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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천량해전(漆川梁海戰)또는 漆川海戰(칠천해전).💢
💢1篇(1편)💢
💢丁酉再亂(정유재란)의 一部(일부).💢
繪本太閤記(회본태합기)에 收錄(수록)된
漆川梁(칠천량) 海戰圖(해전도).漆川梁(칠천량)_海戰(해전).jpg
(633 × 415 픽셀, 파일 크기: 62 KB, MIME 種類(종류): image/jpeg).
說明(설명):江戸時代(에도시대) 後期(후기) 豊臣秀吉(도요토미 히데요시)의 一生(일생)을 그린 文學(문학) '회본태합기(絵本太閤記) エホンタイコキ(에혼타이코키)'에 나오는 漆川梁海戰(칠천량해전).
出處(출처):국립중앙도서관(www.nl.go.kr)의 소장자료
'회본태합기(絵本太閤記)' 1919년본.
file history:ファイルの履歴(파일 歷史(역사)
날짜/시간(현재) 2009년 8월 30일 (일) 19:27 |
사용자 : 루차돌이 (토론 | 기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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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時(일시) | 1597年(년) 8月(월) 27日(일)(陰曆(음력) 7月(월) 15日(일). |
場所(장소) | 巨濟島(거제도) 隣近(인근) 漆川梁(칠천량). |
結果(결과) | 日本軍(일본군)의 勝利(승리), 朝鮮(조선) 水軍(수군) 大部分(대부분)의 潰滅(궤멸). |
交戰國(교전국).
朝鮮(조선) 王國(왕국).指揮官(지휘관).
元均(원균) †
李億祺(이억기). †
崔浩(최호) †
裵泄(배설) (脫營(탈영)
金完(김완) ↓
李雲龍(이운룡) (脫營(탈영)
裴興立(배흥립)
이응표 (脫營(탈영)
禹致績(우치적)
조계종
宋汝悰(송여종)
원전 †
兵力(병력)
龜船(귀선:거북선) 3隻(척)
板屋船(판옥선) 160餘隻(여척)
被害(피해) 規模(규모)
龜船(귀선:거북선) 3隻(척) 等(등)
板屋船(판옥선) 140餘隻(여척) 沈沒(침몰)
指揮官(지휘관) 包含(포함) 朝鮮(조선) 水軍(수군)
2萬餘名(만여명) 潰滅(궤멸)
김완 捕虜(포로)로 끌려감
裵泄(배설) 戰船(전선) 12隻(척) 이끌고 脫營(탈영)
豊臣(도요토미) 政權(정권).
指揮官(지휘관).
肇悟(하지메 사토루) 九鬼嘉隆(구키 요시타카)
藤堂高虎(도도 다카토라)
加藤嘉明(가토 요시아키)
脇坂安治(와키자카 야스하루)
島津義弘(시마즈 요시히로)
小西行長(고니시 유키나가)
菅達長(간 미치나가)
칠천량해전(漆川梁海戰) 또는 漆川海戰(칠천해전)은 1597年(년)(宣祖(선조) 30年(년) 8月(월) 27日(일)(陰曆(음력) 7月(월) 15日(일) 漆川島(칠천도) 附近(부근)에서 벌어진 海戰(해전)이다. 이 戰鬪(전투)에서 三道水軍統制使(삼도수군통제사) 元均(원균) 等(등)이 逃走(도주) 中(중) 戰死(전사)한다.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는 忠淸道(충청도), 全羅道(전라도), 慶尙道(경상도)의 수군(水軍)을 總指揮(총지휘)하는 朝鮮時代(조선시대)의 官職(관직)으로 官品(관품)은 從(종)2品(품)이다. 指揮(지휘) 官廳(관청)과 海軍(해군) 基地(기지)로 三道水軍統制營(삼도수군통제영)을 두었다. 統制使(통제사)는 現代(현대)의 海軍(해군) 作戰司令官(작전사령관)에 相應(상응)하는 職位(직위)이지만 統制使(통제사)가 軍政權(군정권) 또한 行事(행사)하는 것을 미루어 볼 때 海軍(해군) 參謀總長(참모총장)이 軍政權(군정권) 뿐만 아니라 軍令權(군령권)도 맡고 있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三道水軍統制使(삼도수군통제사)는 그 職責(직책) 特性上(특성상) 水軍(수군) 總司令官級(총사령관급)이며, 六軍(육군)과 水軍(수군)을 아우르는 全軍(전군) 總司令官(총사령관)에 對應(대응)되는 都元帥(도원수)의 部下(부하)이다. 但(단), 都元帥(도원수)는 戰爭(전쟁) 勃發(발발) 또는 事變(사변)이 있을 때만 任命(임명)되는 臨時(임시) 官職(관직)이며, 三道水軍統制使(삼도수군통제사)는 恒常(항상) 維持(유지)되는 常設(상설) 官職(관직)이라는 差異點(차이점)이 있다.
統制營(통제영)에서 三道水軍統制使(삼도수군통제사)를 輔佐(보좌)하는 바로 아래 官職(관직)은 正(정)3品(품) 水軍(수군) 虞候(우후)이다. 統制營(통제영) 副司令官(부사령관) 또는 參謀長(참모장)에 該當(해당)한다.
