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젊은이야, 네 젊은 시절에 즐기고, 젊음의 날에 네 마음이 너를 기쁘게 하도록 하여라. 그리고 네 마음이 원하는 길을 걷고, 네 눈이 이끄는 대로 가거라. 다만 이 모든 것에 대하여 하느님께서 너를 심판으로 부르심을 알아라. 10 네 마음에서 근심을 떨쳐 버리고, 네 몸에서 고통을 흘려 버려라. 젊음도 청춘도 허무일 뿐이다. 12,1 젊음의 날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여라, 불행의 날들이 닥치기 전에. “이런 시절은 내 마음에 들지 않아.” 하고 네가 말할 때가 오기 전에. 2 해와 빛, 달과 별들이 어두워지고, 비 온 뒤 구름이 다시 몰려오기 전에 그분을 기억하여라. 3 그때 집을 지키는 자들은 흐느적거리고, 힘센 사내들은 등이 굽는다. 맷돌 가는 여종들은 수가 줄어 손을 놓고, 창문으로 내다보던 여인들은 생기를 잃는다. 4 길로 난 맞미닫이문은 닫히고, 맷돌 소리는 줄어든다. 새들이 지저귀는 시간에 일어나지만, 노랫소리는 모두 희미해진다. 5 오르막을 두려워하게 되고, 길에서도 무서움이 앞선다. 편도나무는 꽃이 한창이고, 메뚜기는 살이 오르며, 참양각초는 싹을 터뜨리는데, 인간은 자기의 영원한 집으로 가야만 하고, 거리에는 조객들이 돌아다닌다. 6 은사슬이 끊어지고, 금 그릇이 깨어지며, 샘에서 물동이가 부서지고, 우물에서 도르래가 깨어지기 전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여라. 7 먼지는 전에 있던 흙으로 되돌아가고, 목숨은 그것을 주신 하느님께로 되돌아간다. 8 허무로다, 허무! 코헬렛이 말한다. 모든 것이 허무로다!
복음 루카 9,43ㄴ-45
그때에 43 사람들이 다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보고 놀라워하는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44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45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서 이해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그 말씀에 관하여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
제가 살고 있는 갑곶성지를 저녁 늦은 시간이나 이른 아침에 돌아다니다보면 만나는 동물이 있습니다(물론 다른 시간대에도 볼 수는 있지만 사람들이 많지 않은 이 시간대에 주로 돌아다니는 것 같습니다). 바로 청설모입니다. 처음에는 쥐인 줄 알고서 깜짝 놀랐지만, 잣이나 도토리를 나르는 모습을 자주 보면서 이제는 상당히 낯익은 모습이 되었습니다.
한 번은 새벽에 삼위비 봉헌 초를 켜고 있는데 바로 제 옆을 지나가다가 저와 눈이 마주친 것입니다. 청설모의 손에는 잣나무 열매를 들고 있더군요. 그 모습이 너무 신기하고 예뻐서 빤히 쳐다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청설모는 제 마음을 몰라주더군요. 자기를 헤칠 것이 아니라 단지 그저 예뻐서 쳐다볼 뿐이었는데, 휙 하고 다른 나무 위로 올라가면서 제 곁을 휙하고 떠나는 것입니다.
청설모가 왜 도망갔을까요? 분명히 저는 헤칠 마음이 전혀 없었는데 말이지요. 그러나 중요한 것은 청설모가 제 마음을 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저야 그런 의도가 아니지만, 힘이 약한 청설모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안위를 생각해야 하니 우선 피하고 보는 것이겠지요.
