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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토반 레이스
벌써 두 달째 차를 한 대도 팔지 못했더니, 지점장은 회의 때마다 열등생을 가르치는 과외선생처럼 침을 튀기었다.
내일이면 또 요양원에 계시는 어머님 치료비를 보내야 되는 날이다. 서른이 넘은지가 언제인데, 잔고는 항상 제자리이고 이러다 장가는 가기나 갈런지.
글쎄, 네 사주가 우라지게 좋긴 한데 고독수가 들었다지 뭐냐. 오래 전에 어머니가 했던 얘기가 어쩌면 들어맞는지도 모른다.
중매해 달라는 핑계로 툭하면 들르던 홍삼가계, 정관장 여사장에게 하이브리드 소나타 한 대를 계약한 건 이달 십육일이다. 무섭게 치고 올라오는 신입들에게 그나마 간신히 체면 유지는 한 셈이다.
“이수인 사장님, 서류 준비는 다 되셨어요?”
“응, 서류는 다 되었어. 그런데… 혼자 온 게 아니고 누구와 같이 왔어. 가계 자주 오는 동생인데 같이 가자고 그래서. 혹시 아는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하길래.”
“열두시가 넘었는데 우선 식사부터 하러 가시죠.”
거리의 벚나무 가로수는 만개해 있었고 처녀들이 비껴 쓴 양산 위로 한낮의 햇빛이 미끄러졌다.
룸 미러로 뒤쪽을 힐끔 보았지만 짙은 선글라스를 쓴 여성은 생소하기만 했다. 하늘색 투피스 차림의 오똑한 코가 돗보이는 서구형 미인이었다.
“박근혜대통령 당선되고 난 뒤 만난 분 중에는, 제일 미인이신 것 같습니다.”
웬걸, 뒷좌석에선 아무 반응도 없었다. 괜히 쌍팔년도식 썰렁한 멘트를 날렸군.
“치매 증세가 있으신가 보네요.”
“……”
갑자기 머릿속이 윙윙 성능 떨어진 기계처럼 소리만 요란하게 낼 뿐 좀처럼 기억을 불러내지 못했다.
“호, 혹시?”
“못 알아보면 그냥 내리려고 했어.”
선글라스를 벗으며 그녀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치약광고 모델 같은 하얗고 가지런한 치아의 미소. 흠잡을 데 없는 완벽한 미소였다.
그녀를 알아본 순간 해물 탕 국물에서 건져 올린 미더덕에 그만 입천장을 홀랑 덴 기분이었다. 미더덕이 품고 있던 뜨거운 국물이 터질 때의 그 낭패감, 너무 뜨거워서 고함이라도 지르고 싶건만 입속에 콩나물 등이 잔뜩 담겨있어 아무 소리도 지르지 못할 때의 그 당혹감.
“언니가 화장실에 갔는데 핸드폰이 계속해서 울리더라고. 이름이 박관우라고 뜨는데 흔한 이름이 아니잖아. 언니한테 물어보니 나이도 같고 해서 따라와 본거야. 생각해 보니 17년 만이네.”
어떻게 운전을 했는지 기억에 없다. 신호를 지키지 않는다고 뒷 차가 빵빵거렸고 옆 차와 부딪칠 뻔하기도 했다.
“희수가 복요리를 좋아하던데…….”
이수인 씨의 말에 관공서가 밀집한 거리의 복 전문집으로 들어갔다. 주방은 분주해 보였고, 방 안은 손님들로 붐볐다. 대부분이 남자 손님들이었고 메뉴를 보니 복국과 복 매운탕, 복 껍질무침 등 다양한 요리 이름이 적혀 있었다.
“복어는 치명적인 독을 품고 있어 알을 먹으면 즉사하죠. 내장과 알을 제거하고도 하루 정도 소금물에 담가둔대요. 알코올 해독에는 최고라고 하더군요. 독은 독으로 푸는 거래요. 다이아몬드는 다이아몬드로 자르고, 사랑은 사랑으로 이겨낸다잖아요. 내 말이 틀렸나요?”
그녀의 맑은 웃음소리가 벚꽃 꽃잎처럼 팔랑이며 흘러내리듯 허공에 울렸다. 나는 그저 어깨만 으쓱했다. 다이아몬드는 다이아몬드로 자른다는 말은 당연했다. 세상에 다이아몬드보다 강한 물건은 없으니까.
“복어는 위험에 처하면 크게 보이려고 배를 점점 부풀린대요. 어쩌면 우리가 믿는 것들의 실체도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요? 부풀어 오른 복어의 배.”
종업원이 음식을 날라 왔고 상 위의 버너에 불을 켜고 매운탕 냄비를 올렸다. 그녀는 중요한 이야기라는 듯 목소리를 낮추고 몸을 앞으로 내밀며 속삭였다.
“종종 요리사들이 실수를 하기도 해요. 독의 치사량은 사람마다 다 달라요. 독을 이기지 못하면 잠이 쏟아진대요. 그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면 죽는 거지요.”
그녀는 테니스 선수처럼 활달하고 제멋대로이면서 동시에 독을 품고 있는 듯 위험한 느낌을 주었다. 그녀는 복 매운탕이 끓자 뚜껑을 열고 콩나물과 미나리 위에 고춧가루를 듬뿍 쏟아 넣었다.
