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두 차의 특성이 비슷할 거라 생각했다. 시승 전 훑어 본 제원표의 수치가 엇비슷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 차의 장단점은 의외로 뚜렷했다. 이번 비교시승의 승자는 그랜저다. 생각해보면 당연하다. 그랜저는 갓 나온 신차지만 ES는 데뷔 5년차니까. 전체적인 완성도는 그랜저가, 하이브리드 시스템의 완성도는 렉서스가 앞섰다.
렉서스 입장에서는 조금 불편할 수도 있다. 그랜저와 ES가 라이벌이라니. 둘 사이의 브랜드 격차도 무시 못 하지만 그랜저는 3,000만원대, ES는 5,000만원대로 가격 차이도 적지 않다. 하지만 하나씩 뜯어보면 이 둘은 라이벌이 되기에 충분하다. 먼저 기계적인 측면에서 이 둘은 쌍둥이라 할 만큼 똑같다. 전륜구동 하이브리드 준대형 세단이라는 컨셉트는 물론, 차체 사이즈마저 거의 비슷하다. 또한 두 모델 모두 각 브랜드의 간판급 스타다. 그랜저는 사실상 현대의 플래그십 모델이고 ES 300h는 국내에서 렉서스의 실적을 이끄는 견인차 역할을 하고 있다.
젊고 스포티한 그랜저와 균형미가 넘치는 ES 그랜저는 굉장히 젊은 인상이다. 구매층의 연령이 갈수록 낮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보행자 안전규정을 고려한 범퍼 디자인은 파팅 라인을 앞쪽으로 당겨놓아 보닛이 길어 보인다. 그릴과 엠블럼의 위치도 낮아지며 시선을 아래쪽으로 이끌어 공격적인 인상이지만 범퍼 상단이 두툼한 탓에 오버행이 길게 느껴져 균형미가 부족한 원인이 되었다. 측면과 후면은 그랜저 고유의 맛이 살아 있다. C필러의 쿼터글라스와 봉긋 솟아오른 측면 캐릭터 라인, 양쪽을 길게 이은 그랜저 고유의 테일램프는 선대 그랜저로부터 물려받은 것.
한편 2년 전 부분변경을 거친 렉서스의 외관은 한결 세련되게 다듬어졌다. 코주부 같던 스핀들그릴을 가다듬고 헤드램프 크기를 줄이며 전에 없던 균형미를 만들었다. 외관에서만큼은 길게 고민할 것 없이 렉서스의 판정승이다.
실내에서는 각자 다른 방식의 고급스러움을 뽐내고 있다. 먼저 그랜저는 화려함보다는 소재와 질감에서 렉서스를 앞선다. 크러시 패드와 플라스틱 소재의 질감까지 손이 닿는 곳곳마다 촉촉한 감촉이고 변속기 앞쪽 수납함 덮개의 작동감마저 솜사탕 녹듯 부드럽게 여닫힌다. 논란의 대상이 된 모니터와 시계 역시 시각적으로는 불편할지언정 구조가 견고해 마음이 놓인다. 고급차에 유행처럼 적용된 이런 돌출형 모니터는 자칫 잡소리가 나기 쉬운 구조다. 하지만 그랜저는 단단한 플라스틱 소재를 짜임새 있게 만들어 잡소리의 원인을 없앴다.
한편 렉서스의 실내는 시각적인 화려함으로 분위기를 이끈다. 밝은 색상의 인테리어 컬러와 나무장식이 먼저 눈을 사로잡는다. 꼼꼼하게 만든 크러시 패드 각 부분의 품질감도 만족스럽지만 조작감이 거친 기어 변속레버와 비교적 딱딱한 플라스틱 소재가 많은 점은 아쉽다. 일장일단이 있는 운전석공간은 무승부.
차이를 보이는 것은 뒷좌석과 트렁크공간이다. 뒷좌석은 두 차 모두 광활하지만 그랜저의 무릎공간이 반 뼘 정도 더 넓다. 트렁크공간 또한 그랜저가 더 넓고 쓸모 있다. 2열 좌석 뒤에 배터리를 배치한 렉서스와 달리 트렁크 바닥에 낮게 깔았다. 그랜저의 트렁크용량은 426L, ES 300h는 414L로 10L 차이에 불과하지만 온전한 모양의 트렁크를 갖춘 그랜저가 활용성에서 앞선다. 사실 준대형차에 골프백 네 개를 실을 수 있고 없고의 차이는 이 차를 구입하는 주고객들에겐 매우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그랜저의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다. 이번에는 그랜저의 승리다.
전기차 같은 그랜저, 화끈하게 달리는 렉서스 파워트레인의 구성은 비슷하다. 하지만 결과는 달랐다. 엔진의 구성과 출력은 거의 같지만 모터 출력이 크게 차이나기 때문이다. 그랜저와 렉서스는 각각 158마력과 159마력의 밀러 사이클 엔진을 얹었다. 여기에 그랜저는 50마력 전기모터를, 렉서스는 141마력 전기모터를 조합했다. 렉서스의 시스템출력은 203마력이고, 현대는 시스템출력을 따로 밝히지 않았다.
