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종의 적장남>
정식칭호 : 숙종현의광륜예성영렬장문헌무경명원효대왕
(肅宗顯義光倫睿聖英烈章文憲武敬明元孝大王)
자 명보(明譜). 휘 순(焞). 현종의 아들. 어머니는 명성왕후 김씨. 비는 김만기의 딸 인경왕후, 계비는 민유중의 딸 인현왕후(仁顯王后), 제2계비는 김주신의 딸 인원왕후(仁元王后). 1667년(현종 8) 왕세자에 책봉되고, 1674년 즉위하였다. 즉위한 이듬해 대흥산성을 완성하고 용강의 황룡산성을 수축하였다. 정치에 관심이 많았으나 당시 예론에 치우쳐 논쟁이 분분하였고, 당쟁이 심하여 서인과 남인(南人)의 파쟁이 그칠 날이 없었다. 그러나 왕은 숙원 장씨를 총애하여 1688년 소의로 승격시켰으며, 이듬해 장씨에게서 출생한 왕자의 명호를 정하고자 하였다.서인들이 이를 반대하자 송시열 ·김수항등을 유배하고 왕자의 명호를 정하였으며, 왕비 인현왕후를 폐위, 희빈으로 승격된 장씨를 1690년에 왕비로 책봉하였다.
그러나 인현왕후 폐위를 후회하던 왕은 폐비복위운동을 꾀하는 서인을 민암(閔耉) 등이 타도하려고 하자 1694년 남인을 추방하고 다시 서인을 등용시켜 폐비를 복위시켰다. 이어 장씨를 희빈으로 강등시키고, 1701년 무고죄(誣告罪)로 사사(賜死)하였다. 왕의 재위기간은 국내적으로 당쟁이 가장 치열했던 시기였으나 대외적인 전쟁이 없어 사회가 점차 안정기로 접어든 때로 선조 말 이후 계속된 대동법을 평안도 ·함경도를 제외한 전국에 실시하여 실효를 거두었으며, 임진왜란 ·병자호란 이후 계속된 토지사업을 추진하여 완결을 보았다.
또 주전(鑄餞)을 본격적으로 실시하여 상평통보를 주조, 중앙관청 및 지방관청 등에 통용하도록 하였다. 특히 폐한지(廢閑地)로 버려둔 압록강 주변의 무창(茂昌) ·자성(慈城)의 2진(鎭)을 개척하여 영토회복운동을 전개하였고, 1712년 함경감사 이선부(李善溥)로 하여금 백두산(白頭山) 정상에 정계비(定界碑)를 세우게 하여 국경선을 확정하였으며, 금위영을 추가로 설치하여 5영체제를 완결하였다. 또 재위기간에 《선원록(璿源錄)》 《대명집례(大明集禮)》 등이 간행되었고, 《대전속록(大典續錄)》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등이 편찬되었다. 능은 명릉(明陵)이다.
■부인
▶ 인경왕후(仁敬王后) 김씨[1661 ∼ 1680]
광주 김씨 광성부원군(光城府院君) 김만기(金萬基)의 딸이고, 어머니는 청주 한씨 유량의 딸이다.
1661년 9월 3일 회현방 사저에서 태어나 1670년(현종 11) 10세 때 세자빈으로 간택되어 의동별궁(義洞 別宮)에 들어갔고, 1671년 3월에 왕세자빈으로 책봉되었다.
1674년 현종이 죽고 숙종이 즉위하면서 왕비가 되었고, 1676년 정식으로 왕비에 책봉되었다.
1680년 10월에 천연두(天然痘: 痘患)의 증세가 보였는데, 이때 숙종도 천연두를 겪지 않아서 약방도제조(藥房都提調)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의 건의에 의하여 숙종은 창덕궁(昌德宮)으로 이어하였다. 인경왕후는 발병 8일 만에 경덕궁(慶德宮) 회상전에서 사망했다.
1713년 존호(尊號) 광렬(光烈)이 올려졌고, 1722년(경종 2) 휘호(徽號) 효장명현(孝莊明顯)이, 1753년(영조 29) 존호 선목(宣穆)이, 1776년 존호 혜성(惠聖)이 각각 올려졌다.
능은 익릉(翼陵)으로 경기도 고양시에 있고, 소생으로는 일찍 죽은 딸 2명이 있다.
▶ 인현왕후(仁顯王后) 민씨[1667 ∼ 1701]
여흥 민씨 여양부원군(驪陽府院君) 민유중(閔維重)의 딸이고, 어머니는 은진 송씨 준길의 딸이다.
1667년 4월 23일 반송동 사저에서 태어났고, 1681년(숙종 7) 가례를 올리고 숙종의 계비가 되었다.
예의가 바르고 덕성이 높아 국모로서 백성의 추앙을 받았으나, 왕자를 낳지 못하여 왕의 총애를 잃게 되었다. 특히, 1688년 소의 장씨(후에 희빈)에게서 왕자 윤(경종)이 출생하자, 숙종의 총애는 소의 장씨에게 쏠리게 되었다.
1689년에 숙종이 왕자 윤을 원자로 봉하고 세자로 책봉하려 하자, 송시열(宋時烈) 등 노론파 인사들이 소를 올려 이에 반대함으로써 숙종과 심하게 대립하였다. 숙종은 이들을 면직, 사사시키고, 이현기(李玄紀)·남치훈(南致薰) 등 남인들을 등용하는 이른바 기사환국이 일어났으며, 지위가 오른 희빈 장씨의 간계로 폐서인이 되어 안국동 본댁(감고당感古堂)에서 지내게 되었다.
그 뒤 숙종이 폐비에 대한 처사를 후회하고 있던 중에 1694년 소론파의 김춘택(金春澤)·한중혁(韓重爀) 등이 폐비복위운동을 일으키자, 이를 저해하려는 남인 민암(閔?)·김덕원(金德遠)·권대운(權大運) 등을 유배, 사사시키는 갑술옥사를 거쳐 다시 복위되었다.
