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중구가 출범한 1968년을 기준으로 1960~70년대 인천 중구와 관련된 생활사를 볼 수 있는 전시관이다.
전시관은 연면적 761.84㎡로 지하 1층과 지상 2층 규모이며
지하 1층에는 중구 출범 후부터 현재까지의 중구의 모습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연표가 전시되어 있다.
지상 1층에는 1960~70년대 중구의 의 · 식 · 주 문화를 볼 수 있으며 특색있는 음식과 문화상품을 판매하는 전문판매점이 있다.
2층에는 백항아리선술집, 극장, 은성다방과 같은 당시의 문화생활을 엿볼 수 있게 꾸며 놓았다. 60~70년대 인천 중구 생활사 전시관 입구 중구의 모습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연표 이발관 인천 중구의 결혼식장 주거문화
중구 지역 주택의 특성은 개항 후 인천의 중심답게 서양인 주택, 신흥 부유층의 기와집, 일제강점기 일본인이 살던 일본집
그리고 한국 서민들이 살던 전통 초가집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1930년대 지어진 붉은 벽돌 2층집, 유항렬 저택은 내동에 아직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주택 내부 모습 석유곤로와 솥단지 주택 내부의 싱크대 2층 전시관에서 내려다 본 1층의 모습 식생활 문화
1960년대에서 70년대에 이르는 시기
중구의 대표적인 음식점으로는 화선장을 비롯해 이화정, 오부자집, 국제경양식, 천미복집, 금화식당, 한양숯불갈비, 서라벌부대고기
답동관, 화신면옥, 강서면옥 그리고 일식집 미조리 등 대부분 신포동 일대에 있었다.
그 외에 신생동 춘천막국수, 동인천역전의 동춘식당 등도 꼽을 수 있다.
이들 중에는 근래까지 문을 열던 집들도 있다.
지금은 이들 모두 사라져 기억 속에만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러나 명성 있는 노포(老鋪)로서 경동의 설렁탕집 삼강옥이나 신흥동의 해장국집 평양옥, 신포동의 횟집 유래
사동의 족탕집 선미정, 신생동의 이조복집, 내동의 냉면집 경인면옥, 중앙동의 대성불고기, 중앙설렁탕, 해안동의 등대경양식
항동의 우정일식 그리고 중앙동이 서민 백반집 명월집, 신포동의 청실홍실, 양지부대고기, 미락 등은 오늘날까지도 영업을 하고 있다.
북성동 8부두 정문 앞 황성오징어찌개집도 성업 중이나 그 원조는 사동주유소 옆에 있었다.
인현동의 인현통닭도 뀨준히 성시를 이룬다.
보신탕집으로는 신포시장 골목 안 북청집이 소리없이 영업을 하고 있다. 중화요릿집 인천 개항과 더불어 중국인의 인천 진출을 통해 '인천은 청요리의 총 본산 격이 되었다. 인천사람은 한국에서 가장 먼저 배갈(白酒), 황주(黃酒) 같은 청국 술을 마시면서 해삼탕, 짜바케, 양장피 같은 색다른 청요리를 맛본 미식가가 되었다'는 기술처럼 인천시내, 특히 중구 전역에 이름난 중국 요릿집이 많았다.
중화요리 "해장국집은 터진개골목(신포동)과 답동 상밥집 거리 그리고 용동 술집 골목에 여러 집이 모여 있었는데 그대로 지금까지 남아 있는 집은 하나도 없다" 故신태범 박사의 증언인데 과거 인천에 해장국업소가 크게 번성했음을 알 수 있다. 그나마 신포동의 답동관이 인천 해장국의 전통을 이어 오다가 1980년대 초반 건물을 개축한 이후 경영난으로 문을 닫았다. 지금은 신흥동의 평양옥이 홀로 남아 구수한 옛 토장국 맛을 전하고 있다. 신흥전파사 경동의 동아라디오, 인천무선, 중앙동의 고려양행, 한미소리사, 내동의 음악사 드으로 모두 사라지고 이제는 추억 속에나 남아 있다. 1960년대 중후반까지만 해도 서민 가정에 TV의 보급이 낮아 주로 라디오가 전파 매체의 중심 역할을 했다. 주로 전파사라고 부르던 라디오 방은 거리에 스피커를 내놓고 음악을 틀거나 스포츠 중계를 내보내 행인의 발걸음을 붙잡기도 했다. 12월에 들면 라디오 방마다 온종일 크리스마스 캐롤을 틀어 놓아 시내는 온통 성탄 분위기에 설레기도 했다. 이어 1960년대를 거쳐 1970년대 흑백TV전성시대를, 1980년대 컬러TV전성시대에 이르는 동안 삼성전자, 금성전기(현 LG전자) 같은 대기업이 곳곳에 서비스센터를 열면서 소규모 개인 전파사는 사라지기 시작했지만 그 이전까지 중구에는 여러 전파사가 있었다. 경동의 동아라디오, 인천무선, 중앙동의 고려양행, 한미소리사, 내동의 음악사 드으로 모두 사라지고 이제는 추억 속에나 남아 있다. 극장식 주점 국일관
대형 극장식 주점이 생겨난 시기는 대략 1970년대 중후반이었을 것이다.
그 효시는 중구 항동6가 12번지, 인천우체국 옆에 있던 국일관 나이트클럽으로 생각되는데
대지 면적이 1,933㎡으로 상당히 큰 업소였다.