하삼도(下三道)는 慶尙道(경상도), 全羅道(전라도), 忠淸道(충청도)를 일컫는 말이다. 이 地名(지명)은 《高麗史(고려사)》에도 登場(등장)한다. 따라서 그 以前(이전)에도 쓰였던 地名(지명)임을 알 수 있다.
慶尙左水營(경상좌수영)은 慶尙左道水軍(경상좌도수군) 節度使(절도사)의 陣營(진영)으로, 主(주)로 倭寇(왜구)의 侵入經路(침입경로)인 洛東江(낙동강)에서 慶州地域(경주지역)까지의 水路(수로) 防禦(방어)를 擔當(담당)하였다. 最初(최초)로 設置(설치)된 곳은 釜山(부산) 東萊縣(동래현)이었고, 太宗(태종) 때 蔚山(울산) 開雲浦(개운포)로 移轉(이전)하였다가, 1592年(년) 東萊(동래) 南村(남촌)으로 옮겨갔다. 1635年(년) 仁祖(인조) 13年(년)에는 最初(최초)의 場所(장소)인 戡蠻夷浦(감만이포)로 옮겼다가 倭館(왜관)과 가깝다는 理由(이유)로 1652年(년) 孝宗(효종) 3年(년)에 다시 東萊(동래) 南村(남촌)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壬亂(임란) 當時(당시)에는 朴泓(박홍)이 맡았지만 日本軍(일본군)에 依(의)해 瓦解(와해)되면서 壬亂(임란)이 끝날 때까지 慶尙左水營(경상좌수영)은 제 機能(기능)을 하지 못했다. 丁酉再亂(정유재란) 當時(당시)에는 前(전) 玉浦萬戶(옥포만호) 李雲龍(이운룡)이 맡았으나 元均(원균)의 漆川梁(칠천량) 海戰(해전) 以後(이후) 三道水軍(삼도수군)이 全滅(전멸)하자 慶尙左手軍(경상좌수군)은 當時(당시) 慶尙道(경상도) 地域(지역)에서 陸戰(육전)에 參加(참가)하였다.
慶尙右水營(경상우수영)은 慶尙右道水軍 節度使(경상우도수군절도사)의 陣營(진영)이다. 慶尙道右水營(경상도우수영)은 처음에 巨濟(거제)에 두었다가 1604年(년)(宣祖(선조) 37年(년) 고성(固城 : 지금의 統營市(통영시)으로 옮겼다. 慶尙右水營(경상우수영)은 三道水軍統制營(삼도수군통제영)으로 機能(기능)하였으며, 李舜臣(이순신)과 元均(원균)이 統制使(통제사)를 歷任(역임)한 壬辰倭亂(임진왜란) 期間(기간)을 除外(제외)하면 大部分(대부분)은 慶尙右水使(경상우수사)가 統制使(통제사)를 兼任(겸임)하였다.
全羅左水營(전라좌수영)은 1479年(년) 成宗(성종) 10年(년) 全羅道 水軍節度使營(전라도수군절도사영)이 全羅左水營(전라좌수영)과 全羅右水營(전라우수영)으로 分理(분리)되면서 內禮萬戶陣(내례만호진) 자리(現在(현재) 麗水(여수)에 設置(설치)되었다. 李舜臣(이순신)은 壬辰倭亂(임진왜란)이 勃發(발발)하기 1年(년) 前(전)인 1591年(년)에 全羅左道水軍節度使(전라좌도수군절도사)로 任命(임명)되었다.
5館(관)(順川(순천), 興陽(흥양), 光陽(광양), 樂安(낙안), 寶城(보성), 5浦(포)(沙島(사도), 麗島(여도), 鹿島(녹도), 防踏(방답), 鉢浦(발포)를 둔 작은 水軍(수군)基地(기지)였지만 李舜臣(이순신)이 連戰連勝(연전연승)을 하고, 統制使(통제사)를 兼(겸)하게 되면서 統制營(통제영) 役割(역할)을 遂行(수행)하였다. 李舜臣(이순신)의 後任(후임)인 李時彦(이시언) 水使(수사)까지는 統制營(통제영) 役割(역할)을 遂行(수행)하였지만 柳珩(류형)이 新任(신임) 統制使(통제사)로 赴任(부임)한 以後(이후)에는 慶尙右水營(경상우수영)에 그 地位(지위)를 넘겨 주게 된다. 그러나 朝鮮後期(조선후기)로 가면서 漸次(점차) 重要性(중요성)이 增大(증대)되었다.
全羅右水營(전라우수영).
