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제목: 상식 밖의 세계사
지은이: 안효상 지음
출판사: 새길
차례
책머리에
1. 바벨탑의 수수께끼를 푼다
2. 태양신이 하사한 함무라비 법전
3. 이집트의 미라도 자격이 있었다
4. 알파벳이 생겨난 경위
5. 신의 계시를 받은 살라미스 해전
6. 아테네 민주주의의 명암
7.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끊은 알렉산더
8. 중국인들은 왜 가을을 싫어하나?
9. 한나라 농민은 모두 귀족이었다
10. 3년이나 지속된 스파르타쿠스의 봉기
11. 거세된 사마천이 눈물로 쓴 <사기>
12. 로마 황제가 한나라에 사신을 파견했다
13. 기독교가 어떻게 로마의 국교가 되었나?
14. 당고조, 당태종은 중국 사람이 아니었다.
15. 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황제 측천무후
16. 며느리 양귀비에게 반한 당현종
17. 바이킹은 정말 해적이었나?
18. 십자군 전쟁은 진짜 성전이었나?
19. 토너먼트라는 말의 숨은 이야기
20. 마스터피스(걸작품)의 어원
21. 대학의 뿌리는 길드였다
22. 천하 무적 칭키즈칸 군대의 숨은 비결
23. 14세기 중세를 뒤흔든 흑사병
24. 르네상스는 중세 문화의 결실기였다
25. 다 빈치가 한밤중에 공동묘지에 간 이유
26. <동방 견문록>을 기록한 사람은 따로 있다
27.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신대륙 찾기 경쟁
28. 독일 농민을 배신한 루터의 종교 개혁
29. 희망봉의 원래 이름은 `푹풍의 곶`
30. 스페인의 무적 함대가 영국에 패한 까닭
31. 명나라 말기에 발생한 노동자 파업
32. 유토피아의 원래 뜻
33. 수염에 세금을 매긴 황제
34. 수평파의 요구는 무엇이었는가?
35. 미국인들은 홍차를 마시지 않는다.
36. 좌파, 우파라는 말은 어떻게 생겨났는가?
37. 최초의 흑인 공화국 탄생
38. 게릴라의 원조는 스페인
39. 폴란드 인의 비애가 담긴 쇼팽의 <혁명>
40. 영국에도 부정 선거구가 있었다.
41. 9표차로 발발한 아편 전쟁
42. 대통령제를 채택할 뻔한 태평천국운동
43. 최초의 박람회였던 1851년 런던 박람회
44. 링컨은 노예제 페지론자였나?
45. 일본 농민은 존재조차도 몰랐던 천황
46. 천황의 품으로 돌아간 일본의 자유 정신
47. 수에즈 운하가 영국의 소유가 되었던 속사정
48. 록펠러는 어떻게 돈을 벌었나?
49. 일본 민간인들의 국제 침략사
50. 여론정치의 천재 강유위의 싱거운 종말
51. 파나마 운하를 둘러싼 미국의 음모
52. 알파벳을 문자로 사용하는 베트남
53. 신해 혁명에서 과장된 손문의 역할
54. 1차 세계 대전을 발발시킨 두 암살 사건
55. 배반당한 민족 자결주의
56. 레닌은 왜 독일과 불평등조약을 체결했나?
57. 1920년대 중국 여대생들의 브래지어 벗기 운동
58. 간디의 비폭력, 불복종 운동의 효과는?
59. 무솔리니와 파시스트 독재
60. 세계 대공황의 발발
61. 신무기 실험대에 오른 게르니카의 비극
62. 보살의 출현을 믿은 일본 국군주의의 시조
63. 장개석은 왜 패했는가?
64. 일본군을 해방군으로 여긴 베트남 사람들
65. 노르망디 상륙 작전이 성공한 비결
66. 채플린은 공산주의자였나?
67. 오키나와는 독립 왕국이었다.
더 읽을 만한 책들
책머리에
약간은 자극적인 제목이 붙은 이 책은 독자들에게 역사의 재미와 역사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씌어진 것이다. 사실 이 책을 읽게 되는 독자들은 이미 고등학교나 대학에서 `세계사`나 `문화사`라는 이름의 과목이나 여러 책을 통해 어느 정도 역사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을 터이다. 하지만 현재의 교육이 갖는 한계 때문에 역사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질문을 받고 자신있게 자신의 논리를 펼 수 있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는다.
사람들은 흔히 역사에 대해 두 가지 생각을 갖고 있다. 그 하나는 역사란 왠지 딱딱하고 연대기나 딸딸 외우는 것이며 어렵다는 생각이고, 다른 하나는 역사에 대한 올바른 지식, 나아가 나름의 역사관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일종의 강박 관념이다. 그래서 섣불리 역사 공부를 시작해 보기도 하고 곧잘 포기하기도 한다.
글쓴이는 어떻게 해야 많은 사람들이 역사에 관심을 가질 것인가 하는 문제에 도전해 보았다. 중요하다고 알려진 역사적 사실들의 알려지지 않은 측면이나 잘못 알려진 것들을 드러내 주거나, 또 중요하지만 어떤 이유에선지 교과서나 역사서에서 잘 다루지 않는 것을 제시하는 것으로 이 책의 방향을 잡았다. 그런 다음 독자들이 접근하기 쉽게 그것을 개개의 장면으로 나누고 사실의 전후 맥락과 의의를 정리하는 방식을 택했다. 그러므로 목차를 보고 흥미를 느끼는 부분부터 읽어도 무방하다.