경영난으로 문을 닫고 설렁탕집을 거쳐 철거된 후 현재는 의류점이 들어서 있다. 관람 동선 2층으로 올라가는 곳 2층 전시관으로 올라가는 계단
서민주점 서민들이 하루의 피로를 풀면서 담소하는 자리가 주점일 것이다. 이 시절 중구 신포동 일대에 있었던 서민주점은 대표적으로 염염집, 오술해, 대전집, 충남집 돼지족과 스지탕으로 유명한 다복집, 전을 잘 부치던 마냥집, 약주 본산 신포주점, 대동강, 백항아리집 밴댕이 회를 주로 팔던 북성동 수원집 등등이었다. 백항아리집 지역원로는 "그 때 '백항아리집'으로 말하면 단순한 목로주점으로서 몇 평 되지 않는 구조인 까닭에 따로 술과 안주를 차려 놓는 탁자가 있는 것도 아니고 벽쪽으로 돌아가면서 선반이 걸려 있고 대개는 그 선반에 안주 한 두 접시와 술주전자가 놓여 각자 마실 수 있는 만큼 청해서 마시는 아주 싼 술집으로 신포동 일대를 배회하는 많은 술꾼들이 드나들던 집이었다"(문학평론가 김양수)고 회상한다. 극장
서민의 휴식처이자 주요한 유흥 무대인 영화관은 거의가 중구와 동구에 집결하다시피 했었다.
인천의 대표적인 영화관으로 100년 역사를 가진 애관극장을 위시해 동방극장, 키네마극장, 인영극장 등이 있었다.
1980년대 컬러TV시대에 들면서 경영난에 처해 동방극장, 키네마극장이 문을 닫았고
애관만이 시대에 맞춰 복합상영관으로 변신, 아직도 영사기를 돌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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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영화를 상영하고 있다. 금주의 상영작 포스터 은성다방 도시의 응접실 다방은 이제는 거의 쇠퇴해 사라지고 없다. 특히 중구 신포동, 용동, 내동, 인현동, 시청이 있던 시절의 관동, 중앙동에는 한 집 건너 다방이라고 할 정도로 많은 다방이 있었다. 생각나는 대로 적어도 은성다방, 짐다방, 별다방, 유토피아다방, 신포다방, 르네상스다방, 흙다방, 태양다방, 상록수다방 우봉다방, 삼미다방, 소월다방, 성지다방, 미담다방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현재 비교적 옛 시절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한 채 영업을 하고 있는 다방은 신포동의 국제다방과 경동의 학다방 정도이다. 은성다방 내부 그 무렵, 도심의 번화가였다고도 할 수 있는 중앙동 대로변의 한 모퉁이 일식집 2층에 자리잡은 이 다방은 한때 문화 예술인들의 휴식처이자 거점이었으며 또한 예술활동의 숨통을 터주는 장소로도 활용되어져 왔다. 무엇보다도 마땅한 전시 공간을 달리 구할 수 없던 당시에 화가들의 작품 발표가 여기서 치러지는 일이 많았다. 혹은 시낭송이나 시화전 장소로 혹은 창작집의 기념출판회나 각종 문화 예술 관계 집회 모임의 장으로 크게 배려되었던 황량한 시대의 문화 소통의 공간이자 카타르시스의 배출구이기도 했었다. * 차 한 잔으로 공허한 시간을 때우는 실업자 예술인들이 매일같이 본능적으로 찾아들어 환담을 교환하는 '만남의 터'였다 무엇엔가의 기다림 같은 것이 항상 짓누르는 무거운 분위기 가운데서 무위에 주눅 든 듯한 예술인들이 초현실적인 자세로 앉아 있는가 하면, 제법 활기 있게 움직이는 봉급생활자 무리도 끼어든다. 늘 틀어놓는 레코드판은 그런대로 격조 있는 클래식이다. 삐걱거리는 목조 계단을 걸어 올라가면 맞아주는 그 집 주인 속칭 마담 김윤희 김윤희에 대해 미술평론가 김인환은 "애교라고는 거의 없어 보이는 여성이지만 손님에게 긴장감을 조성하지는 않는다"라고 말한다. 이 다방은 1990년대 문을 닫았다. 벽에 걸려있는 그때 그 시절의 추억어린 레코드판 뮤직 박스가 있는 은성다방 내부인데 커피를 파는 것 같다. 은성다방에서 1층으로 내려가는 계단 인천 영웅들의 귀환 백옥자의 카퍼레이드 모습 문화사진관 모습 생활사 전시관과 대불호텔 |
첫댓글 "곤로 심지갈아요" 대단했지요. 1호선전철 노선도 오랜만에보니 반갑네요.
곻ㄹ목을누비던장사의걸쭉한 목솧리가 아직도 쟁쟁하네요.
아시아의마녀 백오자
감ㅅ가합니다
전시관을 둘러보니 지나간 옛 추억의 생각이 나더군요.
지금은 전부가 변해도 너무나도 많이 변해 버렸습니다.
그때 그시절
추억을 몽땅 불러왔네요
백옥자 선수는 지금쯤???
당시 아시아의 마녀 백옥자 선수 대단했지요. 완존 영웅이였죠.
아시안 게임에서 두 번씩이나 투포환에서 금메달을 거머쥐었지요.
51년생이니까 올해 67살이네요. 현재는 대한육상경기연맹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