1377年(년) 高麗(고려) 禑王(우왕) 3年(년)에 務安(무안) 闣串浦(당곶포)에 水軍(수군)이 처음 設置(설치)된 後(후), 1440年(년) 世宗(세종) 22年(년)에 海南(해남) 黃原館(황원관)으로 옮겼다. 1465年(년) 世祖(세조) 11年(년)에 水軍節度使營(수군절도사영)으로 昇格(승격)하였다. 壬辰倭亂(임진왜란) 當時(당시) 李億祺(이억기)가 全羅右水使(전라우수사)로 在任(재임)하였으며 그가 漆川梁(칠천량) 海戰(해전)서 戰死(전사)한 다음에는 金億秋(김억추)가, 鳴梁海戰(명량해전) 直後(직후) 巨濟縣令(거제현령) 安衛(안위)가 昇進(승진)하여 任命(임명)되었다. 壬辰倭亂(임진왜란) 때 鳴梁海戰(명량해전)의 主要(주요) 本據地(본거지)가 되었다. 大東地志(대동지지)에 따르면 7館(관) 18浦(포)로 構成(구성)되어 있어 壬亂(임란) 當時(당시) 朝鮮水軍(조선수군) 軍營(군영) 中(중) 가장 規模(규모)가 컸다.
忠淸水營(충청수영)은 高麗末(고려말) 倭寇(왜구)의 侵入(침입)이 잦은 地域(지역)이었고, 間斷(간단)한 形態(형태)의 防禦陣(방어진)만 存在(존재)하다가 1447年(년) 世宗(세종) 29年(년) 對馬島(대마도) 征伐(정벌)과 함께 水軍(수군)과 基地(기지)를 整備(정비)하고, 忠淸水營(충청수영)의 體系(체계)를 갖추었으며, 1466年(년) 世祖(세조) 12年(년)에 忠淸水軍節度使(충청수군절도사)로 昇格(승격)하였다. 倭寇(왜구)의 侵奪(침탈)로부터 防禦(방어)하고 漢陽(한양)으로 가는 漕運船(조운선)을 保護(보호)하는 任務(임무)를 遂行(수행)하였다. 壬亂時(임란시)에는 정걸[丁傑:1514年(년)~ 1597年(년)은 朝鮮中期(조선중기)의 武臣(무신)이다. 壬辰倭亂(임진왜란) 當時(당시) 李舜臣(이순신)의 水軍節度使(수군절도사) 先輩(선배)로서 나이도 31살이나 年上(연상)인 高齡(고령)임에도 많은 活躍(활약)을 했다.]과 선거이[宣居怡: 1550年(년) ~ 1598年(년)는 朝鮮中期(조선중기)의 武臣(무신)이다. 本貫(본관)은 寶城(보성), 字(자)는 사신(思愼), 號(호)는 친친재(親親齋)이다. 寶城宣氏(보성선씨) 始祖(시조) 선윤지(宣允祉)의 8世孫(세손)이며, 判書(판서) 宣炯(선형)(선형)의 증孫(증손)이다.
1592年(년)(宣祖(선조) 25年(년) 壬辰倭亂(임진왜란) 初期(초기)에 李舜臣(이순신)과 함께 閑山島大捷(한산도대첩)에 參戰(참전)하여 勝戰(승전)했고, 그해 12月(월)에는 전라도兵馬節度使(병마절도사)로서 禿山山城(독산산성) 戰鬪(전투)에서 勝利(승리)하였으며, 뒤를 이어 副元帥(부원수) 資格(자격)으로 幸州大捷(행주대첩)의 勝利(승리)를 이끌어 냈다. 1594年(년) 9月(월)의 場門浦(장문포) 海戰(해전)에서 勝戰(승전)하였다. 1605年(년) 선무원종공신일등(宣武原從功臣一等)에 追封(추봉)되었다.]
가 再任(재임)하였다. 丁傑(정걸)이 再任(재임)하던 當時(당시) 그는 幸州大捷(행주대첩) 當時(당시) 權慄(권율)에게 화살等(등) 物資(물자)를 支援(지원)하여 勝利(승리)에 寄與(기여)하였다. 丁酉再亂(정유재란) 當時(당시)에는 최호[崔湖: 1536年(년) ~ 1597年(년) 陰曆(음력) 7月(월) 16日(일)]가 맡았지만 그가 漆川梁海戰(칠천량해전)에서 戰死(전사)하여 後任(후임)으로 壬亂時(임란시) 全羅左水使(전라좌수사) 李舜臣(이순신)의 麾下(휘하)의 將帥(장수)였던 前(전) 慶尙右水使(경상우수사) 權俊(권준)이 맡았다. 現在(현재)의 鰲川港(오천항) 地域(지역)에 該當(해당)한다.
see together(같이 보기).
洪南周(홍남주).(1827年(년)(純祖(순조) 27年(년) ~ ?).
李俊漢(이준한).(李俊漢, 1621年(년) - 1674年(년).
李弘述(이홍술).李弘述, 1647年(년) ~ 1722年(년) 5月(월) 17日(일).
李溏(이당).
李國賢(이국현).
李載鳳(이재봉).
沈樂臣(심낙신).
유명수군도독(有明水軍都督).
丁酉再亂(정유재란)의 勃發(발발).