하지만 인류의 역사에서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사실들을 추려 내는 것도 추려 낸 사실에 의의와 생명력을 부여하는 것도 글쓴이의 능력에 부치는 일이었다. 그래서 역사의 색다른 면을 밝히기 위해 얄궂게도 기존의 많은 책들을 참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활자화된 책을 통한 도움 이외에도 글쓴이가 잘 알지 못하는 부분에 대해 자료를 주거나 내용을 정리해 준 사람들도 있다.
어쨌든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이 역사에 대한 재미를 느끼고, 또 자신이 알고 있던 것과 다른 면이 숨어 있음을 안다면 글쓴이의 첫 의도는 성공한 셈이다. 더 나아가 이 책에 담긴 내용에 의문을 제기하고 다른 책을 더 읽어 나가면서 나름의 역사관을 만들어 나가기 바란다. 그래서 이런 독자들을 위해 글쓴이가 참고했거나 독자들이 더 읽었으면 하는 책들을 말미에 정리해 놓았다.
1993년 9월 안 효 상
1. 바벨탑의 수수께끼를 푼다
현재 지구상의 사람들이 사용하는 말은 100개가 넘는다. 그리고 그 말이 민족을 구별하는 주요 지표로 쓰이기도 한다. 그런데 성경에 의하면 사람들이 나라와 민족에 따라 제각기 다른 말을 쓰게 된 것은 하늘에 도전하려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벌을 내린 결과라고 한다.
성경 창세기 제 11장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온 세상이 한 가지 말을 쓰고 있었다. 사람들은 동쪽으로 옮아 오다가 시날 지방 한 들판에 이르러 자리를 잡고는 의논했다. “어서 도시를 세우고 그 가운데 꼭대기가 하늘에 닿게 탑을 쌓아 우리 이름을 사방으로 흩어지지 않도록 하자.”
야훼께서 이렇게 세운 도시와 탑을 보시고 생각하셨다. “사람들이 한 종족이라 말이 같아서 안 되겠구나. 이것은 사람들이 하려는 일의 시작에 지나지 않겠지. 앞으로 하려고만 하면 못 할 일이 없겠구나. 당장 땅에 내려 가서 사람들이 쓰는 말을 뒤섞어 놓아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해야겠다.” 야훼께서는 사람들을 온 땅으로 흩으셨다. 야훼께서 온 세상의 말을 거기에서 뒤섞어 놓아 사람들을 온 땅에 흩으셨다고 해서 그 도시의 이름을 바벨이라고 불렀다.
후일 사람들은 제각기 다른 말을 쓰는 이유가 바벨탑 때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 탑에 대해서만은 끊임없이 관심을 가졌다. 바벨탑은 실재했던 것일까? 실재했다면 그 위치는 어디일까? 사람들은 이 바벨탑의 존재에 대해 끊임없이 의문을 던졌다. 특히 이것은 기독교도들이 가장 알고 싶어하는 수수께끼의 하나였다.
바벨이라는 것은 원래 `신의 문`이라는 뜻이며 후에 그리스인들은 바빌론이라고 불렀다. 7세기 이후 이 지역 사람들은 이슬람교도가 되었지만 바벨탑의 신비를 쫓는 서유럽 기독교인의 방문은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바벨탑의 흔적을 발굴한 것은 금세기 초 독일 조사단이었다. 이들은 18년 동안이나 땅을 파 옛 바빌론의 모습을 발굴했으며 바빌론에서 가장 신성한 에사기라(성역)내에서 그 옛날의 7층탑(지구라트)의 흔적을 찾아냈다. 흔적밖에 없었지만 면밀한 조사를 통해 탑의 첫번째 층은 각변이 91미터, 일곱번째 층은 24미터이며 높이는 약 90미터라는 것이 밝혀졌다.
또한 1차대전 이후 영국·미국 합동 조사대가 이라크 남부의 고대 유적을 10년에 걸쳐 발굴했다. 그 결과 그곳이 기원전 2000년 전의 수메르인의 도시 국가 우르의 흔적임을 알 수 있었고 이 유적 가운데 탑도 있었다.
어쨌든 오늘날 메소포타미아에는 계단 모양의 신전이 40개 이상 발견되어 있다. 이것을 지구라트라고 부른다. 이 지구라트가 아마 사람들이 생각하는 바벨탑일 것이다. 하지만 40개가 넘는 탑 중에서 어느 것이 창세기에 나오는 바벨탑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런데 왜 이런 탑이 필요했을까? 문명 발생지의 하나인 메소포타미아지역에 수메르인들이 자리잡은 것은 기원전 4000년경이었다. 이들은 작은 도시 국가들을 세웠고 도시의 중심에 신을 모시는 신전을 세웠던 것이다. 동부 산악지대 출신인 이들은 처음에는 신을 평지보다 한 단 높은 곳에 모셨지만, 메소포타미아 지방이 두 강(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으로 인해 홍수 피해가 심한 곳이었기 때문에 단을 높이 쌓아 그 위에 신전을 모셨던 것이다.
2. 태양신이 하사한 함무라비 법전
자신이 당한 대로 상대방에게 해주는 것을 흔히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그리고 이것은 구약 성경의 히브리 사람들의 율법에도 나온다.
이러한 보복의 사상이 최초로 표현된 것은 함무라비 왕(Hammurabi, B.C. 1728 ∼1686)의 법전에서이다.
