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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인되어야 할 성구>
1) 인자야 내가 네게 주는 이 두루마리를 네 배에 넣으며 네 창자에 채우라
하시기에 내가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3:3)
<본문 설교>
오늘도 행복한 주일 아침입니다. 오늘 주일이 더욱 새로운건, 우리를 새롭게 하시기 위해 예수님이 이땅에 오신 날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죄를 위해,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우리의 구원을 위해, 우리의 행복을 위해, 자기 자신을 버리신 우리 예수님이 계시기에, 우리의 오늘은 있고, 우리의 내일이 있는줄 믿습니다. 이제 우리 함께, 우리를 구원해 주시기 위해 이땅에 오신 예수님을 경배합시다. 할렐루야~! 아멘, 아멘, 아멘!
오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에스겔서 입니다. 에스겔서는 히브리 성경에서 책의 주인공의 이름을 따라 "예헤즈켈"이라고 이름 했는데, 그 뜻은 '하나님께서 강하게 하신다' 입니다. 이처럼 이 책의 중심인물(실제로 에스겔이란 이름은 본서에서 두번 밖에 나오지 않지만)을 책명으로 기록하는 경우는 히브리 성경의 첫 구절을 제목으로 사용하는 경우와 함께 전통적인 방법이었습니다.
에스겔서는 임박한 나라의 멸망과 바벨론 포로에 대한 민족적 위기를 보여 주는 면에서, 예레미야서와 같은 시대를 서술하고 있다고 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에스겔서에서 느껴지는 분위기는, 폭풍우가 지나간 뒤의 평정을 느끼게 합니다. 즉 본서에는 한 시대의 격동적 위기는 파멸로 끝나고, 새로운 생활에 어느 정도 적응해 가면서 계약 공동체의 새로운 모색을 추구하는 선지자의 의도가 깃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선지자는 유다의 포로 생활을 민족의 순수성과 단결력을 위해 하나님께서 연단하신 것이며, 하나님을 배반하는 길에서 돌아서게 하려는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라고 선포합니다. 또한 포로기의 이스라엘은 성전이 없는 가운데도 공동체의 결속은 더욱 강화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즉 나라가 멸망하고, 이방의 하늘 아래 처량한 신세가 되어버린 그들에게, 계약 공동체의 중심인 성전마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결속력과 민족의 순수성을 지키려는 공동체의 노력은 에스겔서에서 견지되는 정신이기도 합니다.
그럼 에스겔서를 통한 중심 메시지를 요약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패역한 시대를 향해 선지자를 파송하는 내용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가히 하나님께 대한 배반과 불순종의 역사라 할 만하다고 볼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족속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열방중에서 택하여 선민으로 삼아 주시고, 이방인들이 누리지 못한 엄청난 은혜와 특권을 허락하셨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배반하고 불순종하였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하여 각 시대마다 선지자들을 보내어 책망하기도 하고 징계하기도 하셨으나, 그들은 패역한 습성을 버리지는 못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이방 땅에 포로로 잡혀가는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고, 심지어 그들은 이방 땅에서 포로 생활을 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를 거부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이 얼마나 패역한 모습의 극치입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 족속의 패역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다시금 선지자를 파송하여, 자신의 말씀을 대언하며, 이스라엘 족속에게 다시금 돌아오도록 촉구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는 이스라엘 족속의 패역함과 대조되는 것으로서, 자기 백성을 결단코 포기할 줄 모르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긍흉의 극치라고 할수 있는 것입니다. 정녕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포기할 줄 모르시는 무한한 사랑을 소유하신 분이십니다. 자신의 백성은 자신을 버려도 하나님은 그들을 버리시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패역한 자기 백성이 돌이킬 때까지 기다리시며 자신의 말씀에 순종할 때까지 자신의 종을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포기할 줄 모르는 하나님의 이러한 사랑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얼마나 많이 이스라엘 족속의 패역함을 닮아 있습니까? 이스라엘 족속의 패역함을 비난하면서도 우리는 얼마나 자주 그들의 자리에 서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우리도 외면하거나 포기하지 않으시고, 계속해서 자신의 종들을 끊임없이 보내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에 응답하여야 합니다. 하나님께로 돌이켜야 합니다. 모든 패역함을 버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그의 기뻐하는 백성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 선민의 끝없는 타락에 대한 직설적인 지적에 대한 내용입니다
