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마도(對馬島)는 누구의 영토인가?
태극의 팔괘와 비천상 무늬가 확연해 우리나라 종임을 한 눈에 알 수 있다.[출전] 동아일보
《“‘총각’이 한국말이라고요?” “아니 ‘지게’도 한국말이에요?” ‘쓰총’(쓰시마 총각) ‘삿총’(삿포로 총각)이란
줄임말을 쓰는 쓰시마의 택시 운전사에게 ‘총각’이 한국말이라고 알려주자 깜짝 놀란다.
한국의 지게 역시 쓰시마에서도 ‘지게’로 불린다.
일본의 다른 지역에선 이런 말을 들을 수 없다.
쓰시마(對馬島)에서만 통용되는 한국산 단어는 지금도 300개가 넘는다.》
● 일제시대 한국인 2 만여명 살아섬 전체의 92%가 척박한 산악지형이고 농토는 3%도 안 되는 대마도의
생존과 성쇠는 역사적으로 한반도와의 교류에 크게 좌우돼 왔다.
대마도향토연구회 회장인 나가토메 히사에는 “한반도와 대마도의 관계는 밝았던 시대와 어두웠던 시대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좋았던 시기로 기원전 3세기∼2세기의 500년과 조선 초기를 들었다.
일제강점기 때도 대마도는 인구가 9 만여명에 이를 정도로 융성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한국과의 교류가 끊기면서 인구가 해마다 줄어 지금은 4만여명에
불과하다.
한국인도 일제강점기에는 2 만여명이나 살았지만 지금은 60 명에 지나지 않는다.
◀대마도에 있는 조선통신사 기념비
1999 년 부산∼대마도간 정기여객선이 취항한 이후 한국인 관광객이 급증하고 있다.
지난해엔 1 만 5300명의 한국인이 대마도를 찾았다. 파고가 높아 부산항에서 출발하는 여객선이
뜨지 않으면 대마도의 주요 호텔과 음식점들이 텅 비기도 한다.
● 한복입고 참가하는 ‘아리랑 마쯔리(祭)’조선시대 때도 대마도엔 주기적으로 ‘조선 붐’이 일었다.
관료 학자 통역관 악대 등 500 여명으로 구성된 대규모 문화사절단인 조선통신사 행렬이 지나갈
때면 대마도는 후끈 달아올랐다.
대마도엔 1607 년부터 1811 년까지 200 여년 동안 12 차례에 걸쳐 파견된 조선통신사(朝鮮通信使)의
족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웬만한 절이나 관공서에는 ‘조선통신사가 묵었던 곳’이라는 대리석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매년 8월 첫째 일요일에 조선통신사의 행렬을 재연하는 ‘아리랑 마쯔리’가 열리기도 한다.
이때 대마도 주민들은 한복(韓服)으로 갈아입고 조선통신사 행렬에 참가한다.
주로 부산 동래구청장이나 구의회의장이 초청돼 조선통신사의 정사(正使)가 타던 가마에 탄다.
그 호위는 대마도에 진주해 있는 육상자위대와 해상자위대의 대장이 맡는다.
● 조선왕실의 관직임명장인 ‘고신’대마도 역사민속자료관에 전시된 유물 중 조선왕실의 관직
임명장인 고신(告身·고쿠신)이 특히 흥미를 끈다.
대마도가 조선에 정치적으로 예속돼 있었음을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로 이를 받은 사람들은
수직왜인(受職倭人)으로 불렸다.
내리면서 준 임명장 ‘고신’(告身). 대마도가 조선의 정치체제에 편입돼 있었음을 보여준다.
[출전] 동아일보
明宗때에 對馬島主에게 내려진 교지(敎旨)인 告身은 대마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알려주는 것으로 볼 수있다.
● 대마도의 원주인은 백제계 유민?리아스식 해안으로 둘러싸여 호수처럼 잔잔한 아사우(淺海)만은 요즘 한일
양국의 프로 낚시꾼들이 즐겨 찾는 유명한 낚시터이지만 오랜 기간 왜구(倭寇)의 소굴이었던 천혜의 요새다.
朝鮮 太宗 때 이종무(李從茂 : 1360∼1425) 장군도 아사우만 일대에 한 달간 머물며 왜구를 소탕했다.
이 일대에는 667 년에 백제 유민들이 나당연합군의 침공에 대비해 쌓은 백제식 산성인 ‘가나다노기’(金田城)가
있다.