문명의 발상지의 하나인 메소포타미아 지방은 개방된 평원지대였기 때문에 수많은 민족의 이주와 정복, 이에 따른 지배자의 교체가 잇따랐다. 기원전 2350년경에 셈족인 아카드인(Akkadians)이 처음으로 통일 왕국을 세웠다. 하지만 오래가지 못하고 같은 셈족인 아무르인(Amurites)이 바빌로니아 왕국을 세워 다시 이 지역을 통일했다. 이 왕국은 기원전 18세기 함무라비왕 시대에 전성기를 맞이했다. 함무라비 왕은 중앙집권적 체제를 정비하고 함무라비 법전을 만들었다.
우리가 이 함무라비 법전을 알게 된 것은 법조문이 새겨진 비문이 발견된 덕분이다. 1901년 프랑스의 드 모르간(De Morgan)이 지휘하는 페르시아 탐험대가 수사(Susa:페르시아만 북방에 있는 고대 도시의 유적)에서 큰 돌기둥 하나를 발굴했다. 세 토막으로 끊어져 있었지만 이어 보니 완전한 모습이었다. 이 돌기둥은 높이 2.5미터, 둘레가 1.8미터였다. 그리고 돌기둥의 상부에는 함무라비 왕이 태양신으로부터 법전을 받는 광경이 조각되어 있다. 즉 함무라비 왕이 지상의 백성을 통치하는 권한을 신으로부터 위임받는다는 뜻이다.
이 돌기둥에는 이란의 고대 문자인 설형문자가 촘촘히 새겨져 있다. 이 문자를 해독한 결과 그것이 법률 조문임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 함무라비 법전은 282조로 되어 있는데 토지 제도, 재산, 결혼, 상속, 범죄에 대한 형벌 등 여러 규정을 담고 있다.
이 법전에서 견지하고 있는 원칙은 중형주의와 보복주의이다. 중형주의의 예로는 절도의 경우 10배, 20배, 30배를 물거나 사형, 술을 마신 성직자는 화형을 집행한 것 등이다.
`만약 누군가(귀족)가 다른 사람(귀족)의 눈을 상하게 하면 그의 눈도 상하게 한다. 만약 그가 타인(귀족)의 뼈를 부러뜨렸을 때는 은 1마나를 지불한다`는 조문은 보복주의의 예이다. 또한 다른 사람의 딸을 때려서 유산하게 하면 자기의 딸이 사형당하며, 목수가 집을 짓다가 무너져서 주인의 딸이 죽으면 목수의 딸이 죽어야 한다는 것도 보복주의 원칙이 나타나 있는 예이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동등하게 이 법의 적용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앞에 든 예문처럼 동등한 보복은 귀족들 사이의 사건에 한정되었다. 그리고 평민의 범죄는 귀족의 범죄보다 더 중형에 처해졌다.
이렇게 함무라비 법전은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가장 완전한 첫 성문 법전으로 당시의 사회를 비교적 소상히 전해 주는 중요한 유적이다. 함무라비 법전이 새겨져 있는 이 돌기둥은 현재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3. 이집트의 미라도 자격이 있었다
고대 이집트 하면 떠올릴 수 있는 것 중의 하나가 미라이다. 물론 미라는 이집트에만 고유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집트의 건조한 기후는 미라 보존에 적합해 현재까지 그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다.
이 미라에는 고대 이집트 인들의 삶과 죽음에 대한 태도가 반영되어 있다. 고대 이집트 인들은 사람이 죽은 후에 영혼이 사람의 몸을 떠나지만 후일 영혼이 다시 시체로 돌아와서 죽은 후에도 삶이 지속된다고 믿었다. 이러한 사고 방식은 `오시리스 신화`에도 남아 있다. 그 신화에 따르면 지상의 모든 인류를 훌륭하게 다스리는 자비로운 왕 오시리스가 있었는데 이를 질시한 동생이 그를 죽여 상자에 담아 나일 강에 떠내려 보냈다. 그리고 그의 아내 이시스가 고생 끝에 남편의 유해를 찾아 관에 정성스럽게 모셨다. 하지만 그의 동생이 다시 관을 찾아내어 오시리스의 유해를 조각조각내어 이집트 전역에 뿌렸다. 그러나 이시스는 다시 남편의 유해를 미라로 만들었다. 이후 소생한 오시리스는 죽은 사람들의 왕이 되었고 그의 아들은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 새로운 왕이 되었다. 이 신화는 왕이 사후에 부활해 신이 다스리는 세계의 왕이 되어 영원한 삶을 보낸다는 고대 이집트 인의 내세관을 보여준다. 이러한 믿음에 바탕해서 만들어진 것이 영혼이 돌아올 수 있도록 한 미라이다.
그런데 아무나 영혼이 되돌아오는 것이 아니었고 따라서 아무나 미라가 되지는 못했다. 고대 이집트 초기에 미라가 될 수 있었던 것은 파라오(pharaoh: 이집트의 왕)뿐이었다. 고대 이집트에서 파라오는 신의 후손이자 신과 같은 존재여서 모든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 자신이 국가였으며 국토 전체는 형식상 파라오의 소유였고 상업, 농업 등 모든 경제 활동이 그의 통제하에 있었다. 이렇듯 전제 국가였던 고대 이집트에서 최고 지배자인 파라오만이 미라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다가 중왕국 시대에 이르러 귀족들도 영혼이 다시 돌아온다고 믿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신의 의지에 따라 종교적 계율을 열심히 지키다가 일생을 마친 일반 사람들 역시 내세에 부활하여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다는 믿음이 널리 퍼졌다.
그리하여 죽은 사람을 미라로 만드는 것이 당연시되었으며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투스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미라 만드는 전문 직인도 있었다고 한다.