그 뒤 덕을 베풀고 희빈 장씨와 화기(和氣)를 도모하면서 지내다가 병을 얻어 1701년에 8월 14일 창경궁 경춘전에서 사망했다.
존호는 효경숙성장순(孝敬淑聖莊純), 휘호는 의열정목(懿烈貞穆), 능호는 명릉(明陵)이다. 한 궁녀가 인현왕후를 주인공으로 하여 쓴 소설 《인현왕후전》이 전한다.
소생은 없고, 능은 경기도 고양시 용두동에 있는 명릉(明陵)으로 후에 숙종도 이곳에 묻혔다.
▶ 인원왕후(仁元王后) 김씨[1687 ∼ 1757]
경주 김씨 경은부원군(慶恩府院君) 김주신(金柱臣)의 딸이고, 어머니는 임천 조씨 경창의 딸이다.
1687년 9월 29일 순화방 사저의 양성재에서 태어났고, 1701년(숙종 27) 인현왕후 민씨가 죽자, 간택되어 궁중에 들어가 1702년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1711년 천연두를 앓았으나 소생했고, 2년 뒤에 혜순(惠順)이라는 호를 받았다. 1720년 숙종이 죽은 뒤 왕대비에 올랐고, 1724년 경종이 죽은 뒤 다시 대왕대비에 올랐다.
1722년(경종 2) 자경(慈敬), 1726년(영조 2) 헌열(獻烈), 1740년 광선현익(光宣顯翼), 1747년 강성(康聖), 1751년 정덕(貞德), 1752년 수창(壽昌), 1753년 영복(永福), 1756년 융화(隆化) 등의 존호가 올려졌다.
사후에 휘호 정의장목(定懿章穆)이 올려졌다. 소생은 없고 능은 명릉(明陵)이다.
▶ 희빈 장씨(嬉嬪張氏)[1659 ~ 1701]
이름은 옥정. 인동 장씨 경의 딸이고 어머니는 조사석(趙師錫)의 노비였는데 독사에 물린 조사석을 목숨걸고 구해주었다는 하여 노비의 신분에서 면천되어 양인이 되었고 그 때 장경의 후실이 되어 옥정을 낳았다.
조사석과 종친인 동평군 항(東平君杭: 인조의 서1남 숭선군의 아들)의 주선으로 궁녀로 들어가 숙종의 총애를 독차지하였다.
1686년(숙종 12) 숙원이 되고, 1688년 왕자 윤(경종)을 낳아 소의로 승격되었다. 숙종은 기뻐하여 왕자 윤을 세자로 봉하려 하였으나 송시열(宋時烈) 등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서인이 지지하지 않으므로 남인들의 원조를 얻어 책봉하려 하였다. 이에 서인의 노론·소론은 모두 아직 인현왕후 민씨가 나이가 많지 않으니 후일을 기다리자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숙종은 이를 듣지 아니하고 1689년 정월에 왕자 윤을 원자에 봉하고, 장씨를 희빈으로 승격하였다.
이때 송시열이 세자를 봉함이 아직 빠르다고 상소하자, 숙종은 이미 명호(名號)가 결정된 다음에 이런 의견을 말하는 것은 무슨 일이냐고 진노하므로, 남인 이현기(李玄紀)·남치훈(南致薰)·윤빈(尹彬) 등이 송시열의 상소를 논박하며 파직시켜 제주도로 유배하게 하고 다시 사사하게 하였다. 이밖에 서인의 영수들도 파직 또는 유배를 면하지 못하였고, 반면에 남인의 권대운(權大運)·김덕원(金德遠) 등이 등용되었다. 이 정권의 교체를 기사환국 또는 기사사화라고 한다.
이해 5월에 다시 인현왕후 민씨를 폐하고 희빈 장씨를 왕비로 삼으려 할 때 서인 오두인(吳斗寅)·박태보(朴泰輔) 등 80여명이 상소하여 이를 반대하였으나 도리어 참혹한 형문을 받게 되니 이후 정국은 남인의 세상이 되었다.
기사환국 후 시간이 감에 따라 숙종은 폐비사건을 후회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1694년 서인의 김춘택(金春澤)·한중혁(韓重爀) 등이 폐비의 복위운동을 꾀하다가 고발되었다.
이 때에 남인의 영수이자 당시 우의정으로 있던 민암(閔?) 등이 이 기회에 반대당 서인을 완전히 제거하려고 김춘택 등 수십명을 하옥하고 범위를 넓혀 일대 옥사를 일으켰다.
이때 숙종은 폐비에 대한 반성으로 옥사를 다스리던 민암을 파직하고 사사하였으며, 권대운·목내선(睦來善)·김덕원 등을 유배하고, 소론 남구만(南九萬)·박세채(朴世采)·윤지완(尹趾完) 등을 등용하고 왕비 장씨를 희빈으로 내렸는데 이것을 갑술옥사라고 한다.
또한, 이미 죽은 송시열·김수항(金壽恒) 등은 복작되고 남인은 정계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소론이 들어서고 남인이 물러나게 될 때 장희빈의 오빠 장희재(張希載)가 희빈에게 보낸 서장(書狀) 속에 폐비 민씨에 관련된 문구가 논쟁이 되어 여러 사람이 장희재를 죽이자고 하였으나 세자에게 화가 미칠까 염려하여 남구만·윤지완 등이 용서하게 하였다.
그런데 뒤에 인현왕후 민씨가 죽은 다음에 희빈 장씨가 취선당(就善堂)서쪽에다 신당(神堂)을 설치하고 인현왕후가 죽기를 기도한 일이 발각되었다. 이 일에 관련된 희빈 장씨와 장희재는 살해되고 궁인·무녀와 그 족당(族黨)도 화를 입게 되었다. 이것을 무고(巫蠱)의 옥(獄)이라 하는데, 이때에 희빈 장씨에 대하여 관대한 태도를 취한 남구만·최석정(崔錫鼎)·유상운(柳尙運) 등 소론의 선비들도 몰락하게 되고 다시 노론이 득세하게 되었다. 숙종은 이후 후궁이 왕후로 승격하는 일을 없애는 법을 만들었다.
