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한일 관계 연구에서 유적 유물을 기준으로 잡고 여기서 출발하는 것은 문헌들이 가지는 결함을 시정 보충할 수 있다. 유물 유적 자체에는 거짓말이 없고 문헌들보다 훨씬 더 진실을 시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적 유물이 거짓말이 없다고 해서 그것을 전하는 사람들의 말들에까지 거짓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경우 이것은 심중한 문제다. 해방후 우리 학자들에 의해 조사되고 연구된 북한 연구 성과는 지대가 지대인 만큼 초기 한일 관계 연구에서 이용할 것이 그리 많지 못하고, 남한의 것에 대하여는 대부분의 경우 과거의 일제 어용 학자들의 보고에, 그리고 일본 것에 대하여는 전부 일본 학자들의 보고에 의거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초기 한일 관계 연구에 필요한 유적 유물의 대부분은 3국 시기의 신라와 백제 영역에 속하였던 지역, 다시 말하여 오늘의 남한에 편재한다. 해방 후 남한에서 진행된 유적 유물들에 대한 조사 연구 사업에는 볼 만한 것이 없다. 이직도 그 곳 유적 유물에 대하여는 과거 일제 통치 시기에 일제 어용 학자들이 <총독부>의 간판 하에서 진행한 ‘조사’의 결과를 통하여 진상을 더듬어 내는 수 밖에 없는 형편이다.
일제 시기 일본 사람들이 우리의 유적 유물에 대하여 어떤 짓을 했던가? 그 통치 기간을 통털어 대소 수십 개의 <보고>들을 발행하였다. 오늘까지 우리는 남한 것들에 대한 연구에서 그들의 보고서에 의거하여야 하는 만큼 일제 통치의 죄악적 일변을 여기서도 반드시 적발하여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1905년 일본 제국주의가 우리 나라에 소위 통감 정치를 시작한 때를 전후해서부터 우리 나라 유적 유물들에 대한 일본 사람들의 강도적인 파괴와 약탈이 시작되었다. 도둑질은 이보다 좀 앞서 일본 사람들이 한국 땅에 발을 들여놓은 때부터 시작되었으나 1905년을 계기로 그들은 한국 따에서 주인 노릇을 하게 되었고, 이 때부터 파괴 약탈은 날강도식으로 되었다. 1910년 이후는 다시 말할 것도 없다. 강도들의 눈에는, 한국이라는 나라는 『일본서기』나 『고사기』에도 적혀 있는 것처럼 ‘금은 보화’의 나라이기도 했다. 그런 ‘금은 보화’중에서도 맨 처음에 그들의 구미를 끈 것이 고려 자기였을 것이다. 고려 자기와 그 밖의 보물을 약탈하기 위하여 500년 이상을 두고 <봉금(封禁)>되어 오던 고려 왕릉 이하 개성, 강화도의 고려 시기 옛 무덤들을 일본 사람들은 백주에 무장한 파수병을 세워 놓고 도굴하였다.
한국의 이 방면 사정을 다소간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아마도 감히 증거를 대라고 하지 못 할 것이다. 일본의 골동가들이 그렇게도 침을 흘리던 <고라이 야끼(고려 자기의 뜻)>는 이라하여 일본으로 반출되기 시작하였다. 개성과 강화도 일대의 고려 고총만 피해를 입은 것은 아니다. 백제 고분, 신라 고분, 가락 제국의 고분 등 무릇 도굴할 수 있는 모든 유적들이 도굴 당하고 유물은 일본으로 반출되어 그 곳의 ‘왕공 귀족들’과 ‘호부 신상’들의 골동 상자를 채웠다. 대소 규모로 진행된 형형 색색의 도굴에 의하여 우리 나라에서 눈에 띄는 유적은 경주 부근의 몇 개 고분을 제외하고는 아주 곤란한 것들만이 잔명을 유지하게 되었다. 1917년 경상북도 선산(善山)에 있는 가락 고분들에 대한 일본 사람의 보고서 한 구절에 다음과 같은 글발이 있다.
