萬海 韓龍雲
독립투사/민족시인/행동하는 禪僧
글쓴이/ 김 탁<철학박사>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cfs1.blog.daum.net%2Fupload_control%2Fdownload.blog%3Ffhandle%3DMDZRQURAZnMxLmJsb2cuZGF1bS5uZXQ6L0lNQUdFLzAvNTMuanBnLnRodW1i%26filename%3D53.jpg)
근대의 고승이자 시인이며
독립운동가인 만해(萬海)의 본관은
청주 한씨(韓氏)이다.
속명은 유천(裕天)이고
자는 정옥(貞玉)이다.
법호는 만해, 법명이 용운(龍雲)이다.
그는 1879년(고종 16년) 8월 29일
충청남도 홍성에서
아버지 응준(應俊)과
어머니 온양 방씨(方氏)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몸집은 작았으나 어렸을 적부터
힘이 세고 담력이 컸으며,
총명해서 신동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6세 때부터 서당에서 한학을 익혔으며, 18세에는 학동들을 모아놓고 훈장노릇을 하기도 했다. 만해는 19세때 설악산 백담사(百潭寺)로 출가했다고 한다. 그의 출가 동기는 불분명하지만 당시 의병에 참가하였다가 실패하고 고향을 떠났던 일과 관련이 있는 듯 하다.
이후 그는 21세 무렵 만주등지를 방황하다 26세 때 다시 백담사로 들어가 처음에는 불목하니 노릇을 했으며, 틈틈이 불경을 읽고 심오한 경지에 깊숙이 빠져 들었다. 마침내 만해는 이듬해 1905년 1월 26일 백담사에서 연곡(連谷)화상에게 득도하고, 영제(永濟)화상에게 봉완(奉玩)이라는 계명을 받고 정식으로 불문에 입도하였다.
그뒤 만해는 금강산 신계사(神溪寺)로 진하(震河)대사를 찾아가 교학을 배웠고, 29세 때 학암(鶴庵)스님께 '기신론'(起信論) '능엄경'(楞嚴經)등을 배웠고, 건봉사에서 수선안거를 성취하였다.
이후 백담사와 오세암(五歲庵)을 오르내리며 불도에 정진하던 만해는 건봉사 낙산사 석왕사 등지를 오가며 머물기도 했다. 그는 유점사에서 월화(月華)스님에게 '화엄경'을 수학하였고, 1908년 3월부터 10월까지는 일본을 다녀왔다.
1910년 만해는 '승려취처문제건의서'(僧侶娶妻問題建議書)를 당국에 제출하고, 불교의 유신을 주장하는 '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을 저술하였다.
한일합방이 되자 그는 국치의 슬픔을 이기지 못한 채 만주로 건너가 이시영 이동녕 박은식 김동삼 등의 우국지사들과 힘을 합쳐 의병학교를 세워 독립투사들을 기르기도 하고, 독립군훈련장을 순방하면서 그들에게 독립정신과 민족혼을 심어주는 일에 전력하였다.
만주서 돌아온 그는 1911년 1월 조계산 송광사에서 한영-진응(震應)스님 등과 함께 한일불교동맹 체결을 반대하는 대규모 승려 궐기대회를 열었고, 친일적 경향의 원종(圓宗)에 대항하여 임제종(臨濟宗)을 세워 종무원 서무부장과 관장에 취임하여 종단을 실질적으로 지도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정교분립, 사찰령폐지, 교단혁신을 꾸준히 주장하여 산중불교에서 사회적 대중불교를 건설하는데 공헌하였다.
그의 '조선불교유신론'은 불교대중화와 근대화운동의 이념을 담은 사자후로서, 그때까지 깊은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던 조선불교계에 폭탄선언과 같은 큰 파문을 던졌다. 그리고 만해는 조선불교청년동맹을 결성했는데 그 강령은 첫째 정교분리, 둘째 불교통일, 셋째 사회적 진출의 필요 등이다. 이는 대중불교의 확산을 위해서는 청년운동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의지의 표현이었으며, 이 운동의 실천을 위해 '승려에서 대중에로' '산간에서 길가로' 등의 표어를 내걸었다.
