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병장 운포 이중린의 입산가入山歌>
의병장 운포(雲圃) 이중린(李中麟,1838~1917)은 퇴계선생의 12대손으로 용계고택(龍溪古宅)의 주손이며 용계택의 별당 정자가 침천정(枕泉亭)이다. 침천정은 도산면 온혜리 도산온천 건너편 국망봉 등산로 입구에 있다.
이 침천정은 운산(雲山) 이휘재(李彙載)가 1834년 온혜리 용계에 세운 정자로 그의 손자 운포 이중린이 의병활동으로 2007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자 후손들이 힘을 모아 2008년 중수하였다.
침천정(枕泉亭)은 주자의 서각(西閣)시 “안득침하천,거작인간우(安得枕下泉,去作人間雨)”의 “어찌 흘러가는 샘물 베개 하고 누워, 인간 세상의 비 내림을 버릴 수 있겠는가”에서 취하여 ‘몸은 비록 시골에서 편안히 지내지만 세상을 걱정하고 백성들에게 은택을 끼치고자 한다’는 뜻이 들어있다. 편액은 해사 김성근(金聲根)의 글씨이다. 입산가(入山歌)는 운포 이중린이 선성의병장으로 목숨을 건 항일투쟁을 하였으나 결국 나라가 망하자 망국의 한을 삼키며 자신은 소백산 아래 천부산(天浮山)으로 들어가면서 백성들에게 항일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하여 지은 가사가 입산가(入山歌)이다.그는 입산한 후에도
일제의 감시를 피해 용궁, 문경, 회인, 풍산등지를 전전하면서 후세교육과 구국계몽 운동을 하다가가 1917년 1월에 세상을 마감 하였다.
운포 이중린의 의병활동에 대해서는 계명대고문헌연구소의 장인진(張仁鎭)박사에 의하여 내방가사 생조감구가(生朝感舊歌)의 작가 추적결과 운포 이중린의 딸 이사호(李似鎬)임이 밝혀져서 《운포 이중린의 척사정신과 의병항쟁》이란 논문에서 상세하게 연구된 바가 있다. 그러나 이 논문에서 게재된 이화여대본과 후손 이필상이 가장으로 보관된 입산가는 순언문체(純諺文體)로 되어 있고 원본을 여러손을 거쳐 필사하면서 오기와 누락된 부분이 많아 작자의 원래의 뜻을 파악하기 어려웠다.
우연하게도 금년에 원문을 그대로 필사한 입산가가 공개되었으나 한자와 언문체가 섞인 고전가사를 현대인들이 쉽게 이해할 수가 없어서 이를 쉽게 해설하여 망국의 울분을 삼키며 가족과 전재산을 버리고 산속으로 들어간 의병장 이중린의
애절한 심정을 조금이나마 이해 하고자 한다.
*용계고택의 위정척사(衛正斥邪)정신과 의병활동
운포 이중린의 조부 운산 이휘재(李彙載,1795~1875)는 청벽 이수연(李守淵,1693~1748)의 현손으로 상계종택 부근에 살다가 1815년경 용계에 집을 짓고 살게 되어 뒤에 이집을 용계댁이라 불렀다. 그는 퇴계선생의 학통을 이은 노암 정필규(鄭必奎)로부터 수학하여 1827년 증광생원시에 장원으로 입격한후 선릉참봉(宣陵參奉), 장악원주부, 사헌부감찰 등을 역임하였다.
1842년(헌종8) 경산현령으로 있으면서 문회재(文會齋)를 창건하여 문풍(文風)을 진작시켰고, 안성군수와 청풍부사를 지내며 많은 업적을 남겼고 특히 홍주목사로 있을 때 선정을 베풀어 홍주 백성들이 선정비를 세워 그의 공덕을 기렸다. 1866년 병인양요 당시에 경상도 소모사(召募使)로서 양이(洋夷)를 성토하며 의군을 모집 하였고, 그후 호조참의와 수직(壽職)으로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 한성부우윤에 제수되었다.
벼슬길에는 항상 공정,청렴하게 임하였으며 경연강의(經筵講議)를 포함한 10여권의 저술을 통해 시폐를 지적하고 개혁을 주창한 유학자이자 경세가였다. 한편 학문으로는 진지(眞知)와 실천(實踐)을 기본으로 하여 늘 사칠이기설(四七理氣說)에 침잠(沈潛)하여 퇴계의 가학을 계승하였고 저서로는 『운산문집(雲山文集)』 6책이 있다.