《본 군에 유존하는 약 천 기(基) 또는 그 이상에 달하는 고분은 2∼3년 전부터 이 지방에서 고분 내에 유존하는 고물을 완롱(玩弄)하는 폐풍이 일어났던 것과 장사치들의 매수하는 자가 있었음으로 인하여 모조리 무뢰한의 도굴 하는 바가 되었다, 다만 낙산동(洛山洞), 오목야(吳木野), 송곡동(松谷洞), 도림면(挑林面), 신림동(新林洞), 신촌(新村) 등 평지에 있는 것은 일찍부터 발굴 파괴되었던 것 같아 흔적이 낡았고 또 그 밖에 봉토가 유실되어 자연히 파괴된 것도 더러는 있었을 것이나 그 대다수는 실로 최근 한두 해 동안에 도굴 파괴된 것이다. 군집된 고분이 도굴에 걸쳐 파잔(破殘) 황폐된 참상은 차마 볼 수 없다. 실로 잔인혹 박(殘忍酷薄)을 극하여 정교(政敎)상으로 보더라도 심히 두려웁다 할 것이다. 일이 이렇게 된 원인에 대하여 이제 말하지 않더라도 현대인의 죄악과 땅에 떨어진 도의(道義)를 보려면 이 고분 군집지를 볼 것이다.》
이 시기 우리 나라 유적이 겪은 참상은 선산에만 그치지 않고 고분에만 그치지 않았다. 이 일본 사람의 보고서의 다른 부분에 의하면 <금속기 약탈시대(金屬器掠奪時代)>라는 한 시기가 있었다고 한다.
<자기 약탈 시대>를 좀 지나서 <금속기 약탈 시대>가 도래하였을 것이고, 이 <금속기 약탈 시대>에도 자기약탈은 결코 중단되지 않았을 것이다. 양심을 잃은 일본 사람들은 이 파괴의 죄가 한국 사람들에게 있고, 일본 사람들은 적지 않게 돈을 주기도 했으니까 ‘합법적’인 행위였다고 생역지를 쓴다. 인용된 보고서에 서술된 장사치나 <무뢰한>은 한국 사람이라는 것이다. 다른 「총독부 보고서」의 한 구절을 인용하자. 이 시기 경기도와 충청남도 몇 개 군을 조사한 보고 가운데 논산(論山)의 어떤 고분에 대하여 “소왕묘(小王墓)는 근년에 발굴한 흔적이 있기에 이를 따졌더니 수년 전에 군수가 이를 발굴하여다가 석관(石槨)에는 이르지 못하고 중지한 것이라 하였다…”
역대 논산 군수는 일제 통치 시기가 시작된 후부터 일본 사람이었다는 것도 증거를 댈 필요가 없다. 경찰서를 끼지 않고 <무뢰한>으로 하여금 도굴을 시켜서 이득을 본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며, 아무리 산골에서도 일제 시기는 경찰서 서장 뿐만 아니라 주재소 주임도 일본인이었다는 것도 증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이며 그 앞잡이들이다. 간교한 일제는 아무튼 도굴 현장에는 한국 사람이 더 많았으리라는 것을 가지고 오늘까지도 도굴의 책임을 한국 사람에게 씌워 보려고 시도하지만 이는 턱도 닿지 않는 강도적 논리다. 일제 때 순사 노릇하던 자로서 한국 사람이 아무래도 많았으니 일제 <총독부>의 경찰은 한국 경찰이요 일본 경찰이 아니라고 하여 그것들이 감행한 모든 죄악도 결국 한국 사람에게 들씌우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강점 후 한동한 일제는 우리의 고적들을 닥치는 대로 파괴하고 유물을 제멋대로 약탈해 가다가 사태를 좀 수습하려는 시도를 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다음으로 조직적 목적 의식적인 파괴와 약탈의 시기가 재체로 3·1운동 이후 저들이 내걸은 소위 문화 통치의 간판과 함께 시작되었다. <총독부>의 간판을 걸고 소위 ‘조사’‘발굴’사업을 진행한 것이 물론 3·1운동 후, 즉 1920년 대부터라고만 할 수는 없다. 그 전에도 도굴이 성행하여 사회 여론을 비등시키는 일이 있을 때면 만탕되던 도굴의 뒤를 따라 조사원들을 파견한 일이 없지는 않았다. 앞서 쓴 선산 보고서의 실례가 그런 것이다.