36세때인 1914년 만해는 고려대장경의 요지를 우리말로 옮긴 '불교대전'佛敎大典)을 발간하여 불교 교리의 대중화에 진력하였고, 조선불교회 회장에 취임하기도 했다. 1915년부터 이듬해까지는 영호남의 명찰들을 순례하면서 불교대중화와 현대화를 역설하는 한편 잠자는 민족혼을 일깨우려고 노력했다. 이때 그는 주해본 '강의채근담'(講義菜根譚)을 저술하기도 했다.
만해는 39세인 1917년 설악산 오세암에 머물면서 용맹정진하던 중 어느 날 밤 홀연히 대각하여, 사나이 가는 곳 어디나 고향인데(男兒到處是故鄕)/몇 사람이나 오랫동안 나그네 근심에 머물렀나(幾人長在客愁中)/한 소리 크게 외쳐 삼천세계를 깨치니(一聲喝破三千界)/눈 속 복사꽃이 조각조각 나부끼네(雪裡桃花片片飛)라는 오도송을 남겼다.
그후 40세되던 해에는 서울에서 '유심'(惟心)이라는 월간지를 창간하여 불교대중화에 힘썼으며, 중앙학림에서 강사로 후진을 양성하기도 했다. 41세 되던 해인 1919년 3월 만해는 용성(龍城)스님과 함께 불교계를 대표하여 3.1독립운동을 주도하였다. 이듬해 그는 만세사건의 주동자로 지목되어 재판을 받고 3년동안 옥살이를 하였다. 옥중에서도 유명한 '조선독립이유서'(朝鮮獨立理由書)를 지어 일제의 총독정치와 식민통치의 부당성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1922년 3월 만기 출옥한 후에도 만해는 안국동 선학원(禪學院)에서 기거하며 강연과 강의를 계속 했으며, 1923년 3월에는 법보회를 설립하여 대장경의 국역사업에 힘썼고, 이듬해에는 불교대중화운동을 주도하기 위해 조선불교청년회를 창설하여 총재로 추대되었다. 1925년 오세암에서 선서(禪書) '십현담주해'(十玄談註解)를 저술하여 선사상의 심화와 그 발현을 꾀하여 새로운 선풍을 진작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1928년 그는 일제에 대항하는 독립운동단체였던 신간회(新幹會)를 발기하여 중앙집행위원과 경성지회장을 겸직하였고, 조선불교청년회를 조선불교총동맹으로 개편함으로써 결속을 다졌다. 이듬해에는 '건봉사급건봉사말사사적'(乾鳳寺及乾 寺末寺事蹟)을 편찬하였다.
또 1931년에는 당시 불교계 월간지였던 '불교'에 '조선불교개혁안' '선과 인생' '한글경 인출을 마치고'등 수많은 불교관련 논설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에 김법린, 최범술 등과 함께 청년승려들의 독립운동 비밀결사인 만당(卍黨)을 결성하여 영수로 추대되었다.
1933년 55세 때 만해는 그는 '유마힐소설경'維摩詰所說經) 번역을 시작했으며, 성북동에 심우장(尋牛莊)을 짓고 기거하였다. 1935년부터는 조선일보 등에 '흑풍' '후회' '박명' '삼국지' 등의 소설을 발표하기도 했으며, 1937년에는 '불교'지를 속간하여 '조선불교통제안' '총본산 창설에 대한 인식' 등의 글을 발표하였다.
60세에는 그가 지도해오던 불교계통의 민족투쟁 비밀결사단체인 만당(卍黨) 사건이 일어났고, 많은 후배 동지들이 검거되고 자신도 고초를 겪었다.
1939년 회갑을 맞아 경상남도 사천군 다솔사(多率寺)에서 동지들과 자축연을 가졌으며, 1944년 6월 29일(음력 5월 9일) 만해는 만년에 거처하던 서울 성북동의 심우장에서 중풍으로 인해 6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동지들에 의해 미아리 화장터에서 다비된 뒤 그의 유골은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치되었다.
