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와 해방, 한국전쟁의 혼란 속에 명맥이 끊긴 우리 산하에 대한 애정을 다시 지핀 이는 누구였을까? 성우였다가 산악인, 고지도 연구가로 전향한 이우형(2001년 별세)이었다. 1980년 인사동의 고서점에서 신경준의 '산경표'를 우연히 접하고 변변한 측량 장비도 없던 선조가 너무도 정확하게 우리 국토의 진면목을 짚어낸 것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그런데도 내로라하는 산악인조차 그의 이름 석 자 한 번 제대로 들어본 적 없다는 말을 서슴찮으니 통탄할 일이다.
자하(紫霞) 신경수(申京秀)가 이우형이 세상을 떠난 지 20년이 되는 지난해 해에 고인과 함께 지도를 제작해 온 최선웅이 2004년 제주산악회 창립 40주년 특집호에 기고한 글 '바람같이 살다간 이우형'을 토대로 정리한 이우형의 삶을 여러분께 소개하려 한다.
이우형은 산악계와 지도계에서 ‘현대판 김정호’, ‘고지도 제작자’로 불린다. 서울시산악조난구조대 대장을 역임하고 평생 출판사를 하며 등산관련 서적과 지도를 제작하고 '산경표'와 '대동여지도'에 바탕한 산줄기를 답사, 지도를 제작 배포해 대한민국 등산 문화와 인문지리 역사에 기여한 공로가 지대하다.
1935년 12월 30일 은행원 부친 아래 부산 동래에서 8남매 가운데 다섯 째로 태어났는데 실제로는 당시 부친 직장이 광주여서 그곳에서 출생했을 것으로 보인다. 초등학교 입학했을 때 대동아 전쟁이 일어나 학교 마당에 밭을 일구고 군복 단추를 다는 노역에 동원됐다고 했다. 창씨개명을 거부해 은행에서 쫒겨난 부친을 따라 서울로 이사, 1947년 3월 아현초등학교를 졸업했다.한국전쟁을 피해 부산으로 피란했고, 1953년 서울 용산고를 4회로 졸업한 뒤 성균관대 정치학과에 입학했다. 같은 해 12월 기독교중앙방송국 제1기 성우 공채에 당당히 합격했다.
군대를 다녀온 뒤 1958년 3월~1962년 한국일보 문화부 기자로 일한 뒤 여러 방송국을 돌며 프리랜서 성우로 활약했다. 어려서부터 손재주가 좋아 중학교 때 교회 주보를 프린터로 컬러판 인쇄를 했고 대학교 때도 학보를 만들었고 군에서도 출판과 방송 일을 했다. 1967년 6월 대한민국 최초로 등산백과사전인 등산수첩을 펴냈다.
1969년 5월 잡지 '등산'을 창간한 뒤 다음달 잡지 '산수'를 창간, 1000부 정도를 자비로 출간했다. 창간 6월호와 7월호, 8월호를 내고 9월과 10월 합본호를 낸 뒤 폐간했다. 동아방송국 성우로 일하면서도 지도 제작에 매달렸다.
1969년 10월 23일 이화여대를 졸업한 권정자와 결혼했지만 역마살 탓인지 집을 비우기 일쑤였다. 그의 부인은 많은 사람들을 위하는 일이란 것을 알고 내조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재경, 재윤 두 딸의 딸바보 아빠였다. 술과 담배를 좋아하고 술자리를 사양하거나 일찍 끝내는 법이 없었으며 , 지도와 산을 주제로 이야기를 꺼내면 시간이 가는 줄 몰랐다.
1971년부터 도봉산장을 근거지로 매주 토요일 구조 활동을 했는데 본인 호주머니를 터는 수밖에 없었다. 이듬해 2월 서울시산악연맹 산악조난구조대 초대 회장이 됐다. 1973년
중앙지도사에서 지도 편집을 맡아 제주 경주 관광지도를 출간했다. 잡지 ‘산악인’도 전주가 손을 떼는 바람에 한국산악회 회장이던 노산 이은상의 동생 이신상에게 넘겼으나 일년을 겨우 버티다 정계 인물들의 모임인 신우회로 넘어가자 손을 떼고 한국소문사에서 일본지도 제작을 했다.