“술 마시면 점수 깎이나?”
그녀가 테니스공처럼 탄력 있게 말했다.
이수인 씨는 식사를 끝낸 뒤 다른 볼일을 핑계로 요령껏 자리를 떴다. 역시 장사하는 사람이라서 눈치가 달랐다.
그 동안 어떻게 지냈느냐고 물었다. 대답이 궁금해서가 아니라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아서였다.
“싱가포르에 있었어. 거기서 사업을 하는 오빠가 있거든. 같이 방수제를 팔아.”
“외모는 완전 연예인 스타일인데 웬 방수제?”
“응, 베스톤이라고 일본 나가노 현에서 나는 천연제품이야. 시간이 지날수록 콘크리트의 강도도 높여주고 균열을 방지하는 기능도 있어. 콘크리트의 모세구조를 규산칼슘 겔이라는 게 채워주어 물의 이동을 완전 차단시켜주는 원리야. 별도 방수가 필요 없는 반영구적인 제품이지. 한국엔 일찍 들어와서 한국사장은 떼돈 벌었어.”
“어떻게 그런 사업을 시작했어?”
“오빠가 딜러로 하던 걸 내가 나서서 확 키웠지. 나, 인맥 대단해. 동남아 5개국 판권을 갖고 있는 에이전트거든. 좀 비싸긴 하지만 댐 공사 같은 데는 필수적이라 수입이 대단해.”
탄산음료 기포가 식도를 타고 내려가 가슴 한 부분에서 온몸으로 퍼지는, 알싸한 자극. 나는 그녀가 건네는 술잔을 마다하지 않고 거뜬히 받아넘겼다. 그리곤 그녀가 무슨 말을 할 때면 고3때 보충수업시간보다 더 집중해서 들었다. 그리고 눈을 맞부딪치며 고개를 끄덕인다든가 눈을 깜박거리는 것으로 그녀의 말을 주의 깊게 듣고 있다는 표시를 했다. 그녀가 지루하거나 혹은 자신만이 떠들고 있다는 느낌을 주지 않으려는 배려에서였다.
“혹시, …… 결혼했니?”
“웬 결혼? 싱글인거 몰랐어?”
“그만한 미모면 유혹이나 따르는 남자들도 많았을 텐데.”
“돈 버느라고 뭐. 몇 번 오빠 소개로 만나보기는 했는데 도대체 아무런 감정도 생기지 않는 거야. 그러다 보니 그냥 친구처럼 되더라. 아마 널 만나려고 그랬나봐.”
그 순간 사랑 고백을 들은 사춘기 소년처럼 가슴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차는 어떤 거 타?”
역시 직업은 못 속인다니까.
“응, 싱가포르에서 벤츠 500 탄다.”
그녀가 내게 분에 넘치는 것은 점점 분명해졌다. 역시 비틀림 없이 잘 자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살이에 한 번도 부대껴 본 적 없는 온실 속의 화초. 태어날 때부터 성장에 필요한 빛과 수분과 영양을 충분히 공급받은 그들은 언제나 자신과 주위를 환히 밝힌다. 그들이 발산하는 여분의 밝음과 화사함에 힘입어 누군가는 스스로의 어둠과 굴절을 몰아내기도 할 것이다.
“이번에 귀국한 것도 유산 때문이야. 아버지가 돌아가셨잖아. 토지 보상금이 꽤 공탁되어 있어. 전에 엄마 돌아가시고 적적하신 것 같아서 오빠가 과수댁 하나 들였잖아? 글쎄 그 여자가 호적에 떠억 하니 올라 있는 거 아냐? 기가 막혀서. 엄마를 생각해서라도 어떻게…… 게다가 나보고 10억만 받고 떨어지라고 해서 할 수 없이 소송 중이야. 양로원에 기부하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로 바보가 될 수는 없어.”
술병이 비어가는 것과 속도를 같이하여 나는 비틀거렸고 우리는 벚꽃처럼 하얗게 취해 있었다.
그녀는 언제나 눈부신 존재였다.
그녀를 옆에서 바라볼 수만 있어도 나는 좋았다. 같은 공기를 마시는 같은 도시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면 어느새 주체할 수 없이 행복해졌다. 그녀는 시골 남학생들이 밤새 쓴 어설픈 연애편지를 눈앞에서 좍좍 찢어 허공으로 흩뿌렸다.
그녀는 명백히 오만했고, 그 오만은 눈부셨다.
그럴수록 남자 아이들은 그녀에게 열광했다. 나 역시 그 무리 중 하나였다. 그녀의 존재는 내 의식을 거의 지배하고 있었고, 시시때때 사사건건 모든 상념의 끝자락은 어김없이 그녀한테 귀결되었다.
기적처럼, 우연히 길에서 그녀에게 우산을 빌려준 적이 있었다. 폭우가 쏟아지던 어느 여름날이었다.
이거…… 쓸래요? 네? 하는 표정으로 그녀가 쳐다봤지만 눈을 마주칠 수 없었다. 난 하나 더 있어서……. 거짓말까지 나왔다.
고마워요 라는 목소리에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방향이 같으면 같이 가실래요? 그런 말을 들었다.