1920년 전후 시기부터 일제 <총독부>와 일본의 학술 단체가 한국의 유적 유물들에 조직적으로 손을 대게 된 것은 그들에게 장사치들의 ‘골동품 완롱’의 수준을 넘어서 그 어떤 학술적인 문제로서 이를 관찰하려는 목적이 움직이게 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이로써 대체로 일본 사람들의 <조선 고고학>이 시작되었다고 볼 것이다. 이 <조선 고고학>은 최대 관심을 소위 미마나 미야께 유적과, 소위 낙랑 유적의 발굴 조사와, 그 밖의 한국 경내에서 나오는 한(漢)문화 우물들의 적발에 두었었다. 그들의 <조선 고고학>이라는 것은 한국 역사의 자율적 발전을 부인하며, 한 문화와 <일본 세력>의 한국에로의 유입이라는 외래적인 요소들의 타율적인 작용을 밑바탕으로 해서 엮어졌다, 그러나 소위 미마나 관계 유적 유물은 하나도 찾아낸 것이 없으며, 한(漢) 문화에 대한 ‘연구’라는 것도 학문으로서의 꼴로 갖추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극히 명백하고도 흉학한 ‘목적’을 추구하였다. 일본 세력의 침투에 대하여는 할 말이 없으므로 이 이른바 한 문화를 가지고 한국 민족의 열등론을 조작하고, 이것을 가지고서라도 일제 지배의 ‘정당성’과 그 ‘영구성’을 옹호해 보자는 것이었다.
이러한 가증할 목적 밑에 ‘조사’와 ‘발굴’이 진행되었기 때문에 이 시기에도 무릇 지식을 가진 한국 사람은 조사 현장에 접근시키지도 않았었다. 일본 학자라는 사람들이 발굴된 유물을 어느 정도나 발표했는지, 얼마나 <총독부> 박물관이나 <이왕직>박물관에 남기고 얼마나 도둑질을 해 갔는지 알길이 없다. 다만 이 시기에 그러한 소위 발굴한 유물들 중에서 한국 땅에 남긴 것 보다 훨씬 많은 것을 저들의 나라로 날라 갔다는 것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에도 계속 <조선 고고학>에 대하여 일본 사람들이 ‘새로운 것’을 말할 거리를 적지 않게 가지고 있다는 것으로써도 이 사정은 짐작할 수 있다.
그러면 1920년대 이후 일제가 비교적 ‘학술적’관심을 돌렸다는 시기에는 도굴은 중지되었던가? 도굴은 그들이 중점적으로 ‘보호’했다고 하는 평양 부근의 소위 낙랑 유적에서도 공공연히 진행되었다는 것을 이 당시 발굴에 관계한 일본 학자들도 숨기지 않았다. 일본 보고자에 의하면 이 시기에 진행된 조직적인 발굴이라는 것도 도굴의 뒷꽁무니를 따르는 정도의 것이었음을 쉽게 짐작케 한다.