산악인 창간호
1974년 12월 서울시산악연맹과 대한적십자사 서울지사의 합동구조대 회장이 됐고, 이듬해 1월 제주적십자사 산악안전대의 훈련 강사로 초청 받았다. 1977년 최선웅과 함께 제주도 지도를 제작했고, 이듬해 8월 1일 세계문화사에서 종합제주도총도를 발간했다. 자신의 손을 만든 첫 지도였고, 국내 최초의 종합관광지도였다. 제주의 사진작가 고길홍의 사진을 모아 삼다도 사진첩을 부록으로 곁들여 내놓았다.
1979년 4월 종합경주관광총도를 발간한 뒤 성우 생활을 그만 두고 지도 제작에만 전념했다. 다음달 29일 후배 박훈규가 에베레스트 등산 도중 동상에 걸려 서울대병원에 입원하자 친아버지처럼 간호하고 격려해 삶을 포기할 뻔한 후배에게 용기를 북돋웠다.
1980년 1월 17일 서울 중부경찰서에 불법 지도 간행 및 배포 혐의로 구속됐다. 측량법에 민간인이 지도를 배포하려면 국립지리원의 측량 성과 사용 승인을 받아야하는데 그런 법이 있는 줄도 몰랐던 것이다. 소식을 들은 성우협회, 산악계, 관광업계 등에서 진정서를 연일 올리고 신문에도 현대판 김정호를 살리자는 기사가 연일 실려 다음달 4일 기소 유예 처분을 받아 풀려났다. 그 뒤 정식 승인을 받아 제주도총도, 경주총도를 재간행했다.
1980년 인사동 고서점에서 주인과 얘기를 나누다 1913년 조선광문회에서 발행한 '산경표'를 접하게 됐다. 조선 영조때 어문학자이면서 지리학자였던 여암 신경준의 저서로 알려진 책으로, 우리 산줄기를 알기 쉽게 족보 형식으로 편찬한 지리정보종합서였다. 그는 당시 '대동여지도'를 연구하고 있었는데 김포 들판에 나가 살펴본 결과 두 책 모두 정확히 전통의 산수경 원리를 따르고 있음을 확인했다. 다시 말해 100년의 시차가 있는데도 산경표를 풀어서 지도로 만들면 대동여지도가 되고, 산경표에는 물줄기 얘기는 별로 없지만 우리나라의 모든 물줄기를 설명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즉 산경과 수경은 같은 개념이고 결국은 하나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또 이렇게 '산경표'에 소개된 백두대간을 비롯해 1정간. 13정맥의 우리산줄기 이름들이 없어진 의문을 풀기 위해 일본 국회도서관까지 뒤졌다. 일제는 1900년초 조선의 자원 조사를 위해 지질학자 고토 분지로를 파견했고, 그는 1905년부터 지도 제작을 위해 측량을 시도했는데 우매한 조선 백성들은 영문도 모른채 고용돼 측부 노릇만 했다. 고토 분지로가 귀국해 보고한 보고서에는 엄연히 우리가 현재 쓰는 태백산맥, 소백산맥 등의 이름이 담겨 있었다.
분개한 그는 이 사실을 세간에 널리 알리고 우리 산줄기 찾기에 나섰다. 이때부터 백두대간이 알려지기 시작했고, 산 하나로만 이끌던 안내산악회부터 백두대간 종주 산행에 나서기 시작했다. 여러 직장산악회로 옮겨 붙어 한동안 붐을 이뤘다.
현재는 백두대간보호에관한법률까지 제정됐지만 많은 이들이 여전히 태백산맥, 소백산맥을 그대로 쓰고 있다. 이우형이 내놓은 새로운 지도 '산경도'는 백두대간을 비롯해 1정간, 13정맥으로 우리 산줄기를 실었다. 산맥이란 개념을 쓰면 안 된다는 뜻이다. 학계나 정부에서도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는 상황에 그의 노력은 돋보일 수밖에 없었다. 불행한 것은 여전히 학계나 정부, 심지어 산악계에서도 그의 유지를 올바로 이어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1980년 10월 고상돈의 유해가 제주도 1100고지로 이장할 때 만사를 제쳐놓고 일을 처리했다. 이듬해 1월 제주산악회 명예회원으로 추대됐고, 그 뒤 제주에서 구하기 어려웠던 자일, 카라비너 등을 구해 보냈다. 같은 해 12월 충주호 수몰로 인한 중원문화권 유적 조사에 참여한 뒤 중원문화권 유적 분포 지도를 제작했다.
1983년 2월 도서출판 광우당을 차려 안경호와 공저로 170개 산을 묶어 ‘산으로 가는 길’이란 책자를 발간했다. 인사동 고서점 통문관에서 대동여지도 원본을 빌려와 제판용 카메라로 촬영하고 훼손되거나 가필된 부분은 다른 본과 일일이 비교하며 원도 복원에 온힘을 기울였다. 1984년 제주산악회 20주년 행사때 손수 제작한 한라산 등산 지도 100부를 기증했다.