백제와의 인연은 13 세기 중엽까지 대마도를 지배했던 ‘아비류’(阿比留)씨 가문의 혈통에서도 더듬어볼 수 있다.
‘아비류’는 ‘아사달’ ‘아직기’ ‘아사녀’ ‘비류백제’ 등과 어원이 같은 백제 계통의 성씨(姓氏)이다.
● 다시 거세게 이는 대마도의 한국 붐대마도에 다시 한국 바람이 거세다.
시로 승격한 대마도엔 산을 깎고 온천과 골프장 등을 개발하는 공사가 한창이다.
더 많은 한국 사람들을 끌어 들이려는 의지가 섬 곳곳에서 느껴진다.대마도가 속해 있는
나가사키(長崎)현은 정부에 ‘대마도 특구’ 법안을 제출했다.
이 안에는 대마도를 찾는 한국 관광객에 한해서는 비자 면제, 섬내 토지이용 및 취득 규제 완화,
한국어 교육 확대 등의 정책이 포함돼 있다.
실제로 한국인 단체관광객과 학생은 비자를 면제해주고 있다. 또한 대마도고교 국제교류과 학생들은
졸업학점(25학점) 중 한국어 5학점을 필수과목으로 이수하도록 돼 있다.
● 주민증만 내보이면 땅도 살 수 있어
발견하게 된다. 일본어와 한국어로 ‘대마도의 토지와 건물을 한국의 모든 분들이 구입하실 수 있습니다.
토지와 건물의 판매 가격은 2000 만원부터’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한국의 주민등록증만 제시하면 살 수
있고 등기도 가능하며 가격은 평당 20만∼30만원대”라고 한다.
대마도 시청의 우치다 히로시(內田洋) 총무기획부장도 이 같은 사실을 확인해 주면서 “50km 떨어진
부산엔 400 만∼500 만명이 살고 있는데 150km 떨어진 후쿠오카의 인구는 200 만명에 불과하다.
눈앞에 좋은 시장이 있는데 왜 한국과 교류하지 않겠는가”라고 덧붙였다.'대마도에 별장을!’.
한국과의 교류를 통해 경제를 발전시키려는 대마도 곳곳에는 ‘한국사람도 대마도의 토지와 건물을
구입할 수 있다’는 플래카드가 붙어 있다.대마도가 일본 땅이 된 이유는 척박한 땅이라고 해서 한국이
방치해왔기 때문이라는 것이 현지 여행 가이더의 의견이다.
대마도의 한국관련 유적 및 행사 | |
조선통신사 행렬도 |
400∼500명으로 구성된 조선통신사 일행의 화려한 행렬을 담은 길이 16.58m짜리 두루마리 그림. 이즈하라 대마역사민속자료관 보관. |
아리랑 마쯔리 |
매년 8월 첫째 토-일요일에 개최되는 대마도 최대의 축제. 조선통신사의 행렬 재현. 노젓기 대회, 불꽃놀이 등 다양한 행사. |
바이린지(梅林寺) |
538년 백제 성왕에 의해 일본에 불상과 경전이 전파됐던 연고지에 건립됐다고 전해지는 고찰. 1436년 조선에 예속된 후 일본에서 조선으로 도항하는 선박에 대해 문인(도항증명서)을 발급해주는 사무를 보던 곳. |
가나다(金田)성터 |
일본 최고(最古)의 성터. 높이 2∼5m의 성벽이 5.4km에 걸쳐 남아 있는 백제식 산성. 667년 백제유민이 나당연합군의 침공에 대비해 쌓은 것으로 알려짐. |
신라사신 순국비 |
왜에 볼모로 잡혀 있던 신라의 왕자 미사흔을 탈출시키고 자신은 잡혀 처형당했던 신라 사신 박제상을 기리는 순국비. 1988년 한국과 대마도의 학자와 유지가 힘을 모아 건립. |
코즈나(小綱)의 고려불 |
칸온지(觀音寺)에 본존불로 안치돼 있다. 불상 속에서 발견된 문서에는 1330년 주조돼 고려 부석사에 봉납한다고 쓰여 있으나, 어떤 경로로 대마도에 유입됐는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
대마도가 우리 땅이라는 증거들
"너희 섬(:대마도)은 조선 지방이니, 마땅히 조선 일에 힘을 써야 한다."― 에도 막부(江戶幕府) 장군의
측근이 대마도 고위관리에게 한 말. 서기 1617 년 통신사 이경직(李景稷 : 1577∼1640)이 자신들
(통신사 일행)을 수행하던 대마도의 고위관리에게 이 말을 듣고 적어 놓았다.
