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여름 선물
오종락
유년시절 시골 고향집 여름 준비는 우물청소로 시작되었고, 나에게 여름의 시작을 알려준 것은 새콤한 풋자두 맛이었다. 우리 집 안마당에는 우물이 하나 있었고 우물 뒤 축대 위에는 자두나무 두 그루가 서 있었다.
우물 청소는 긴 나긴 여름을 나기 위해 우물 안팎을 깨끗이 청소하는 일로 매우 중요한 여름 나기 준비였다. 깨끗하고 위생적인 샘물을 길러 보리밥도 말아먹고 미숫가루도 태워 먹기 위해서였다. 이 무렵 우물가에 서있는 자두나무에 달린 풋자두는 군침을 돋우며 나를 끊임없이 유혹했다. 우물물을 길러 올리기 위해 두레박을 내릴 때면 시선은 항상 자두 열매에 꽂혔다. 입이 궁금해서 익을 때까지 도저히 참고 기다릴 수가 없었다.
풋자두는 열매가 달린 지 한 달가량 경과한 후 열매를 솎아 내기도 전, 대추만할 때부터 맛보기 시작했다. 그 당시는 변변히 먹을 만한 간식도 귀했다. 기껏해야 뽕나무 오디 열매 정도였다. 나는 틈만 나면 채 영글지도 않은 자두를 하나둘씩 따서 맛보곤 했다. 자두가 익을 무렵이면 가지에는 자두가 얼마 남아 있지 않았다. 그동안 중요 간식이었던 자두를 부지런히 따먹은 결과였다.
나의 이런 모습을 보고 부모님은 “풋과일을 너무 많이 먹고 배탈 날나!”하시며 걱정하셨다. 이런 염려에도 불구하고 아버지가 “담배를 자주 피우시듯” 틈만 나면 줄기차게 따먹었다. 하루는 아버지가 자그마한 풋자두를 따먹고 있는 나를 보시며 “우리 ‘락’이 때문에 자두 열매를 솎아 주지 않아도 되겠구나”라고 하셨다. 굵은 자두열매부터 골라가며 하나둘씩 따먹다 보면 하루 이틀 열흘이 흐르고 한 달이 흘렀다. 어느새 누런빛을 띠며 탁구공 만하게 제법 커져갔다. 이때쯤 되면 자두나무 가지는 휑하니 변해 수확한 나무처럼 보였다. 이러다 보니 신 과일을 유독 좋아하는 소년이 되었다.
그런 추억을 뒤로하고 내가 결혼하여 객지 생활을 할 때였다. 여름 무더위가 시작되고 자두가 탐스럽게 영글 때쯤이면 아버지는 해마다 우리 집을 방문하셨다. 아버지는 먼 길에 버스를 몇 번이나 갈아타고 삼베 바지저고리에 무거운 봇짐을 걸머지고 오셨다. 봇짐을 풀어보면 약간 푸른색을 띤 싱싱한 자두가 한가득 들어 있었다. 이 모습을 보는 순간, 난 코끝이 찡하고 눈물이 핑 돌았다. 아버지, “이렇게 힘들 게 안 가지고 오셔도 되는 돼요. 먹고 싶으면 제가 시장에 가서 몇 개 사 먹으면 됩니다.” 하면 아버지는 “올해도 자두가 잘 익어서 가지고 왔다. 한번 맛봐라”라고 하셨다. 어릴 적부터 풋자두를 좋아하는 아들을 챙겨 먹이기 위해 힘들게 가져오신 것이다.
이제 먼 곳까지 힘들 게 가져오신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할 차례였다. 나는 옛날에 먹던 실력을 발휘하여 여남 개의 자두를 게눈 감추듯 단숨에 먹어 치웠다. 옆에서 보고 있던 아내는 보기만 해도 신맛을 느끼는데 어찌 눈도 한번 깜빡이지 않고 그렇게 맛나게 잘 먹을 수가 있어요. 했다. 그러면 아버지는 빙그레 미소를 지으시며 “아범은 어릴 적부터 신 과일을 좋아했느니라”라고 하셨다. 퇴근후 집에 돌아오면 아내는 냉장고에서 자두를 몇 개씩 꺼내 주었다. 나는 아버지에 대한 감사함을 느끼며 한동안 자두를 달게 먹었다.