미라 만드는 방법은 우선 사체에서 뇌를, 다음으로 내장을 끄집어낸다. 그 다음 소금, 향료, 수지의 혼합물을 이용하여 사체에 방부 처리를 하고 건조시킨다. 이후 미라의 속을 채우고 끝으로 아마포로 몇 겹씩 감는다.
이렇게 만들어진 미라는 유가족에게 돌아와서 상징적인 의미의 `입을 벌리는 의식`을 받는다. 이것은 죽은 자로 하여금 다시 먹고 마시고 말할 수 있게 한다는 뜻에서 치러진 의식이다. 이로써 미라는 무덤 속으로 들어갈 모든 채비를 갖추게 된다.
하지만 일반 사람도 미라가 될 수 있게 된 다음에도 차별은 존재했다. 그것은 재력에 따른 것이었는데 미라 만드는 사람에게 대금을 지불하는 정도에 따라 세 등급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니 훌륭한 미라가 되는 것은 부자들뿐이었을 것이다.
4. 알파벳이 생겨난 경위
오늘날 세계에서 사용되고 있는 문자는 크게 1)알파벳 체계, 2)한자 체계, 3)기타로 분류될 수 있다. 이중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는 것은 알파벳 체계이다.
보통 알파벳이라고 하면 라틴 문자 체계를 떠올리며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이 영어 26자이다. 하지만 이외에도 그리스 문자 체계, 셈 문자 체계, 인도.남아시아 문자 체계 등이 있다. 이 중에서 셈 문자 체계에 속하는 페니키아 문자가 알파벳 문자 체계 전체의 모태가 되었다.
기원전 10세기경 셈 어족의 한 파인 페니키아 인(Phoenican)이 레바논 산맥 서쪽에 정착하여 지중해 연안에 티루스(Tyrus), 시돈(Sidon), 비블로스(Byblos) 등의 도시를 건설했다. 이들은 지중해를 무대로 교역과 식민 활동에 힘썼는데 나중에 로마와 대결하게 되는 카르타고도 페니키아가 기원전 9세기에 세운 식민지이다. 페니키아 인은 지중해 일대의 산물, 즉 레바논의 목재, 키프로스의 주석, 이베리아 반도의 납 그리고 양모, 포도주, 곡물 등을 매매하여 번영했다.
당시 사용되던 문자는 이집트의 상형 문자, 메소포타미아의 설형 문자 등이었는데 복잡하기 짝이 없어 배우기가 쉽지 않았고 상업 활동의 실용성면에서도 매우 불편했다. 따라서 페니키아 인들은 상업 활동을 원활히 수행하기 위해 쓰기에 편리한 표음 문자인 알파벳을 고안했다.
최초의 페니키아 문자는 이집트의 상형 문자의 영향을 받아 기원전 17∼16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것은 22개의 자음만을 표기하는 문자 체계였는데 22개라 누구나 쉽게 깨우칠 수 있어서 페니키아 인에 의해 지중해 주변 지역으로 널리 퍼졌다. 그리하여 비블로스를 비롯한 지중해 연안 일대에는 다수의 페니키아 어 각문이 남아 있으며 그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는 1923년 비블로스에서 발견된 아히람 왕(기원전 11세경으로 추측)의 석관에 새겨진 각문이 있다.
그리스 인이 이 문자 체계를 들여온 것은 기원전 9세기였다. 그리스 인들은 이것을 그리스 어의 성질에 맞게 변화시켰다. 즉 페니키아 문자는 자음밖에 표기할 수 없었기 때문에 여기에 모음을 더해 오늘날 알파벳의 원형을 만들었다. 그리고 러시아를 비롯한 슬라브 계통에서 쓰이는 슬라브 문자 체계는 그리스 문자를 모태로 하여 만들어졌다.
그리스 인이 페니키아 문자를 받아들인 얼마 후 중부 이탈리아의 고대 민족인 에트루리아 인들도 당시 이탈리아 남부에 있던 그리스 식민지와의 접촉을 통해 이를 받아들여 에트루리아 어를 표기하는 데 사용했다. 그 후 이는 로마 인에게 채택되어 라틴 알파벳(로마자)이 만들어졌고 로마 제국 전역에 보급되었다. 로마 시대의 라틴 문자는 23자였으나 중세에 이르러 I에서 J가 불리되고 Y에서 U와 W가 분리되어 현재의 26자가 되었다. 알파벳의 대명사인 이 라틴 문자는 현재 알파벳을 직접 쓰지 않는 곳에서도 기호 등의 보조 문자로서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다.
5. 신의 계시를 받은 살라미스 해전
마라톤 경기가 페르시아와 아테네 사이에 벌어졌던 `마라톤 전투`(기원전 490)에서 기원한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기원전 5세기경 그리스의 아테네는 민주 정치의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다. 그런데 얼마 안가 동방의 페르시아라는 강국의 위협을 받게 되었다. 오리엔트 세계를 통일한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왕은 서쪽으로의 진출을 꾀했고 먼저 소아시아의 그리스 식민지들을 굴복시켰다. 페르시아의 다음 목표는 그리스 본토였다.
기원전 490년 페르시아 군은 아테네에서 북쪽으로 25마일 떨어진 곳인 마라톤(Marathon)에 상륙했다. 애국심에 불타는 아테네의 중무장 보병들은 자기들의 두 배가 넘는 페르시아 군대를 이곳에서 격파했다. 승리의 소식을 전하기 위해 한 병사가 아테네까지 쉬지 않고 달렸다. 그는 “기뻐하라, 우리의 승리를”이라는 한 마디를 외친 후 곧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이 마라톤 전투에서의 승리는 중무장하고 전투에 나선 아테네 시민의 승리였으며 민주정치의 승리라 할 수 있다. 이것이 마라톤 경기의 기원이다.
