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 결혼식
조 흥 제
영남대학교 이동순교수가 ‘백석시전집’을 내서 백석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자 모르는 여성에게서 전화가 왔다. 작품 속에 있는 ‘자야’가 자기라고 하면서 만나자고 했다. 이 교수도 작중 인물을 만날 수 있다니 가슴이 뛰었다. 그녀를 만난 이교수는 ‘철 없던 시절 백석과의 뜨거웠던 사랑과 헤어진 가슴 아픈 사연’을 들었다. 이 교수는 그것을 글로 쓰라고 했지만 자야씨는 자신이 없다고 했다. 하지만 그녀는 오래 전에 이미 수필로 등단한 경력이 있어서 적극적으로 권하였다. 자야씨도 마지못해 78세의 노구를 이끌고 혼신의 힘을 다해 1,000매를 써 보냈다. 이교수가 다듬어서 ‘내 사랑 백석(김자야 지음, 문학동네 펴냄)’이라는 책명으 빛을 보게 해 주었다.
그 책에는 김자야씨가 20대 기생(妓生)이었을 때 시인 백석과 뜨거운 사랑을 하면서 3년 여 동안 같이 살았지만 신분 차이로 결혼을 할 수 없어서 헤어진 후, 일생을 백석을 생각하면서 산 ’짧은 만남, 긴 그리움‘이 담겼다.
김자야씨는 서울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집은 사기꾼에게 빼앗겨 길거리에 나 앉게 되었다. 동네 방 하나를 얻어 여섯 식구가 살면서 어머니가 삯 바느질을 하여 근근이 먹고 살았다. 자야는 입을 하나라도 더는 것이 어머니를 도와 드리는 거라고 생각하여 16세 때 기생이 되었다.
백석은 일본 아오야마 학원 전문부에서 영어를 전공하고 함흥 영생고보 영어 선생님으로 부임해서 기생까지 불러 거창하게 신고식을 했다. 거기에 나온 기생이 선녀같이 예뻤다. 백석은 그녀를 옆 자리에 앉히고 손을 덥석 잡으면서 ‘마누라, 오늘부터 당신은 나의 영원한 마누라야. 죽기 전엔 우리 사이에 이별은 없어요.’하는 것이 아닌가. 처음 보는 여자에게 더구나 천한 기생에게 그런 말을 하다니 백석은 제 정신이 아니었던 가 보다. 기생이 보니 잘 생긴 외모에 시인(사슴 출간)과 영어 선생님이라니 사귀고 싶었다.
백석은 26세, 기생은 22세였으니 한창 물 오를 나이였다. 백석은 기생에게 ‘자야’라는 아명을 지어 주었다. 그때 백석의 부모가 아들을 불러서 양가집 규수와 결혼을 시켰다. 본인의 의사는 조금도 반영되지 않았다. 그래서 신방에서 등을 보이고 하루 저녁 자고는 이튿날 득달같이 자야에게로 달려 왔다. 백석은 신부를 버리고 온 것이 마음에 걸렸던지 자야에게 만주로 가자고 했다. 하지만 자야는 만주에 가면 백석의 일생을 망칠 것 같아 말도 안 하고 고향인 서울로 도망 왔다. 백석은 어떻게 알고 찾아 와서 방학 때면 머물렀다. 어느 날은 방학도 아닌데 와서 어떻게 왔느냐고 물었더니 축구부 감독으로 왔다고 했다. 중학교 전국축구대회가 서울운동장에서 있었는데 선수들을 여관에 투숙시키고 감독은 곧바로 자야에게로 달려 와 선수들을 방치했다. 함흥 촌놈들은 번화한 서울 거리를 쏘다니다 단속하는 선생님께 걸렸다. 그 사실이 본교에 알려지자 벌집을 쑤셔 놓은 듯 했다. 결국 백석은 영생여고보로 좌천됐다. 방학 때 백석은 자야네 집으로 와서 학교에 사표를 내고 직장은 전에 다니던 조선일보사로 옮겼다.
백석의 부모는 또 백석을 불러 두 번째 결혼을 시켰으나 먼젓번과 같았다. 그러자 아들의 친구를 시켜 자야에게 백석을 놓아 주라고 했다. 아무리 둘 사이가 좋아도 기생은 양반과 결혼시킬 수 없으니 어쩌겠는가. 자야가 고민에 휩싸였을 때 중국 상해에 살던 친구가 다니러 왔다. 중국 구경 가자고 하여 따라 나섰다. 인당수 푸른 물에 풍덩 몸을 던진 심청과 같이 황해에 빠져 죽을 결심이었다. 그러나 배에서 친구가 놓아 주지 않아 기회를 놓쳤다. 자야는 상해 구경을 하고 달포 만에 서울로 돌아왔다.