3:16-24:27은 남유다 왕국과 선민의 수도인 예루살렘이 저지른 패역한 범죄를 조목조목 밝히고, 그에 따른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다양한 각도에서 거듭하여 예언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특별히 이 부분을 대할 때 놀라게 되는 것은, 선민의 타락된 충격적 실상입니다. 남유다 백성들은 남유다 땅과 예루살렘 곳곳, 심지어 가장 거룩하게 보존되어야 할 하나님의 성전까지도, 이방 우상을 위한 만신전(萬神展, Pantheon)으로 만들어, 가장 추악하고 가증스런 곳으로 만들어 버렸던 것입니다. 어디 이뿐입니까? 남유다 백성들은 하나님 대신 이방 강대국들을 의지하였고, 살인과 간음과 탈취와 압제,폭력 등 온갖 도덕적 악행을 저지르기에 빨랐던 것입니다. 실로 선민의 타락은 그들이 과연 선민인지, 의구심을 가지게 할 정도로, 끝을 모를 지경까지 이르렀습니다. 에스겔은 선민의 이러한 타락의 실상을 조금도 숨기거나 미화하지 않고 그대로 직설적이면서도 아주 진솔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는 선민의 치부를 드러내어 그들로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거나,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정당성을 강조하기 위한 데에 궁극적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선민으로 하여금 자신들의 죄악된 실상을 분명하게 직시하게 함으로써, 결국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하는 데 궁극적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울러 선민의 끝없는 타락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버리거나 포기하지 않고 그들을 징계한 후에 다시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원대한 사랑을 드러내는 데 그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하나님의 선민인 우리는 구약 선민이었던 남유다 백성들과 얼마나 다른가요? 우리도 끝없이 타락하기는 남유다 백성들과 다를 것이 없지 않습니까? 자신의 모습을 솔직하고도 진지하게 돌아본다면 우리 역시 남유다 백성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부끄러운 사실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끝없이 타락한 구약 선민을 완전히 버리거나 포기하지 않으신 것처럼, 신약 선민인 성도 또한 완전히 버리거나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구약 선민의 타락에 대하여 그들을 엄중하게 징계하신 것처럼, 우리의 타락에 대하여도 엄중하게 징계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구약 선민을 회복시키신 것처럼, 우리를 징계하신 후에 다시 회복시키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때 두려워하지 않을 수는 없으나, 구원의 소망을 버려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께서 회복시키실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징계를 받을 때에 죄악에서 돌이키고 인내로써 징계를 극복해야 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셋째, 이중적 관점에서의 션민의 때늦은 각성에 대한 경고입니다
에스겔서에서 가장 특징적 말씀은 '그 때에야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6:7을 필두로 하여 본서에서 무려 70회 가량 반복적으로 사용된 말씀으로, 본서의 핵심 주제 또는 목적을 반영한 것이기도 합니다. 이 말씀은 특히 선민에 대한 심판 예언 부분에서 집중하여 나타나고 있는 바, 하나님께서 선민을 심판 하시는 목적을 밝히는 문구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상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만물의 근원자요 창조자로서 참되시며 유일하신 신이시며, 영원히 살아계셔서, 자신의 언약을 반드시 이루시는 분임을 비로소 깨닫게 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때에야’ 비로소 선민이 하나님을 여호와인 줄 알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그 때’ 란 과연 언제를 말하는것입니까? 그 때는 선민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때 입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후에야 비로소, 하나님께서 그들이 섬기던 우상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영원히 살아계시며 자신의 언약을 이행하시는 진정한 신이심을 각성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선민의 때늦은 각성을 말씀하는 이 문구에는 두 가지의 의미가 동시에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 첫째는 경고의 의미입니다. 즉 하나님을 참되고 유일한 신으로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배반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비록 심판을 통해서이기는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에 대하여 바르게 알게 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타락한 선민을 심판하시는 것은, 그들의 죄악을 응징하는 데 그 일차적 목적이있습니다.