하지만 이것으로 페르시아의 위협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기원전 480년 다리우스를 계승한 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가 그리스를 침략하기 위해 몸소 대군을 진두 지휘했다.
이러한 상황을 맞이하여 아테네는 델포이에 있는 태양의 신 아폴론의 신전에 사람을 보내 신의 계시를 받아 오게 했다. 이것은 당시 정치의 신정적 성격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신의 계시는 절망적이었다. 다시 한번 계시를 간청하자 약간은 희망적인 내용이었다. 나무로 만든 벽 뒤에 숨으라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이 `나무로 만든 벽`이 도대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의견이 분분했다. 이 때 테미스토클레스라는 사람이 `나무로 만든 벽`이란 배를 뜻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원래 해군의 증강을 강력하게 주장했던 사람으로 이미 2년 전에 그가 제안했던 배 200척이 건조되어 있었다. 아테네의 민회는 테미스토클레스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이리하여 아테네 시민은 모든 부녀자와 노인을 사라미스 섬으로 피신시키고 싸울 수 있는 남자는 200척의 배에 올라 페르시아 군과 싸울 준비를 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당시 아테네가 가지고 있던 200척의 배는 3단 노선이었으며 길이는 약 40미터, 폭은 6미터였다. 그리고 노를 젓는 데는 100명 이상의 사람이 필요했다. 뱃머리에는 충각이라고 하는 뾰족한 것이 달려 있었는데 이것은 나무 뿌리를 날카롭게 깎아 청동을 입힌 것이었다. 전속력으로 적함에 다가가 이것으로 적함의 옆구리를 찔러 침몰시키는 것이 당시 사용된 전술이었다. 따라서 노를 젓는 사람의 기술과 일치된 단결심이 승리의 열쇠였다.
결전은 기원전 480년 살라미스 해상에서 벌어졌다. 아테네를 버리고 해상에서 페르시아 군에 맞서 싸운다는 작전은 멋지게 성공했다. 400척이 넘는 페르시아 배의 절반 이상이 침몰했고 크세르크세스는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테네는 승리했고 민주 정치는 위기에서 벗어났다.
이 살라미스의 승리는 아테네 민주주의에 변화를 가져왔다. 10년 전 마라톤에서의 승리는 중무장한 보병의 승리였다. 그런데 이 당시에는 창과 방패 등 무기는 시민이 자비로 구입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재산이 있는 시민만이 보병이 될 수 있었다. 따라서 무장을 할 수 없었던 가난한 시민은 전투에 참가할 수 없었고 정치적 발언권도 약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살라미스 해전에서는 가난한 시민들이 노 젓는 사람으로 활약했다. 아테네를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지켜 낸 이들은 이제 정치 무대에서도 자신들의 주장을 힘있게 펼 수 있었다. 이전의 민주 정치가 중무장한 시민들 중심으로 운영되었다면 이제는 가난한 시민을 포함하는 새로운 민주 정치로 변화하게 되었던 것이다.
6. 아테네 민주주의의 명암
민주주의를 가리키는 데모크라시(democracy)라는 말이 그리스어인 데모크라티아(인민의 지배)에서 생긴 것과 마찬가지로 민주주의라는 정치 체제가 가장 먼저 성립하고 발전한 것도 그리스였다. 하지만 처음부터 민주주의가 정착한 것은 아니어서 기원전 8세기 도시 국가인 폴리스(polis)가 성립했을 때는 귀족이 정치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후 기원전 5세기까지 폴리스의 역사는 귀족에 맞서 평민이 정치적 권한을 증대시키려고 노력한 역사였다. 그리하여 페르시아 전쟁(기원전 5세기 후반) 직전에 어느 정도의 민주주의 제도가 마련되고 전쟁 이후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 민주주의의 전성기를 지도자의 이름을 따 페리클레스 시대(기원전 457-459)라고 한다. 민주주의를 철저하게 실현하고자 했던 사람들은 명문귀족 출신의 펠리클레스를 지도자로 내세워 보수파와의 싸움에서 승리했다. 먼저 주목되는 것은 민회의 권한이 대폭 강화된 것이다. 시민권을 가진 성년 남자 전원이 참석하여 발언할 수 있는 민회는 행정, 입법의 최고 기관이 되었다. 그리고 재판권도 추첨에 의해 재판관을 선출하는 시민 법정이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경제적 번영과 동맹시로부터의 공납금으로 공직자들에게 보수를 지급할 수 있었는데, 이런 수당제의 실시는 가난한 시민이 정치에 참여하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이전에 수당이 지급되지 않을 때는 직접 일하지 않고도 생활이 가능한 부유한 시민만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당시 민주 정치의 기본 원리는 통치하는 자와 통치받는 자의 차이를 없애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테네에서는 관리의 임기를 1년으로 정하고 중임을 금지했으며 관리의 선출 방식도 추점제였다. 당시 아테네 인들은 추점제가 선거보다 공평하고 민주적이라고 생각했다. 원래 그리스인들이 제비 뽑기를 좋아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렇지만 예외도 있었다. 국방의 책임을 지는 장군들은 추첨에 의해서가 아니라 경험과 능력에 의해 10명이 뽑혔으며 또한 중임도 인정했다. 그런데 점차 이들의 권한이 확대되어 모든 내외 정책이 이들에게 집중되었다. 페리클레스가 30년 가까이 아테네를 지도할 수 있었던 것도 장군으로 매년 민회에서 재선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시민이 직접 정치에 참여한다는 이상을 실현한 것 같은 페리클레스 시대의 민주주의도 기본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즉 정치에 참여하는 시민에는 성년 남자만이 포함되었던 것이다. 여자나 재류 외국인, 노예는 포함되지 않았다. 특히 페리클레스는 시민권을 얻는 자격을 엄격히 규정하여 부모 모두가 아테네 인인 경우로 제한했다. 기원전 5세기 중반 아테네의 시민수는 약 3만 명, 그리고 여기에 가족수를 합하면 약 12만 명이었다고 한다. 그 외에 시민권이 없는 외국인이 약 1만 명, 노예는 시기에 따라 4만 명에서 10만 명 이상일 때도 있었다. 이렇게 아테네 전 인구 중 시민권을 가진 사람의 수가 적었다는 것이 아테네 직접 민주주의의 한계였지만 또한 이 한계가 직접 민주주의를 가능하게 한 원천이기도 했다.