1985년 12월 20일 대동여지도가 복간됐다. 김정호가 만든 지 124년 만의 일이다. 목판본보다 더 선명했고 완벽했다. 100부를 만들어 신세 진 이들에게 나눠주고, 나머지는 9만 5000원에 판매했다. 지금은 희귀본이 돼 고서점에서 상당히 비싼 값에 팔리고 있다. 이 일 때문에 고지도 연구가로 불리게 됐는데 쌍용그룹 김석원 회장이 그를 불러 한지로 200부를 더 만들어 자신의 인삿말을 붙여 배포하게 했다.
1986년 1월 이우형의 권유로 월간 ‘스포츠레저’에 백두대간이라는 용어가 처음으로 소개된다. 언론 매체 첫 사례였다. 같은 해 7월 24일 조선일보에 ‘국내 산맥 이름 일제가 바꿨다’ 제목의 기사가 실린 뒤 대간과 정간, 정맥 개념이 전파되기 시작했다
1987년 중고등학교 사회과부도와 지리부도를 제작했다. 1990년 10월 대동여지도 목판본 제작 전에 필사본으로 제작한 동여도와 대동여지도를 비교한 결과, 대동여지도에 누락된 7400여개 지명을 3분의 2로 축소한 대동여지도 영인본에 제자리를 찾아 별색 활자로 첨쇄한 복간본으로 제작하고 연구한 성과를 한데 모아 ‘대동여지도의독도’를 펴냈다. 그는 이책에서 ‘고산자의 대동여지도는 한 시대의 문화와 과학을 집약한 것으로 문헌과 사료로서의 가치도 중요하지만 우리 조상의 얼과 살아있는 우리땅의 지도임을 보여주는 것으로 인식해야 한다’고 갈파했다.
1993년 ‘우리땅의 산과 산줄기 고(考)“를 발간했다. 3년 남짓 초등학교 교과서 국어읽기 김정호 단원의 오류를 고치고자 부단한 노력 끝에 바로잡았다. 생몰 연대를 알수 없는 김정호의 제사를 모시기로 하고 신촌 봉원사에서 박용기, 이상태, 성남해, 최선웅 등이 모여 구혼제를 올렸다. 1997년 11월 8일 삼성출판박물관에서 전통 제례의식에 따라 김정호 제사가 치러졌다. 성신여대 양보경 박사의 ‘김정호선생의 지지와 학문’, 국사편찬위원회 이상태 박사의 ‘김정호의 생애와 사상’, 한국교육개발원 국어교육연구부장인 이인제 박사의 ‘초등학교의 국어읽기 김정호 단원의 개정’이란 주제의 강연이 있었다.
사람 좋아하고 술 좋아하는 그가 돈을 벌 리 만무했다. 미국 사는 형이 불러들였으나 차일피일 미루기만 했다. 나이 육십을 넘겨 출판사 일이 힘에 부치자 천일빌딩의 사무실을 정리했고, 꼭 필요한 자료만 집으로 가져갔고, 많은 책과 자료는 대동여지도 복간에 참여했던 김규원에게 맡기고, 등산장비 등은 제주도에 있는 박훈규에게 보냈다.
1999년 5월 24일 마지막 정리를 마친 그는 그동안 연구하고 구상한 것을 집대성, ‘우리땅 산줄기 물줄기’를 집필하다가 그는 일생에 가장 견디기 힘든 일을 당했다. 고지도 연구를 함께 했던 성남해로부터 고소를 당했다. 내용은 국사편찬위원인 이상태의 ‘한국고지도의발달사’ 책과 이우형이 펴낸 ‘대동여지도의독도’란 책이 자신의 연구 성과를 표절했으며 심지어 이상태와 이우형이 자신을 비하하고 인생을 망쳤다는 황당한 내용이었다.
이 일에 충격을 받아 그의 건강은 급격히 나빠져 원고 집필도 힘들어 후배 민병준에게 대필도 시켰지만 결국 병원에 입원하게 됐다. 2001년 4월 29일 68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산악계, 지도업계, 고지도계, 방송계, 문화계 등 다양한 조문객들이 찾아와 앞으로 고지도를 정리하고 고증할 때 꼭 계셔야할 분인데 너무 빨리 가셨다고 아쉬워했다. 최선웅은 뒤에 '이우형기념사업회'를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