1597年(년) 3月(월) 1日(일)(丁酉年(정유년) 陰曆(음력) 1月(월) 14日(일) 壬辰倭亂(임진왜란)을 終決(종결)시키기 위한 明(명)나라와 日本(일본) 間(간)의 講和(강화)交涉(교섭)이 決裂(결렬)되자 加藤清正(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日本軍(일본군) 先鋒隊(선봉대)가 朝鮮(조선)의 釜山(부산)을 再侵(재침)하였다. 이것이 바로 丁酉再亂(정유재란)이다. 이어 小西行長(고니시 유키나가)의 第(제)2軍(군)이 熊川(웅천)으로 上陸(상륙)하여 北進(북진)하였다. 같은 해 8月(월) 20日(일)(陰曆(음력) 7月(월) 8日(일) 日本(일본)의 後續(후속)部隊(부대)가 慶尙道(경상도) 南海岸(남해안) 地域(지역)에 上陸(상륙)하였다.
再侵(재침)을 命(명)한 豊臣秀吉(도요토미 히데요시)의 命令書(명령서)에는 敵國(적국)(全羅道(전라도)을 비롯한 朝鮮(조선)의 下三道(하삼도:하삼도(下三道)는 慶尙道(경상도), 全羅道(전라도), 忠淸道(충청도)를 일컫는 말이다. 이 地名(지명)은 《高麗史(고려사)》에도 登場(등장)한다. 따라서 그 以前(이전)에도 쓰였던 地名(지명)임을 알 수 있다.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는 忠淸道(충청도), 全羅道(전라도), 慶尙道(경상도)의 수군(水軍)을 總指揮(총지휘)하는 朝鮮時代(조선시대)의 官職(관직)으로 官品(관품)은 從(종)2品(품)이다. 指揮(지휘) 官廳(관청)과 海軍(해군) 基地(기지)로 三道水軍(삼도수군)統制營(통제영)을 두었다. 統制使(통제사)는 現代(현대)의 海軍(해군) 作戰(작전)司令官(사령관)에 相應(상응)하는 職位(직위)이지만 統制使(통제사)가 軍政權(군정권) 또한 行事(행사)하는 것을 미루어 볼 때 海軍(해군) 參謀總長(참모총장)이 軍政權(군정권) 뿐만 아니라 軍令權(군령권)도 맡고 있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三道水軍統制使(삼도수군통제사)는 그 職責(직책) 特性上(특성상) 水軍(수군) 總司令官級(총사령관급)이며, 陸軍(육군)과 水軍(수군)을 아우르는 全軍(전군) 總司令官(총사령관)에 對應(대응)되는 都元帥(도원수)의 部下(부하)이다. 但(단), 都元帥(도원수)는 戰爭(전쟁) 勃發(발발) 또는 事變(사변)이 있을 때만 任命(임명)되는 臨時(임시) 官職(관직)이며, 三道水軍統制使(삼도수군통제사)는 恒常(항상) 維持(유지)되는 常設官職(상설관직)이라는 差異點(차이점)이 있다.
統制營(통제영)에서 三道水軍統制使(삼도수군통제사)를 輔佐(보좌)하는 바로 아래 官職(관직)은 正(정)3品(품) 水軍(수군) 虞候(우후)이다. 統制營(통제영) 副司令官(부사령관) 또는 參謀長(참모장)에 該當(해당)한다.
慶尙左水營(경상좌수영).
慶尙左水營(경상좌수영)은 慶尙左道水軍(경상좌도수군) 節度使(절도사)의 陣營(진영)으로, 主(주)로 倭寇(왜구)의 侵入經路(침입경로)인 洛東江(낙동강)에서 慶州地域(경주지역)까지의 水路(수로) 防禦(방어)를 擔當(담당)하였다. 最初(최초)로 設置(설치)된 곳은 釜山(부산) 東萊縣(동래현)이었고, 太宗(태종) 때 蔚山(울산) 開雲浦(개운포)로 移轉(이전)하였다가, 1592年(년) 東萊(동래) 南村(남촌)으로 옮겨갔다. 1635年(년) 仁祖(인조) 13年(년)에는 最初(최초)의 場所(장소)인 戡蠻夷浦(감만이포)로 옮겼다가 倭館(왜관)과 가깝다는 理由(이유)로 1652年(년) 孝宗(효종) 3年(년)에 다시 東萊(동래) 南村(남촌)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壬亂(임란) 當時(당시)에는 朴泓(박홍)이 맡았지만 日本軍(일본군)에 依(의)해 瓦解(와해)되면서 壬亂(임란)이 끝날 때까지 慶尙左水營(경상좌수영)은 제 機能(기능)을 하지 못했다. 丁酉再亂(정유재란) 當時(당시)에는 前(전) 玉浦萬戶(옥포만호) 李雲龍(이운룡)이 맡았으나 元均(원균)의 漆川梁(칠천량) 海戰(해전) 以後(이후) 三道水軍(삼도수군)이 全滅(전멸)하자 慶尙左手軍(경상좌수군)은 當時(당시) 慶尙道(경상도) 地域(지역)에서 陸戰(육전)에 參加(참가)하였다.
慶尙右水營(경상우수영).