그러나 타락한 선민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궁극적 목적은 그들로, 하나님을 여호와로 알고 섬기게 하는 데 있습니다 . 이는 하나님께서 인생들 각자 모두에게 기대하시는 소망이기도 합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인생들에게 때로는 은혜를, 때로는 심판을 베푸시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와이심을 알고 그 지식에 근거하여 삶을 영위해야 하는 것입니다. 인생의 모든 불행은 하나님을 여호와로 알지 못하는데 그 원인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여호와로 알지 못한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에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을 여호와로 아는 때늦은 각성을 하게 될 것입니다.
네째, 선민을 중심으로 한 여호와의 역사 전개에 대한 내용입니다
유다 주변의 열방들에 대한 심판 예언은, 이들 모든 나라에 대한 심판의 공통적 원인으로 제시하고 있는, 그들이 선민에 대하여 적대적 태도를 취하였거나, 부정적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입니다 . 예를 들면 암몬과 모압과 에돔과 블레셋은 남유다 멸망 전후를 즈음하여 남유다를 적대하였거나 남유다의 멸망을 기뻐하였을 뿐만 아니라, 역사 속에서도 끊임없이 선민을 괴롭혀온 나라들입니다. 그리고 두로와 시돈은 상업적 이유로 유다의 멸망을 기뻐하였고, 선민의 우상 숭배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또한 애굽은 유다를 유혹하여 하나님을 배반하고 자신들을 의지하게 하였고, 정작 유다가 위기에 처하였을 때에는 돕지 아니하여, 유다가 멸망하는데 결정적 원인을 제공하기도 했습니다. 바로 이와 같은 이유들로 하나님은 이들 나라들올 심판하시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들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들인가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은 선민을 중심으로 역사(歷史)를 전개 해 나가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민의 타락과 그들에 대한 심판에도 불구하고 긍극적으로는 그들을 중심으로 역사를 전개하십니다. 실로 선민은 세상 역사의 중심인 것입니다. 비록 타락하여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지 못하고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심판올 받는다고 해도, 선민이 세상 역사의 중심이라는 사실 자체는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하나님 자신이 택한 백성으로서, 신약 선민인 교회와 성도들을 중심으로 역사를 전개하여 나가시기 때문입니다. 비록 교회가 초라하여 보잘것없고 심지어는 타락하여, 그들을 심판하신다고 해도, 하나님은 교회와 성도들을 중심에 두고, 역사를 전개해 나가십니다. 그러므로 교회와 성도들은 자신이 역사의 중심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역사 속에서 책임 있는 행동과 당당함을 함께 지녀야 할 것입니다.
다섯째, 단독자로서의 각 개인을 향한 심판과 구원의 철저한 개별성을 말씀하십니다
왕국 말기의 유다 백성들은 자신들이 처한 상황과 관련하여 두 가지의 매우 잘못된 생각과 태도를 취했습니다. 그중 하나는 당연한 위기와 자신들이 당하고 있는 고통은, 자신들의 죄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그들 조상들의 죄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생각과 태도를 보이며, 하나님께서 공평하지 않다고 불평한 것입니다. 그들의 이러한 생각과 태도는 그틀 사이에 마치 속담같이 회자되었던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그의 아들의 이가 시다” 는 말에 잘 반영되어 있습니다(18:2:렘31:29). 즉 죄는 조상들이 범하였는데, 그에 대한 징벌은 자신들이 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의 이러한 생각과 태도는 십계명중 제2계명인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출20:5) 라는 말씀을 오해한 데서 비롯된 것으로 여겨집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아버지와 아들의 영혼의 독립성을 근거로 하여, 각 개인 및 아비와 아들의 사례를 통한 심판의 개별성(個別性) 원칙을 명확하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18:5-32).
