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형 창단 비화
이 글은 우리 동기들이 1972년 부산대학교에 입학하여 창단한 아마츄어 야구팀 ‘구형’이 35년동안 역사가 면면히 이어져 옴에 대하여 후배들에게 감사하며 구형 홈페이지(www.kuhyung.com)에 올린 내용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꿈같은 대학 1년 시절을 보내던 때
어느 모임이든 첫 모임이 언제부터 였는지, 누가 시작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1972년 봄 날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야구를 좋아하고 하고 싶어하는 동기 몇이서 동네야구가 다 그렇듯이 집에 있는 야 구 글러브 하나씩 들고 야구장(그 때는 부산대 대운동장 귀퉁이에 있는 야구장)에서 취미로 연습하며 시작한 것이 구형의 초기 모습이었다.
대학 1학년 교양과정부 소속이었던 우리들이 개교기념 야구시합에서 같이 하며 자연 스럽게 어울려 야구를 하게 되었다.
야구배트 하나, 새 공 하나에도 벌벌 떨든 시절에 그 당시로서는 취미로 시작한 아마 츄어팀이 유니폼을 갖춘다는 것은 정말 꿈같은 이야기였으나 야구에 대한 열정 하나 로 그 꿈을 실현하였다.
등록금이 3~4만원 안팍이던 시절, 돈 1,000원이면 막걸리 한 되에 꼼장어 2접시를 주던 시절이고 유니폼 값이 10,000원정도 였던 것 같다.
구형구락부라는 말은 야구 球자에 향기 馨(경고 덕형관에서 따옴)으로 정하자는 양 희권 동기의 의견을 좇아서 정했고 WALKERS는 구덕 상징인 우직하지만 끈기있는 학교 똥구두와 보행자 의미의 워커에서 따왔다.
창단 초기 맴버로는 건축학과인 나를 포함하여 수학교육과 이동수(울산대 교수), 수 학교육과 정대근(부흥고 교사), 사학과 추기복(부산진고 교사), 수학교육과 양희권(세 양선박 대표), 국문학과 박원상(혜광고 교사), 기계과 성재업(불광도원), 수학교육과 차성우(한전 재직중 작고)등 8명이었다.
초기 회장은 양희권이 맡고 내가 총무를 맡았는데 2학년 초쯤 토목공학과 김현룡(전 현대산업개발 부장), 기계과 박동기(대신빌딩), 약학과 최수일(동명대 교수)동기가 참 여케 되고 야구 좋아하던 25회 김영국선배를 비상근 감독격으로 영입하고 박재걸 수 학교육과교수님(19회)을 지도교수로 모시게 된다.
초기에는 많지 않은 야구구성원으로 인하여 시합때마다 그때그때 야구 좋아하는 동 기들을 임시 땜빵으로 메웠다. 경제학과 강성우(국제종합건설), 의예과 이종인(이종 인 신경내과원장), 행정학과 최창집(부산대 법대), 행정학과 최의수(개인사업) 동기 등이 잠시잠시 구형과 함께 한 동기들이다.
초기 클럽 당시 야구방망이 살 돈이 없어서 부숴진 부분에 못질을 해서 썼고 너덜너 덜해진 공으로 연습을 하였다. 연습과 시합이 끝나면 야구방망이와 글러브, 베이스 를 학교 바로 앞에 있는 성재업동기의 집까지 옮기는 것이 일이었다.
피곤에 축처진 몸으로 무거운 장비를 옮기는 일을 서로 미루고 굉장히 싫어했다.
일정한 회비도 없이 그때그때 돈 가진 사람이 주머니를 털어서 눈치껏 비용을 내곤 했었지.
막걸리 집에서는 막걸리 한 두 주전자에 두부찌게 한 냄비가 고작이고 자금 사정이 그래도 괜찮은 날은 맥주집에서 맥주 한 두잔 팝콘을 안주삼아 먹는 것이 전부였다.
별도 클럽실이나 마땅한 장소가 없었던 우리들은 동기집을 돌아가며 미팅장소로, 작 업장소로 이용했다. 특히 차성우동기와 추기복동기의 집에 신세를 끼친 적이 많다.