운포의 아버지 석포 이만시(李晩蓍,1814~1875)는 부형의 정훈(庭訓)을 따라 유생들에게 강학을 통한 의식개혁으로 척사구국(斥邪求國) 운동에 앞장섰다. 1849년 생원시에 입격한후 장흥고봉사, 의금부도사, 산청현감, 금산군수 등을 거쳐 1874년에
군위군수가 되었는데 이듬해 아버지 운산 이휘재의 상을 당하자 애통한 나머지 11일만에 연이어 졸하였다. 배위는 연안이씨 거창부사 이재연(李載延)의 딸이다.
운포 이중린(李中麟,1838~1917)은 자는 진백(振伯)이며, 호는 운포(雲圃), 황산(潢山)이다. 퇴계선생의 12대손으로 가학을 계승하여 덕행과 학문으로 이름난 유학자이며 부조(父祖)의 위정척사 정신을 이어받아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척암(拓庵)
김도화(金道和) 등 당시의 명사들과 교유하면서 국권회복운동에 앞장서서 의병대장에 추대되기도 하였다.
어머니는 연안이씨로 용계리에서 태어나 낙파 류후조의 아들이자 이모부인 계당 류주목(柳疇睦,1813~1872)의 문하에서 배웠다. 1874년 위정척사의 우국충정에서 안동유림을 대표하여 실각된 대원군의 복위상소를 올린바가 있고, 1877년에는 경향에 뜻있는 선비 10여명과 문경 요성(堯城)에 모여 상의계(尙義稧)를 조직하고 학문을 강론하였다. 그후 민씨 일파의 미움을 받아 함경도에 4년간의 유배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1894년에 경상도 위무사 이중하(李重夏)가 이중린을 포함하여 면우 곽종석(郭鍾錫), 방산 허훈(許薰), 대계 이승희(李承熙), 만구 이종기(李種杞), 진주인 강면(姜沔)등 영남의 명망높은 선비 6인을 조정에 등용토록 천거 하였다. 그 후 1895년 8월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11월 단발령이 공포되자 곧바로 이중린이 앞장서서 선성(예안,도산)지역에 의병을 일으켜 본격적인 항일투쟁을 전개하였고 초대 의병장에 향산 이만도(李晩燾)를 추대하여 안동 의병장 성대 권세연(權世淵)과 합세하여 크게 기세를 떨치게 되자 전국적으로 의병이 확산되어 일제에 항거하게 되었다.
1896년 2월 선성의진은 2대 의병장에 이중린, 중군장에 김도현(金道鉉), 선봉장에 이인화(李仁和), 전방장에 이중언(李中彦)으로 지휘부를 정비하여 연합의진과 함께 일본 병참부가 주둔하고 있는 문경함창의 태봉을 공격하였으나 일본군의 반격으로 안동시내가 점령되어 민가 1천여호가 불타고 태봉전투에 앞장선 퇴계후손들의 선성의병을 추격하여 1896년 4월20일
퇴계종택이 일본군에 의하여 방화 소실되었고, 그 뒤 7월29일에는 온계종택마져 방화 소실되는 참화를 겪게 되었다.
그 후 일본경찰은 청량산 오산당이 의병의 본거지라 하여 또 다시 불을 질러 소실되는 만행을 저질렀으나 3대 의병장에 온계종손의 동생 이인화(李仁和), 4대 의병장엔 노송정 종손 이찬화(李燦和)등이 계속해서 의병을 규합하여 일제에 저항하였으나 결국 나라는 망하고 말았다.
운포 이중린의 의병활동은 벽산 김도현(金道鉉)의 「창의전말」 청송 심성지의 「적원일기」 주촌종택 이긍연의 「을미의병일기」에 소상히 기술되어 있고 송상도의 「기려수필」과 이중린의 딸 이사호(李似鎬)의 가사〈생조감구가〉등에 이중린의 우국애민사상과 항일 저항의식이 잘 드러나 있다.
운포 이중린은 경술국치 이후 총검으로 위협하면서 내린 은사금을 거부하였고 망국의 아픔과 수모를 당하면서 가통을 이어야 하는 처지에서 목숨을 버리기도 어려워 왜경의 눈을 피해 산속으로 은둔하였다.