慶尙右水營(경상우수영)은 慶尙右道水軍節度使(경상우도수군절도사)의 陣營(진영)이다. 慶尙道(경상도) 右水營(우수영)은 처음에 巨濟(거제)에 두었다가 1604年(년)(宣祖(선조) 37年(년) 고성(固城 : 只今(지금)의 統營市(통영시)으로 옮겼다. 慶尙右水營(경상우수영)은 三道水軍統制營(삼도수군통제영)으로 機能(기능)하였으며, 李舜臣(이순신)과 元均(원균)이 統制使(통제사)를 歷任(역임)한 壬辰倭亂(임진왜란) 期間(기간)을 除外(제외)하면 大部分(대부분)은 慶尙右水使(경상우수사)가 統制使(통제사)를 兼任(겸임)하였다.
全羅左水營(전라좌수영).
1479年(년) 成宗(성종) 10年(년) 全羅道(전라도) 水軍節度使營(수군절도사영)이 全羅左水營(전라좌수영)과 全羅右水營(전라우수영)으로 分利(분리)되면서 內禮萬戶陣(내례만호진) 자리(現在(현재) 麗水(여수)에 設置(설치)되었다. 李舜臣(이순신)은 壬辰倭亂(임진왜란)이 勃發(발발)하기 1年(년) 前(전)인 1591年(년)에 全羅左道(전라좌도) 水軍節度使(수군절도사)로 任命(임명)되었다. 5館(관)(順天(순천), 興陽(흥양), 光陽(광양), 樂安(낙안), 寶城(보성), 5浦(포)(沙島(사도), 麗島(여도), 鹿島(녹도), 防踏(방답), 鉢浦(발포)를 둔 작은 水軍(수군)基地(기지)였지만 李舜臣(이순신)이 連戰連勝(연전연승)을 하고, 統制使(통제사)를 兼(겸)하게 되면서 統制營(통제영) 役割(역할)을 遂行(수행)하였다. 李舜臣(이순신)의 後任(후임)인 李時彦(이시언) 水使(수사)까지는 統制營(통제영) 役割(역할)을 遂行(수행)하였지만 류형[柳珩: 1566年(년) ~ 1615年(년)은 朝鮮中期(조선중기)의 武臣(무신)이다. 本貫(본관)은 진주(晉州), 諱(휘)는 형(珩), 字(자)는 사온(士溫), 號(호)는 석담(石潭), 諡號(시호)는 충경(忠景)이다. 三道水軍統制使(삼도수군통제사)를 歷任(역임)하였다.]이 新任(신임) 統制使(통제사)로 赴任(부임)한 以後(이후)에는 慶尙右水營(경상우수영)에 그 地位(지위)를 넘겨 주게 된다. 그러나 朝鮮後期(조선후기)로 가면서 漸次(점차) 重要性(중요성)이 增大(증대)되었다.
全羅右水營(전라우수영).
1377年(년) 高麗(고려) 우왕[禑王: 1365年(년). 7月(월). 己卯日(을묘일) - 1389年(년). 12月(월). 壬寅日(임인일), 25歲(세) 斬首(참수)] 3年(년)에 務安(무안) 當串浦(당곶포)에 水軍(수군)이 처음 設置(설치)된 後(후), 1440年(년) 世宗(세종) 22年(년)에 海南(해남) 黃原館(황원관)으로 옮겼다. 1465年(년) 世祖(세조) 11年(년)에 水軍節度使營(수군절도사영)으로 昇格(승격)하였다. 壬辰倭亂(임진왜란) 當時(당시) 李億祺(이억기)가 全羅右水使(전라우수사)로 在任(재임)하였으며 그가 漆川梁(칠천량) 海戰(해전)서 戰死(전사)한 다음에는 金億秋(김억추)가, 鳴梁海戰(명량해전) 直後(직후) 巨濟縣令(거제현령) 안위[안위(安衛: 1563年(년) ~ 1644年(년)는 朝鮮中期(조선중기)의 武官(무관)이다. 本貫(본관)은 順興(순흥), 壬辰倭亂(임진왜란) 當時(당시) 巨濟縣令(거제현령)을 지내고, 丁酉再亂(정유재란)때에는 鳴梁海戰(명량해전)에서 功(공)을 세워 全羅右水使(전라우수사)로 昇進(승진) 하였다]가 昇進(승진)하여 任命(임명)되었다. 壬辰倭亂(임진왜란)때 鳴梁海戰(명량해전)의 主要(주요) 本據地(본거지)가 되었다. 大東地志(대동지지)에 따르면 7館(관) 18浦(포)로 構成(구성)되어 있어 壬亂(임란) 當時(당시) 朝鮮水軍(조선수군) 軍營(군영) 中(중) 가장 規模(규모)가 컸다.
忠淸(충청)水營(수영).