정말로, 정말로 지금 죽어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집은 반대방향이라……. 온몸이 떨렸지만 눈을 감고 그대로 내달아 버렸다. 그리고 길을 돌아 꼬박 삼십분을 비를 맞으며 걸어갔다. 그녀의 집은 같은 방향이었다. 나는 열여덟 살 여드름투성이였다.
선망의 대상이던 그녀가 나같이 평범한 남학생을 기억할 리 없다. 그녀가 스타라면 나는 영화에 출연한 추억으로 평생을 살아가는 엑스트라일 뿐이다. 불만은 없다. 별이 인간을 헤아릴 순 없다. 인간이 별을 헤아릴 뿐이니까. 그런 그녀가 갑자기 내 삶 속으로 또각또각 걸어 들어왔다.
남에게 자랑하지 못하는 비단옷이나 다이아몬드가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나는 희수를 친구들에게 자랑하지 못해 거의 안달이 날 지경이었다. 횟집으로, 카페로, 갖은 핑계를 만들어 친구들을 불러내서 희수의 미모와 재력을 과시하는데 열중했다. 만난 지 17년이나 되었다는 대목에서 친구들은 눈이 휘둥그레지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박관우 저거, 왜 장가를 안가나 했더니 다 꿍꿍이속이 있었던 거야. 이런 미인 제수씨를 숨겨놓고 이제껏 내숭을 떨었다 이거지?”
그들은 하나같이 영화배우처럼 웃었다. 나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들은 모두 자신 명의의 집이 있고 그 집에는 아내도 있었다. 처가의 도움으로 프랜차이즈 사업을 벌여 성공한 친구도 있었다.
“시청 앞 표지판을 보니 시민이 271만 8836명이라더군요. 그렇담 이곳은 271만 8835명과 관우씨가 사는 도시네요.”
우리는 자리를 옮겨서 먹고 마셨다. 이제껏 해온 다른 이야기들은 긁고 보니 꽝인 즉석복권처럼 팽개쳐진지 오래였다.
“제가 싱가포르 가서 같이 사업하자고 그랬어요. 관우씨 정도의 능력이면 뭐, 환상의 콤비죠.”
이처럼 광채가 나고 능력 있는 여자가 내 앞에 있다는 게 믿어지질 않았다. 어릴 적 점쟁이가 예언했다는 그 우라지게 좋다는 사주대로 이날을 위해 그동안 고생을 했단 말인가?
“그런데 탈모 증세가 있네? M자 형이야.”
세상 모든 사람에겐 아니지만, 누군가에겐 정오의 공작처럼 보이고 싶은 순간이 있게 마련이다.
“글쎄, 유전인가 봐. 그럼 가발이라도 쓸까.”
“아직 나이가 있는데, 그리고 그건 강북사람들이나 하는 짓이야. 차라리 짧게 깎는 게 당신한테는 더 어울려. 그리고 모발 이식 수술을 해. 잘 아는 강남 성형외과 원장 있거든. 서울대 나오셨고. 전화 해 볼게.”
삼천 모쯤 심으면 만족할 거라고, 가격은 오십 퍼센트 할인이라며 맘에 들어?
귀에 익은 목소리. 나무가 수액을 빨아올리듯 저 심장의 밑바닥으로부터 그리움을 뽀글뽀글 떠오르게 하는 음성. 나지막하지만 귀에 쏙쏙 박히는.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이 여자를 위해 당장 죽을 수도 있겠다는…….
사랑은 능력이다. 사랑에 빠지는 것은 운명이지만, 빠진 사랑을 지키는 데는 절대적으로 능력이 요구된다. 그렇다면 나의 능력은? 이제 나는 짧은 머리가 어울린다는 당위성을 부여받은 셈이다. 눈에 보이는 미장원으로 대뜸 들어갔다.
“바리깡으로 확 밀어주세요.”
“후회 하실 텐데요?”
“괜찮으니까 얼른 밀어 주세요.”
거울을 보니 교도소에서 갓 출소한 사람처럼 보였다. 그래도 나는 행복해서 죽겠다는 듯이 웃음이 실실 절로 나왔다.
“어머머, 그래도 너무 짧게 깎았다아앙. 말을 했어야지이…… 그나저나 돈 가진 것 좀 있어? 변호사한테 연락이 왔는데 얼마 후면 판결인데 사례금을 미리 달라는 거야. 내가 지금 현금 갖고 있는 게 없잖아. 우선 돌려줘 봐.”
“에이, 내가 그런 돈이 어디 있어?”
대답이 용수철처럼 튀어나왔다. 용수철은 저쪽에도 있었다.
“신용 하나로 살았다며? 그럼 대출 받으면 되지? 내가 임시로 쓰고 있는 당신 체크카드 있지? 그 계좌로 보내면 돼. 그 대신 우리 피서 같이 가자.”
감출 수 없는 생의 에너지가 정오의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고 구르는 돌멩이도 생기가 충만했다.
사랑은 소중하게 다루지 않으면 안 돼. 소중하게 다루지 않으면 아름다운 사랑은 망가져버릴지도 몰라. 사랑하는 사람을 다시 만나는 시간은 아무리 빨리 돌아와도 늦은 거야. 그렇게 지루한 시간을 나는 견디어냈어.