그리고 민주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시민이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능력이 필요했다. 일단 생산적인 일에서 벗어나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했다. 또한 단순히 참가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와 법률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민회에서 훌륭한 연설을 하여 민주주의를 적극적으로 운영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전쟁이 일어나면 무기를 들고 전쟁터로 달려나가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일상적으로 군사 훈련을 받아야 했다.
시민은 이러한 능력을 키우기 위해 경제적, 시간적 여유가 필요했다. 이러한 여유는 노예의 존재에서 나왔다. 당시 아테네 시민은 한 사람당 평균 두세 명의 노예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노동은 노예에게 맡기고 시민은 정치, 학문, 체육에 전념했다. 이것이 시민의 이상이었다. 경우에 따라 노예와 함께 일하기도 했지만 육체적인 노동은 항상 노예의 몫이었다. 시민은 이렇게 여유 있는 신분으로서 민주주의를 향유했던 것이다.
아테네 시민들은 문자 그대로 민주주의(데모크라티아, 즉 인민의 지배)를 달성하려 했고 어느 정도 그것을 향유했다. 하지만 그들이 향유한 민주주의는 여성, 외국인 특히 노예를 배제한 제한된 것이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그들이 민주주의에서 배제한 노예의 노동에 의해 민주 정치가 가능했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직접 민주주의이기는 했지만 여타 신분을 배제한 시민만의 민주주의였다. 진정으로 모든 사람이 정치에 참여한다는 이상은 평등을 이념으로 한 시민 혁명 이후에나 본질적으로 제기될 문제였다.
7.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끊은 알렉산더
굉장히 어려운 문제나 일을 고르디우스의 매듭이라고 한다. 이 말의 기원은 알렉산더 대왕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며 알렉산더는 이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푼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다.
기원전 4세기 그리스의 폴리스(도시 국가)들이 쇠퇴하고 그 대신 그리스 북쪽의 마케도니아가 흥기했다. 기원전 359년에 마케도니아의 왕위에 오른 필립(Philip)은 정치, 군사적 개혁을 통해 강력한 통일 왕국을 만들고 막강한 상비군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개별 도시 국가로 분열되어 있던 그리스를 통합하여 페르시아를 정복할 계획을 세웠다.
이에 맞서 아테네는 테베와 연합하여 대항했지만 기원전 338년에 케로네아에서 크게 패했다. 승리한 필립은 그리스의 폴리스들을 규합하여 페르시아 원정길에 오르려 했다. 하지만 그는 암살되고(기원전336) 그의 아들 알렉산더가 20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기원전 334년 알렉산더는 마케도니아, 그리스 연합군을 이끌고 동방 원정길에 올랐다. 그는 먼저 소아시아를 정복했다. 여기서 페르시아 군을 몰아낸 알렉산더는 소아시아의 중앙에 있는 고르디우스에 들어섰다.
이 도시에는 제우스 신전이 있었다. 이 신전의 기둥에 한 대의 짐수레가 단단히 묶여 있었는데 이 매듭을 푸는 사람이 아시아를 지배한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었다. 그러나 이 매듭은 너무 절묘하게 묶여 있었기 때문에 아무도 풀지 못하고 있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알렉산더는 신전으로 가서, 허리에 찬 칼을 뽑아 들고 단칼에 그 매듭을 베어 버렸다. 이제 그는 아시아의 지배자로서 지위를 약속받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매듭을 푼 것은 아니라 난폭하게 잘라 버린 것이었다.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풀지 않고 잘라 버린 것은 알렉산더와 그의 제국의 미래를 보여 주는 것이었다.
이제 거칠 것이 없는 알렉산더는 먼저 후방을 평정하기 위해 이집트를 정복하고 나일강 하구에 알렉산드리아라는 그리스식 도시를 건설했다(기원전 331). 이 도시는 이후 300년 동안 세계 최대의 도시로 번성했다.
소아시아와 이집트를 평정한 알렉산더는 페르시아와 마지막 결전을 치르기 위해 또다시 동방으로 향했다. 기원전 331년 알렉산더는 티그리스 동쪽의 가우가멜라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페르시아의 국왕 다리우스 3세는 중앙아시아로 도망쳤다가 거기에서 살해되었다. 페르시아는 멸망한 것이다.
이제 알렉산더는 마케도니아의 왕, 그리스 세계의 대표자뿐만 아니라 페르시아 제국의 후계자로서의 지위도 차지하게 되었다.