高麗末(고려말) 倭寇(왜구)의 侵入(침입)이 잦은 地域(지역)이었고, 簡單(간단)한 形態(형태)의 防禦陣(방어진)만 存在(존재)하다가 1447年(년) 世宗(세종) 29年(년) 對馬島(대마도) 征伐(정벌)과 함께 水軍(수군)과 基地(기지)를 整備(정비)하고, 忠淸(충청)水營(수영)의 體系(체계)를 갖추었으며, 1466年(년) 世祖(세조) 12年(년)에 忠淸水軍節度使(충청수군절도사)로 昇格(승격)하였다. 倭寇(왜구)의 侵奪(침탈)로부터 防禦(방어)하고 漢陽(한양)으로 가는 漕運船(조운선)을 保護(보호)하는 任武(임무)를 遂行(수행)하였다. 壬亂時(임란시)에는 정걸[丁傑: 1514年(년) ~ 1597年(년)은 朝鮮中期(조선중기)의 武臣(무신)이다. 壬辰倭亂(임진왜란) 當時(당시) 李舜臣(이순신)의 水軍節度使(수군절도사) 先輩(선배)로서 나이도 31살이나 年上(연상)인 高齡(고령)임에도 많은 活躍(활약)을 했다.]과 선거이[(宣居怡: 1550年(년) ~ 1598年(년)는 朝鮮中期(조선중기)의 武臣(무신)이다. 本貫(본관)은 寶城(보성), 字(자)는 사신(思愼), 號(호)는 ... 1569年(년)에 宣傳官(선전관)으로 登用(등용)되고, 1570年(년)에 武科(무과)에 及第(급제)하였다 . ... 이어 청백(淸白)으로 星州牧使(성주목사)를 거쳐 1591年(년)에 全羅右道(전라우도) 水軍節度使(수군절도사)가 되었다. ... 나오는 바와 같이 "바다에서는 李純信(이순신), 陸地(육지)에서는 宣居怡(선거이) "이라 할만큼 이름이 높았다.]가 在任(재임)하였다. 정걸[丁傑: 1514年(년) ~ 1597年(년))은 朝鮮中期(조선중기)의 武臣(무신)이다. 壬辰倭亂(임진왜란) 當時(당시) 李舜臣(이순신)의 水軍節度使(수군절도사) 先輩(선배)로서 나이도 31살이나 年上(연상)인 高齡(고령)임에도 많은 活躍(활약)을 했다.]이 在任(재임)하던 當時(당시) 그는 幸州大捷(행주대첩) 當時(당시) 權慄(권율)에게 화살等(등) 物資(물자)를 支援(지원)하여 勝利(승리)에 寄與(기여)하였다. 丁酉再亂(정유재란) 當時(당시)에는 최호[崔湖: 1536年(년) ~ 1597年(년) 陰曆(음력) 7月(월) 16日(일)는 朝鮮(조선)中期(중기)의 武臣(무신)으로, 청난공신(淸難功臣) 2等(등)으로 忠原君(충원군)에 封(봉)해졌다. 本貫(본관)은 慶州(경주) 이며 新羅(신라) 末期(말기) 名臣(명신) 崔致遠(최치원)의 15代(대) 後孫(후손)이다.]가 맡았지만 그가 漆川梁(칠천량) 海戰(해전)에서 戰死(전사)하여 後任(후임)으로 壬亂時(임란시) 全羅左水使(전라좌수사) 李舜臣(이순신)의 麾下(휘하)의 將帥(장수)였던 前(전) 慶尙右水使(경상우수사) 權俊(권준)이 맡았다. 現在(현재)의 鰲川港(오천항) 地域(지역)에 該當(해당)한다.)를 占領(점령)하라 命令(명령)하였다. 그러나 下三道(하삼도)를 占領(점령)하려면 補給(보급)이 圓滑(원활)해야 하는데 朝鮮(조선)은 意圖的(의도적)으로 道路(도로)를 놓지 않아 輸送(수송)은 全的(전적)으로 江(강)과 바다를 利用(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豊臣秀吉(도요토미 히데요시)의 命令(명령)을 이행하려면 李舜臣(이순신)의 朝鮮水軍(조선수군)을 무너뜨려야만 可能(가능)했는데, 日本軍(일본군)은 뜻하지 않은 곳에서 朝鮮水軍(조선수군)의 核心(핵심)인 李舜臣(이순신)을 除去(제거)하게 되었다.
宗敎(종교) 問題(문제)와 日本內(일본내)의 武断派: ぶだんは(무단파)와 文治派(문치파)의 對立(대립)으로 因(인)해 서로 不和(불화)하였던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는 임진왜란 당시에도 공을 두고 경쟁할만큼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리고 재침이 명령되자 임진년과는 달리 가토 기요마사가 제 1진으로 건너가게 되었고, 그러자 小西行長(고니시 유키나가)는 ヨシラ:要矢羅(요시라)를 慶尙右兵使(경상우병사) 金應瑞(김응서)에게 보내어 加藤(가토)의 渡海(도해) 情報(정보)를 보내주었다. 하지만 朝廷(조정)에서 다시 攻擊(공격) 命令(명령)을 내렸을 때는 이미 加藤軍(가토군)이 釜山(부산)에 上陸(상륙)한 뒤였기에 李舜臣(이순신)은 攻擊(공격) 命令(명령)을 遂行(수행)할 수 없었지만 돌연 朝廷(조정)은 꼬투리를 잡아 李舜臣(이순신)을 罷免(파면)하고 代身(대신) 元均(원균)을 三道水軍統制使(삼도수군통제사)의 자리에 앉혔다.