방안에 들어서니 백석에게서 온 편지가 책상에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그날 저녁 또 백석이 와서 하는 말이 만주로 가게 되었다면서 같이 가자고 했다. 자야가 완강히 거절했더니 백석은 ‘우리 사이는 이제 끝이야’하고 고함을 지르면서 문을 쾅 닫고 나갔다. 백석이 만주로 간 후에도 자야는 인편에 소식을 종종 들었는데 자리를 못 잡고 고생하고 있다고 했다. 그의 대표 시 중 하나인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南新義州 柳洞 朴時逢方)’이 그때 쓰여졌다.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추운 겨울 밤/ 어느 목수네 집 헌 삿을 깐 방에서 살았다…’
자야는 그 시를 읽고 대성통곡 했다, 시를 이해하려면 전후 사정을 알아야 하는가 보다. 자야는 솜을 두툼하게 둔 한복 한 벌과 검은 두루마기를 해 보냈다. 백석은 그 옷을 입고 신나게 다녔다고 한다.
광복 후 백석은 서울에 와서 김자야씨를 찾았으나 만나지 못하자 북한 고향으로 갔다. 과수원 일을 하다 조만식 선생의 요청으로 평양에 와서 조선 민주당의 일을 돌보았다. 국군이 평안도를 수복했을 때 주민들이 그를 정주 군수로 추대한 것으로 봐서 골수 공산주의자는 아니었던가 보다. 그 후 김일성대학에서 영어와 러시아어를 강의했다. 백석이 일생동안 혼자 살지는 않았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첫 사랑의 연인인 자야를 잊지는 않았을 것이다.
김자야씨는 성북동에 대원각이라는 요정을 차려 큰 돈을 벌었다. 대원각은 삼청각, 선운각과 함께 서울의 3대 요정 중 하나다. 1997년 백석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자야씨는 그의 명복을 빌고자 법정스님에게 대원각을 시주하였고, 법정스님은 대원각을 ‘길상사’라는 사찰로 만들고 자야씨에게는 ‘길상화’라는 법명과 목탁 한 개를 주었다. 대원각을 요즘 돈으로 환산하면 1,000억 원대라는 설도 있다.
그뿐 아니라 2억 원의 기금을 마련하여 ‘백석문학상’도 제정하였다. 백석의 존재를 한국문단에서 영원히 잊혀 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기왕에 백석의 문학적 업적을 기리고자 했다면 대원각도 문학상 기금으로 내 놓았다면 더 좋았을 것을.
백석은 1996년에, 자야는 1999년에 저 세상으로 갔다. 우리의 풍습에 청춘남녀가 사랑을 하다 이루지 못하고 죽으면 영혼결혼식을 시켜 주었다. 백석과 자야는 비록 늙어서 죽었을지언정 평생을 그리워하였으니 이승에서의 한(恨)을 저승에서나마 이루어 살라고 영혼결혼식이라도 올려 주고 싶다. 우리 문단에 끼친 공로가 크니 문단에서 그 행사를 주선했으면 하는 마음이 든다.
첫댓글 이생진님의 내가 백석이 되어 라는 시에서는 살아서 못만난 두사람이 죽어서 눈오는 길상사
뒷마당에서 까치가 울던날 만나지요~!
아름답고슬픈사랑이야기 머물다 갑니다!!
김자야씨는 비록 기적에 몸 담고 있지만 영혼은 깨끗한 분입니다. 권번에서 가르쳐 주셨던 하규일 선생님이 감옥에 갇히자 일본 유학 중에 돌아 와 함흥까지 가서 면회를 신청했지만 안 되어 다시 기생이 되어 면회코자 했지만 안 되어 선생님이 돌아 가신 후 선생님 일대기와 가르쳐 주셨던 노래를 책으로 만들었습니다. 백석도 그때 함흥에서 만났습니다.
감동이라고 하지요?
사랑하는 사이라면 최소한 이 정도는 되어야 하지요. 조흥제 운영이사님!
고맙습니다. 잘지내시지요?
나총장님 출판기념회 때 수고 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ㅎㅎ. 다 아는 이야기지만 백석과 자야의 러브스토리는 읽을 때마다 마음이 찡합니다.
선생님. 올려주신 글 잘 읽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