그랜저(IG)의 배터리 용량은 1.76㎾, ES300h의 배터리 용량은 1.6kwh다. 그랜저는 EV 모드가 따로 없다. 하지만 저속에서 수시로 엔진이 개입하던 렉서스와 달리 전기 모터로만 주행하는 시간이 상대적으로 많았다. 그랜저에서는 4기통 엔진 특유의 진동을 찾을 수 없다. 모터를 역방향으로 회전시켜 엔진의 진동을 잡았다는 설명이다. 엔진이 켜지고 꺼지는 느낌이 굉장히 억제되어 있기 때문에 전기차로 착각할 정도다. 바퀴에서 비롯된 소음도 거의 없다. 3겹 도어 실링과 앞뒤 창문에 이중차음유리를 도입해 소음을 꼼꼼하게 틀어막은 것. 렉서스의 상징이었던 정숙성에서 오히려 그랜저가 앞섰다는 게 놀랍다.
고출력 모터를 쓴 렉서스는 잘 달리는 가솔린차의 감각이다. 엔진을 수시로 가동시켜 배터리를 충전하면서도 급가속이 필요할 땐 고출력 모터가 앞바퀴에 힘을 보태며 세차게 가속한다. 속도가 빨라질수록 가속력이 무뎌지던 그랜저와 달리 고속에서도 지치는 기색이 없다. 렉서스가 밝히고 있는 최고속도는 180km/h지만 실제로는 그보다 더 높다.
연비는 큰 차이 없다. 렉서스의 공인연비는 16.4km/L(구연비 기준), 그랜저의 연비는 16.2km/L(신연비 기준)다. 구연비가 신연비보다 더 후하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 실제 시승에서 나온 연비 역시 엇비슷했다. 데뷔 5년차 하이브리드 시스템과 갓 나온 신형 하이브리드 시스템의 연비가 비슷하다는 점은 토요타의 기술이 얼마나 앞섰는지 말해준다. 최근 출시한 일본계 하이브리드 준대형차 연비가 그랜저보다 월등히 나은 점을 생각하면 다음 세대 렉서스 ES 하이브리드의 연비도 기대해볼 만하다. 렉서스가 비슷한 연비로 더 나은 구동성능을 지녔다는 점에서 하이브리드 완성도에 있어서는 아직 렉서스가 한 걸음 더 앞서간다고 할 수 있겠다.
두 차의 몸무게 차이는 거의 없다. 하지만 운전시 느껴지는 중량감은 꽤 다르다. 그랜저가 보다 가벼운 몸놀림인 데 반해 렉서스는 실제 중량보다 더 무거운 차처럼 움직인다. 코너에서 꾹꾹 눌러가며 몰아붙이면 두 대 모두 잘 버텨주지만 이 차를 그렇게 몰 사람은 드물기 때문에 평가의 기준에서 제외했다. 준대형차 서스펜션 세팅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단연 승차감이다. 이 점에서는 그랜저의 압승이다. 말랑말랑하고 노면정보를 충실히 전달해 위화감이 없고 고속에서의 안정감도 높기 때문. 물론 렉서스도 나쁘지 않다. 어떤 상황에서도 유연하면서도 넉넉하게 받아주는 하체가 듬직하다.
결론, 상품성에서 앞서는 그랜저 이번 대결은 신인의 판정승이다. 5년 된 베테랑인 ES는 준대형차의 기준을 만들어왔다는 점에서 언제나 존경의 대상이었다. 조용한 실내와 고급 오디오, 넉넉하고 푸근한 승차감과 뛰어난 내구성은 전세계 모든 준대형 세단이 따라야 할 모범 답안이었다. 이에 도전하는 신인들은 많았다. 그랜저 역시 그 중 하나다. 신형 그랜저 하이브리드는 동력성능을 제외한 모든 수치에서 ES 300h를 조금씩 앞설 정도로 갈고 닦은 솜씨를 뽐냈다. 하지만 5년 먼저 데뷔한 ES 300h와 연비가 비슷하다는 점은 반드시 개선해야 할 문제다. ES는 낡은 티가 났다. 그랜저를 앞서는 유일한 장비는 마크레빈슨 오디오뿐. 능동형 조향보조 시스템이나 어댑티브 크루즈 컨트롤이 없는 것은 이 급 차에게는 적잖은 단점이다. 풀 모델 체인지를 1년여 앞둔 모델이니 다음 모델을 기대할 수밖에. 하지만 렉서스는 높은 신뢰성을 바탕으로 독일 프리미엄 브랜드차 사이에서도 꾸준한 인기를 얻어왔다. 렉서스의 그 가치만큼은 여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