《그러나 “대정 12, 13년(1923, 24년―필자)에 걸쳐 행해진 낙랑 유적 지대의 도굴은 쏟아지는 출토품에 의하여 세상의 주의를 높이는 기연으로 되고, 그 전후에 있어서 경주에서의 풍부한 황금제 유품의 출토와 함께 반도(한국―필자) 유물에의 관심(말하자면 학술적 관심―필자)을 높임에 이르렀다. 이리하여 전자의 도굴에 관한 전후책으로서 동 유적(낙랑 유적―필자)의 발굴이 계획되었다.…”》
일제 통치 시기 거듭되는 불행 속에 있던 우리나라 유적들은 해방 후 북반부에서는 햇빛을 보게 되었다. 청소한 우리 고고학계는 장족의 발전을 이룩하게 되었다. 그러나 남쪽의 유적들은 해방의 빛을 보지 못하고 계속 유린당하고 있다. 매몰된 채, 산재된 채 그대로 있는 것만 해도 오히려 다행이라고 할 정도로 남쪽의 유적 유물들은 계속 피해를 입고 있다.
초기 한일 관계사에 포괄되는 약 천 년간 한국은, 일본 사람들의 견해에 의하면 한(漢)문화의 영향으로 신석기 시대로부터 금석(金石)병용기로 넘어가던 시기이며, 금석 병용기는 기원후 2∼3세기까지 계속하다가 4∼5세기 경부터서야 특히 남부 한국 일대는 역사 시대로 들어가는 것으로 설면되어 왔다. 이 틀은 대체로 일본의 역사 발전을 그렇게 보는 데서 우리에게도 그렇게 들씌워진 것이다. 물론 이보다 더 심하게 우리 역사를 왜곡하는 자들도 있다.
이러한 그들의 틀은 한국의 유적 유물들을 상세히 연구하고 거기서 끄집어 낸 결론이 아니라 그 반대로 그러한 틀을 정해 놓고 이상에서 논급한 바와 같은 ‘조사’‘발굴’사업에서 얻은 자료들을 거기에 꿰어 맞춘 것이라고 하여야 정확할 것이다.
이 틀의 근저에 놓인 선입견은 역사 발전에서 문명의 여명을 알리는 한 개 이정표로 되는 금속 도구는 주로 한(漢)세력에 의하여 전래된 것이라는 시비 전도의 외인론(外因論)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외인론은 일본의 이러한 문명 발생을 설명할 때에는 한국이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교량의 역할을 놀았다는, 말하자면 교량론(橋梁論)으로 된다. 이에 의하면 이 시기에 한국으로부터 많은 선진적인 것을 받았는데 그러한 모든 것은 거의 한국 것이 아니라 한국을 통과해서 들어온 중국 것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모든 유적의 구조와 유물을 분석하기 전에 먼저 이런 선입견을 가지고 한국의 유적 유물에 임하였고, 오늘도 기본적으로는 이 틀에 매어달라고 있다. 이 선입견의 근저를 또 따진다면 한국 역사를 모욕하고 한국 사람을 멸시하는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깜찍하고도 흉학한 심산이 놓여 있음은 누구에게도 명백하다. 그리고도 이 자들은 근대 이후 구라파의 문화를 그렇게도 많이 수입하여 이루어진 현대 일본 문화는 일본 문화이지 구라파의 문화라고는 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주로 취급하게 되는 남한의 유적 유물들에 대한 일본의 <남조선 고고학>은 그러한 틀에서 산만하게 논의되었을 뿐 그것 대로도 체계적이며 계통적인 것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초기 한일 관계 연구에서 양 지대 유적 유물들을 고고학적으로 조사 발굴한 기초하여 그것을 기준으로 잡아 출발하려고 할 때에 우리 나라 것에 대한 ‘성과’에 의거할 수가 없는 까닭이 이러한 데 있다.
