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신작인 <인월(引月)>은 어떤 작품일까.
‘달을 끌어들인다’라는 이번 작품은 고려 말을 배경으로 한 시대 사극으로,
(일제시대 배경인 <광야>가 있긴 하지만) 돌고 돌아 드디어 김혜린이 한국의 옛 역사를 건드렸다 싶은 작품이다.
작가 본인은 그런 부분을 인식하진 못했다고 하지만 작품과 함께 북유럽에서 프랑스,
중국대륙과 만주 벌판을 내달렸던 독자들로서는 왠지 모르게 감개가 무량할 법도 한 대목이다.
‘인월’은, ‘날은 저물고 달은 뜨지 않아 더 이상 싸울 수 없게 되자 이성계가 달을 미리 뜨도록 끌어다 놓고 밤늦게까지
왜구가 하나도 안 남을 때까지 싸웠다’는,
요즘 식으로 치면 ‘장군님 축지법 쓰신다’ 식으로 통할 법한 황산대첩의 약간 과장된 전설에서 유래한 표현이다(비슷한 것으로 이성계가 바람을 끌고 다니며 싸웠다는 ‘인풍’도 있다.
둘 다 현재까지 지명으로 남았음).
김혜린은 이 단어를 고려 말 청춘극장풍으로 그릴 작품의 제목으로 붙여 ‘무모한 이야기’, ‘불가능한 꿈’ 같은 인상을 담아냈다. 예쁘고 짧으면서도 꿈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한 이 작품에 어울린다 여겼기 때문이라고.
구상은 이미 오래 전에 시작했다는 이번 작품에 관해 김혜린은 “이미 끝냈어야 하는 건데 이제 시작을 하고 있다”라면서 출판사(허브)를 많이 애 먹였다고 고백한다. 연재는 씨네21의 만화잡지 《팝툰》에서 진행하며 내년 3월경 단행본 1권을 발행할 예정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팝툰》은 10월호를 김혜린 특집호로 꾸며 뒷면을 광고 대신 <인월> 표지를 넣는 특별 편집을 예정하고 있기도 하다.
자료에 따르면 이번 작품은 고려 말인 1370년경에서 조선 개국시점인 1392년 무렵까지를 이야기의 시간배경으로,
남서해안 일대와 남원부, 개경 등지를 공간 배경으로 삼고 있다. 왕조 말기의 어지러운 사회상과 거듭되는 왜구들의 침탈,
신진 사대부들의 개혁 의지 등이 뒤얽힌 가운데 각자 다른 신분과 환경을 가진 젊은이들의 사랑과 갈등,
희망과 절망 등을 다룰 예정이라고 한다.
분량은 4권 가량이 될 것이라고 하니 김혜린 표 대하 서사에 목말랐던 이들이라면 기대를 해 봐도 좋을 듯하다.
추리소설, 록음악과 국악을 오가는 다양한 취향이 창작의 바탕
김혜린의 작업실에는 여타 만화가들의 작업실과는 또 다르게 다양한 자료와 더불어 만화책들이 책장을 한가득 채우고 있었다. 책장에는 생각 이상으로 다양한 장르의 책이 꽂혀 있었다.
국내 여성 작가들의 작품은 말할 것도 없고 <소년탐정 김전일>과 <베르세르크>와 <크르노 크루세이드>,
<갤러리페이크>, <바람의 검심>, <후르츠 바스켓>과 <이누야샤>가 사이좋게 어울리고 있는 책장을 보고 있노라니
대하 서사물, 시대극, 여성 만화의 대가라는 인상으로만 생각했던 것이 부끄러워졌다.
이뿐만이 아니라 김혜린은 “홈즈 전집, 작은 건 (집에) 있는데 애장판 전집이 나왔더라고요.
사서 모셔놓나 어쩌나~”라면서 들떠 하는 추리소설 팬이자 헤비메탈에서 하드록,
가요에서 국악, 트로트까지 종횡무진 오가는 음악 취향까지 지니고 있다.
“요즘은 체력이 달려서 콘서트는 못 가요. 스탠딩할 자신이 없어요. 다음날 다다음날까지 후환이 두려워서….
그래도 지금도 기타리프 들으면 우오오~하는데”라는 모습을 보면 문화 장르를 마음 가는대로 즐길 줄 아는 향유자였다.
그것도 엄청난 잡식. <아라크노아>의 기타맨 블라디미르가 어디에서 나왔는지 새삼 실감이 되는 대목이었다.
마지막으로, 워낙 오랜만에 작품을 들고 돌아오는 작가인지라 목을 빼고 기다리고 있을 독자들에게 복귀 소감을 겸해
한 말씀 전하길 청했다. 다른 누구보다 김혜린이기에 인사말 한 마디가 더 의미가 있을 듯하다.
“오랫동안 인사 못 드려서 죄송스럽습니다. 일단 독자들에게 좀 미안한 마음이 있어요.
제 스스로한테도. 왜냐면 제가 만화라는 걸 통해서 그 분들하고 소통하고 있는 셈이니까요.
소통할 수 있는 걸 제가 내 드리지 못한 그런 데에 관한 아쉬움은 있죠.
활동을 하건 안 하건 제가 만화가인건 사실이니까. 앞으로도 그럴 거고.
지금 신작의 행로에 관해선 정확하게 말은 못하겠어요.
연재 건은 말할 수 있겠지만, 구체적인 부분은 아직 확정짓지 못한 부분도 없진 않아요.
그래서 작품이 자꾸 미뤄진 것도 있고.
하지만 전 앞으로 만화가겠죠. 입에 발린 소리로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은 아직 못하겠지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