퇴계종택이 일본군에 의해 소실된후 퇴계종가의 식솔이 갈곳이 없어서 종부의 외가댁이기도 한 용계고택에서 생활하였고,종택이 소실된 책임이 자신의 의병활동 때문이라고 생각하여 자신의 남은 재산과 집을 이건하여 종가를 복원토록하고 소백산 아래 천부산(天浮山)으로 들어가면서 백성들에게 항일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하여 입산가(入山歌)를 짓고 “금은화장
손에 짚고 망혜를 들멘 후에/ 사면을 살펴봐도 갈 곳이 전혀 없네”라고 망국의 한을 삼키며 입산한 후 일제의 감시를 피해 용궁, 문경, 회인, 풍산등지를 전전하면서 후세교육과 구국계몽 운동을 하다가가 1917년 1월에 세상을 마감 하였다.
저술로는 운포유고(雲圃遺稿), 대원군복위상소문인 〈청대원군복위소 請大院君復位疏〉와 선성의진을 결성할 당시 상소문인 〈청진의려소 請鎭義旅疏〉및 안동부관찰사 김석중의 학정(虐政)을 고변한 〈여친위대대장 與親衛大隊將〉의 글을 지었고, 토사
부정(討邪扶正)의 명분으로 개화당의 김홍집등을 탄핵한 〈병신창의시고일방인사문 丙申倡義時告一方人士文〉 등이 남아있다.
운포 이중린의 초취 부인은 우복 정경세(鄭經世)의 9대 종손 백인당 정윤우(鄭允愚,1804~1869)의 딸로 사이에 5녀가 있고,사별후 재취 부인은 의성인 김진영(金鎭永)의 딸로 3녀가 있어서 모두 8명의 딸을 영남의 명문가와 결사하여 혼가시켰고,매부는 진사 김덕영(金悳永)으로 그의 딸이 퇴계종손 이충호(李忠鎬)의 부인으로 운포의 생질녀가 된다.
운포 이중린은 조카 원호(元鎬)를 양자하여 대를 이었고 맏사위는 하회 북촌댁 주손 류덕영(柳德榮)이며, 둘째는 풍산 오미동 영감댁 주손 김정섭(金鼎燮)이다. 셋째는 내앞 운천종가 종손 김국형(金國衡)이며 넷째는 경주양동 무첨당 후손으로 변정록(辨正錄)을 저술한 이소구(李韶久)이며 부인이 이사호(李似鎬)로 〈생조감구가〉 가사를 지어 친정 아버지
운포 이중린의 의병활동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다섯째는 연안이씨 이병성(李炳星)이며, 여섯째는 풍기 금계 종손 황병하(黃秉夏)이며, 일곱째는 영주 줄포의 정의섭(丁儀燮)이며, 여덟째는 창원황씨 황달흠(黃達欽)이다.
운포 이중린선생 서세후 행적은 90년동안 묻혀 있었는데 계명대학교 장인진 박사에 의해 우연히 발굴된 〈생조감구가〉에 의하여 선생의 의병활동이 세상에 드러나 2007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으나 당시 의병활동으로 멸실된
용계고택(龍溪古宅)은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 복원하지 못하여 후손들의 한이 가슴에 맺혀있다.
나라가 위난에 처했을때 분연이 떨쳐 일어나 가산을 탕진하여 구국 의병활동에 몸바쳐 일제에 맞서 싸운 선인들의
나라사랑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서도 용계고택의 복원은 민족정기의 회복차원에서 정부에서 최우선으로 추진해야 할 현충사업이라 생각된다.현재 용계고택의 대를 이은 안산대학 이필상교수가 침천정 3대에 걸친 애국 애민정신과 구국 의병활동을 널리 알리고 멸실된 용계고택의 옛 영광을 되찾기 위하여 많은 애를 쓰고 있다.
<입산가(入山歌)>/운포 이중린작 (1394字)
어허 내 身命 고이하고/ 어허! 이 내 신세 괴이하고
이 세상이 왠 세상인고/ 이 세상이 어찌된 세상인가!