나) 일본 열도(서부) 내 고고학적 자료들의 발굴과 정리
일본 학자들이 7세기까지의 자기 나라 역사의 일반 서술에서도 고고학적 시대 구분을 도입하여 승문시대 → 야요이 시대 → 고분 시대(아스카 시대 포함)라는 술어를 쓰는 데는 이 시기에 대한 고고학적 연구 성과가 적지 않다는 사실이 안 받침되어 있다. 일본 학자들에 의한 자기 나라 유적 유물들에 대한 조사 연구 사업은 과거 일제에 의한 한국 것에 대한 조사 연구 사업에 비할 바가 아니다. 특히 남쪽이 일제 때와 그리 다를 것이 없는 오늘의 형편과, 8·15 이후 특히 장족의 발전을 이룩했다는 일본의 고고학계 형편을 대비알 때 양자간의 현저한 차이는 쉽게 파악될 수 있다. 아무튼 남의 식민지로 되는 날에는 지하에 묻힌 황천객들과 고물들도 무사할 수 없음을 통감하게 하는 것이다.
8·15후 일본 고고학계는 자기 나라의 구석기 시대 유물들을 찾아내어 연구 사업에서 적지 않은 성과를 보여주고 있다. 이 방면 연구는 아직 초보적인 단계에 머무르고 있다고 하나 기초는 잡힌 모양이다. 이 구석기 시대로부터 단계에 머무르고 있다고 하나 기초는 잡힌 모양이다. 이 구석기 시대로부터 신석기 시대의 첫 단계인 승문 문화에로의 이행에 관하여서와 승문 문화 자체에 대한 연구 사업에서도 종전에 비하여 전진을 이룩한 것만은 사실이다.
승문 문화의 시작 연대에 관하여는 여러 학설이 있으나 <이소토프>에 의한 실험 결과를 가지고 기원전 7∼8천 년이라는 숫자까지도 나온다는 것을 말하기도 한다. 이 승문 문화의 마지막 시기가 기원전 3세기 경에서 그치고, 이 때부터 야요이 문화로 이행한다는 점에서는 일본 학계에 그리 이론은 없는 것 같다.
승문이 있는 질이 좋은 토기를 포함하는 종태의 문화가 전체 일본 열도를 뒤덮고 있었을 때에 대륙=한국으로부터 우수한 농경(農耕)문화가 전래되어 서쪽에서 차차 동쪽으로 전파되었고, 이 문화 유적에서는 질이 단단한 이른바 야요이 식 토기를 반출한다고 한다. 처음 전래된 곳이 북 큐슈요, 그 시기는 대체로 기원전 3∼2세기라는 것이다. 초기 한일 관계의 첫 시기를 이 때부터로 잡느느 것은 오늘 우리로서는 승문 시대의 한국과의 관계는 아직 잘 모르나 야요이 문화 때부터는 비교적 알게 되기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승문 시대에 양 지대 간의 내왕이 그리 없었다는 것은 우리의 연구에 기초하여 지어진 결론이 아니라 현대 일본 학자들이 하고 있는 말이다. 승문 시대에도 가장 가까운 대륙인 한국과의 관계가 전혀 없었을 리는 없을 것이다. 있었다고 해도 야요이 시대보다 못했을 것만은 사실일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장차 연구의 전진에 따라서는 초기 한일 관계사를 더 소급해서 말할 수 있으리라는 전망은 부정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일본 학계에서 야요이 문화에 대한 연구는 도쿄 시내 야요이라는 이름의 동리에서 긍문 토기와 구별되는 새로운 질의 토기(야요이 식 토기)가 발견된 이래 오늘날까지 약 8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할 것이다. 그 후 거듭되는 발굴과 연구에 의하여 수십 개의 그 각양한 유형이 알려지고, 이런 것들을 지역별로 분류하고 시기별로 편년하는 데서도 일본 고고학자들은 상당한 솜씨를 보이고 있다. 야요이 식 문화 유적에 속하는 집자리, 묘지, 농경지들에 대한 상당한 규모의 발굴 사업도 진행되었고 거기서는 대량의 유물들이 나왔다. 오늘 일본 고고학자들은 복잡한 종태를 가진 야요이 시대에 대하여 많은 것을 말할 수 있는 자료를 가지고 있고 또 많은 의견들을 내놓고 있다.