실로 모든 사람은 구원과 심판에 대하여 철저하게 단독자(單獨者)로 하나님 앞에 섭니다. 즉 모든 사람은 오로지 자신의 행위에 따라 구원과 심판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의인의 자손이나 자녀가 악을 행하면 심판에 이르고, 악인의 자녀나 자손이 의를 행하면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악한 왕 아하스의 아들인 히스기야가 그 의로 하나님의 인정을 받은 반면, 의로운 왕 히스기야의 아들인 므낫세가 그 악행으로 심판에 이른 사실은, 이에 대한 좋은 실례가 됩니다. 따라서 성도 각자는 하나님 앞에서 단독자로 서 있음을 분명하게 인지하고, 그 자신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을 뿐만 아니라, 온 세대가 다 타락한다고 할지라도, 그 가운데서도 자신을 거룩하게 보존해야 할 것입니다.
여섯째, 구원의 현재성에 대한 말씀입니다
바벨론 땅에 포수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처지와 형편을 비탄해 하며 자포자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에게 허물과 죄가 있고 그로 말미암아 자신들은 그 가운데서 쇠퇴하고 있으며 결국 구원에 이를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의 죄를 인정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은 다만 조상들의 죄가 자기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쳐 그로 말미암아 고통을 당하며, 쇠퇴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그들은 죄와 허물이 자신들 가운데 있고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였기에, 선지자의 회개 촉구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으며, 자신들의 처지를 한탄하며, 자포자기 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동시에 그들은 조상들의 죄로 인하여 자신들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공평하지 못한 분이라고 불평을 일삼았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그들이 고통을 당하는 것은 하나님이 공평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바르지 않기 때문임을 지적하시며 “나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의 길에서 돌이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33:11) 라고 말씀하심으로, 그들의 고통의 원인이 그들의 죄에 있음을 분명하게 하심과 동시에, 그들이 회개하지 않고 여전히 죄 가운데 머물러 있으면 완전한 멸망에 이르게 될 것임을 시사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아울러 비록 과거에 의인이었던 자라도 범죄하면 그의 과거의 의가 그를 구원하지 못하며, 비록 과거에 악인이었던 자라도 회개하고 의를 행하면, 구원을 얻게 됨을 말씀하심으로, 구원은 과거의 상태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상태에 따라 결정되는 일임을 분명히 하셨습니다(33:12-20). 즉 구원은 하나님의 심판 날을 기준으로 철저하게 현재성(現在性)을 띤다는 것입니다. 이는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서 가져야 할 두 가지 태도를 명확히 제시한 것입니다. 즉 의를 행함에 있어 일시적이 되어서는 안되고, 끝까지 의를 행해야 한다는 것과 더불어 연약함으로 죄를 범하였을 때에는 즉시 회개하고 다시금 의의 길로 돌이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곱째, 선민을 향하신 여호와의 목양의 열정에 대한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양 무리인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을 위하여 세운 목자들과 양들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이방 땅으로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양 무리인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잃어버린 양과 같이 되고 만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들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다시 찾아 목양하시되, 이전의 악한 목자들과는 완전히 다른 한 의로운 목자를 통하여, 그들을 목양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신것입니다(34:1-31). 이는 자기 양에 대한 하나님의 목양의 열정을 잘 보여줍니다. 주님의 잃어버린 양 비유(녹15:3-7) 가 시사하여 주듯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양을 절대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양이 어떠한 처지와 상태에 놓여 있든지, 그틀을 반드시 찾아, 목양하심으로 그들에게 안식을 허락하십니다. 사실 선민의 실패는 하나님께 수치스런 일입니다. 