경종의 생모라는 이유에서 영조로부터 '대빈궁'의 궁호를 하사받았다.
소생으로는 경종과 일찍 죽은 아들 1명(성수)이 있다.
▶ 숙빈 최씨(淑嬪崔氏)[1670 ~ 1718]
최효원(崔孝元)의 딸. 1670년 11월에 태어났고, 1676년 입궐하여 무수리(궁중에서 청소 일을 맡은 여종)로 있다가 숙종에 눈에 들어 아들(영수)을 낳아, 숙원에 봉해졌다. 이후 숙의, 귀인을 거쳐 빈으로 승격되었다.
처소를 얻을 때 처음 숙종이 가장 애용하던 보경당을 하사받았지만 그녀의 출신이 천출이라 대신들의 반발이 많았고, 숙종은 보경당을 다시 회수했다
1718년 3월 9일에 사망했고, 무덤은 경기도 파주시 광탄에 마련되었다.
영조는 왕위에 오른 후 자신의 어머니인 숙빈의 궁호를 육상궁으로 하고, 숙빈의 묘를 원(園)으로 격상시켜 소령원(昭寧園)이라 했으며 묘비는 영조가 친히 썼다.
영조 만녀에 각지의 유생들이 소령원을 능(陵)으로 격상시키자는 상소를 여러 차례 올렸으나 영조는 벼슬자리를 얻기 위한 아부 상소로 판단하고 끝내 능으로 격상시키지 않았다.
소생으로는 영조와 일찍 죽은 아들 2명이 있다.
▶ 명빈 박씨(示冥嬪朴氏)[ ? ~ 1703]
밀성(密城) 박씨. 후궁이 된 뒤에 귀인에 봉해졌다가 1702년 빈으로 승격되었다. 소생으로는 연령군이 있다.
▶ 영빈 김씨(寧嬪金氏)[1669 ~ 1735]
안동 김씨 창국(金昌國)의 딸로 숙종의 후궁이 되어 귀인에 봉해졌다가 후에 빈으로 승격되었다. 당쟁에 휘말려 서인 세력의 몰락으로 인현왕후가 폐위될 때 함께 폐출당해 본가로 쫓겨났다가 인현왕후가 복위되었을 때 다시 입궐했다.
연잉군(영조)를 친아들처럼 여기며 자주 불러 음식도 주고 업어주기도 했다. 연잉군(영조)도 영빈 김씨를 어머니라 부르며 따랐다고 한다. 소생은 없다.
▶ 귀인 김씨
소생은 없다.
▶ 소의 유씨
강릉 유씨. 소생은 없다.
■자녀
▶ <적장녀> 공주 1678~1678 - 인경왕후 김씨 소생
일찍 사망.
▶ <적2녀> 공주 1679~1679 - 인경왕후 김씨 소생
일찍 사망.
▶ <서장남> 경종 - 희빈 장씨 소생
▶ <서2남> 왕자 성수(盛壽)[1690 ~ 1690] - 희빈 장씨 소생
태어난지 일주일만에 사망.
▶ <서3남> 왕자 영수(永壽)[1693 ~ 1693] - 숙빈 최씨 소생
태어난 지 2달 만에 사망.
▶ <서4남> 영조 - 숙빈 최씨 소생
▶ <서5남> 왕자[1698~1698] - 숙빈 최씨 소생
일찍 사망.
▶ <서6남> 연령군 휜(延齡君 日日)[1699 ∼ 1719] - 명빈 박씨 소생
1703년(숙종 29) 5세에 연령군으로 봉하여졌다. 예법에서는 6세 이후에 봉작하는 것이 관례이나 5세 당시 생모인 명빈 박씨가 죽음으로써 주상자(主喪者)가 되었기 때문에 서둘러 봉해졌다. 이때에 대간들의 논란이 많았으나, 왕은 허락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대간들을 파직시키기도 하였다.
1707년 상산 김씨 동필의 딸과 혼인하였으며, 1708년 연령군 저택을 마련해 주라는 숙종의 명령이 내렸는데 신하들이 호화주택을 반대하여 선조대왕의 딸 정명공주(貞明公主)의 집을 주었다. 1711년 10일간 천연두를 앓기도 했다. 1718년(숙종 44) 4월에 도총관이 되었다가 1719년 10월 2일 어린 나이에 죽었다. 숙종은 특별히 연령군을 사랑하여 제문과 묘지문을 직접 지었다.
부인은 상산 김씨 동필의 딸인 상산군부인(商山郡夫人)으로 소생은 없다.
숙종이 소현세자의 증손 밀풍군(密豊君) 탄(坦)의 차남 상원군(商原君)으로 후사를 잇게 했으나, 일찍 사망하여 낙천군 온(洛川君縕), 달선군 영(達善君泳) 등으로 후사를 이었으나 역시 일찍 사망했다. 그리고 마침내 1777년(정조 1) 사도세자의 서2남 은신군(恩信君)으로 후사를 이을 수 있었다.
현종 2년 신축(1661) 8월 15일(신유)
원자가 태어나다
원자(元子)가 태어났다. 예조가 날짜를 택해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에 고하고 진하(陳賀)하며 반사(頒赦)하는 일을 차례로 거행할 것을 청하니, 상이 간략하게 행하도록 명하였다.
현종 2년 신축(1661) 8월 19일(을축)
원자의 탄생을 종묘·영녕전 및 사직에 고하다
원자가 탄생했다는 것으로 종묘·영녕전(永寧殿) 및 사직에 고하였다.