근로소득 원천 징수표, 급여통장, 신용정보 조회 동의서……. 웬 서류는 이렇게 많은지. 마이너스통장, 카드론, 캐피탈을 거쳐 저축은행, 대부업체까지 서류를 팩스로 보내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고 나서야 간신히 부탁한 금액을 맞출 수 있었다.
얼굴에 와 닿는 바람이 삽삽했다. 고속도로에 진입하자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달리는 빨간색 스포츠카를 가리키며 희수가 말했다.
“방금 우리를 추월해 간 저 차를 봐. 다시 차선을 바꾸어서 위험하게 트럭을 추월하고. 저러면 무척 빠를 것 같지? 하지만 저렇게 지그재그로 곡예운전을 해서 앞서간 차가 다음 톨게이트에 가보면 겨우 거기 서있는 거야. 그 차의 운전자는 모를 거야. 자기는 약삭빠르게 한참이나 앞서간다고 생각했을 테니까. 그게 아니라면 어쩌면 위반 자체를 즐기고 있는지도 모르지. 위반이 어떤 성공보다도 강렬한 성취감을 동반할 수도 있거든. 세상이라는 거, 어쩌면 고속도로 같은 건지도 몰라.”
고속도로는 점점 정체가 심해졌다. 거북이걸음을 반복 하다 보니 조수석을 깔아뭉개진 차가 전복되어 있었다. 앞 유리에 금이 가고, 유리창이 박살이 난 채로 찌그러진 차의 운전자가, 휴대폰으로 어디론가 계속 연락을 하는 모습이 보였다.
쏟아진 유리 조각들이 햇빛을 받아 마치 다이아몬드처럼 황홀하게 빛나고 있었다. 어찌하여 깨진 것들이 성한 것들보다 더 빛나는 것일까. 구급차는 오지 않고 렉카만 다섯 대가 보였다.
파도소리가 들리는 펜션에서 희수는 부끄러워했다. 그녀의 껍질을 하나씩 벗겨낼 때 숨죽이는 모습에 난 어설프고 서툴렀다.
두 사람의 몸이 하나의 심장이 되어 뜨겁게 타오르는 일은 분명 마력이었다. 그녀의 몸은 아득했고 저쪽 끝에 흐린 등불이 하나 켜져 있는 듯도 했다. 나는 그 길속으로 들어갔고, 투항하듯이 무너졌다.
희수가 나의 머리를 안았다. 어땠어? 좁아서 꼭 끼었는데, 아주 넓어서 닿을 수 없을 것도 같았어. 이상하지? 너무나 좋고 이상해. 넌 어땠니. 난 꽉 찼는데, 텅 비어서 허허로운 것도 같았어. 좋고 안타까웠어. 이상하지? 그랬구나. 둘이 똑같았구나.
휴일마다 어김없이 가던 요양원을 희수를 만나고는 가을이 다 되도록 못 가보았다. 이번 주말에 꼭 가야겠다고 생각할 때 어머님이 돌아가셨다는 전화를 받았다. 요양간호사의 전화는 암호문처럼 짧았다. 지병인 협심증과 당뇨가 있었다고는 하나, 일흔둘의 나이에 세상을 등진다는 건 애석한 일이었다. 고통 없이 편히 가셨다는 말이 그나마 위로가 되었다. 말리는데도 불구하고 희수는 부득부득 장례식장에 따라가겠다고 우겼다.
가을은 찬란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나뭇잎이 단풍드는 것은 엽록소의 생명이 다해 푸른빛이 떠나기 때문이라고 한다. 생명의 환이 소멸된 자리가 불꽃이 튀어 오르듯 아름다운 것은 또 어떤 비의인지.
시동을 끄자 내 차는 늙은 말처럼 풀썩 주저앉았다. 마을 이장인 숙부는 우리를 번갈아 보았고 나는 쭈뼛거렸다.
“결혼할 사람이냐?”
나는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그렇다고 했다.
“상복 입히거라. 진작 데리고 왔으면 늬 엄마가 얼마나 좋아하셨을까.”
빈소 옆에 세워진 국화 화한의 흰 국화꽃들은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기에 열중하고 있었다.
장례식은 적당히 엄숙했고 적당히 번잡했다. 죽음은 슬프지 않으며 슬픈 것은 슬픔뿐이다. 어쩌면 떠나보내는 슬픔보다도 남아있는 자신의 처지가 더 슬퍼서 우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검은 한복에 흰 버선과 하얀 동정, 큰 키의 그녀는 우아했다. 사뿐사뿐 걷는 그녀를 보니 군계일학(群鷄一鶴)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희수는 역시 전천후였다. 내가 해야 할 일들을 요모조모 알려주는 게 꼭 상조회사에서 나온 사람 같았다. 나는 상을 당한 사람이 아니라 조문객처럼 느껴졌고 가끔 히죽거리기까지 했다.
나는 울음이 나오지 않아 민망했는데 희수는 꺼이꺼이 곡도 구성지게 잘 했다. 며느리 감이 아주 미인이고 효부라는 말들이 심심치 않게 들렸다. 희수는 어른들의 존칭도 금세 기억해 살갑게 불러드리고 여러모로 신경을 써 드려서 금세 분위기를 휘어잡았다.