李舜臣(이순신)의 後任(후임)으로 任命(임명)된 元均(원균)도 統制使(통제사) 제직전에 自身(자신)의 主張(주장)과 달리 事態(사태)의 不利(불리)함을 깨닫고,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出戰(출전)하지 않는다. 特(특)히 陸軍(육군)의 掩護(엄호) 없이는 出戰(출전)할 수 없다며 3月(월) 29日(일) 狀啓(장계)를 通(통)해 30萬(만) 大軍(대군)으로 安骨浦(안골포), 加德島(가덕도) 等地(등지)의 敵(적)을 몰아내야 한다는 非現實的(비현실적)인 狀啓(장계)를 올린다., 以後(이후)에도 敵(적)과 싸울 생각없이 小數(소수)의 敵(적)을 보고도 바로 逃走(도주)하는 等(등)의 問題(문제)를 일으키다 보다 못한 都元帥(도원수) 權慄(권율)이 元均(원균)에게 嚴(엄)한 棍杖(곤장)을 쳐서 出戰(출전)시켰다. (사실 棍杖(곤장)을 친 理由(이유)는 元均(원균)이 朝鮮朝廷(조선조정)을 입에 발린 말로 愚弄(우롱)한 것이 掛心(괘심)하여 친 것이다. 棍杖(곤장)을 命令(명령)을 듣지 않아 쳤다는 理由(이유)는 訛傳(와전)된 것이다.)
漆川梁(칠천량) 海戰(해전).
漆川梁(칠천량)의 位置(위치)
1597年(년) 8月(월) 26日(일)(陰曆(음력) 7月(월) 14日(일) 100隻(척)이 훨씬 넘는 板屋船(판옥선), 龜船(귀선:거북선)과 1萬餘名(만여명)에 달하는 朝鮮水軍(조선수군)을 總動員(총동원)한 元均(원균)은 釜山(부산) 隣近(인근)에서 바람과 파도를 考慮(고려)하지 않고 敵(적)을 追擊(추격)하다가 12隻(척)의 板屋船(판옥선)을 漂流(표류)하게 해 잃어버리고, 9日(일)에는 오히려 敵(적)의 反擊(반격)을 받아 亦是(역시) 많은 戰船(전선)을 잃게 된다. 實錄(실록)에서는 이 때 我軍(아군)이 활 한 번 제대로 쏘지 못 한 채 敗(패)했다고 하면서 我軍(아군)의 對應(대응)을 問題(문제)삼았고, kenen(케이넨)의 朝鮮日記(조선일기)에는 이 때 反擊(반격)한 兵力(병력)이 日本(일본) 水軍(수군)이 아닌 陸軍(육군) 輸送(수송)艦隊(함대) 兵力(병력)인 것이 確認(확인)된다.
朝鮮水軍(조선수군)은 加德島(가덕도)에서 물을 確保(확보)하기 위해 내리는데 이 때 敵(적)의 奇襲(기습)을 받았고, 元均(원균)은 400名(명)의 我軍(아군)을 버리고 逃走(도주)한다. 1597年(년) 2月(월) 李舜臣(이순신)이 釜山浦(부산포)로 出動(출동)했을 때 加德島(가덕도)에서 물을 긷던 樵童(초동) 5名(명)이 倭軍(왜군)에게 끌려가자 加德(가덕)倭城(왜성)을 直接(직접) 攻擊(공격)해서 ヨシラ(요시라)가 直接(직접) 와서 捕虜(포로)들을 풀어주며 和親(화친)을 求乞(구걸)했던 것과는 比較(비교)된다.
巨濟島(거제도) 西(서)쪽의 작은 섬 漆川島(칠천도) 南(남)쪽에 碇泊(정박)했던 朝鮮水軍(조선수군)은 日本(일본) 水軍(수군)에 夜襲(야습)을 當(당)한 以後(이후)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계속 退却(퇴각)한다. 元均(원균)은 제대로 된 指揮(지휘)를 하지 않은 채 記錄(기록)에 依(의)하면 船上(선상)에서 暴飮(폭음)을 하였다고도 한다. 見乃梁(견내량) 혹은 春原浦(춘원포)에서 三道水軍(삼도수군)을 上陸(상륙)하게 한 뒤 反擊(반격)하지도 않은 채 逃走(도주)했다. 捕虜(포로)가 되었던 助防將(조방장) 金完[金浣: 1546年(년) ~ 1607年(년)은 朝鮮中期(조선중기)의 武臣(무신)이다. 字(자)는 언수(彦粹), 號(호)는 사성당(思誠堂). 本貫(본관)은 慶州(경주)로, 1546年(년) 永川(영천)에서 태어났고, 武科(무과)에 及第(급제)하여 宣傳官(선전관)에 올랐다. 1591年(년) 全羅左水營(전라좌수영) 所屬(소속) 蛇渡(사도) 첨절제사(蛇渡僉事)로 除授(제수)되었다.