올해도 초여름이 왔다. 시골 과수원에는 자두가 하루가 다르게 굵어지고 있다. 옛날 아버지가 봇짐에 둘러메고 오시던 그 자두 맛이 생각난다. 약간 신맛에 달콤한 그 오묘한 맛! 생각만 해도 입에 침이 고이는 영원히 잊을 수 없는 맛이다. 그 맛은 아마 아버지의 사랑이 담긴 아주 특별하고 독특한 자두맛이었기 때문이다.
고향집의 두레박으로 떠서 마시던 그 시원한 샘물 맛도 여름철 별미로써 너무나 그립다. 아버지는 들판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오시면 “시원한 샘물 한 그릇 떠다다오.” 하셨다. 놋그릇 대접의 샘물을 한 그릇 마신 후 “아! 속이 시원하다. 여름철엔 우리 집 샘물 맛이 최고야!” 하셨다. 우리 집 샘물은 맛도 유난히 좋아 동민들로부터 인기가 높았다. 우물가로부터 십여 미터 떨어진 돌담장 아래 아름드리 은행나무가 두 그루 서 있었다. 그 은행나무 뿌리에서 흘러나오는 좋은 성분이 샘물에 녹아 있다고 믿었던 탓인지, 아마 은행나무가 건강에 좋은 영향을 미치는 불로수 역할을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요즘 우리 집은 비싼 돈을 주고 유명회사 생수를 사서 마시고 있다. 그런데도 왠지 약간 찜찜한 기분이 든다. 아마 보존수가 들어 있다는 생각 때문에 옛날 고향집 샘물처럼 그렇게 달게는 넘어가지 않는 것 같다.
어느덧 세월이 많이도 흘렀다. 믿기지 않지만 내가 벌써 그때의 아버지 나이가 되어 있음을 언뜻 느낀다. 봇짐에 자두를 담아 오시던 아버지 생각이 떠오를 때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이제는 내가 자식들을 살피며 걱정하는 처지가 되었다.
올해는 지난달부터 무더위가 일찍 찾아왔다. 자식들을 위해 여름 선물을 한 가지 준비해 두었다고 전달했다. 백화점에 들렀다가 황토로 염색한 인견이불이 눈에 들어왔다. 나도 하나 사용할 겸 해서 4채를 구입했다.
지난달 어버이날 자녀로부터 선물을 받을 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가정의 달 5월은 너희가 신경 쓸 일이 참 많겠구나. 양가 부모님 선물에다 아기 장난감 선물하랴 이것저것 챙길 것도 많아 너희가 고생이 많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애들에게 답례를 하나 해야지 하는 생각이 들어 선물을 준비하게 되었다. 이젠 내가 아버지에게 받은 사랑을 나의 자식들에게 전수할 시기가 온 것 같다.
선물을 준비하다 보니 추가로 점점 더 늘어났다. 격무에 시달려 힘들어하는 딸아이를 위해 무더위를 잘 이겨낼 수 있도록 덤으로 한약 한재를 지었다. 한약을 짓다 보니 개구쟁이 손주 녀식이 튼튼해야 딸아이가 편할 것 같아 외손주를 위해서 용을 넣은 한약도 함께 지었다. 택배로 보내고 나니 여름 준비를 제법 완벽하게 했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든든하고 왠지 기분이 좋았다. 아버지의 작은 선물이지만 제 기능을 톡톡히 해주어 건강한 여름을 보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2018.6.15.)