내가 한밤중에 찰떡이 먹고 싶다면 당장에 찹쌀이라도 빻아 떡을 쪄줄 여자였다.
어른들은 탈상하고 바로 혼인 날짜를 잡으라고 했다.
“당신 어깨가 좀 휘었어. 이제 어깨 좀 확 펴고 살아봐. 내가 있잖아.”
그 말은 그동안 내 몸을 묶고 있던 튼튼한 밧줄을 풀어내고 있었다. 나는 스르륵 풀리는 밧줄의 느낌에 몸을 흠칫 떨었다.
“능력 부족에 대한 자격지심 때문인가 봐. 물려받을 유산도 없고, 개인 사업을 할 만한 자본도 없고, 그저 월급쟁이로 살아가야하는 자신에 대한 지겨움에 생각이 미치면, 사는 게 무슨 장애물 경주만 같았어. 하지만 이제라도 널 만나서 다행이야.”
희수는 삼우제도 지내기 전 싱가포르에서 중요한 손님이 왔다면서 급히 서울로 떠나갔다. 안개 속 고속도로로 택시는 줄행랑을 놓듯 파묻혀 갔다.
차원의 경계에서 일어나는 순간적 소멸, 그런 것 같았다.
무심코 내다본 하늘은 수상했다. 맑던 하늘에 먹구름이 덮치더니 해를 가리고 우박이 쏟아졌다. 검은 그림자가 땅에 서리더니 우박이 퍼붓기까지는 오 분도 채 되지 않은 짧은 시간 안에 이루어졌다.
모든 게 한순간에 달라질 수 있다는 것. 삶도 또한 그렇게 갑자기 변할 수 있는 것일까.
희수의 핸드폰은 계속 꺼져 있었다. 게다가 이런 저런 장례비용도 계산하지 않고 조의금을 몽땅 받아갔다는 것을 숙부로부터 들었다.
“도무지 조카자식 키운 공이 없구나. 네 아버지도 염치 좋게 제삿밥만 날름날름 받아먹었지 뭐냐. 귀신도 아무 쓸모가 없다니까.”
세상일이란 기대와 진행 결과가 다를 때가 많이 있다. 그게 인생이라지만 정말 고통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던 것은 그녀로부터 연락이 끊긴 이후였다. 가슴은 찢어지고 영혼은 산산조각 나는 것 같았다. 나락으로 떨어져 내려가는 추락의 속도감 속에서 나는 비틀거렸다.
중년의 남자에게 어느 날 전화가 걸려온다. 지난날 서로에게 열렬했으나 헤어질 수밖에 없었던 옛 애인의 목소리이다. 여자의 옛 이야기를 들으며 남자도 아름다웠던 젊은 날의 회상에 잠긴다. 여자가 그윽한 눈빛으로 남자를 응시한다. 여자의 눈빛만은 예전과 다름없다고, 남자는 생각한다. 이윽고 여자가 말한다. ‘보험 하나만 들어 주시겠어요?’ 이런 유의 이야기를 텔레비전 드라마 같은 데서 보긴 했다.
그런데 드라마가 아닌, 그것도 꿈같은 이야기를 들었다.
희수가 내 친구들을 전부 찾아다녔던 것이었다. 싱가포르에 골프와 호텔을 예약해 놓을 테니 부담 없이 놀러오라며, 그리고 싱가포르에서 송금된 돈이 웨이팅이 걸려서 찾을 수 없으니 돈 좀 돌려달라는 얘기였다. 나는 웨이팅이란 게 무언지 처음 듣는 단어였다.
관우씨나 다른 친구들에게는 절대 얘기하지 말라고, 자기를 얼마나 우습게보겠느냐고 공범의식까지 심어주면서.
그들은 아마 수상쩍은 미소를 난수표처럼 서로 주고받았으리라.
약속한 날이 지나도 입금이 되지 않자 발신했던 핸드폰으로 연락해보니 전원이 꺼져 있었다. 미심쩍은 생각에 친구들끼리 연락해 보니 여덟 명 모두가 피해자였다. 이용했던 핸드폰은 그중 한 친구의 핸드폰으로 밝혀졌다. 영업상 핸드폰을 두 개 가지고 있는 친구인데, 비싼 전화를 쓰고 있으니 며칠만 제가 쓰면 안돼요? 해서 별생각 없이 빌려줬다는 얘기였다. 마치 짜고 치는 고스톱 판에 나만 멋모르고 불려나가 앉아 있었던 기분이었다.
그녀가 내가 알았던 사람 중 가장 고결한 사람이길 바랬다. 하지만 이제 보니 발밑의 덫에 걸린 꼴이었다. 스스로 놓은 덫, 그래서 더욱 치명적인.
누구나 한두 가지의 재능은 타고나는 모양이다. 성장하는 과정에서, 뼈와 살갗에 스며들고 길들여진 삶의 방편 같은 것. 하지만 어쩌면 그렇게 완벽할 수 있었을까? 희수는 사기 사건으로 이미 수배 중이었다. 이수인 씨 역시 피해자로 가계 전세금까지 압류된 상태였다. 나 혼자만 절절한 러브스토리였지 드라마 소재도 되지 않을 흔해빠진 삼류 스토리였다.