대마도는 … 대대로 우리 조정의 은혜를 받아 조선의 동쪽 울타리를 이루고 있으니, 의리로 말하면
임금과 신하 사이요, 땅으로 말하자면 조선에 부속된 작은 섬이다.― 서기 1590 년, 임진왜란 직전에
통신사 부사로서 일본을 다녀온 김성일(金誠一 : 1538∼1593)이 조선에 돌아온 뒤 낸 보고서에서우리
대마도에게 조선 영토 안의 주 군(州 郡)의 예에 따라 주(州)의 명칭을 정하여 주고 인신(印信 : 도장)을
주신다면 마땅히 신하의 도리를 지키어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서기 1419 년 대마도 정벌 뒤에 대마
도주가 보낸 서신에서
(전략) … 이곳은 일본 국왕의 명령이 미치지 않기 때문에 중간에서 망령되게 자존하면서 포악하오나,
이들 모두 도서(圖書)를 받고 우리 조정에 귀순하기를 바라고 있사오니, 바라옵건데 이 섬의 두목들에게
예전처럼 오고 가게 하고, 이따금 양식이나 주고 도서를 주어 뜻밖의 우환에 대비하게 하소서.
― 서기 1444 년 대마도에 보내졌던 초무관 강권선(康勸善) 이 世宗에게 보고한 글.
11세기 후반(1000년경)부터 13세기 후반(1200년경)까지 200여 해 동안 對馬島의 高麗에 대한
진봉관계(進封關係)가 연구로 밝혀지고 있습니다.(대마도는 고려 때에도 우리의 영토였음)
『산가요약기(山家要略記)』(:12 세기 말 일본 천태종의 승려가 쓴 책)에 말하기를 "대마도는
고려국의 행정치소인 목(牧 )이다. 옛날에는 신라 사람들이 살았는데, 개화천황(開化天皇)대에
이 섬(대마도)으로부터 (일본본주로) 습래(襲來)해 왔다. 중애천황(仲哀天皇;신공황후가 섭정)
이 풍포궁(豊浦宮)에서 나와 대마도 악포(鰐浦)에서 新羅(당시 對馬島에 있던 佐護加羅 중심의
新羅임)를 정벌함으로써 마침내 이 섬을 얻었다."고 하였다.― 1723 년 對馬島人 등정방(藤定房)이
쓴 대마도의 역사서인『대주편년략(對州編年略)』에서무릇 對馬島는 옛날에는 新羅國과 같은 곳이었다.
사람의 모습도 그곳에서 나는 토산물도 있는 것은 모두 신라와 다름이 없다.
― 13세기 말의 일본 책인『진대(塵袋)』
제 2권에서『高麗史』에 의하면 고려는 선종 2년(1085) 이래 대마도주를 '대마도구당관(對馬島勾當官)'
으로 불렀다고 하는데 이 점이 시사하는 바는 상당히 흥미롭다. 이와 비슷한 사례로는 제주도의
성주(星主)를 '탐라구당사'(耽羅勾當使)로, 일기도(壹岐島 : 대마도와 구슈 섬 사이에 있는 이키 섬)
도주(島主)를 일기도구당관(壹岐島勾當官)이라고 명명한 것에서 찾아볼 수 있다.
구당관은 高麗時代 변방 지역 내지 수상(水上)교통의 요충지를 관장하는 행정 책임자들에게 붙인
관직명이다. 이를 보면 탐라, 대마도, 일기도의 지배자에게 고려가 구당사 혹은 구당관이란 명칭을
붙인 의미를 알 수 있다. 즉 앞의 세 섬을 고려의 속령(屬領: 영토로 속한 땅)으로 인식하였거나 아니면
고려 정부가 대마도와 제주도를 고려 고유의 지배 질서 속에서 같은 차원으로 취급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하우봉의 논문『한국인의 대마도인식』에서대마도는 섬으로서 본래 우리 나라의 땅이다.