추기복동기, 박원상, 내가 밤새 가리방(철필 등사기)을 긁어 스텐실로 신문도 발행하 고 구형노래도 만들고 밤새는 줄도 몰랐다.
그 당시 부산대 무지개문 앞에서는 귀가 아프게 시끄러운 맥주집 하나, 막걸리 집 달 랑 하나, 서점 서너개가 우리들 놀이터였다. 그래서 우리끼리 야구연습이 끝날 때는 학교앞 막걸리 집에서 한잔하고 타 팀과의 시합후는 10번 버스(합동버스 부산대-충 무동) 제일 뒷칸을 전세내어 자갈치시장으로 진출하곤 했었다.
부산대에서 유일하게 여학생이 없는 클럽으로서 그 모자람을 보충하기 위하여 미팅 도 하고 그 여학생들과 정기적 모임도 갖고 요즘의 소위 MT도 갔었다.
돈이 없어서 민박집 방 한칸에 10명이 같이 잠을 잔 적도 있다.
여학생과 함께 단체로 여행도 가고 했었는데 스캔들은 없었으나
동기들과 사랑과 우정사이에서 고민도 많이 했고,
지금은 지난 이야기지만 가슴아픈 사연도 많았다.
우린 그렇게 야구로 인하여 울고 웃으며 대학생활 클럽활동으로 애정과 낭만의 세월 을 보냈다.
돌이켜보니 아름다운 젊은 날의 추억들이다.
특히 서생 여름캠프때 일이 제일 생각난다.
민박집 아주머니가 10명 선수에 국수 5인분 정도만 삶았다. 서로 먹는다고 설치는 바람에 국수를 쏟아 까맣게 때가 낀 시골집 대청마루에 흘린 국수가락도 서로 먹는 다고 난리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저녁에는 민박집 마당에 캠프파이어를 하고 둘러앉 아 막걸리 마시며 밤새 노래를 불렀었지.
조개껍질 묶어♫ 그녀의 목에 걸고♬
물가에 마주앉아♩밤새 속삭이네♪
저멀리 달 그림자♫ 시원한 파도 소리♬
여름 밤은 깊어만 가고♩ 잠은 오질 않네.
실제 시합에 있어서는 그 때 내가 투수앞 땅볼을 치고 1루 달리는 것을 포기한 적이 있었다.
뒤에서 팀원들이 얼마나 뭐라했는지 40년이 다 되가는 지금까지 그 기억이 난다.
동기고 친구고 친선경기지만 최선을 다하지 않는데 대한 질책이었다.
시합을 지고 이기고 문제가 아닌 그런 열정이 당시 우리에게 있었다.
다만, 그 당시 사진기 있는 동기들도 없고 사진 인화비용도 만만치 않아 사진 한 장 없이 그때 그 시절 장면들이 우리들 가슴속에만 면면히 간직하고 있다.
내게 그때 그 흔한 사진 한 장 없는 것이 유감이다.
부산고 동문과의 시합, 서생, 남지에서의 여름캠프 등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일화를 소개하면 한번은 내가 주선하여 5:5로 미팅을 하게 되었다.
6신가 약속시간인데 5시가 다되어서도 야구장에서 3명은 교섭이 되었는데 한 명이 모자랐다.
그래서 야구장에서 이리저리 뛰고 있는데 박원상동기가 집에 가려는지 어슬렁거리 는 것이 보였다.
그래서 사정하니 집에 꼭 일찍이 가야할 사정이 있다는 것이다.
내 사정부터 먼저 봐 달라고 사정사정하여 겨우 허락을 받았다.
아마 잠시 참석하고 머리수만 채우고 원상동기는 일찍 가는 것으로 그렇게 합의가 된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참으로 인생은 묘한 것이다.
그 미팅파트너가 지금 원상동기의 부인이 되어 아들, 딸 낳고 잘 살고 있으니....
후배들에게 바라건데,
운동시합을 하다보면 시합에는 꼭 이겨야 하고 이길려고 하면 야구를 잘하는 동기들 이 경기를 주도하게 되는데 그러면 야구를 좋아하나 야구를 못하는 동기들이 소외될 수 있다.