사랑도 게임이라면 이건 페어플레이가 아니다. 아니, 사랑이 욕망의 또 다른 이름이라는 사실을 내가 잊고 있었을 뿐이었다. 모든 인간은 무엇인가를 끝없이 소유하려 하고, 얻은 것을 지키려 애쓴다. 욕망 자체가 결여에서 비롯된다면 나의 결여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신기루엔 보는 사람이 원하는 환영만 떠오른다고 하지 않는가.
중심으로 가고자 기를 쓰겠지만, 어차피 나는 이 사회의 변두리일 뿐이다. 아마 그녀도 중심을 향해 끝없이 내 달리고 싶어 그렇게 몸부림쳤을지도 모른다. 하기야 양치는 소년이 오죽했으면 거짓말을 했을까, 그는 늑대가 나타났다고 외칠 때마다 자신에게 가해지는 관심을 엄청난 희열 속에서 맛보았을 것이다. 아마도 그 소년은 거짓말과 바꾼 죽음 앞에서도 미소를 지었을지도 모른다.
‘꿈은 이루어진다’라는 말은 한때 매혹적인 구호였다. 이 단호하고 확신에 찬 구호는 열광적인 욕망의 구호였다. 그러나 현실 앞에는 이루어지지 않는 꿈과 살아내야 할 일상이 버티고 있었다. 악몽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물론 나도 한때는 좀 더 찬란한 무엇이 되리라 꿈 꾼 적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껏 내 꿈의 변천사는 ‘되고 싶다’와 ‘될 수 없다’사이의 투쟁의 역사였다. ‘되고 싶다’가 번번이 패배했다. 기권 패였다.
많은 이들이 나에게 착하다고 말했다.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고 했다. 나는 신호위반도 하지 않았고 규정 속도를 준수하고 고속도로에서 갓길운행 같은 것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랑은 교통사고처럼 닥치지만 이별은 보험 처리처럼 지지부진하기만 했다.
그녀와의 모든 기억을 키 하나만 누르면 흔적도 없이 지워지는 컴퓨터의 파일처럼 그렇게 지워 버리고 싶었다.
마음속에 이름 붙일 수 없는 감정들이 지나치게 많이 엉겨 있었다. 그 감정이 어떠한 것인지, 무엇인지, 정확히 이름붙일 수만 있다면 그것이 외로움이든 슬픔이든, 미움이든 배반이든, 견뎌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너무 많은 감정이, 간헐천처럼 뜨겁게 예고 없이 솟아올랐다. 매번 소스라쳤고 매번 화상이었다.
뜨거운 커피에 얼음을 넣어서 마시고 싶었다. 차가움과 뜨거움이 동시에 혀에 감기는 그런 커피.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내 속에 그런 뜨거움과 차가움이 제각각의 온도를 유지한 채 엉겨 있었다.
그러나 슬픔보다 더 강하게 나를 압박한 건 빚이었다. 난 연인을 잃은 슬픈 남자가 아니라 갚지 못한 빚에 대한 내용증명의 수취인이었으며 민사소송의 출두 요구서에 찍힌 피고였다. 직장으로 찾아오는 채권 추심회사 직원들 때문에 사무실에서 도망친 적도 몇 번 있었다.
오늘은 핸드폰이 발신 정지된다기에 상담원을 연결하여 통 사정을 하고 있는 신세였다. 순정의 말로는 정말이지 잡지 표지보다도 더 통속이었다.
분주히 가을이 지고 있었다. 가로수 잎은 독촉 고지서처럼 거리로 투둑, 떨어져 내렸다. 가로등이 켜진 거리에는 퇴근길 정체로 애가 타는 차들이 분통을 터뜨리듯 매연만 푹푹 뿜어대고 있었다. 나는 동맥경화증으로 혈압이 잔뜩 상승한 거리의 플라타너스 낙엽들이 뒹굴고 있는 보도를 천천히 걸었다.
친구들이 기다리는 식당 이층으로 올라가자 잠시 대화가 끊어지고 술 마시는 소리, 안주 뒤적이는 소리들이 적막하게 들려왔다.
“어떻게, 그런 여자를 우리한테 데려 오냐?”
“어쨌든 우린 박관우 통장으로 보냈으니까 당연히 관우가 해결해야 돼!”
아무리 독한 잔이라도 이미 내 앞에 놓였다면 어차피 마셔야 될 터였다. 그러나 그들의 상식의 껍질을 깨뜨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너희들의 시야라는 것이 얼마나 좁고, 그 시선은 얼마나 오류를 범하기 쉬운 것인지를 보여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들은 당장이라도 물을 뿜을 준비를 갖추고 있는 소방관이었고 나는 물줄기를 피하기 위하여 전전 긍긍하는 생쥐의 꼴이었다. 그 순간, 어릴 적 놀이처럼 한번 외쳐보고 싶었다.
자, 지금부터 바꿔서 반대로!
그들은 에이포 용지 두세 장 분량으로 써도 모자랄 것 같은 나에 대한 말을 단 한 단어로 압축했다.
병신.