현종 6년 을사(1665) 9월 28일(신해)
대신과 비국의 제신들을 인견하여 원자의 책봉, 양전의 거행 등의 일을 논의하다
현종 8년 정미(1667) 1월 22일(정유)
원자를 책봉하여 왕세자로 삼다
상이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원자를 책봉하여 왕세자로 삼았는데 의례대로 하였다. 세자의 나이 겨우 7세였는데 거동 하나하나가 예에 맞지 않는 것이 없고 영특한 자태와 덕성스러움이 마치 성인(成人)처럼 엄연하니, 뜰을 가득 메운 신하들이 모두 탄복하여 목을 길게 빼고 바라보았다.
현종 8년 정미(1667) 1월 22일(정유)
왕세자 책례 교문
책례 교문(冊禮敎文)은 다음과 같다.
“왕은 이르노라. 나는 생각건대, 세자를 세워 적통을 수립하는 것은 종조(宗祧)를 계승하기 위함이요, 지위를 정하여 명분을 바르게 하는 것은 백성들의 기대를 묶어 놓는 것이다. 이는 진실로 대대로 중하게 여겼던 일이니 어찌 어리다고 해서 늦출 수 있겠는가. 이에 옛법을 따라 삼가 아름다운 식전을 펼친다. 아, 너 원자 휘(諱)는 나면서부터 효경(孝敬)을 알았고 자질도 총명하여 행동 거지가 자연히 절도에 맞았으며 단정하고 영특한 모습은 마치 성인(成人)과 같이 늠름하였다. 학업이 이미 상당한 문리에 이르렀으며 덕성과 국량은 스승에게 배우지 않아도 될 정도가 되었다. 주(周)나라의 교육은 반드시 어린이를 가르치는 방법을 먼저 했으며, 한(漢)나라의 빈틈없는 의절에 어찌 세자를 미리 세우는 것을 늦추었겠는가. 이미 훌륭한 소문이 일찍이 전파되었으니 마땅히 책호를 하루속히 정해야 하겠다. 그러므로 여러 사람들의 뜻에 따라 이에 세자를 정하고 이제 너를 왕세자로 명한다.
아, 너의 어린 뜻을 버리고 나의 훈계하는 말을 공경히 받들라. 인·의·예·지의 떳떳함은 본래 천성이며, 요·순·우·탕의 도는 인륜을 벗어나지 않았다. 몸을 성실하게 하려면 훌륭한 사람을 친히 하는 것만한 일이 없으며, 이치를 밝히려면 학문을 강론하는 것만한 일이 없다. 혹시라도 완호(玩好)를 일삼지 말며 혹시라도 주색에 빠져들어 즐기는 일을 따르지 말라. 날로 달로 진보하여 시종 학문을 생각하고 밤낮으로 부지런히 하여 태만함을 경계하라. 공경히 도심을 지키면 거의 우리 조상께 욕됨이 없을 것이고, 밝으신 명을 주심이 그 처음에 달려 있지 않음이 없다. 그러므로 이에 교시(敎示)한다.”
현종 12년 신해(1671) 3월 22일(계유)
왕세자빈을 책봉하다
상이 원유관(遠遊冠)·강사포(絳紗袍)를 갖추고 숭정전(崇政殿)에 나아가 김씨(金氏)를 책봉하여 왕세자빈(王世子嬪)으로 삼았다. 그 교명문(敎命文)에 이르기를,
“예로부터 국가에서는 반드시 세자를 미리 세워서 나라의 근본을 튼튼하게 하였고, 또한 깨끗하고 현명한 사람을 널리 구하여 길상(吉祥)을 정하고 배필을 세워서 부인의 일을 잇게 하였다. 이는 인륜이 시작되는 바이매 임금 교화의 바탕이니,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러므로 내가 선왕의 큰 명을 이어받아 가르침을 받들어 따르고 아름다운 법을 살피고 삼가서 신명과 백성의 뜻에 맞기를 바랐었다. 내 원사(元嗣)는 총명이 뛰어나서 일찍부터 종묘의 제사를 주관하는 중책을 받아 백성들이 이름을 우러러 보고 있으니, 아름다운 짝을 가려 그 아름다움을 같이 하게 하고 그 법도를 보이게 해야겠다.
아, 너 김씨는 덕스러운 성품을 하늘에서 받아 온순함이 어려서부터 나타났다. 네 조상 때부터 대대로 덕을 쌓아 가르침이 집에서 이루어지고 은택이 후손에 미쳤다. 이에 아름다운 여자를 길러 내가 자나 깨나 찾는 바에 응하였다. 그리하여 두루 간택을 거쳤는데 내 마음에 들었다. 말과 행실을 보고는 궁위(宮闈)가 모두 경하하고 점을 쳐보면 거북점과 시초점이 다 길하다 하였고 외조(外朝)에 물어 보면 사대부들이 모두 동의하니, 휘장(徽章)을 주는 예에 실로 합당하다.
그러므로 정사 심익현(沈益顯)과 부사 김수항(金壽恒)을 보내어 절(節)을 가지고 예를 갖추어서 너를 왕세자빈으로 책봉하게 한다. 내 듣건대, 양(陽)의 덕은 음(陰)이 도와주는 공이 아니면 펴지 못하고 남자의 가르침은 여자가 순종하지 않으면 나타나지 못하는 것이니 이 상복(象服)에 어울리게 하는 것이 모두 너에게 달려 있다. 우리 종사(宗事)를 이어받고 우리 세자를 돕는 것은 효도와 공경, 화목과 순종에 있다. 그러니 너는 성심으로 이것을 생각하여 사치로 의리를 잃거나 방종으로 예의를 무너뜨리지 말고 오직 부지런하고 검소하여 끝까지 한결같이 하라. 그리하여 상제의 누이에 견줄 만한 아름다움이 주(周)나라에만 있게 하지 말라. 아, 공경하고 아름답게 하여 한없이 명예를 전파하는 것은 네가 어질기에 달려 있고 자손이 백세(百世)토록 전하여 우리 국가가 끝이 없게 하는 것도 네가 몸받기에 달려 있으니, 밤낮으로 공경하여 내 가르침을 욕되게 하지 말라.”