다만 궁벽하게 막혀 있고, 또 좁고 누추하므로 왜놈이 거류하게 두었더니 개같이 도적질하고 쥐같이
훔치는 버릇을 가지고 경인년부터 뛰어놀기 시작하였다.― 태상왕(太上王)이었던 太宗이 世宗 때 대마도
정벌을 하기 전에 군사들에게 내린 교유문(敎諭文)에서
대마(對馬島)는 섬으로서 경상도의 계림(鷄林)에 예속되었던 바 본시 우리 나라 땅이라는 것이
문적(文籍 : 서적, 기록)에 실려 있어 확실하게 상고할 수 있다. 다만 그 땅이 매우 작고 또 바다
가운데 있어서 왕래함이 막혀 백성들이 살지 않았을 뿐이다. 이에 왜놈으로서 그 나라에서 쫓겨나
갈 곳 없는 자들이 몰려와 모여 살며 소굴을 이루었던 것이다.
― 대마도를 정벌한 뒤 대마도주에게 보낸 편지에서
대마도는 본래 조선의 목마지(牧馬地 : 말 기르는 땅)이므로 대내전(大內殿)이 조선과 더불어
협공하여 대마도를 귀국(貴國:朝鮮)에 돌리고자 하다가 불행히도 세상을 떠났는데 지금의 영주는
그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대마도 정벌 이후 일기도로 파견된 조선 관리인 강권선(康勸善) 에게
壹岐島 영주 대내전(大內殿)의 관반(館伴)인 노라가도로(老羅加都老)가 한 말.
풍신수길(豊臣秀吉)이 조선 침략에 대비하여 무장에게 명령해서 만든 지도인『팔도전도(八道全圖)』
에는, 獨島 뿐 아니라 對馬島도 朝鮮의 땅으로 나와 있으며, '공격 대상'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일본도 대마도를 일본 땅으로 여기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이승만 정부때(1948 년 8월 이승만 대통령의 "대마도 반환요구"와 '대마도 속령에 대한 성명') 까지는
대마도의 영유권을 주장했는데
박정희 정부 들어와서 한일협정 이후에 대마도에 대한 영유권 주장이 꼬리를 감추게 됩니다.
당시 저는 한일협정 내용을 모르고 있었기에 대마도에 대한 영유권 포기의 대가로 무상,유상의
차관이 들어오지 않았었나 생각했었는데,
요사이 그에 대한 해답을 얻게되어 그 의문은 살아졌지만 대마도에 대한 영유권 문제는 국민적
공감대와 역사학계의 연구와 정부의 강력한 의사천명을 기대하게 됩니다.
거리상으로도 일본본토와의 거리는 150 km나 떨어진 대마도가 부산과는 불과 50 km밖에 안떨어져
있다는 사실도 중요합니다.
날이 쾌청하면 부산에서도 대마도가 보이는데 일본 본토에서는 아무리 날이 맑아도 대마도를 볼 수가
없습니다..
역사적으로도 우리 땅임이 확실한 것인데 왜놈밑에서 친일,부일했던 조상들의 땅찾기에는 손을 들어
주면서 정작 찾아야할 땅들은 수수방관하고 있는 모습에 억장이 무너집니다.
일본 시마네(島根)현 의회가 16일 `다케시마의 날'을 정하는 조례안을 제정해 사회적인 공분을
사고 있는 가운데 독도뿐만 아니라 대마도도 조선의 땅임을 보여주는 중국의 고지도가 발견됐다.
부산외국어대 김문길 교수는 이날 1488년 당시 명나라 사신 동월(董越)이 황제(영종)의 명을 받아
조선땅을 둘러본 뒤 작성한 견문록인 `조선부(朝鮮賦)'의 4-5페이지에 나와있는 `조선팔도총도
(朝鮮八道總圖)'를 공개했다.
이 지도에는 울릉도와 독도(于山島)뿐만 아니라 대마도(對馬)가 조선의 영토로 자세히 표기돼 있다.
특히 김 교수가 최근 일본 모 대학의 고문서실에서 발견한 `조선부'는 1717년 일본이 한자에 일본음을
달아 제작한 필사본으로 밝혀졌다.
김 교수는 "독도는 물론 대마도까지 우리땅이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고문서가 발견됐는데 일본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하는지 모르겠다"면서 "우리나라가 대마도의 영유권을
주장한다면 일본이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다"고 말했다.
첫댓글 독도주소가 요번에 바뀌었다고 들었습니다...우리나라땅![~](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28.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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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대마도군 독도읍 독도리로 변경 되었다지요 아마.... 주소가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