첫댓글 유년시절 고향집의 정겨운 모습과 풋 자두를 따서 먹는 소년의 모습이 눈에 어른 거립니다. 결혼하신 후에도 자두를 좋아하는 아들을 생각하신 아버님의 모습 우리 부모님들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이제 곧 올자두가 나올 시기가 가까워 오고 있습니다. 상큼 달콤한 그맛이 떠오르는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여름 나기 준비를 대를이어 하시고 있어 본받을가 합니다. 보내는 마음과, 받는 고마음이 전해집니다. 저도 어린시절 집안에 있는 배나무의 배가 익기도 전에 많이 따먹은 기억이 납니다. 효가 흐르는 글 잘 읽었습니다.
자식이 좋아하는 것은 부모는 무엇이든 다 내어주고 싶어 하시지요. '너를 위하여 나 살거니 소중한 건 모두 너에게 주마,이미 준 것은 잊어버리고 못다준 사랑만을 기억하리라, 하는 김남조 시인의 시가 생각나는 아버지의 선물입니다. 도시에서만 살았던 저는 여름 나기 준비로 우물 청소를 한다는 것을 처음 알았네요. 아버지 봇짐 속에 담겨 있던 자두는 그냥 자두가 아니고 사랑이지요. 그 사랑을 또 대물림하시며 아버님을 그리워하시는 마음이 엿보입니다.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아버님의 여름자두선물 자루에는 사랑이 가득합니다.그리고 그 사랑을 헤아리는 선생님의 마음도 효심이 가득하십니다.
자녀에게 줄 선물을 준비하시는 선생님의 행복한 고민 그 자체가 행복이겠지요
저는 해마다 이때즘 되면 시어머니께서 제가 좋아하는 콩잎물김치를 담궈서 주십니다. 시어머님이 돌아가시면 많이 생각날것 같습니다
나의 고향집, 아름드리 고목과 깊은 샘물, 감나무 살구나무 대나무 그리고 드물게도 청포도 두 그루가 담장안에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 그걸 쳐다보며 침을 흘리게 하던 기억은 누구나 겪었던 일로 옛날을 회상하게 합니다. 끝없는 내리 사랑의 추억이 새롭습니다. 글을 읽으며 나를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흐뭇한 내리 선물 이야기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최상순드림
초여름이면 고향 뒷집 복숭아 과수원을 지날 때 내가 "할아버지 복숭 하나만 주이소"라고 하면 몇개를 따 주시며 엣다 잘 먹어라 하던 생각이 납니다. 어릴적 아버지의 자식 사랑이 묻어나는 정겨운 글 잘 읽었습니다. 농촌에서만 보는 아름다운 정경입니다.
눈물이 핑글 돕니다. 아드님이 좋아하시는 자두를 봇짐속에 넣어오시는 아버지, 아버지께서 가지고오신 그 자두를 맛있게 잡수시는 선생님, 아름다운 모습이 가슴 찡하게 울림니다. 그리고 내리사랑으로 자식에게 아버님의 정성을 그대로 내려주시는 선생님 여기에 효의 교육이 뭐 필요하겠습니까? 보고 들은대로 그대로 전달되어 행복한 가족관계가 형성됨은 효의 흐름이라 생각합니다.
어릴 적 자두에 엮인 추억 이야기를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추억과 좋은 글 많이 써십시오.
우물청소와 풋자두 이야기... 고향집에 얽힌 추억의 한 페이지를 풀어주셨습니다. 아버님의 사랑이 대를 이어 또 다른 모습으로 전해지고 있어 감동적입니다. 초여름의 상큼함이 자두맛처럼 전해옵니다. 잘 읽었습니다.
유년시절 자랐던 고향집 모습이 수채화 처럼 지나갑니다. 그 곳에 자두나무가 여름의 선물의 주인공이 됏군요. 자두를 통한 부친의 정이 훗날 자녀들에게 전달되는 이야기 가슴 뿌듯합니다. 이 전통이 대대손손 이어지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