하였다. 글은 대제학 김수항(金壽恒)이 지어 바치고 개성 유수 이정영(李正英)이 썼다.
현종 12년 신해(1671) 3월 22일(계유)
세자빈(인경왕후)의 내력
빈(嬪)은 문원공(文元公) 김장생(金長生)의 4대손이다. 예법 있는 집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참하고 얌전한 여자의 덕이 드러났었는데 때마침 세가(世家)의 처녀를 뽑는 데에 들어 궁중에 들어갔다. 빈의 나이가 겨우 열 살이었는데도 행동 거지가 예에 어긋나는 것이 없었으므로 사전(四殿)이 모두 사랑하여 드디어 세자빈으로 정하였었다. 이때에 이르러 책례(冊禮)를 행하게 되었는데 마침 비가 내리다가 행사할 때가 되자 비로소 맑아지니 사람들이 다 서로 축하하였다.
숙종 즉위년 갑인(1674) 8월 23일(갑인)
왕세자의 즉위 교서
왕세자가 인정문(仁政門)에서 즉위(卽位)하였다. 왕비(王妃)를 높여서 왕대비(王大妃)로 삼고, 빈(嬪) 김씨(金氏)를 왕비(王妃)로 삼았으며 교서(敎書)를 반포하여 대사(大赦)하였다. 그 교서(敎書)의 글은 아래와 같다.
“왕은 이와 같이 말한다. 하늘이 우리 가문(家門)에 재앙을 내리어 갑자기 큰 슬픔을 만났으므로, 소자(小子)가 그 명령을 새로 받게 되니, 군신(群臣)의 심정(心情)에 힘써 따라서 이에 신장(腎腸)을 펴게되어 더욱 기(氣)가 꺾이고 마음이 허물어지는 듯하다. 국조(國朝)에서 왕통(王統)을 전함은 당우(唐虞)와 융성(隆盛)을 견줄 만하였다. 종(宗)은 덕(德)으로서, 조(祖)는 공(功)으로서, 성현(聖賢)이 6대 7대나 일어났으며, 문모(文謨)와 무열(武烈)로서 자손에게 억만년을 물려 주셨다. 삼가 생각하건대, 대행 대왕(大行大王)께서는 진실로 잘 계술(繼述)하셨다. 효우(孝友)는 마음을 따라 절로 일어났고 풍화(風化)는 사방에 미쳤으며, 청명(淸明)은 자신(自身)에 있었고 기욕(嗜欲)은 물러나게 되었다. 하늘의 노함을 공경하여 한결같이 지성(至誠)으로 대하니, 성실에 감응(感應)하는 것이 메아리가 응하듯 하였고, 백성의 빈궁을 진휼(賑恤)함이 거의 빈 해가 없었으니, 도탄(塗炭)에 헤매던 사람이 모두 살게 되었으며, 영왕(寧王)이 이루지 못한 공(功)을 장차 넓히려 하였고, 우리 조선의 위대할 수 있는 업(業)을 크게 세우려 하셨다. 효심(孝心)은 한이 없으되, 비통(悲痛)은 겨우 경렴(鏡奩)에 맺혀졌고, 몽령(夢齡)이 징조가 없으니 유명(遺命)이 갑자기 옥궤(玉几)에서 공언(公言)되었다. 병환이 나서 열흘이 되었는데도 약은 효과가 나지 않았으며, 내 몸이 대신 죽으려는 성심이 간절했는데도 신(神)이 굽어 살피지 않았었다. 종천(終天)까지 이르는 거창(巨創)한 일을 당했으니 큰 소리로 부르짖어도 미칠 수가 없었으며, 엄한 훈계를 받들 시일(時日)이 없게 되었으니 보잘것 없는 작은 내 몸이 어디에 의지하겠는가?
더구나 이 대위(大位)를 갑자기 계승하게 되니, 나로 하여금 지정(至情)을 억제하게 한다. 그러나 종묘·사직(社稷)의 큰 책임은 실로 후인(後人)에게 있으므로, 부형(父兄)·백관(百官)들이 같은 말을 하니 중인(衆人)의 소망을 막기가 어려웠다. 자성(慈聖)의 자상한 유시(諭示)를 우러러 본받아 성주(成周)의 예전 법도를 따랐다. 이에 본년(本年) 8월 23일 갑인(甲寅)에 인정문(仁政門)에서 즉위(卽位)하여 왕비(王妃)를 높여서 왕대비(王大妃)로 삼고, 빈(嬪) 김씨(金氏)를 왕비(王妃)로 삼는다. 욕의(縟儀)를 대하매 슬퍼서 부르짖게 되고, 중기(重器)를 주관하매 두려워서 마음이 편안하지 못하다. 부왕(父王)의 자리에 앉아 부왕의 예절을 행하니 사모함이 갱장(羹墻)에 더욱 돈독하게 되고, 중대하고 어려운 책임을 맡게 되니 두려움은 실로 연곡(淵谷)보다 깊었다. 역대 임금의 큰 사업을 계승했으니, 어찌하면 하늘의 착한 명령을 맞이할 수 있겠으며, 선왕(先王)의 끼친 백성을 다스리게 되니, 어찌하면 우리 나라를 어루만져 편안하게 할 수 있겠는가? 다만 혹시 부왕(父王)의 사업을 무너뜨릴까를 두려워할 뿐인데, 어찌 숙소(夙宵)의 조심을 조금이라도 늦추는 것을 감내하겠는가?
