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녘의 상현달' 수월 스님
<수월스님 진영>
천수다라니 외며 나무하고 물 긷고…노동하는 수행자'
근세불교의 고승인 수월(水月)의 법명은 음관(音觀)이다. 그는 1855년 충청남도 홍성군 구항면 신곡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성씨가 전(全) 또는 전(田)씨라는 설이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수월은 어려서 부모를 잃은 뒤 남의 집에서 머슴살이를 하면서 자랐다. 그는 성품이 단순하고 맑았으며, 모든 살아있는 것들을 자기 몸처럼 여겨 비록 모기나 빈대 같은 벌레라도 함부로 괴롭히거나 죽이지 않았다고 한다.
어느 탁발승이 전해준 수행 이야기를 듣고 깊이 감명 받은 수월은 1883년 늦가을 나이 서른이 다되어 출가하기 위해 서산군 연암산 중턱에 있는 천장암(天藏庵)을 찾아갔다.
당시 천장암에는 한국 근대 선풍의 중흥조 경허(鏡虛)선사의 친형인 태허(太虛) 성원(性圓) 스님이 홀어머니 박씨를 모시고 주지로 있었다. 이곳에서 수월은 행자로서 나무꾼 생활을 했다.
그가 천장암에 온 지 1년이 되던 어느 날 14살의 어린 동자가 수행자가 되겠다며 천장암을 찾아왔는데, 이 동자가 바로 계룡산 동학사에서 경허를 만난 인연으로 훗날 큰 선지식이 된 만공(滿空)이었다.
만공은 그해 사미계를 받고 밥 짓는 공양주가 되어 여러 해를 지냈다. 또한 훗날 ‘천진도인(天眞道人)’으로 이름난 혜월(慧月)도 그 무렵 천장암을 찾아와 밭일을 하면서 수심결(修心訣)을 공부했다. 당시 수월은 특히 ‘천수경(千手經)’을 좋아해서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항상 외웠다.
1887년 겨울 어느 날, 수월이 절 아래 있는 물레방앗간에 내려가 방아를 찧고 있었다. 그날도 수월은 천수다라니를 지극 정성으로 외우며 일을 했다. 밤늦게 절로 돌아오던 태허가 물레방앗간 앞을 지나다 돌확 속에 머리를 박고 아기처럼 잠들어 있는 수월을 발견하고 급히 끌어냈다.
그 순간 방앗공이는 다시 ‘쿵 쿵’ 소리를 내며 방아를 찧기 시작했다. 이때 그의 순전한 수행력을 인정한 태허는 다음날 법명과 사미계를 내려 정식으로 출가를 인정했고 경허를 법사로 정해주었다. 이후 수월은 스승 경허가 일러준 대로 종일 일하면서 죽기 살기로 천수대비주를 외웠다.
그 해 수월은 용맹정진을 했는데, 이레째 되는 밤 몸에서 불기둥이 뿜어져 나왔다고 한다. 이처럼 방광(放光)을 체험한 수월은 세 가지 특별한 힘을 얻었는데, 한번 보거나 들은 것은 결코 잊어버리지 않는 불망념지(不妄念智)를 얻었고, 잠이 없어져 버렸으며, 앓는 사람의 병을 고쳐줄 수 있는 힘을 얻었다고 전한다.
이후 그는 보임공부를 위해 천장암을 떠나 금강산 유점사에서 신분을 숨긴채 여전히 땔나무를 해 나르며 한 철을 지냈으며, 1891년 무렵에는 경허, 제산 등과 호서지방을 돌면서 함께 수행했다.
1892년경 금강산 마하연사를 찾은 수월은 그의 얼굴을 알고 있던 스님들에 의해 선방의 조실(祖室)로 모셔졌지만, 여전히 낮에는 산에 들어가 나무하고, 밤에는 절구통처럼 앉아서 온밤을 밝히고 스스로의 정진에 몰두하며 말없는 가르침을 내렸을 뿐이었다.
1896년 정월 수월은 지리산 감로동천에 있는 천은사(泉隱寺) 상선암(上禪庵)과 우번대(牛?臺)에서 지냈다. 이곳에서도 밤새 삼매에 든 수월의 몸에서 다시 빛줄기가 터져 나왔는데, 어찌나 크고 강렬했던지 천은사에 살던 대중들뿐만 아니라 아랫마을 사람들까지도 몰려왔다고 한다.
이 일로 인해 수월의 신분이 밝혀졌고 천은사 대중들은 그를 상선암 조실로 모셨다. 얼마후 다시 방광이 일어나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자, 수월은 이적에만 마음을 빼앗기는 세태를 염려하여 지리산을 떠났다. 이후 10여 년 동안 수월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이 기간 동안 수월이 충남 청양군에 있는 칠갑산 장곡사(長谷寺)에서 만공과 더불어 1년 정도 보임공부에 열중했다는 소문이 있을 따름이다.
1907년 수월은 오대산 상원사에서 반년을 지내다가, 묘향산 중비로암에 들어가 3년동안 머물렀다.
그 후 그는 1910년경 강계군에 있는 자북사(子北寺) 등지에 머물면서 스승인 경허의 행방을 애타게 찾아다녔다. 결국 수월은 갑산군 도하리에서 박난주라는 이름으로 신분을 감춘 채 훈장 노릇을 하던 스승 경허를 찾았다.
