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1년 잉글랜드 이스트 서식스의 루이스에 있는 강물에 선병질적인 얼굴의 여인이 다가간다. 그녀는 남편과 언니 앞으로 꾹꾹 눌러 써놓은 편지를 봉투에 담아 벽난로 위에 올려 둔다.
59세로 스스로 삶을 접은 시인 겸 소설가 버지니아 울프다. 그녀 이름이 등장하는 가사를 담은 '목마와 숙녀'를 부른 가수 박인희를 오랜만에 방송 인터뷰에서 대면했는데 얼마 전 넷플릭스에 시인의 마지막을 그린 영화 '디 아워스'(2002)가 올라와 공교로웠다. 작품보다 먼저 필립 글래스의 오리지널 사운트트랙으로 깊은 인상이 각인됐다. 시간과 세월의 의미를 돌아보는 이 영화에 음을 잘게 쪼개고 반복해 선율을 펼치는 미니멀리즘 아티스트 필립 글래스의 음악이 쓰이는 것은 너무 당연해 보이고 어울린다. 국내의 한 영화평론가는 '끝없이 반복되는 시간의 매정한 흐름을 묘사하는 데 글래스만큼 적절한 작곡가가 있을까?' 되물었다.
니콜 키드먼이 한사코 죽음을 떠올리는 시인의 우울, 좌절, 낙담을 그리는데 정말 빼어난 연기를 선보인다. 메릴 스트립이 무색할 지경이다. 아카데미상, 영국아카데미(BAFTA), 골든글로브, 미국배우조합 여우주연상을 휩쓸었고, 베를린국제영화제는 세 여주인공 모두에게 여우주연상을 안겼다.
마이클 커닝햄의 1999년 퓰리처상 수상작이 원작인데 스티븐 달드리 감독이 니콜 키드먼, 메릴 스트립, 줄리언 무어, 에드 해리스, 제프 다니엘스 등 쟁쟁한 배우들을 기용해 연출했다. '홈랜드' 클레어 데인즈의 풋풋한 모습을 보는 것은 덤이었다. 원작 소설은 처음에 '세월'로 번역 출간됐다가 영화가 나온 뒤 '디 아워스'로 재출간했다.
1923년 런던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리치먼드에 사는 버지니아 울프(니콜 키드먼)는 소설 '댈러웨이 부인'을 힘겹게 쓰고 있다. (작품이 출간된 것은 1925년이었다) 1949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사는 평범한 전업주부 로라 브라운(줄리언 무어)은 같은 작품을 읽고 있다. 2001년 미국 뉴욕에 사는 작가 클라리사 본(메릴 스트립)은 책을 엮는 일을 하는데 자신을 "댈러웨이 부인"이라고 부르는 남자사람친구를 위해 파티를 열어주려 한다.
영화 초반을 접한 이들은 혼란스럽기만 하다. 세 여성은 어떻게 연결되는 거지? 그러다 차츰 언뜻 안정되고 여유로워 보이는 세 여성의 하루가 아주아주 위태롭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각자 아내와 엄마, 연인으로 스스로를 규정하고 그 의무에 갇혀버린 삶을 영위하고 있을 뿐이란 점을 통감하고 있으며, 자신만의 방과 자기만의 시간을 갖기를 원한다.
영화 중반을 넘으며 관객은 시공간을 달리한 세 여인이 한 소설을 매개로 갑갑한 일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을 친다는 점을 알게 된다. 자연스럽게 씨줄날줄이란 표현을 떠올리게 되는데 국내 한 영화평론가는 '시간의 카펫을 짜는 영화, 그 정교함에 대하여'란 멋진 평을 남겼다.
모두 일상의 무게에 짓눌려 그 갑갑함에서 달아나려 한다. 버지니아 울프가 시인이 극단을 선택해야 하는 이유를 선지자이기 때문이라고 답하는 장면, 사랑하는 사람을 더 이상 괴롭히지 않기 위해 스스로 삶을 내려놓으려 한다는 식으로 자살을 미화하는 것인가 싶은 묘사, 세 여인 모두 페미니즘과 동성애 코드를 짙게 깔고 있는 점 등이 생각할 거리를 많이 안긴다. 라틴어 명제 '시간, 모든 것을 잡아 먹는 자(Tempus, edax rerum)'를 계속 떠올리게 된다.
혼돈스럽기만 하던 영화는 후반 클라리사 본이 정성껏 돌보던 에이즈 환자 리처드(에드 해리스)가 5층 건물에서 뛰어내린 뒤 그가 누구인지를 드러내면서 막을 내린다. 리처드가 왜 그런 선택을 하는지도 세 얘기를 하나로 묶어준다. 누군가는 자살과 동성애를 미화하는 영화라고 손가락질할 수 있겠지만, 버지니아가 남편에게 받은 따듯한 마음, 로라가 이웃의 연인 키티와 나눈 입맞춤, 그리고 열여덟살 클라리사와 열아홉살 리처드가 해변에서 처음 만났을 때와 같은 행복을 다시는 맛볼 수 없다고, 과거의 시간에 갇혀 있다는 느낌이 주는 막막함을 절절하게 느끼게 된다. 스스로 삶을 등지겠다고 마음먹은 이들의 하루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이 영화를 보며 오히려 삶에의 동력을 얻는다는 관객이 적지 않을 것이다. 영화는 1941년 3월 28일 세상을 등진 버지니아 울프의 유언으로 갈무리한다.
글도 제대로 못 쓰는 내 꼴 좀 봐요. 그 동안 내 삶과 행복을 지켜주느라 그대는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그래도 한결같은 마음으로 참아내며 모두가 날 떠나도 끝까지 내 곁을 지켜준 당신. 이제 당신을 놔줘야 할 것 같군요. 그래도 우리 두 사람, 세상에서 가장 행복했잖아요.
레너드. 삶을 회피하지 않고 과감하게 맞서 싸우면서 내 삶의 의미가 뭔지 알았죠. 마침내 그걸 깨닫고 삶을 사랑하게 됐지만 그 삶을 접을 때가 된 거 같군요. 레너드, 우리가 함께 한 그 세월, 그 소중한 순간을 영원히 간직할게요. 우리의 시간들도.
[Playlist] 죽음 속에서 난 삶을 택했어요 | 디 아워스 Original Soundtrack (youtube.com)
Philip Glass: The HOURS performed live by Anton Batagov, piano (youtub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