壬辰倭亂(임진왜란) 當時(당시) 玉浦海戰(옥포해전)과 唐浦海戰(당포해전)에서 우척후장(右斥候將), 閑山島(한산도) 大捷(대첩)과 釜山浦(부산포) 海戰(해전)에서는 斥候將(척후장)으로 活躍(활약)하였다. 後日(후일) 대병장(代兵將)으로도 活躍(활약)하며 李舜臣(이순신)이 參戰(참전)한 主要(주요) 海戰(해전)에 參加(참가)해 戰功(전공)을 세워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올랐다. 李舜臣(이순신)이 元均(원균)의 謀陷(모함)을 받아 罷職(파직)을 當(당)하자 權晙(권준)과 같은 將帥(장수)들이 辭職(사직)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元均(원균)을 輔佐(보좌)하였다.
漆川梁(칠천량) 海戰(해전)에서 助防將(조방장)이 되어 戰鬪(전투) 中(중) 日本水軍(일본수군)에게 捕虜(포로)로 사로잡혀 日本(일본)으로 押送(압송)됐지만 脫出(탈출)해 歸國(귀국)하였다. 宣祖(선조)로부터 해동소무(海東蘇武)라는 御筆(어필)을 下賜(하사)받고, 咸安郡守(함안군수)에 任命(임명)되었으며, 1607年(년) 故鄕(고향)으로 돌아와 그곳에서 死亡(사망)하였다.
後日(후일) 원종훈1등(原從勳一等)에 策錄(책록)되었으며, 그의 故鄕(고향)인 慶北(경북) 榮川郡(영천군) 臨皐面(임고면) 三梅里(삼매리)에는 이 忠武公(충무공)과 金完(김완)을 追慕(추모)하기 위해 東麟閣(동인각)이 세워져 있다. 東麟閣(동인각)은 正祖(정조) 9年(년)(1785年(년) 5月(월) 燒失(소실)되어 正祖(정조) 11年(년)(1787年(년) 再建(재건)되었으며, 1960年(년) 紫陽面(자양면) 聖谷洞(성곡동)으로 移轉(이전)·復元(복원)하였으나 永川(영천)댐 水沒地區(수몰지구)가 되어 1976年(년) 7月(월) 現(현) 位置(위치)로 移轉(이전)·復元(복원)되었다.]
이 陳述(진술)한 《海所實記(해소실기)》에는 이 때 我軍(아군)이 各其(각기) 水使(수사)를 따라 退却(퇴각)했다고 하면서 朝鮮水軍(조선수군)이 奇襲(기습)을 받은 狀況(상황)에서도 指揮權(지휘권)이 維持(유지)되었다는 것이 確認(확인)된다. 指揮(지휘)를 無視(무시)한 채 退却(퇴각)한 배들은 鎭海(진해), 閑山島(한산도) 方面(방면)으로 向(향)했고, 또한 宣傳官(선전관) 金軾(김식)의 初期(초기) 報告(보고)에 依(의)해 戰死(전사)했다고 알려진 水軍(수군) 將帥(장수)들 多數(다수)가 體察使(체찰사) 李元翼(이원익)의 照査(조사) 結果(결과) 살아있음이 確認(확인)돼 朝廷(조정)을 混亂(혼란)에 빠뜨렸다.
이를 通(통)해 春原浦(춘원포)로 退却(퇴각), 上陸(상륙)한 것은 元均(원균)의 命令(명령)에 依(의)해 이루어진 것이며, 漆川梁(칠천량) 海戰(해전)에서 板屋船(판옥선)을 잃었다 해서 將帥(장수)와 守卒(수졸)들이 全滅(전멸)한 것이 아님을 確認(확인)할 수 있다.
固城(고성) 地域(지역) 春原浦(춘원포)까지 後退(후퇴)하여 統制使(통제사) 元均(원균)과 中軍長(중군장) 順天府使(순천부사) 禹致績(우치적)은 脫出(탈출)하여 上陸(상륙)했는데, 慶尙右水使(경상우수사) 裵泄(배설)은 戰船(전선) 12隻(척)을 이끌고 逃亡(도망)을 친다.
元均(원균)의 同生(동생) 元㙉(원전)은 兄(형)의 麾下(휘하)에서 從事官(종사관)으로 在職中(재직중)이었는데 兄(형)과는 달리 배 안에서 끝까지 남아서 싸우다가 戰死(전사)했다. 元均(원균)은 逃亡(도망)치다가 소나무 아래에 숨어있던 日本軍(일본군)들의 襲擊(습격)을 받아 戰死(전사)했다고 한다. 이 김완[金浣: 1546年(년) ~ 1607年(년)은 朝鮮中期(조선중기)의 武臣(무신)이다.
字(자)는 언수(彦粹), 號(호)는 사성당(思誠堂). 本貫(본관)은 慶州(경주). 1546年(년) 永川(영천)에서 태어났고, 武科(무과)에 及第(급제)하여 宣傳官(선전관)에 올랐다. 1591年(년) 全羅左水營(전라좌수영) 所屬(소속) 蛇島(사도) 僉節制使(첨절제사)(蛇渡僉事(사도첨사)로 除授(제수)되었다.]은 鎭海(진해)에서 日本軍(일본군)의 捕虜(포로)가 되었다.
巨濟(거제) 古縣城(고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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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승철~금 2021-06-25 오후 6:01 ~ 양 선생님 참으로 좋은 자료 잘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