만해의 불교사상은 선교일치(禪敎一致) 선교겸수(禪敎兼修)를 주장하는 것으로, 선으로써 정(定)을 얻고 교로써 지(智)를 얻을 것을 주장한다. 그리하여 선을 통하여 생사고해를 건너 열반피안에 이르며, 교를 통하여 중생을 제도하는 실천지침을 얻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가 자신의 견해를 덧붙인 '십현담주해'를 보면 현상속에서 법신을 발견하고자 했고, 역시 현상속에서 중생제도의 사명을 다하는 활로의 선풍(禪風)을 제시하고 있다. 결국 선을 모든 인간에게 필요한 정신수양의 방법으로 보고, 그 목적이 열반에 안주하는데 있지 않고, 선인은 반드시 다시 출세하여 중생제도를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을 강조하였다. 그의 대중불교론은 생활불교의 실현, 불교청년운동의 활성화, 선사상의 생활화, 불경의 번역과 보급, 포교방법의 현대화와 다양화 등으로 다양하게 나타났으며, 일제의 강압에 의한 관제불교로부터의 해방과 정교분리론, 그리고 주체적 민족불교에로의 환원 등으로도 표출되었다.
만해의 대표작인 '조선불교유신론'은 불교부흥을 위해 일대 혁신을 단행해야겠다는 의도로 저술한 것이다. 전체 17장 가운데 1∼4장은 그가 이해하고 있던 불교관을 토대로 뒤에서 전개될 구체적 문제의 해결을 위한 이론적 근거를 밝힌 부분이다. 이어 △승려교육 △참선 △염불당 폐지 △포교의 강화 △사원의 위치 △불교의식의 간소화 △승려의 권익을 찾는 길 △승려의 혼인문제 △주지의 선거 △승려의 단결 △사원의 통괄 등에 대해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전체적인 논지는 한국불교의 비종교적, 비시대적, 비사회적인 인습을 타파하고 혁신하여 시대의 발전에 따라 새로운 진로를 개척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불교 본연의 자세로 복귀하고 부처님의 근본정신을 발휘하고 실현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만해는 불교의 대중화와 현대화에 앞장 선 선승이며, 겨레의 설움과 아픔을 어루만져 준 탁월한 민족시인이자 3·1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였다. 그리고 그는 청년불교운동에 관심이 컸던 불교유신의 기수였으며, 시나 소설 등을 통한 적극적인 대중교화를 실천한 지식인이었다. 또 그는 주체불교, 민족불교, 호국불교, 애국불교의 실천자였으며, 선사상의 부활과 일반화를 시도하여 활로의 선풍을 진작하고 실현하고자 노력한 인물이었으며, 심오한 불교사상을 예술적으로 승화시켜 우리 문학사상 불멸의 작품을 생산한 노래하는 선승이었다.
글쓴이/ 김 탁<철학박사>
첫댓글 늘 좋은 가르침을 주시는군요... 감사합니다
萬海(卍海)라고 韓龍雲선생의 號를 적어 놓고도, <滿海>라고 하셨네요 . . .
허걱~ 아... 정말 그랬습니다!
어떻게 이런 실수를 하였나 모르겠습니다.
편집하면서도 본문을 몇번이나 읽고 쓰고 하면서... 어째 그랬다나요?
도대체 제가 滿海를 어디서 가져왔을까요?
단순히 제가 입력을 잘못한 것일까요?
주의 깊지 못했습니다.
삼오회장님, 지적해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법명은 龍雲, 법호는 萬海가 맞으십니다.
곧바로 고쳐놓겠습니다.
그나저나 8분이나 스크랩을 하셨는데 이를 어쩌지요?
헥헥~
고마우신 삼오회장님, 지금 제가 詩코너 등에도 잘못 올려놓지 않았나 찾아보고, 확인하고,
죄다 고친다고 고치고 왔는데...
또 어딘가에 숨어있을지 몰라 염려됩니다.
어쨋든 틀린 것을 가르쳐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그런데 왜 오래 전부터 저는 시를 소개할 때 찰 만자를 써왔을까요...?
혹시 법호는 일만 만자를 쓰시면서 시호는 찰 만자로 쓰시지 않았을까 찾아봤는데...
그런 거 없네요.^^*
저의 오기가 맞는 거 같습니다. 고맙습니다.
안방에서 전국의 꾼들과 섯다의 짜릿함!
http://imb85.net
승부사들의 진정한 한판 승부! “ 화투 “
회원가입만 하셔도 5000원의 무료머니를 드립니다
귀찮은 다운로드 이제그만,웹에서 바로 즐기는 화투!
http://imb85.net
국내 최다 회원보유 고객만족도1위!!!
화투의 짜릿한 손맛을 즐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