땅을 걸지게 한다’는 다릅나무가 길손을 반길 즈음
약수산장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난 고즈넉한 길(130m)로 접어든다.
미끄럼을 막기 위해선지 길 한쪽은 두꺼운 고무줄로 엮어놓은 길 끝에는 거북이 등에 올린 비석이 있고,
이윽고 급경사 계단 쉰다섯 개를 오르니 대한민국 초대부통령을 지낸 성재 이시영 선생의 묘소다.
양편에 세운 문인석 인상이 참 독특하다고 느낀 것도 잠시,
봉분 앞부분의 흙이 많이 무너져있어서 참배하는 이의 마음이 절로 무겁다.
관리가 잘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보낸다.
봉분 앞이 많이 무너진 이시영 선생의 묘소. 참배하는 이의 마음이 무거웠다.
선생은 서울 출신으로 부유한 가문에 태어났으나 독립운동을 위해 모든 재산을 정리하고 만주로 이주하여
동포사회 일을 다루는 경학사와 독립군 양성기관인 신흥강습소(현 경희대 전신)를 설립한다.
임시정부 시절에는 법무․재무 분야에서 임원으로 활동하고, 광복 후에는 초대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이승만 대통령과 노선이 각기 달랐기에 스스로 사직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정규군인 광복군을 모신 합동묘역이 가까이에 있다.
1940년∼1945년 동안 중국 각 지역
즉, 산서성 능천과 고평․태행산 지구 등에서 일본군과 치열하게 싸우다 순국한 애국선열 18위를 모신 곳을
유치원생 한 무리가 더위를 뚫고 찾아왔다.
그리고 선생님의 말씀에 따라 일제히 다소곳하게 두 눈을 꼭 감고 묵념을 올린다.
아이들은 무슨 마음으로 고사리 손을 모은 채 기도를 하는 것일까.
사진 몇 장을 바삐 담고 그 자리를 조심스럽게 빠져나온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정규군인 광복군을 모신 합동묘역. 김성율 김순근 김운백 김유신 김찬원 동방석
문학준 백정현 안일용 이도순 이한기 이해순 전일목 정상섭 조대균 한휘 한이평 외 신원미상 1인 등
18위의 충혼을 모셨다.
국가보훈처는 아래의 비문을 새겨 선열을 위로하고 있다.
"일제의 국권침탈을 반대하여 가정을 돌보지 않고 고귀한 생명마저도 나라와 겨레를 위해 기꺼이 바친다는 것은 민족정기의 발로라고 하겠다. 여기는 이역만리 중국 땅에서 조국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일본군과 싸우다 순국하신 대한민국 임시정부 정규군인 광복군 18위의 충혼이 서려있는 곳이다. 우리 자손들에게 님들의 그 숭고한 애국정신을 귀감으로 전하고자 1985년 광복 40주년을 기하여 이곳을 단장했다"
길을 되돌아 나오면 물 흐르는 소리가 쾌활한 계곡을 이어주는 아치형 나무다리 대동교를 만난다.
아름다운 계곡을 천천히 건너면 1882년에 만든 태극기부터 1890년, 1921년, 1932년, 1949년의 태극기까지
우리 국기의 변천사를 알기 쉽게 소개한 자리가 인상적이다.
특히 북한산 대동문에서 흘러내린 물줄기가 지나는 수유계곡은 나무로 친 울타리를 따라 가기 걷기도 쉬울뿐더러
길 잃을 염려도 없는 구간이다.
그래서 무심코 지나치는 곳이 바로 순례길의 명물 섶다리이다.
소나무 가지들을 엮고 그 위에 흙을 덮어 전통방식으로 만들었기에 어느 길에서도 볼 수 없는 향수를 흠뻑 자아낸다.
원래는 민가 앞으로 길이 났으나 사생활 보호를 위해 섶다리를 놓았다고 한다.
순례길의 명물 '섶다리'
경북 안동 출생으로 아나키스트․독립운동가, 정치인으로 1919년 3․1운동에 참여하고 만주로 탈출,
서로군정서 특파원으로 활동한 단주 유림 선생 의 묘역이다.
선생은 광동기계공인총동맹 활동을 통해 10만 노동자 조직을 지도했으나, 강제하는 권력에 싫증을 느낀 나머지
평양에서 아나키즘 전국 조직인 조선공산무정부주의자연맹을 결성(1929)한다.
아나키스트 활동과 더불어 독립운동가 간부를 양성하는 의성숙을 세우고 운영하던 중 체포되어
5년간 옥살이를 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현 국회의원), 광복 후에는 아나키즘을 모태로 한 독립노동당과 노동신문을 창간했다.
어느 산책길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각종 운동기구들, 이곳 순례길에도 잘 마련되어 있다.
특이한 점은 탁구장이 있다는 것이다.