상대방의 마음은 전혀 헤아리지 못하고, 내 마음을 몰라준다면서 불평불만을 말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면서 상대방을 판단하고 미워하고 단죄하기까지 합니다. 하긴 고양이와 개가 싸우는 이유는 서로 좋아하는 표현이 달라서 그렇다고 하지요. 고양이는 좋아하면 꼬리를 아래로 내리는 반면, 개는 상대방에 대한 적의를 갖게 되면 꼬리를 아래로 내리게 됩니다. 그래서 싸울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인간들 역시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서로 다른 마음으로 자기 식대로 이해하고 판단하고 있으니 미움과 다툼이 끊이지 않는 것입니다. 서로 다른 마음이라는 것 자체를 인정한다면 그만큼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지 않을까요?
오늘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에 대한 예고를 하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의 모습을 보면 그 예고를 받아들이고 있지 못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에 대해서 전혀 묻지 못하고 가만히 있습니다.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부재를 인정할 수 없었고, 주님께서 그런 고통과 시련을 겪으셔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묻는 것조차 두려웠습니다.
바로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단지 이 세상의 기준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있기 때문에, 힘없이 수난과 죽음을 당해야 하는 주님을 인정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마음은 우리 모두의 구원을 위한 사랑 그자체입니다. 즉, 우리가 구원되려면 당신의 수난과 죽음은 반드시 필요했던 것이지요.
자기 식대로 이해하고 판단하는 잘못된 습관을 과감하게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에게 큰 사랑을 주시는 주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으며, 이로써 언제나 주님과 함께 하는 주님의 자녀가 될 것입니다.
당신이 하는 것, 꿈꾸는 것은 모두 이룰 수 있으니, 지금 시작하라!(요한 괴테)
순례객이 찍어서 보내주신 성지의 청설모 사진.
만나고 싶은 만남(정채봉, ‘만남’ 중에서)
가장 잘못된 만남은 '생선'과 같은 만남입니다 만날수록 비린내가 묻어오니까
가장 조심해야 할 만남은 '꽃송이' 같은 만남입니다 피어있을 때는 환호하다가 시들면 버리니까
가장 비참한 만남은 '건전지'와 같은 만남입니다 힘이 있을 때는 간수하고 힘이 닳아 없어질 때에는 던져 버리니까
가장 시간이 아까운 만남은 '지우개' 같은 만남입니다 금방의 만남이 순식간에 지워져 버리니까
가장 아름다운 만남은 '손수건'과 같은 만남입니다 힘이 들 때는 땀을 닦아주고 슬플 때는 눈물을 닦아주니까
오늘도 수많은 만남을 갖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만남을 만들고 싶습니까?
따뜻한 말로 좋은 만남을 만드세요.
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 재차 제자들에게 당신의 수난에 대해 알려 주십니다. 군중은 예수님께서 하신 일에 찬사를 보내고 모두 놀라워하고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찬물을 뿌리듯이 수난을 이야기하십니다. 제자들은 이 말씀을 알아듣지 못했고 묻기도 두려워했습니다. 제자들은 그 말씀을 인정하기 싫었고, 그 상황이 실감나지도 않았습니다. 역사의 흐름에서 의인들의 죽음은 많았으며 그들에 대한 박해와 죽음은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 속에서 되풀이되었습니다. 이 시대에서도 종교 간의 충돌과 증오로 하루아침에 사람들이 난민이 되고 고통과 죽음의 수렁에 빠지는 것을 우리는 지켜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시선을 다른 곳에 돌려 외면하고 싶습니다. 사람들 모두가 하느님의 피조물이고 지구촌 가족인데 서로를 증오하고 피를 흘리게 하는 현실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실존입니다. 전쟁과 폭력은 하느님께서 세우신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아비규환 속에 그리스도께서는 새로운 질서를 세우러 오셨습니다. 주님께서 받아들인 수난은 하느님에 대한 모독을 기워 갚고 인류를 구원하려는 하느님의 사랑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분은 분노에 대해 온유함을 보여 주셨고, 증오에 사랑을, 죽음에 생명을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그분이 보여 주신 길은 우리에게 불가능해 보여도 우리가 넘어야 할 산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수난의 길을 겪어 낸 사람만이 진정한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귀담아들으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며칠 전입니다. 식탁에서 이런 대화가 있었습니다. ‘자유, 진보, 인본주의’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은 많은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과학적인 방법이 교회의 신학과 성서학에도 적용되었습니다. 