기원전 327년 알렉산더는 인도로 향했다. 당시 그리스 인들은 인더스 강 너머에 동쪽 세계의 끝이 있고 그 앞에는 넓은 바다가 펼쳐져 있다고 생각했다. 세계의 끝에 도달하여 그곳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 넣는 것이 알렉산더의 꿈이었다.
그러나 그 꿈은 실현될 수 없었다. 인더스 강을 넘어서도 아시아 대륙은 끝없
이 펼쳐져 있었다. 게다가 알렉산더의 군대가 처음 경험하는 인도의 자연 환경은 너무나 지독했다. 무더위와 장마가 그들을 괴롭혔고 식량 부족도 한 몫 거들었다. 거기에다 주민들의 저항마저 만만치 않았다.
지친 군대는 알렉산더에게 원정의 중지를 요구했다. 이틀이나 고민하던 알렉산더는 마침내 철수 명령을 내렸다. 고생고생하여 그들이 옛 페르시아의 도시 수사로 돌아온 것은 기원전 324년이었다. 마케도니아를 출발한 지 10년이 지난 뒤였다.
다음해 바빌론에서 아라비아 원정을 준비하던 알렉산더는 예기치 않게 말라리아에 걸려 32세의 나이로 죽고 말았다. 세계를 정복한 그도 자연의 질병에는 맞설 수 없었던 것이다.
그가 죽은 후 알렉산더의 대제국은 혼란에 빠졌다. 제국의 통치권을 둘러싸고 후계자들 사이에 치열한 다툼이 벌어졌던 것이다. 권력다툼 끝에 세 왕실이 유력한 존재로 남게 되었다. 오리엔트와 소아시아의 일부를 지배하는 시리아의 셀레쿠스(Selecus)왕실, 이집트의 프톨레미(Ptolemy)왕실, 마케도니아의 안티고누스(Antigonus)왕실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 세 개의 나라도 끊임없이 대립했다.
10년이라는 짧은 세월 동안 지중해와 아시아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했기에 알렉산더는 대왕이라는 명칭이 어울리는 정복자였다. 하지만 그의 정복은 말 그대로 군사적 정복을 넘어서지 못했다.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잘랐기 때문에 그는 아시아의 정복자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잘라 버린 매듭처럼 그의 제국도 그가 죽은 후 조각조각 잘려 나갔던 것이다.
8. 중국인들은 왜 가을을 싫어하나?
우리는 중국의 역사를 지나치게 대단한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알게 모르게 우리의 무의식에 남아 있는 중화사상과 주로 중국측 기록에 의존한 우리의 역사 지식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병자호란 때 우리가 겪었던 삼전도의 치욕이나 일제 36년의 식민지 시절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중국인은 수많은 치욕과 수모를 겪어 왔다.
기원 전후경 중국은 빈번히 흉노라고 불리는 북방 기마민족의 침입을 받아 그 방비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흉노는 몽고계 또는 투르크 계로 불리는데 활솜씨와 승마 실력이 굉장히 뛰어나 언제나 바람처럼 기습하여 활세례를 퍼붓고 물건을 약탈한 후 바람처럼 사라지곤 했다.
평상시 그들은 중국 북부에 흩어져 살면서 말을 타고 유목과 수렵 생활을 하고 있었다. 초원에서는 봄에서 여름에 걸쳐 배부르게 풀을 먹은 말이 가을이 되면 통통하게 살이 오르지만 어느새 풀은 시들고 혹독한 겨울이 찾아오면 대지는 꽁꽁 얼어붙게 된다.
겨울이 오기 전에 흉노는 살찐 말에 올라타고 겨울 식량을 구하기 위해 따뜻한 남쪽 중국 본토로 밀려온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인은 가을이 되면 흉노의 습격을 두려워했다. <한서>는 `흉노는 가을에 온다. 살찐 말과 강한 활과 함께` 라고 중국인들의 놀라움을 표현하고 있다.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후 1세기까지 약 350년간은 북방의 유목민족인 흉노와 남방의 농경민족인 한이 전쟁과 화친을 되풀이한 남북 대립의 시대였다. 당시 양측의 관계는 힘으로서는 굴욕적이다 싶을 정도로 흉노의 일방적인 우세 속에서 유지되었다.
아버지를 죽이고 선우(흉노의 최고 지도자)에 오른 묵특이 만리장성 이북의 초원지대를 통일한 때는 마침 한고조 유방이 항우를 멸하고 한을 세운 때였다. 이 두 거대 세력의 충돌은 불가피했다.
기원전 201년 유방의 심복이었던 장군 한신이 흉노군에 포위당하자 투항, 흉노 편에 가담한 사건이 발생했다. 진노한 유방은 직접 대군을 지휘하여 흉노를 공격하다가 평성이라는 곳에서 묵특의 군사에게 포위당하게 되었다. 죽음의 위기에 빠진 그는 묵특의 부인에게 뇌물을 주고 구명을 호소했다. 그녀는 묵특을 “두 군주께서는 서로 다투지 마십시오. 지금 한나라 땅을 얻는다 하더라도 초원에서 말 달리신 선우께서는 끝내 그곳에 살지 못할 것입니다”라며 설득했다.
묵특은 이에 유방의 목숨을 건져 주고 화친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의 내용은 형제맹약의 체결, 한의 공주가 선우에게 시집갈 것, 흉노에게 매년 솜, 비단, 술, 곡식 등 물자를 공급할 것 등이었다. 한으로서는 굴욕적인 불평등 조약이었고 이런 형태의 조약은 이후의 역사에서 송, 명과 북방의 거란, 여진, 몽고족 사이에서 반복되어 나타난다.