마침내 큰 칭호를 공포(公布)하여, 모든 품계(品階)에게 두루 미치게 한다. 본월(本月) 23일 어둑새벽 이전부터 잡범(雜犯)으로서 사죄(死罪) 이하는 모두 용서해 주고, 관직에 있는 사람은 각기 한 자급(資級)을 올리되 자궁(資窮)한 자는 대가(代加)한다. 아! 공을 도모하여 일을 마쳐서 시종(始終) 쇠퇴(衰頹)하지 않기를 원하고, 과오를 고치고 흠을 씻어버려 생육(生育)에까지 모두 용서되기를 바란다. 이런 까닭으로 이에 교시(敎示)하니 마땅히 죄다 알고 있을 것이다.”【대제학 김만기(金萬基)가 지어 올렸다.】
이날 성복(成服)을 마치고 왕세자가 관면(冠冕)과 길복(吉服)을 갖추고, 규(圭)를 쥐고 여차(廬次)로부터 걸어가면서 곡(哭)하였다. 내시(內侍) 2인이 좌우(左右)에 끼고 보호하여 선정전(宣政殿) 동쪽 뜰에 나아가 빈전(殯殿)을 향하여 사배례(四拜禮)를 행하고, 섬돌에 올라가 전내(殿內)의 향안(香案) 앞으로 들어가서 향을 피우고는 내려와 그전 자리로 돌아와서 또 네 번 절하고 동쪽 행랑의 막차(幕次)로 들어갔다. 조금 후에 왕세자가 선정문(宣政門)으로부터 걸어 나와서 연영문(延英門)을 따라 가서 숙장문(肅章門)을 나와서 인정문(仁政門)에 이르니, 승지와 사관(史官)이 따라 나갔다. 왕세자가 서쪽을 향하여 어좌(御座) 앞에 서서 차마 자리에 오르지 못하고 소리를 내어 슬피 울기를 그치지 아니하였다. 승지와 예조 판서가 서로 잇달아 임금의 자리에 오르기를 권하였다. 삼공(三公)이 도승지와 더불어 나아가 왕세자를 부축하면서 번갈아 극진히 말하였다. 왕세자가 눈물을 흘리면서 슬피우니, 이 날 뜰에 있던 백관(百官)과 군병(軍兵)으로서 목소리를 내지 못할 정도로 울부짖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왕세자가 어좌(御座)에 오르니, 백관들이 사배(四拜)하고 의식대로 산호(山呼)하였다. 예를 마치자, 사왕(嗣王)이 인정문(仁政門)으로부터 인정전(仁政殿)에 올라가 인화문(仁和門)으로 들어와서 여차(廬次)로 돌아왔는데, 우는 것이 끊어지지 않았으며 소리가 밖에까지 들렸다.
숙종 46년 경자(1720, 강희 59) 6월 8일(계묘)
임금이 승하하다
임금이 승하(昇遐)하였다. 시약청(侍藥廳)의 세 제조(提調)와 사관(史官) 등이 어제 저녁부터 입시(入侍)하여 밤을 새우고 기둥 밖으로 물러나왔는데, 조금 후에 날이 밝았다. 도제조(都提調) 이이명(李頤命)이 환시(宦侍)로 하여금 중궁(中宮)께 아뢰기를,
“날이 이미 밝았으니, 신 등이 잠시 물러갔다가 문안(問安)드릴까 합니다.”
하였다. 이윽고 빠른 걸음으로 걸어 나오자 사관(史官)이 뒤따라 나왔는데, 막 시약청에 이르자 환관(宦官)이 급히 나와 내교(內敎)를 전하기를,
“우선 문안드리지 말고 빨리 들어오라.”
하였다. 이이명 등이 사관과 함께 황급히 달려들어가니, 연잉군(延礽君)이 이이명을 맞으며 말하기를,
“드셨던 약물(藥物)을 모조리 토해 내셨습니다.”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와내(臥內)로 들어가니, 임금이 목구멍 속에 담(痰) 끓는 소리가 크게 났다. 환시(宦侍)가 큰소리로 조정(朝廷)·승정원(承政院)·옥당(玉堂)이 문안드린다고 아뢰었으나, 임금이 알아듣지 못하였다. 도승지 윤헌주(尹憲柱)가 세자에게 고하기를,
“감군(監軍)의 단자(單子)는 성상의 환후가 이와 같으시니 낙점(落點)할 수가 없겠습니다. 어제 낙점한 것으로 그대로 시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세자가 허락하였다. 연잉군이 내전(內殿)으로부터 나와 말하기를,
“다만 부원군(府院君)만 남아 있고 도제조 이하의 관원들은 조금 물러가 있으라.”
하였다. 세 제조와 사관이 물러나 기둥 밖에 엎드려 있었는데, 이때 궁녀(宮女)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밖에까지 들렸고 환시들도 눈물을 흘리며 몹시 바쁘게 다녔다. 조금 후에 부원군 김주신(金柱臣)이 나와 기둥 밖에 이르러 이이명에게 말하기를,
“내전(內殿)께서 그래도 만에 하나 성상의 병세가 회복되기를 기대하시므로, 방금 다시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다는 뜻으로 주달(奏達)하였습니다.”
하였다. 이윽고 내시(內侍)가 여러 신하들을 불러서 도로 들어가니, 중궁(中宮)이 연잉군으로 하여금 전교(傳敎)하게 하기를,
“일찍이 듣건대 ‘명성 왕후(明聖王后)께서 병환이 나셨을 때는 단지 가슴 앞에 한 점(點)의 미지근한 온기(溫氣)가 있을 뿐이었는데도 능히 회복을 하셨다.’ 한다. 성상의 병환이 비록 위중하기는 하지만 가슴과 배에 모두 온기(溫氣)가 있으니, 약물(藥物)을 신중히 써서 기필코 회복을 기약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이명이 대답하기를,
“만일 할 수 있는 방도만 있다면 감히 정성을 다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중궁이 또 연잉군으로 하여금 나와 전교하게 하기를,
“금평위(錦平尉) 박필성(朴弼成)·동평위(東平尉) 정재륜(鄭載崙)·임창군(臨昌君) 이혼(李焜)·어영 대장(御營大將) 김석연(金錫衍)【바로 주상의 내구(內舅)이다.】과 시임(時任)·원임(原任) 대신(大臣)들을 모두 동궁(東宮)에게 품하여 입시(入侍)하게 하라.”