나는 발소리를 죽이며 돌아섰다. 미닫이문 건너편에서 호기심과 흥미로 반짝거리고 있을 눈들, 바깥에 널려있는 구두 짝들과 정확하게 똑같은 숫자의 눈들이 나의 뇌리에 선하게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만약 지금 문을 연다면 여러 개의 눈들이 내 얼굴을 향하여 빛을 뿜을 것 같았다. 나는 돌아서기 전에 고개를 숙여서 구두의 수를 세어 보았다. 검은색 계통의 것이 열 개, 갈색 계통의 것이 여섯 개. 나는 되돌아 걸으면서 그것들 중 가장 가까이 있는 것을 세게 짓밟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고작 그 정도뿐이었다.
달려오던 자동차의 전조등 빛살이 내 얼굴을 강타하고 지나갔다. 나는 너무나 지쳐 있었다. 나의 시선은 술 취한 사람이 운전하는 자동차의 헤드라이트처럼 좌우로 심하게 흔들렸다. 걸으면서도 수시로 브레이크를 밟거나 핸들을 급하게 꺾어야 했다.
지쳐 돌아온 나의 빌라 건물은, 수십 개의 가스통이 아무렇게나 방치돼 있어 마치 폭발물 벨트를 온몸에 휘감고 있는 알카에다 조직원처럼 위험하고 비장해 보였다. 나는 옷만 벗어던지고 침대 속으로 기어 들어간다. 그리고 운다.
아고라 억울 난에 이야기를 올렸다. 나 같은 피해자가 다시는 없어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같이 찍은 사진을 보니, 사진 속의 나는 바다를 뒤로 한 채 활짝 웃고 있었다. 근심과 고통이 도대체 뭔지 모르는 푼수처럼.
이튿날, 하루 만에 무려 오만 칠천 명이 조회한 게 아닌가? 검색어 순위 1위였다. 댓글들도 다양했다. 성금을 모아 현상금을 걸자는 사람도 있었고, 전국의 대형 전광판에 공개수배하자는 다혈질도 있었다. 역삼동의 여성전용 찜질방에서 보았다는 신빙성 있는 제보도 있었지만 구태여 찾지 않았다.
어차피 변경시키거나 개선할 수 없는 과거일 뿐이다. 현실을 과거로 만드는 결단, 그 외에는 삶을 바꿀 방법이 도저히 없었다.
지점장은 내게 퇴직을 권고했다. 남들보다 느려터지다는 게 내 퇴출의 요지였다. 나는 점심을 먹을 때도 남들보다 숟가락을 늦게 내려놓았다. 회의 시간에도 남들보다 늦게 입을 열었다. 그리고 실적도 당연히 남들보다 느리게 쌓았다. 결국 나는 남들보다 느리다는 이유로 남들보다 빨리 짐을 싸게 되는 꼴이었다. 일생에 처음으로 남들을 앞지를 수 있는 순간이 오고 있었다.
고통을 통과해 본 영혼만이 그만큼 깊어지는 삶의 깊이를 느낄 수 있을까? 되도록 즐거운 일들만 상상하기로 했다. 울적할 때면 다른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노래를 불렀다. 혼자 노래방을 기웃거리기도 했더니 음치이던 내가 노래를 흥얼거리는 버릇이 생겼다.
“오빤 강남 스타일, 강남 스타일. 낮에는 따사로운 인간적인 여자… 밤이면 심장이 뜨거워지는 여자, 그런 반전 있는 여자….”
싸이는 졸지에 전용기를 타는 세계적인 스타가 됐다던데, 한국 대통령은 몰라도 가수 싸이는 세계가 다 안다니.
이메일을 보내오는 여성들이 생겼다. 삼류코미디는 잊어버리고 자기와 사귀자는 내용이었다. 그들은 하나 같이 내가 이 시대의 마지막 휴머니스트라며 멋있다고 했다. 프로필도 다양했다. 프로골퍼도 있었고, 인터넷 쇼핑몰 사장도 있었다.
그들과 만나 같이 웃고 떠들었지만 서로의 간격을 의식해야만 했다. 내로라하는 배경과 유복함으로 감싸여진 당당함 때문에, 그 여자들이 눈부신 느낌조차 들었다. 아! 이 여자야말로 명품이구나. 그들과 비교할 때 내가 짝퉁인 것 같다고 느낀 것은 당연했다. 명품이란 소유해본 사람만이 발음할 수 있는 사치스런 어휘였다. 애써 차분한 척 했지만 나는 초조해하고 있었다. 마음을 찍는 사진기가 있다면 촌뜨기처럼 웅크린 채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내 가엾은 모습을 찍을 수 있으리라.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갑자기 전국에서 나에게 차를 사겠다며 벌떼처럼 연락이 오기 시작했다. 내 사연에 공감한 많은 사람들이었다. 매일 두 세대씩 차를 팔아 치우자 지점장은 조회 때 마다 칭찬하는 것으로는 모자랐던지, 한주소금인 그 짠돌이가 내게 양복을 한 벌 선물하기도 했다.
택시회사 사장은, 차량 십여 대를 내게 계약 하며 희망을 잃지 말라고 격려하여 주기까지도 했다.
지점장 말대로 어쩌면 내가 올해 판매 왕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연봉 이억에 해외여행까지, 상상만 해도 즐거운 일이다. 정말 이처럼 간단하게 꿈이 이루어져도 괜찮은 것일까. 아니 이렇게 쉽게 이루어지는 수도 있기는 한 걸까?