그런 동기들에 대한 배려가 꼭 필요하다.
우리 모임 목적이 야구 자체를 좋아할 뿐 야구가 종착역이 아니기에..
우리가 야구 하나로 만나서 야구 아닌 일로 지금까지 35년이상을 만나는 것처럼.
사랑하는 후배들..
우리 동기들이 이미 우리의 아들, 딸들이 우리가 처음 만난 그 때의 나이 이상이 된 지금, 반백의 나이에 온백의 머리를 하고 인생의 종착역을 향하여 저물어가는 때에 지나온 35년의 추억을 되돌려주는 후배들.
지금까지 우리의 클럽을 유지 발전해 온 후배들이 무엇보다도 자랑스럽다.
후배 여러분들의 건승을 빌며 다시 만날 때까지
2007년 10월 7일 아침에
1972년을 되돌아보며
구형1기 하원규씀
첫댓글 구형의 역사가 다 나오는구나..ㅎㅎㅎ,그런데 솔직히 구성원들 중 야구를 할만한 친구는 동기,수일이 정도인데...어찌 긴 역사를 일궈 냈는지 참 용하이.ㅋㅋㅋ
그래도 작년에 기별 야구 대회에 나온 사람은 서울서 근무하면서 내려온 왕정일이 밖에 없더라.그것도 선수 부족으로 기권.
창단 비화 보다 유지 비화라고 해야 할 듯... 좋은 추억거리요. 그 지도교수도 이젠 치아를 몽땅 교체하는 공사를 해야하는 세월이 되었으니...
1972년은 박동기, 강성우, 왕정일, 김택영, 이헌곤, 김정원(치과), 정삼용, 김현룡, 김태권 등등이 경남학원에서 재수 하던 때. 그때 경남학원에는 야구팀이 두팀 있었지. 재수 주축에 삼수, 사수가 각팀 감독^^ 그중 한팀이었던 Dorma의 명칭으로 아직도 이어져 오고 있음. 그때 학원팀과 시합 교섭차 야구 배트 들고 학원에 왔던 차성우가 제트기한테 들켜서 혼이 나기도 했고.. 아!! 옛날이여!!!
학원 영어 교제에 도르마란 이야기가 나왔고...내 기억엔 프랑스에서 포도잎에 싸서 먹는 음식인가??? 그랬는데 거기에서 도르마가 야구팀이 되었다. 25회 누군가가 이야기 한 것으로 기억되네...%^&^(^(_
현재는 동아대에 계시는 25회 한모 교수님이 주인공^^ 내 기억으로는 영어시간에 도르마라는 음식을 주제로 선배가 영작을 한데서 유래한 것이 아닌가 생각됨(?)
수일이 이야기가 맞네...25회 한모씨...키가 좀 크가 말랐던 기억이 나네...고맙소..
하도사! 아름다운 추억이 있어 부럽네. 근데 하도사는 아직 젊은데 옛날 일 생각할 연세는 아니제. ㅎㅎ 강교주께서 젊은 사람들하고 얘기하라고 안 했드나.. 건강하게 살려면 ㅋㅋ
35년전의 까막득한 일이건만 어제 일로 생각된다.. 근데 젊어질려면 젊은 사람들 하고 얘기하라는데 그들 만나면 우리가 나이든 것만 깨닫게 되는 현실이 안타깝네.
야구와 함께 이어온 35년 우정...지난 9월 동부인하여 통영에서의 만남도 정겹고, 친구와 포도주는 오래될수록 깊은 맛이 난다.
"구형"의 전신이 구덕산 "솔구부"가 아닐까로 추측~ "구형' 화팅!!
전혀 근거없는 추측은 아닐 듯..^^ 근데 "솔구부"하면 박상호(건축)가 전설적인 인물이었는디.. 모자를 글러브 삼아...^^
맞다. 박상호가 솔구에서는 최강이었지. 점심먹고 나면 항상 솔구에 매달렸었다.
구형 이야기를 하니까 자꾸 먼저간 차성우가 많이 생각 난다.
어흐흐.. 흑흑. 하도사 이렇게 좋은 추억 만들고 있을 때 난 뭐했을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