많은 의견들 중에서 몇 개만 종합하더라도 일본 학자들의 이 문화에 대한 기본 관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을 더듬어낼 수 있다. 첫째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야요이 문화가 주로 한국으로부터 유전된 선진 문화라는 것이다. 열도 내의 승문 문화의 주인공들이 아직 채취 경제 단계에 있었던 시기에 농경 문화의 유전에 의하여 점차로 승문 문화는 구축되고, 그 구축되는 시기는 열도 동부에 이를수록 늦어지며, 혼슈 섬의 동북 지방이나 홋카이도에 이르자면 몇 세기가 늦어진다는 것이다. 이 농경 문화는 꼭 한국으로부터만 온 것이 아니라 큐슈 섬의 남쪽을 통하여 중국 대륙의 남쪽으로부터 온 것으로도 입증하고 있는 사람도 있으나 압도적 견해는 한국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견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일본 학자들이 꼭 말하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야요이 문화가 비록 한국에서 온 것이라 하더라도 거의 모든 것이 한국 밖에서 한국으로 들어갔다가 일본 열도로 들어갔다는, 앞서 말한 바의 소위 <조선 교량론>을 강조하며 역사에 대한 그들의 근본 태도의 여하를 막론하고 열 사람이면 8∼9명은 내륙 것을 말할 때는 이 <교량론>에 기울어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음으로 야요이 식 문화에 아무리 외래적인 요소가 많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승문 문화로부터의 계승 관계에서 보려는 관점이다. 이 관점은 일본 역사 학계가 비단 야요이 문화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모든 문제 관찰에서 가지고 있는 뿌리 깊은 것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관점은 옳은 방법론에 입각할 때 역사 발전에서의 외인론과 같은 반동적 관점을 격파할 수 있는 주요 무기가 되며, 다른 나라 역사에 대하여도 그러한 공정한 관점을 가지고 보게 될 때에는 아주 정당한 입론으로 될 수 있다. 우리는 개별적인 일본 고고학자들이 이 점에서 수긍될 수 있는 면과 그렇지 못한 면을 나타내고 있음을 앞으로 적지 않게 보게 될 것이다.
야요이 문화 서술에서 가지고 있는 이상과 같은 일본 사람들의 기본 관점은 3세기 말 내지 4세기 초 이후의 고분 문화 서술에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시기에 이르러서는 그 밖의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그 초기부터 야마도 중심의 관점을 세우고 있다.
우리는 개개의 문제 해명에서 공정한 입장에서 엄격히 시비를 가르는 태도를 견지할 필요를 느끼게 된다.
고분 문화 시기, 즉 일본 사람들이 말하는 고분 시대는 우리 3국의 발전기 및 그 통합을 위한 토쟁의 시기에 해당한다. 일본 고문헌들의 이 시기 서술은 미마나 문제에 관련된 것 이외의 것들도 대부분 애매 모호하여 종 잡을 수 없이 되어 있다. 그것은 일본 고문헌들의 기본 체계, 즉 왕조사의 기본 체계가 왜곡 날조된 데 기인할 것이다. 이 점은 우리 『삼국사기』가 싣고 있는 이 시기 우리 형편에 대한 서술과는 아주 대조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하여 일본 학자들은 고분 시대라는 개념으로 이 시대를 체계화하며, 이런 체계화는 오늘 형편에서는 타당한 면이 있기도 한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 방면 연구 사업에서는 특히 개개의 문제 해명에서 상당한 성과가 있다는 것은 인정된다. 각지 고분들에 대한 유형별 분류와 그 편년도 필자가 보기에는 체계성을 가지고 있다. 문헌 사료의 저러한 심중한 결함을 보충할 만한 것을 고고학적 성과가 가지고 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거짓말로 충만된 문헌 자료를 움직일 수 없는 고고학적 자료들이 많이 뒤집어 엎고 있는 것이다.
