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2,28ㄱㄷ-34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2,28ㄱㄷ-34
그때에 28 율법 학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 하고 물었다.
29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30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31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32 그러자 율법 학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훌륭하십니다, 스승님.
‘그분은 한 분뿐이시고 그 밖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시니,
과연 옳은 말씀이십니다.
33 또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
34 예수님께서는 그가 슬기롭게 대답하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하고 이르셨다.
그 뒤에는 어느 누구도 감히 그분께 묻지 못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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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모든 율법을 종합하는 사랑의 이중 계명을 가르치십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자기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안다면, 이 두 계명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인간에게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은 거의 본성과도 같아 이겨 낼 수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다른 이를 사랑할 때도 그 사랑 안에는 언제나 자신을 향하는 사랑이 섞여 있습니다. “너를 사랑한다.”라고 말하는 그 순간조차도 ‘너’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나’입니다. 프랑수아 바리용 신부는 인간의 근원적인 자기애(自己愛)와, 그로 말미암아 순수하게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는 무능함을 ‘원죄’로 봅니다. 상대방이 나에게 전부일 수 없게 하는 ‘자신을 향한 사랑’이 바로 원죄입니다(『흔들리지 않는 신앙』, 47-48면 참조).
자기애를 이겨 내려면 끊임없이 하느님을 중심에 두려고 노력하여야 합니다. 자기중심적인 사람들은 하느님과 이웃을 자신의 필요에 따라 이용하거나 배제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중심에 두었을 때 그 누구도 결코 도구화되거나 소외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다른 사람을 향하는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첫 번째 계명을 충실히 지키면, 이웃을 사랑하라는 두 번째 계명이 자연스럽게 실현됩니다.
이러한 삶이 결국 자기 자신을 참되게 사랑하는 삶입니다. 사랑으로 창조되고 사랑으로 충만하여지는 인간은, 순수하고 참된 사랑을 할 때 본모습을 찾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을 참으로 사랑하고 잘 돌보려면 이기주의적인 자기애에서 벗어나, 하느님과 이웃을 향한 순수한 사랑의 시선을 찾아야 합니다. 자기애를 버리고 하느님을 향할 때, 진정으로 이웃을 사랑하고 자신을 사랑할 수 있으며 이것이 바로 하느님 사랑의 신비입니다
(최정훈 바오로 신부)
오늘의 명언: 가장 바쁜 사람이 가장 많은 시간을 가진다. 부지런히 노력하는 사람이 결국 많은 대가를 얻는다 (알렉산드라 피네).
(스펜서 존스).
사진설명: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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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오늘의 명언: 가장 바쁜 사람이 가장 많은 시간을 가진다.
부지런히 노력하는 사람이 결국 많은 대가를 얻는다
(알렉산드라 피네). (스펜서 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