그러나 방 안에서 문고리를 잡고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오.”라고 매정하게 말하며 끝내 만나주지 않는 스승에게, 수월은 짚신 몇 켤레를 정성껏 삼아 올리고 절을 한 다음 돌아섰다는 일화가 전한다.
그 뒤 수월은 스승이 열반에 들 때까지 2년 동안 갑산에서 가까운 회령군 팔을면 백천사, 경원군 만월산 월명사, 명천군 칠보산 개심사 등지에서 정진하면서 지냈다. 이곳에 머물고 있을 때도 수월은 언제나 한결같은 모습으로 나무하고 물긷는 일만 했으며, 가끔씩 두만강 강가에 앉아 며칠동안 대비주삼매에 들곤 했다.
1912년 경허가 열반에 든 소식을 당시 수덕사 정혜선원에서 정진하던 만공에게 알려준 수월은 두만강을 넘어 간도(間島)로 들어갔다. 그는 백두산 기슭에 있는 도문시 회막동에서 일반인의 모습으로 3년동안 소먹이 일꾼 노릇을 했다.
이때 수월은 자기가 받는 품삯으로 밤을 새워 짚신을 삼고, 낮에는 소치는 짬짬이 틈을 내어 큰 솥에 밥을 지어 주먹밥을 만들었다. 그는 일제의 탐학을 피해 고향을 떠나 살 곳을 찾아 간도로 건너오는 동포들을 먹이고 입히기 위해 길가 바위 위에 주먹밥을 쌓아 놓고 나뭇가지에 짚신을 매달아 놓았다. 자신의 얼굴과 이름을 알리지 않는 무주상보시를 베풀며 보살행을 묵묵히 실천한 것이다. 수월은 1915년 회막동을 떠나 만주와 러시아 국경지대에 있는 흑룡강성의 수분하(綏芬河)로 들어갔다. 그는 관음사(觀音寺)라는 작은 절에서 신분을 감춘채 어떤 젊은 스님에게 온갖 욕설과 행패를 당하면서도 6년간 보임공부에 열중했다고 한다.
1921년 봄 수월은 왕청현 나자구(羅在溝)에 들어가 동포들이 지어준 화엄사(華嚴寺)라는 작은 절에서 여생을 보냈다.
이곳에서도 그는 누더기를 걸치고 날이 밝으면 종일 들이나 산에 나가 늘 말없이 일했고, 탁발을 자주 다녔으며, 생식을 했고, 잠을 자지 않았으며, 산짐승과 날짐승과 어울려 놀거나 때때로 호랑이를 데리고 다녔다고 한다. 그리고 여전히 그는 아픈 사람들을 고쳐주었고, 산이나 들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손수 밥을 지어 날라 주었다.
한편 수월이 화엄사에 머무는 동안 그를 만나려고 먼 길을 걸어오는 조선 스님들의 발길이 끊일 날이 없었다. 금오, 효봉, 청담 등이 수월을 찾아와 몇달 혹은 1년 동안 함께 지내면서 그의 ‘말없는 가르침’을 배워갔다. .
1928년 하안거를 마친 다음날인 음력 7월 16일 수월은 절 뒤편 송림산에 흐르는 개울물에 깨끗이 몸을 씻고 머리 위에는 잘 접어서 갠 바지저고리와 새로 삼은 짚신 한 켤레를 가지런히 올려놓고 맨 몸으로 단정히 결가부좌한 자세로 세상을 떠났다. 세수 74세, 법랍 45세였다.
그가 세상을 떠난후 7일 동안 밤마다 송림산에 불기둥이 치솟는 대방광이 일어났고, 산짐승과 날짐승이 떼를 지어 울었다고 한다. 그가 세상을 떠난 5일후 다비식을 거행했다.
나그네들에게 짚신을 삼아주고 주먹밥을 해 주며 무주상보시를 베풀었던 ‘북녘의 상현달’ 수월과 아이같은 천진불로 유명했던 ‘남녘의 하현달’ 혜월, 그리고 호방한 선풍을 진작시킨 풍류객이었던 ‘중천의 보름달’ 만공은 흔히 ‘경허의 세 달(月)’로 불릴 정도로 경허의 제자들 가운데 특히 뛰어난 제자로 인정받았다.
현재 수덕사 위쪽에 있는 작은 암자인 금선대에는 경허, 수월, 혜월, 만공의 진영이 모셔져 있다. 수월은 한평생 나무하고 불이나 때는 불목하니 같은 스님이었고, 글과는 담을 쌓고 살다간 ‘까막눈 선사’였다.
그러나 그는 일상의 노동을 철저한 수행의 방편으로 삼아 평생을 ‘끊임없이 일하는 수행자’로 살면서 뛰어난 수행력과 함께 때때로 나툰 방광불사(放光佛事)로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킨 한국불교사의 전설적인 대선지식이다. 또한 수월은 삶의 터전인 고향을 떠나야 했던 이 땅의 한 많은 백성들을 위해 손수 주먹밥을 만들어 주고 짚신을 삼아주는 무주상보시를 한량없이 베풀었던 ‘자비의 관세음보살’이며, 이름 그대로 ‘물속의 달’처럼 흔적 없는 바람같이 살다간 숨은 성자였다.
김 탁〈철학박사〉
출처 : 불교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