하고, 또 연잉군을 시켜서 이이명에게 묻기를,
“원명귀(元命龜)【숙경 공주(淑敬公主)의 아들이다.】·정건일(鄭健一)【숙휘 공주(淑徽公主)의 아들이다.】·김도협(金道浹)【김석연(金錫衍)의 아들이다.】 등을 모조리 같이 불러 들이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니, 이이명이 대답하기를,
“너무 광범위합니다.”
하였다. 연잉군이 들어가 아뢰고, 다시 나와 심정보(沈廷輔)【숙명 공주(淑明公主)의 아들이다.】를 부르라고 명하였다. 또 어유귀(魚有龜)·김동필(金東弼) 두 사람을 불러 들이라고 명하니, 이이명이 말하기를,
“이런 때에 어찌하여 반드시 인척을 다 불러들이겠습니까? 부디 이런 뜻으로 품주(稟奏)하소서.”
하였다. 연잉군이 들어가 아뢰고 나와 내교(內敎)를 전하기를,
“진달한 바가 옳다.”
하였다. 이에 시임·원임의 여러 대신이 다 같이 와내(臥內)로 들어왔는데, 이이명이 어탑(御榻) 아래로 나아가 큰 소리로 아뢰기를,
“시임·원임 대신이 들어왔습니다.”
하고, 영의정(領議政) 김창집(金昌集)이 또 큰소리로 아뢰기를,
“소신(小臣) 창집 등이 들어왔습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알아듣지 못하였다. 연잉군이 어수(御手)를 붙들고 울면서 말하기를,
“손가락이 이미 다 푸른 색으로 변했습니다.”
하였다. 의관(醫官)이 나아가 콧마루를 살피고, 이어서 진맥(診脈)을 한 뒤 물러나와 말하기를,
“오른쪽 맥(脈)이 먼저 끊어졌고, 왼쪽의 맥은 바야흐로 들떠 흔들리며 안정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하였다. 중궁이 환시를 시켜서 전교하기를,
“종전에 약(藥)을 쓰는 길이 잘못되었기에 이미 이런 지경에 이른 것이다. 이런 때에 약을 쓰기란 더욱 어려우니, 반드시 상세히 살펴서 쓰라.”
하니, 이이명이 울면서 대답하기를,
“신 등이 보호(保護)하는 처지에 있으니, 비록 하교(下敎)가 없으시더라도 어찌 십분 상세히 살피고 싶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본래 약리(藥理)에 어두운 까닭으로 이런 지경에 이르렀으니, 죽어도 여죄(餘罪)가 있습니다. 지금 약을 쓰는 길이 여러 가지가 있기에 바야흐로 세심하고 신중히 골라쓰고는 있으나 그것이 합당한지 합당하지 않은지는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조금 후에 임창군(臨昌君) 혼(焜)·동평위(東平尉) 정재륜(鄭載崙)·금평위(錦平尉) 박필성(朴弼成)·어영 대장(御營大將) 김석연(金錫衍)·원주 목사(原州牧使) 심정보(沈廷輔)가 들어왔다. 이이명이 연잉군에게 묻기를,
“지난번 시약청을 설치할 때 빈전(嬪殿)의 일로 하교한 바가 있었는데, 선정전(宣政殿)은 창덕궁(昌德宮)에 있어서 불편하여 시행하기 어려운 단서가 있습니다. 그때 진달하고자 하였으나 차마 아뢰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연잉군이 말하기를,
“이것은 바로 유교(遺敎)이니, 어찌 차마 어기겠는가?”
하였다. 이때 여러 신하들이 모두 조용히 탑전(榻前)에 엎드려 있었는데, 임금이 기식(氣息)과 담향(痰響)이 점차 가늘어지다가 갑자기 크게 토한 뒤 드디어 승하(昇遐)하였다. 이때가 바로 진정(辰正) 2각(二刻)이었는데, 북쪽 협실(夾室) 안에서 일시에 울부짖고 곡(哭)하며 문을 밀치고 나오려 하다가 연잉군이 문을 막고 금하자 환시가 수족(手足)을 정돈하였다. 중궁(中宮)이 연잉군을 시켜 전교(傳敎)하기를,
“초상(初喪)에 있어서의 모든 일들을 중궁이 주관하라는 뜻으로 직접 성상의 하교를 받았다. 이제 마땅히 이것에 의거하여 시행할 것이니, 대신(大臣)은 모름지기 이 뜻을 알아야 할 것이다.”
하니, 김창집이 부복(俯伏)하여 말하기를,
“삼가 마땅히 전교를 받들겠습니다.”
하였다. 이때 밖에 있던 여러 승지와 종척(宗戚)들이 모두 들어왔다. 대신(大臣) 이하가 흐느껴 울면서 허둥지둥 어쩔 줄을 몰랐다. 《오례의(五禮儀)》와 등록(謄錄)을 들추어 열람하면서 임금이 승하하신 시각이 꽤 오래 되었는데도 곧바로 속광(屬纊)을 하지 않았다. 승지 한중희(韓重熙)가 갑인년의 일기(日記)를 예조 판서(禮曹判書) 이관명(李觀命)에게 보이며 말하기를,
“그때는 장선징(張善瀓)이 예조 판서로서 속광을 행하였으니, 오늘은 그대가 마땅히 속광하여야 합니다.”
하니, 이관명이 말하기를,
“장선징은 바로 척속(戚屬)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불가하다.”