등산객들이 양편으로 나누어 열심히 탁구를 치는 모습이 낯설게 뵈지 않음은 왜일까.
예서 다시 대동문으로 오르는 길을 따르면
광주학생운동 시위를 주도(1930)했고, 광복 후에는 통일당 총재를 지낸 현곡 양일동 선생(1912∼1980) 묘역이다.
그리고 경북 성주 태생으로 1905년 을사조약 체결을 반대하며 매국 5적 처형을 요구하다 옥고를 치루고,
전국 유림을 결속한 유림회와 성균관대학을 설립(1946)하고 초대학장을 맡은 심산 김창숙 선생의 묘소를 지난다.
서상일 선생 묘비. 그 왼쪽으로 묘역이 단정되어 있다.
이후 완만한 산길 바로 옆에 조선국권회복단을 조직해서 독립운동을 펼치고, 광복 후에는 한국민주당을 창립하고
제헌국회 헌법기초위원으로 헌정의 초석을 다진 동암 서상일 선생(1887∼1962) 묘역에 닿는다.
다른 선열과는 달리 바로 길 옆에 묘가 있어서 접근성은 뛰어나나
묘역 전체가 들풀로 가득하여 왠지 무상함이 더하는 듯하다.
본격적으로 내리막이라 발걸음 또한 가벼운 순례길은 다시 경기도 김포 출신으로
일본 동경에서 2․8독립선언을 주도하다 일경에 체포되어 동경형무소에 수감되었던
김도연 선생의 묘역을 향한다.
선생은 연희전문학교에서 교수(경제학 박사)로 재직하던 중 조선어학회 사건(1942)에 연루된다.
이 일로 함흥형무소에서 다시 2년간 옥고를 치룬다.
해방이 되자 입법의원과 제헌국회의원을 거쳐 초대 재무부장관을 역임한다.
사방이 확 트여있고 다른 곳보다 단장이 잘되어 있어서 보는 이의 마음 또한 경쾌하다.
신숙 선생 묘역 오르는 길 입구에 정렬한 곧은 소나무.
이제 오늘의 마지막 여정으로 한국독립당을 결성하고 독립군 참모장으로 일제에 대항하여
무장투쟁을 지휘한 신숙 선생을 찾으러 발길을 재촉한다.
그런데 입구부터 예사롭지가 않다.
쭉쭉 뻗은 소나무 사이로 난 곧은 길, 보기만 해도 참으로 멋지다.
선생은 경기도 가평 출신의 독립운동가로서 1911년 매국의 원흉인 일진회장 이용구의 암살을 기도했다.
3․1운동 당시는 독립선언서의 교정과 인쇄, 배포를 책임졌다.
이후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단체인 대동단에서 일제에 대항하여 무장투쟁을 지휘하던 생전의 선생 모습을 그려본다.
보광사 경내
문득 순국선열들의 묘가 이처럼 한군데 모여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무척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이에 대해 국립공원 측도 뚜렷한 답을 내지 못했다.
다만 ‘삼각산 인수봉은 우리 민족의 정신적 구심체이기 때문에 수유지역으로 모신 것이 아닐까’
추측만 할 뿐이다.
발길은 보광사를 지난 뒤
290명의 젊은 영령들이 잠들어 있는 4.19국립묘지를 굽어 볼 수 있는 전망대에 닿는다.
50여년 전의 기막힌 젊음을 간직하고 있는 조용한 공간을 굽어보면서
다시 접어든 호젓한 숲길 끝머리에서 순례길 출구를 만난다.
290명의 젊은 영령들이 잠들어 있는 4-19국립묘지 전경
순례길 마무리는 울창한 소나무들과 함께 정자와 쉼터가 마련된 우이동 솔밭공원이다.
여기 저기 유명 시인들의 시도 감상할 수 있어 가족단위 나들이에 무척 좋다.
멀리 인수봉, 백운대, 만경대가 장엄하게 펼쳐진 모습을 가슴에 담으면서
순국선열들의 숭고한 애국정신이 배어 있는 순례길 걷기를 마감한다.
앞으로 북한산 둘레길은 ‘북악 오솔길’, ‘우이 소나무길’, ‘불광 언저리길’, ‘회룡 탐방모험길’처럼
저마다 테마를 갖고 2012년까지 총 63.17km로 완성할 예정이다.
올해 말에는 강북구와 은평구 지역 둘레길이 새로 선보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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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중학시절,,,돈암동에 살았던 덕에 4.19 탑과 조병옥 선생묘소를 위시하여 주변으로 제법 다녔던 기억이 있는데...
본 순례의 장을 보고는 이렇게 선열들의 묘역이 많은줄은 몰랐습니다...
순국 선열들의 장을 아이들과 함께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겠습니다....
잘보고갑니다 주말에 산책삼아 걸어보겠습니다 좋은길 안내해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