이성적인 방법으로 수긍이 되는 것만을 받아들이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고생물학, 지질학, 유전공학, 진화생물학, 심리학, 의학’의 발전은 우리의 전통과 문화를 버려야 될 것들로 여겼습니다. 산업혁명과 기술의 발전은 우리의 힘만으로도 풍요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을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아담과 이브, 천사와 악마, 하느님나라와 지옥은 신화와 전설로 치부되었습니다. 빙산의 일부만 보고 바다 밑에 잠겨있는 빙산을 보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진리의 바다에 떠있는 빙산의 겉모습만 보고, 숨겨져 있는 것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유럽의 교회가 성소가 줄고, 신자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단지 풍요로운 삶을 살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닐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라는 생각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풀잎 끝에 맺혀있는 이슬처럼, 아침에 해가 나면 곧 말라버리고 마는 짧은 삶에 모든 것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힘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인류는 두 번의 큰 전쟁을 겪어야 했고, 폭력과 갈등은 더욱 커져만 갔고, 굶주림과 질병으로 고통 받는 사람은 줄어들지 않고 있습니다. 희생과 자비, 나눔과 사랑이 설 자리가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아신다면, 굳이 우리가 기도할 필요가 있을까요? 논리적으로는 맞는 말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답은 이렇습니다. ‘기도하면 알 수 있습니다.’ 기도한 사람은 기도의 힘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습니다. 기도한 사람은 하느님과 만나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 알 수 있습니다. 신앙은 논리와 이성을 넘어서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것이 단순히 본능이 아니라, 우리가 하느님을 닮았기 때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헛되고 헛된 것들을 추구하면서 살아야 하는지,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며 살아야 하는지 식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시장에서 물건을 고를 때, 차를 살 때, 집을 살 때 우리는 꼼꼼히 따져보고, 신중하게 생각하게 됩니다. 잘못 판단을 하면 커다란 손해를 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느님께 가기 위해서는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하느님은 어떤 것을 원하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 식별’입니다.
처음에는 올바른 선택을 한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는 흔히 이런 말을 합니다. ‘한번 써보고, 살아봐야 안다.’ 겉보기와는 다른 경우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영적식별의 기준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식별의 결과입니다. 결과가 좋고, 결실이 있으면 영적식별을 잘 한 것입니다. 하지만 결과가 나쁘고, 결실이 없으면 그것은 악의 유혹을 따른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를 때 ‘위로와 고독’이 옵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뜻을 충실히 따르면 결과는 늘 기쁨과 평화입니다. 악의 유혹을 따를 때도 ‘위로와 고독’이 있습니다. 악의 유혹을 따를 때 결과는 늘 불평과 불만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늘 감사하십시오. 항상 기도하십시오.’ 이것은 영적식별을 잘 하기 위한 조건입니다.
영적식별을 잘 하는 사람은 3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첫째는 겸손입니다.
자신만이 옳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남의 의견도 충분히 듣습니다. 누군가 영적 식별을 잘 했는데, 교만하다면 그것은 악의 유혹에 넘어간 것입니다.
둘째는 진중함입니다.
남의 이야기를 쉽게 하지 않습니다. 남의 허물과 탓을 이웃에게 전하지 않습니다. 깊은 바다와 같아서 사람들을 품어 줄 수 있습니다.
셋째는 순종입니다.
어떤 분들은 자신의 의견이 교회의 가르침과 다를 때, 교회를 비판하고 순명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올바른 영적식별이 아닙니다. 비록 자신의 판단이 옳다고 생각할지라도 교회의 가르침에 순명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이야기 하셨습니다.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예수님을 따른 다는 것은 영광의 길이기도 하지만, 고난과 십자가의 길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