계약하랴, 탁송하랴,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 모를 지경이다. 어제는 차량 인도시간을 맞추느라 고속도로에서 갓길로 이리저리 빠져 다니며 밟아댔더니 계기판이 200km를 훌쩍 넘었었다. 스릴이 괜찮았다. 경험해 보지 못했던 새로운 흥분의 세계였다. 갑자기 이제껏 살던 세상의 선을 벗어나고 싶다는 유혹에 빠져들었다. 범접할 수 없는 금단의 열매에 손을 뻗치고 싶은 것처럼. 열린 문틈을 자꾸만 들여다보고 싶은 것처럼, 들어가지 말라는 잔디밭을 밟아보고 싶은 것처럼, 좁고 견고한 철망사이에 손가락을 넣어 빠르게 회전하는 선풍기의 날개를 만지고 싶은 것처럼 탈선의 욕구와 충동이 굼실굼실 올라왔다.
이제 흐릿하기만 하던 앞길이 하이패스처럼 선명하게 다가온다.
폭설이 도로 턱에 쌓이고, 눈이 아스팔트길을 빙판으로 만들어도 나는 춥지 않았고 불행하지도 않았다.
기록적인 눈이 온 이유는 따스한 기온과 찬 기온이 만나 두 개의 에너지가 부딪히면서 눈 폭탄이라는 또 다른 형태의 에너지를 창조한 것이다.
삶도 절망이든 희망이든 상충하고 부딪히면서 새로운 에너지가 되고 하나의 가능성이 된다.
심장을 걸 수 있을 만큼 지독한 사랑도 꿈꾸지 않는다. 아무리 대단한 사랑도 그 끝이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제 내 방식대로의 어설픈 연애를 시작하게 될 지도 모른다.
태양이 땅 그림자를 그리기 시작하는 황혼이었다. 남아있는 노을빛과 켜지기 시작하는 전등 빛, 차츰 드러나는 어둠이 어우러져 거리는 몽환적 분위기였다.
여자의 카키색 페라리가 보였다. 가운데는 잘록하고 양쪽 끝은 봉긋 솟은 보닛, 곤충의 눈을 연상시키는 유선형 헤드라이트, 차체에 파충류 동물 같은 느낌을 주는 공격적인 그릴. 여자의 차에서 오래된 것이라고는 유창으로 들이치는 노을빛과 그녀뿐인 것 같다.
부모가 삼풍백화점 건물더미에 깔려죽어 갑자기 상속자가 됐다는 여자였다. 작은 얼굴과 흰 피부가 귀염성 있는 얼굴이다. 어제 만난 여자보다 아이큐는 높지 않아도 멍청한 놈들의 머리를 마비시킬 만큼의 미모를 갖고 있다.
수입차 키를 테이블에 내려놓자 여자가 슬쩍 바라본다. 치켜 올라간 듯한 눈매가 도발적이다.
“인상이 너무 강해 보여요. 강남에 잘 아는 성형외과 원장이 있거든요? 서울대 나오셨고, 아마 50% 할인은 될 거에요. 어때요?”
여자가 하아, 웃었다. 촛불이 바람에 흔들리는 듯한 웃음.
“숙부가 교포신데 유산을 남기셔서 소송 중이거든요. 상속 받는 거, 복잡하고 비용 많이 드는 거 아시잖아요? 얼마 후면 판결인데, 변호사가 사례금을 먼저 달라는 거예요. 혜미씨 같은 분이 도와주신다면이야 더 바랄 게 없죠.”
여자는 게임기를 선물 받은 어린아이처럼 얼굴이 환해졌다. 빨대를 타고 세차게 올라온 주스가 꿀꺽 넘어가는 소리가 역력히 들렸다.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여자의 온 신경이 내게 향해 있음을. 이제 코스 요리를 즐기는 사람처럼 천천히 여자의 시선을 음미하기 시작했다.
최신형 재규어 XF가 외곽 순환도로의 푸르스름한 금속성 여명 속을 질주하고 있다. 흰색가죽, 월넛 벌 무늬목, 브러시드 알루미늄 같은 내장재로 격조 있게 꾸민 차 실내는 편안하고 안전한 느낌을 주었다.
“연예 기획사를 설립하고 있어요. 한류 스타들이 해외에서도 인기가 장난이 아니거든요. S M 엔터테이먼트 같은데 주식 값이 얼만지는 아시죠? 잘만하면 대박 나는 사업이죠. 이거, 흔한 기회가 아니니까 이번에 투자 한다면 정말 횡재하는 거죠.”
이때「개선행진곡」이 들려왔다. 누군가 내게 할 말이 있다는 신호.
“아, 박대표! 어제 TV 봤어? 오프라 윈프리 쇼 말이야. 가수 싸이가 오프라 윈프리 쇼에 출연했는데 그 여자가 같이 나왔더라고. 희수라던 여자. 아, 글쎄 그 여자가 수지 최라고 하면서 매니저로 나왔더라고. 맞아 틀림없어. 영어도 아주 유창하게 하던데, 이제는 만나야하는 거 아냐? 둘이 뭉친다면야 진짜 환상의 콤비일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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