청춘시절 먹은 마음/ 청춘에 먹은 마음
致君澤民 하잣더니/ 임금을 도와 백성에 은택을 끼치고자 하였더니
八字가 奇窮하여/ 팔자가 사납고 어려워
白首無成 가이없네/ 늙어서도 이룬것이 하나도 없구나
共工氏가 있었는가/ 옛날 전설의 신 공공씨가 있었던가
不周山이 부러졋네/ 불주산을 머리로 박아 하늘이 무너졌구나
女媧씨가 없었으니/ 하늘을 떠받치던 여와씨가 없었으니
鍊石補天 누가 할꼬/ 무너진 하늘을 누가 돌을 쌓아 고칠 것인가
身世도 이러하고/ 이 몸 신세도 이리 어렵고
세상도 저러 한데/ 세상도 저리 망했는데
窮山第屋 혼자 앉아/ 궁벽한 산속 집에 혼자 앉았으니
萬念이 塗灰로다/ 일만가지 생각이 잿빛으로 물들이네
烟竹을 빗겨물고/ 담뱃대를 비스듬이 물고
창문을 밀쳐보니/ 창문을 밀쳐 밖을 보니
洪水는 滔天하여/ 홍수(외세)는 걷잡을 수 없이 하늘에 넘쳐나서
陸沉乾坤 되어있고/ 하늘과 땅은 모두 적에게 빼앗겻네
夜色은 沈沈하여/ 밤 기운은 어둡게 가라앉아
長夜乾坤 되어있고/ 온 세상이 긴나긴 밤이 되었구나
風塵은 淫亂하고/ 티끌 세상은 욕심이 난무하고
雲霧는 아득한데/ 구름과 안개는 사람의 눈을 가려 아득한데
앞뒤 산 구미호는/ 앞 뒤산의 교활한 여우(러시아,일본)는
어지러이 지져귀고/ 어지럽게 지저귀고
좌우편 도깨비는/ 좌우에 망나니 짓하는 신료들은
제 세상을 만났구나/ 제 세상을 만났구나
心事가 愁亂하여/ 마음은 근심으로 어지러워
진정하기 어렵구나/ 진정하기 어렵구나
태평세계 어디메요/ 태평한 세상이 어느곳에 있는가
아무려나 찾아갈가/ 아무려나 찾아가 보자
金銀花杖 손에 잡고/ 아끼던 지팡이 손에 잡고
芒鞋를 들멘 후에/ 성근 짚신 둘러멘 후에
四面을 살펴보니/ 사방을 살펴보니
갈곳이 전혀없다/ 갈곳이 전혀없다
箕山潁水 어디메요/ 중국의 기산과 영수는 어디인가
巢父許由 찾아갈가/ 은둔하여 숨어산 소부와 허유를 찾아갈까
薪野渭濱 어디메요/ 이름난 재상이 살던 신야와 위수는 어디인가
伊尹呂尙 찾아갈가/ 은나라 이윤과 주나라 여상을 찾아갈까
동해바다 어디메요/ 동해바다 어디인가
魯仲連을 찾아갈가/ 전국시대 부귀공명도 마다한 노중련을 찾아갈까
西山이 어디메요/ 서산이 어디인가
伯夷叔齊 찾아갈가/ 군주에 충성바친 백이숙제 찾아갈까
商山이 이디메요/ 상산이 어디인가
四皓를 찾아갈가/ 진시왕의 난리 피해간 네 노인을 찾아갈까
富春山이 어디메요/ 부춘산이 어디인가
嚴子陵을 찾아갈가/ 동한시대 광무제의 친구 엄자릉을 찾아갈까
臥龍岡이 어디메요/ 와룡강이 어디인가
諸葛孔明 찾아갈가/ 삼국시대 촉한의 전략가 제갈공명 찾아갈까
武陵桃源 어디메요/ 무릉도원이 어디인가
魚舟子를 찾아갈가/ 동진시대 별천지를 찾아간 어부를 찾아갈까
栗里村이 어디메요/ 율리촌이 어디인가
陶淵明을 찾아갈가/ 진나라 벼슬 버리고 돌아온 도연명을 찾아갈까
아서라 못가것네/ 아서라 못가겠네
中原이 멀고 멀어/ 중국땅은 멀고 멀어
가까운 조선땅을/ 가까운 조선땅에
역역히 헤어보세/ 지난 자취 뚜렷하게 헤아려 보자
杜門洞을 가자하니/ 고려가 망하고 개풍군 두문동을 가자하니
七十二賢 간데 없고/ 충절을 지킨 72현 간데없고
雉嶽山을 가자하니/ 원주 치악산을 가자하니
元耘谷이 간데 없고/ 지조를 지킨 원천석이 간데 없고
金烏山을 가자하니/ 구미 금오산을 가자하니