하였다. 여러 의론이 박필성(朴弼成)과 혼(焜)으로 하여금 하게 하려고 하였는데, 결정이 나지 않았다. 우의정(右議政) 이건명(李健命)이 손에 의주(儀註)를 들고 방(房)으로 들어와 말하기를,
“속광의 절차는 내척(內戚)이 마땅히 행해야 할 것이니, 심정보(沈廷輔)로 하여금 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이때 심정보가 대궐 밖으로 나가서 곧 들어오지 않았으므로 찾느라고 어수선한 사이에 내시(內侍)가 이미 속광하였다. 중궁이 연잉군을 시켜 전교하기를,
“성상께서 평일에 매양 습렴(襲殮) 등의 여러 가지 절차를 기필코 정제(整齊)하게 하라는 뜻으로 누누이 하교하셨다. 대신(大臣)들은 부디 이 뜻을 깊이 체념하여 큰 일은 내간(內間)에 품하고 세세한 절차는 짐작하여 시행하되, 반드시 꼭 정성을 쏟도록 하라.”
하니, 김창집과 이건명이 대답하기를,
“감히 마음을 다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대신(大臣)이 내시 두 사람으로 하여금 호복(呼復)을 하게 하니, 내시 두 사람이 함(函)에다 강사 곤룡포(絳紗袞龍袍)를 담아 대궐 지붕으로 올라가 세 번 주상의 존호(尊號)를 불렀다. 내시가 남쪽 협실(夾室)에서 왕세자(王世子)를 부축하고 나와 입(笠)과 사포(紗袍)를 벗기고 머리를 풀고 거애(擧哀)하였다. 연잉군이 옷을 벗고 머리를 풀고 기둥 밖에서 거애하였다. 대신 이하가 침문(寢門) 밖에서 부복(俯伏)해 거애하였는데, 뒤죽박죽으로 질서가 없었다. 곡이 끝나자 김창집이 주서(注書)로 하여금 ‘상대점(上大漸)’이란 세 글자를 써서 외정(外庭)에 내다 보이게 하였다. 이때 비가 퍼붓듯 크게 쏟아졌다. 백관(百官)들이 세 곳에 나뉘어 모여 있었는데, 주서가 두루 돌아다니며 들어보이니, 백관들이 모두 곡하였다. 대신이 마침내 외정으로 물러나와 옷을 바꿔입고 백관을 인솔하여 거애한 뒤 숭정전(崇政殿)의 동쪽 월랑(月廊)에 모였다. 승정원(承政院)·옥당(玉堂)·춘방(春坊)·익위사(翊衞司) 등은 흥태문(興泰門) 밖에 모였다.
숙종 46년 경자(1720) 6월 13일(무신)
이달 경술에 시호를 정하고, 12월 21일에 명릉에 장사지내다
이달 경술(庚戌)에 대신(大臣)과 2품 이상이 빈청(賓廳)에 모여 시호(諡號)를 올릴 것을 의논하여, ‘장문 헌무 경명 원효(章文憲武敬明元孝)’라 하였다. 시법(諡法)에 법도 대명(法度大明)을 ‘장(章)’, 도덕 박문(道德博聞)을 ‘문(文)’, 상선 벌악(賞善罰惡)을 ‘헌(憲)’, 강강 이순(剛强以順)을 ‘무(武)’, 숙야 경계(夙夜儆戒)를 ‘경(敬)’, 조림 사방(照臨四方)을 ‘명(明)’, 입의 행덕(立義行德)을 ‘원(元)’, 대려 행절(大慮行節)을 ‘효(孝)’라 한다. 묘호(廟號)는 숙종(肅宗)이라 하였는데, 시법에 강덕 극취(剛德克就)를 ‘숙(肅)’이라 한다. 전호(殿號)는 효령(孝寧)이라 하고, 능호(陵號)는 그대로 명릉(明陵)이라 칭하였다.【대개 인현 왕후(仁顯王后)를 먼저 명릉(明陵)에 장사지냈는데, 이때에 이르러 유명(遺命)에 따라 같은 영역(塋域)에 장사지냈다.】 12월 21일 갑인(甲寅)에 명릉에 장사지냈다.
숙종 6년 경신(1680) 10월 26일(신해)
2경에 중궁(인경 왕후)이 경덕궁에서 승하하다
숙종 7년 신유(1681) 3월 26일(기묘)
대내에서 삼간택을 거행하니, 병조 판서 민유중의 딸(인현왕후)을 간택케 하다
숙종 15년 기사(1689) 1월 15일(계미)
소의 장씨를 희빈으로 삼다
숙종 15년 기사(1689) 5월 2일(정유)
왕비 민씨(인현왕후)를 폐하여 서인으로 삼다
숙종 15년 기사(1689) 5월 6일(신축)
희빈 장씨로 왕비를 삼겠다는 전지
숙종 20년 갑술(1694) 4월 24일(신묘)
곤위(인현왕후)가 회복되었음을 알리는 비망기를 내리다
숙종 27년 신사(1701) 8월 14일(기사)
왕비 민씨가 창경궁의 경춘전에서 승하하다
축시(丑時 *오전(午前) 1-3시 사이)에 왕비 민씨(閔氏)가 창경궁(昌慶宮)의 경춘전(景春殿)에서 승하(昇遐)하였다.
숙종 28년 임오(1702) 9월 3일(신해)
삼간택을 거행하여, 순안 현령 김주신(인원왕후)의 집으로 결정하다
영조 33년 정축(1757)3월 26일(정사)
사시에 대왕 대비 김씨(인원왕후)가 영모당에서 승하하다
첫댓글 월화드라마 역사극 동이를 보다가..숙종의 역사가 궁금해서 잠시 찾아봤어요...지금의 동이가 궁녀최씨로 영조대왕의 친모예요.. 잠시 머리도 식힐겸..^^
월화드라마 역사극 동이를 보다가..숙종의 역사가 궁금해서 잠시 찾아봤어요...지금의 동이가 궁녀최씨로 영조대왕의 친모예요.. 잠시 머리도 식힐겸..^^
저도 사극을 좋아 한답니다..
어쩔때는 사극이 현혹시켜시리 ㅎㅎㅎㅎㅎㅎ 나름 올바른 역사를 알아서 좋앗네요 강원장님~
역사공부 잘했네요 ... 사극내용은 알고 보면 더 재밌는거 같아요 종종 올려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