이로써 일본 열도 내의 유적 유물에 대한 조사 및 연구는 한국 내의 이시기 유적 유물들의 ‘조사’및‘연구’와 대비할 때 아주 대조적임을 더욱 잘알 수 있다.
이런 형편에서 양 지대 유적 유물들에 대한 고고학적 성과를 가지고 초기 한일 관계사 검토릐 기초로, 출발점으로 삼으로 할 때 현재로서는 부득이 서부 일본의 해당 시기의 고고학적 정리 체계에 의거하여 그 곳 유적 유물들을 기준으로 하는 수밖에 없다고 필자는 인정하였다.
고분 시대 유적 유물에 대한 일본 학자들의 조사 연구는 8·15 후에도 계속 야마도 지방에 치중한 모양이고, 북 큐슈 지방에 대하여는 그래도 적지 않은 조사 연구가 진행되었으나 그 중간 지대인 이즈모나 기비 지방에 대하여는 그 곳에 상당한 무덤 떼들이 있다고 하면서도 볼 만한 조사 연구는 그리 하지 않은 것 같다. 초기 한일 관계사 연구에서 이는 큰 구멍이라고도 하겠으나, 그러나 일본 고고학자들은 고분 시대 전반에 걸쳐서도 야요이 시대처럼 소시기들을 설정하고 있고, 매 소시기 별로 특징을 끄집어 내고 있으며 이를 설명하는 많은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일본 고고학계가 서부 일본을 중심으로 해서 설정한 야요이 고분의 두 시기 구분을 도입해서 문제를 취급해 나가는 것이 편리하다고 인정한다.
비교적 잘 연구되어 있는 서부 일본 일대는 해당 시기를 통하여 한국으로부터 계속 많은 선진적인 것들을 받은 지대요 한국은 준 지대라는 점도 고려되어야 한다. 준 지대로서의 한국이 현재 가지고 있지 않는 것까지도 받은 지대에서는 가지고 있을 수 있으며, 앞으로 볼 수 있을 바와 같이 그런 것들을 실지로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이다. 초기 한일 관계사를 고고학적 자료를 출발점으로 하여 검토하려고 할 때에 일본의 고고학적 시대 구분을 도입하는 것이 편리한 점을 여기서도 찾을 수 있다.
일본 학자들이 해당 시기 유적 유물들을 해석하는 기본 관점에서는,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몇 가지 필자로서 수긍 못할 점을 자기고 있으나 그들은 개별적인 경우에는 우리 나라 것과의 대비 분석을 적지 않게 시도하고 있다. 이는 현재 일본 것을 출발점으로 삼는 우리로서는 또한 유리한 점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 학자들이 자기들의 유적 유물들을 분석할 때 우리 나라 것과의 대비 분석을 적지 않게 시도하는 것은 그들의 고고학적 연구 방법 자체가 가지는 성격에서 유래한다는 외에 또한 피치 못할 다음과 같은 사정이 작용하고 있다고도 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해당 시기를 통하여 한국 것, 일본 것이라고 문제를 세울 때에 한국것이라고 할 것이 많다는 정도가 미만저만하지 않다는 것이다. 야요이 시대 초기 유물에서는 한국 것이라고 할 것을 일본 것이라고 할 것들중에서 골라내게 되어 있다기보다도 반대로 일본 것(원주민의 문화)들이라고 할 것들을 그러한 유적 유물들 중에서 골라내어야 하게 되어 있다. 후대로 내려올수록 사태는 조금씩 달라진다. 그러나 또다시 고분 시기 말기인 아스카 시대에 이르러서는 야마도 지방의 유적 유물들 중에서 선진적인 것, 우수한 것을 놓고 볼 때 거기에는 거의 모든 것이 한국 것임을 앞으로 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서부 일본에 있는 유적 유물들은 단순히 초기 한일 양 지대간의 관계 역사연구에만 좋은 자료로 될 뿐만 아니라 그것은 우리의 슬기로운 민족 문화 연구에서도 상당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