吉冶隱을 뵈올손가/ 불사이군 충절의 길재선생 뵈올수 있을까
頭流山을 가자하니/ 함양의 두류산을 가자하니
鄭桐溪를 뵈올손가/ 병자호란때 순절한 정온선생을 뵈올수 있을까
靑鶴洞 牛腹洞은/ 난리도 피해가는 청학동 우복동은
갈기죄 아득하고/ 갈기져서 아득하고
金剛山 太白山은/ 강원도 금강산 경상도 태백산은
이름이 너무나고/ 이름이 너무나 유명하고
淸凉山 小白山은/ 봉화 청량산 영주 소백산은
巖石이 險惡하니/ 바위가 험악하니
茫茫한 天地間에/ 넓고도 아득한 이 천지간에
어디메로 가잔말고/ 어느 곳으로 가잔 말인가
書冊을 끌어안고/ 서책을 끌어 안고
舊日衣服 떨떠리고/ 지난날 입던 옷을 자랑삼아 걸쳐입고
門前에 주저거려/ 문전에서 어디갈까 머뭇거려
指向이 없었더니/ 지정한 곳이 없었더니
우연히 들은 말이/ 우연히 들은 말로
家近處 天技山이/ 집 근처 천기산(풍기 천부산)이
萬丈高峯 높이솟아/ 만길 봉우리 높이 솟아있어
塵世가 隔絶하고/ 티끌세상과는 사이떠 끊겨있고
土山이 有德하야/ 흙 산으로 땅기운이 후덕하니
泉甘而土肥로다/ 물맛도 좋고 땅이 기름질 것이로다
하늘도 조선 하늘/ 하늘도 조선하늘
日月도 조선 일월/ 해와 달도 조선 일월
草木도 조선 초목/ 산천초목도 조선초목
雲霞도 조선 운하/ 구름과 노을도 조선의 운하로다
四面을 살펴봐도/ 사면을 살펴 보아도
옛날 조선 완연하다/ 옛날 조선이 완연하다
大韓國이 어디메며/ 대한조선이 어디메이며
日本國이 무엇인고/ 일본나라 무엇인고
중대가리 안볼게요/ 일본사람 중대머리와
검은옷도 안볼게요/ 보기싫은 검은옷도 안볼게요
日進黨도 안볼게요/ 일본 앞잡이 어용단체 일진당도 안볼게요
淨土宗도 안볼게요/ 일본 불교 정토종도 안볼게요
諺文訓令 안볼게요/ 일본놈 지시 공문 훈령도 보기싫고
開和말도 없을게라/ 일본말이 섞인 개화말도 보기싫다.
別有天地非人間이/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별천지가
알것이 여기로다/ 알만한 곳이 여기로다
天神이 외회던가/ 하늘이 아껴서 품으신가
祖上이 도우신가/ 조상이 돌보신가
渾濁世界 내버리고/ 혼탁한 세상 내버리고
그리로 가자하니/ 그리로 가자하니
親舊와 집안사람/ 친구들과 집안사람은
내 心事 모르면서/ 이내 심사도 모르면서
目前에 어렵다고/ 눈앞이 우선 어렵다고
말리지 너무마오/ 말리지 너무마소
土室이 朴陋하여/ 토굴이 소박하고 누추하여
容身하기 어려워도/ 내 몸 붙이고 살아가기 어려워도
倭세상 高臺廣室/ 왜놈 세상 높은 마루와 넓은 방은
내 이제 부럽잔코/ 내 이제는 부럽지 아니하고
메조밥 나물국이/ 메 조밥에 나물국이라도
草薄하여 못견디도/ 거칠고 싱거워 못견뎌도
倭世上 膏粱珍味/ 왜놈세상 고기와 맛있는 음식
내 이제 부럽잔코/ 내 이제는 부럽지 아니하고
바람이 세드라도/ 바람이 세차더라도
倭바람에 더할손가/ 왜놈바람 더할손가
三綱이 없었으니/ 인륜도덕이 없었으니
四維가 있겠는가/ 인의예지가 있겠는가
賣國하는 역적놈들/ 나라팔아 먹은 역적놈들
倭놈 氣勢 빌어써서/ 왜놈의 세력을 빌어써서
人君도 威脅하고/ 임금도 위협하고
百姓도 위협하여/ 백성도 위협하여
衣冠文物 좋은나라/ 예의문물 좋은나라
倭놈에게 쓸어바쳐/ 왜놈에게 쓸어바쳐
戶籍도 왜국호적/ 호적도 왜놈 호적
짐수도 왜국짐수/ 분부도 왜국 분부