그들의 실패는 곧 하나님의 실패로 비춰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실패하시는 법이 없지만, 선민의 실패는 곧 하나님의 실패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실패한 자신의 양인 이스라엘을 버리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와 같이 실패한 선민을 버리지 않고 다시 찾아 회복시키며, 좋은 꼴로 먹이며, 안식을 누리게 하실 것임을 천명하고 계신 것입니다. 참으로 선민을 향한 하나님의 목양의 열정은 가히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자기 양에 대한 불타는 사랑이 있었기에 우리는 실패를 거듭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망하지 않고, 마침내 다시는 실패가 없는 영원한 구원과 안식에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이사야 선지자는 “남는 자가 예루살렘에서 나오며 피하는 자가 시온 산에서 나올 것임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이다" (사 37: 32) 라고 말씀하고 계시며, 바울 사도는 “너회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 1:7)고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덞째, 심판과 구원에 대한 여호와의 절대 주권과 권능에 대한 내용입니다
에스겔서는 심판과 구원에 대한 예언이 거듭 반복됩니다. 제1-32장까지의 전반부가 심판 예언의 거듭된 반복이라면,제33-48장까지의 후반부는 회복과 구원 예언의 거듭된 반복입니다. 이러한 심판과 구원 예언의 거듭된 기술은 그저 무의미한 반복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렇게 심판과 구원 예언을 거듭하여 반복하는 것은, 그 일이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권능으로 반드시 성취될 일임을 강조하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이는 당시의 선민은 물론, 후대의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약속의 확실성을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 에스겔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에스겔이 선포하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은 에스겔이 선포한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이는 결국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반드시 성취될 것이라는 확실한 증거가 되는것입니다.
에스겔 시대에 많은 약속을 주시고, 그것을 그대로 성취하신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많은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약속들 가운데에는 이미 성취된 것도 있고, 성취 중에 있는 것도 있으며, 아직 성취되지 않은 것들도 있습니다. 특히 아직도 대종말의 때에 성취될 일들은 미래의 일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약속들 또한, 대종말의 때가 이르면,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권능으로 말미암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대로 성취 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에스겔 시대에 주어지고, 역사 속에서 그대로 성취된 하나님의 약속을 보면서, 또한 다른 선지자들에 의해 주어지고, 역사 속에서 분명하게 성취된 하나님의 약속을 보면서,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종말론적 심판과 구원에 대한 약속도 반드시 성취될 것임을 굳게 확신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홉째, 선민은 종말론적 축복의 핵심이며, 그 조건으로서 신앙생활에 대한 방법을 말씀하십니다
제40-48장은 종말론적 선민 왕국에 대한 대환상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종말론적 선민 왕국의 복락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이는 같은 묵시 문학(默示文學)으로서,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에 대한 대환상을 다루는 요한계시록과는 대조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장차 도래한 신천신지(新天新地)와 그안에 건설될, 새 예루살렘의 현란한 영광과 그곳에서 누리게 될 하나님의 백성들의 복락을 구체적으로 보여줍니다. 그에 반해 본서에서는 종말론적 새 성전의 건설과 제사 제도의 회복에만 집중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선민의 종말론적 축복의 핵심이자 조건으로서의 신앙생활 유지를 보다 선명하게 부각시키기 위함입니다. 선민의 종말론적 축복의 핵심은, 하나님 나라에서 그들이 누리는 복락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의 회복입니다. 선민이 하나님 나라에서 누리는 복락은 축복의 원천이신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회복의 자연스런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나라가 멸망하고 성전마저 파괴되는 비참한 운명을 맞아야 했던 근본 원인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에 대한 바른 신앙생활을 유지하지 못한 까닭인 것입니다. 