一號一令 倭分付라/ 명령도 하나하나 왜놈의 지시구나
우리임군 계시든가/ 우리 임금 계시든가
아니꼬와 아나꼬와/ 아니꼽고 아니꼬와
胃腸통이 아니꼬와/ 위장통이 아니꼬와
터졌구나 터졌구나/ 터졌구나 터졌구나
쓸개통이 터졌구나/ 쓸개통이 터졌구나
불행이 오래살아/ 불행하게 오래살아
이런꼴을 어찌볼고/ 이런꼴을 어찌볼고
用武之地 없었으니/ 군사를 쓸곳도 없으니
英雄도 쓸데없고/ 영웅도 쓸데없고
세상을 못발쿠면/ 세상을 바로잡지 못하면
죽는 것이 올컨마는/ 죽는 것이 옳지마는
自刎而死 하자하니/ 스스로 목을 찔러 죽자하니
義理에 적당잖고/ 의리에 맞지 않고
남과같이 살자하니/ 남과같이 살자하니
生不如死 아니던가/ 살아도 죽은사람 아니던가
그런소문 그런꼴을/ 그런소문 그런꼴을
듣기싫코 보기싫어/ 듣기싫코 보기싫어
가자서라 가자서라/ 가자서라 가자서라
떨떠리고 나는 가네/ 홀가분하게 나는가네
찾아가자 찾아가자/ 찾아가자 찾아가자
別乾坤을 찾아가자/ 딴 세상을 찾아가자
아들과 손자놈과/ 아들과 손자놈과
村秀課童 願從者를/ 시골에 빼난 인재와 따르고자 하는 자를
앞세우고 뒤세우고/ 앞세우고 뒤세우고
行裝을 차릴적에/ 떠나갈 채비를 차릴적에
書冊과 文房四友/ 서책과 종이,붓,벼루,먹 네가지와
지게 낫 겸해가자/ 땔감 할 지게와 낫도 준비해 가자
晝耕夜兼治하여/ 낮에는 농사짓고 밤에는 마음 다스려
工夫를 씨긴 후에/ 공부를 시킨 후에
忘世間之 甲子하고/ 세간에 흐르는 세월 모두 잊고
超人間之 是非하야/ 인간세상 옳고 그름을 벗어나서
窓前에 기로초는/ 문앞에 오래된 풀은
호미로 매여내고/ 호미로 매여내고
隴上에 多白雲은/ 언덕위에 흰구름은
소부로 갈아눞여/ 쟁기로 갈아눞여
藥草靈芝 심은후에/ 약초와 영지를 심은후에
壽民丹을 꼬와내니/ 백성들을 위한 선약을 꼬와내니
無猿氏之 民일런가/ 중국고대의 무원씨 사람인가
葛天氏之 民일런가/ 태평성대의 갈천씨 사람인가
日出雲中 鷄犬喧하고/ 구름사이로 해가뜨면 개 닭이 짖고
月明松下 旁櫳静할제/ 달밝은 밤 소나무아래 사방이 고요하면
時時로 學童불러/ 때때로 학동들을 불러
聖經賢傳 講論하고/ 성현의 경전과 현인의 글을 강론하고
先王때 좋은풍속/ 옛날 훌륭한 임금때 좋은풍속
이야기로 일러 듣겨/ 이야기로 말해 듣겨
時俗에 두드잔코/ 시속에 뜻을 두지 않고
修身德行 씨긴 후에/ 몸을 닦고 덕행을 시킨후에
洪水가 물러가고/ 홍수(외세)가 물러가고
漆夜가 다시밝아/ 어두운 밤 다시 밝아
禮義之俗 되온후에/ 예의 풍속이 되돌아온 후에
果於忘世 너무말고/ 진정코 잊은 세상 너무오래 말고
데리고 내려와서/ 데리고 내려와서
太平世界 살아볼가/ 태평한 세상에 살아볼까
庚戌(1910) 三月 謄書 (숭정기원후 5병오년 계추)
위의 기록으로 보아 1906년(숭정기원후 5병오년) 늦가을에 작자가 가사를 지은 것으로 추정되며 헌(憲)자 수결을 한 것으로 보아 1910년 3월에 오미동의 외손자(金鼎燮의 아들) 김헌재(金憲在)가 베껴쓴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논문 《운포 이중린의 척사정신과 의병항쟁》 계명대 장인진 박사, 자료제공 이동수 안동문화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