본서 제 40-48장은 바로 그처럼 선민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비참한 운명에 처하게 하였던 원인의 제거라는 측면을 강조하여, 간접적으로 선민의 종말론적 축복 상태를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실로 바른 신앙생활의 유지는 그 자체가 축복의 핵심이자 조건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의 축복을 바라며, 천국의 구체적인 복락을 기대하기에 앞서, 하나님께 대한 바른 신앙생활을 유지 하기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 바른 신앙생활의 유지, 그것이 바로 축복의 핵심이자 조건임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에스겔서를 통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교회인 우리의 성패는 하나님의 영광의 떠남과 돌아옴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에스겔서를 이해하는 중심틀은 '심판과 회복'입니다. 왜 유다와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었을까요? 왜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과 예루살렘을 떠날 수 밖에 없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유다와 예루살렘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왜 유다와 이스라엘은 회복될 수 밖에 없는건가요? 이 이유는 특이한 환상을 통해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다는 것은 곧 하나님이 예루살렘과 성전을 버리셨다는 것이며, 이것은 곧바로 예루살렘과 성전의 심판과 파괴로 이어졌습니다. 하나님 백성의 죄는 하나님의 임재를 떠나게 만든것입니다. 하나님이 떠나시는 것은 하나님 백성에게는 심판인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이 돌아오게 될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약속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맺은 하나님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남은 자를 보존하시며, 남은 자를 모아 다시금 성전을 재건 하시고, 그들과 함께 거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심판이란 하나님의 떠나심이며, 구원과 회복이란 하나님의 돌아오심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럼 하나님의 영광과 임재는 어디에 있을까요? 이것이 바로 에스겔이 우리에게 던지는 중요한 질문입니다. '성령이여 우리에게 임하시옵소서'
결 론
바벨론 포로 사건을 설명하도록 부르심 받은 다른 선지자들과 마찬가지로 에스겔도 백성들의 하나님께 대한 불성실함에 그 원인이 있으며, 따라서 그들이 하나님의 회복된 인간으로 살지 못한데, 그 원인이 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에스겔은 또한 이 재앙 조차도 이스라엘 이야기의 끝은 아니라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도덕적 영적으로 회복시키실 것이고, 결국 이스라엘을 이방에 빛을 전해 주는 데 사용하실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에스겔은 이러한 예언적 후렴구에 다음과 같은 뉘앙스를 더합니다. 즉, 이스라엘의 소명은 하나님의 이름의 거룩함을 드러내는 것이었지만, 그들은그 이름을 “더럽혔고" (거룩하지 않은것으로 취급했고) 하나님은 그들을 회복시키실 때, 열방 앞에서 자신의 이름의 거룩함을 변호하기 위해 역사하셔서, 열방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하실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렇기에 오늘 예수님은 우리에게 오신것입니다. 우리가 더이상 알지 못하기에, 우리에게 에스겔이라는 이름의 뜻처럼
"하나님이 강하게 하신다"는 말씀을 실현시켜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사실을 인정하십니까? 믿으십니까? 믿으셔야 합니다. 우리가 바로 오늘날의 에스겔이며, 선지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제는 더이상 조상탓하지 말고, 내탓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이상은 내탓도 하지 말라고, 예수님은 이 땅에, 우리에게 오신것입니다. 그러니 이제는 어떠한 '탓'도 하지말고, 그냥 내안에만 있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까지도 우리의 부족함을 온전함으로 반전시키시며, 우리를 끝까지 지키실 살아계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여러분들을 사랑하고 계십니다.
함께 기도드리시겠습니다.
<참고 문헌>
"손에 잡히는 구약개론" IVP
"성경개관 구약편" 부흥과개혁사
"ESV스터디바이블" 부흥과개혁사
"위드바이블" 바이블넷
"옥스퍼드 원어 성경대전" 제자원 바이블네트
"구약개론"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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