흉노가 한을 얼마나 조롱했던가를 좀더 살펴보자.
한고조 유방이 죽은 후 선우는 유방의 미망인에게 편지를 띄운다. “나 의로운 군주는 소와 말이 가득한 들판 가운데서 항상 죽국에 가 노닐고 싶었노라. 이제 그대도 홀로 되었고 독수공방 외로우니 우리 두 사람 모두 즐겁지 않을 것 같소. 우리 서로 갖고 있는 것과 갖지 않은 것을 바꿔 봄이 어떻소.” 이런 모욕적인 추파에 유방의 미망인은 “선우께서 저희 나라를 잊지 않고 글을 내려 주시니 우리는 그저 두렵기만 할 뿐입니다. 물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니 저는 연로하고 기력이 쇠하여 보행도 주체할 수 없습니다. 선우께서는 과히 허물치 마시고 제게 그같이 힘든 일을 요구하지 말아 주십시오. 대신 수레 두 대와 말 두 짝을 보내 드리옵니다” 라는 답장을 했다. 이는 한-흉노 관계가 거의 일방적이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화친조약이 체결된 후에도 흉노는 2,3년을 주기로 주로 가을에 중국을 침략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새로운 조약을 체결, 물자를 약탈해 갔다.
이런 관계가 한의 우위로 뒤바뀐 것은 월남과 조선을 정벌하여 무위를 떨쳤던 한무제 때에 이르러서였다.
9. 한나라 농민은 모두 귀족이었다
흔히 백작, 남작, 후작이라고 하면 군주에게 작위를 수여받은 귀족을 말한다. 그러나 중국 진나라와 한나라의 무지렁이 농민들이 모두(물론 미성년자와 여자는 제외) 황제에게 작위를 수여받았다면 믿을 수 있겠는가. 이는 물론 역사적 사실이고 여기에는 엄청난 역사적 비밀이 숨어 있다.
우리는 보통 중국 역사에서 하은주 시대부터 신해 혁명까지 중국을 지배했던 전제군주의 성격이 같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진한 시대를 획으로 큰 변화가 있었다.
사실상 진한제국 이전의 농민들은 왕이 누구인지도 몰랐다. 그들에게는 씨족 집단의 장이 곧 왕이요, 황제였다.
물론 은나라, 주나라의 왕들은 그 시대의 최고 지배자였지만 그 권력에는 심각한 제약이 있었다. 이 시대 사회구조의 기본 단위는 씨족 집단이었기 때문에 왕의 지배력은 씨족 우두머리의 충성을 확인하는 정도였고 씨족 내부에는 미치지 못했다. 따라서 은,주 시대의 농민들은 왕을 의식하지도 못했고 의식할 필요도 없었다. 오로지 씨족장만이 그들의 지배자였다. 게다가 씨족장일지라도 씨족
원들의 동조 없이 독단적으로 일을 처리할 수 없었다. 한마디로 은,주의 왕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왕의 개념과는 거리가 멀었다.
은,주가 무너지고 춘추전국의 혼란기를 거쳐 등장한 진시황제에 이르러서야 우리가 알고 있는 개념과 같은 왕권이 성립한다. 그는 말을 듣지 않는 지식인들을 파묻거나 책을 불살라 버리고 지방까지 자신의 전용도로를 만들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모든 백성들에게 똑같은 화폐와 길이, 무게, 부피 단위를 쓰도록 강요했고 전국의 인민을 동원, 아방궁과 만리장성을 짓도록 했다. 그리고 씨족을 해체하고 군과 현을 전국에 설치, 씨족장을 통하지 않고 직접 인민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서는 자신이 이전의 왕들과는 다르다는 의미에서 스스로 `황제`라고 칭했다. 황제는 원래 중국 고대의 신을 지칭하는 말로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인 호칭이었다. 후일 역사가들은 이 호칭을 처음으로 사용했다 하여 그를 시황제라고 불렀다.
이는 은주 시대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권력이었고 이러한 황제 중심의 새 체제는 한대에 들어와 완전히 자리를 굳혀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중국 황제의 개념이 성립한 것이다.
그렇다면 황제들은 어떻게 자신들을 의식조차 못하고 있던 일반 백성에게 `하늘이 보내신 황제`라는 관념을 주입시킬 수 있었을까? 그 미끼가 바로 작위이다. 여기서 잠시 당시 촌락 상황을 들여다보자.
씨족 집단이 유지되고 있을 때 사람들은 씨족장을 중심으로 같은 조상신에게 제사 지내고 자연스레 형성된 서열에 따라서 생활하고 있었다. 그러나 춘추 말 전국 시대로 접어들면서 씨족 질서가 해체되자 사람들은 질서감을 잃고 동요했다.
이 때 이들을 자신의 지배하에 두고자 했던 황제는 자신의 즉위나 황후, 황태자를 세울 때 등 국가의 경사가 있을 때 전 백성에게 황제의 이름으로 작위를 하사했다. 작위의 수여 횟수를 보면 진시황제 때 1회, 전한 때 53회, 왕망 시대에 1회, 후한 때 36회가 실시되었다. 따라서 한 사람이 일생 동안 여러 개의 작위를 받는 것은 일반적이었다.
전한 무제 때의 예를 보자.
한무제는 즉위할 때 인민(성인 남자)들에게 작1급씩을 수여하고 리마다 쇠고기와 술 열섬을 하사해 5일 동안의 연회를 허락했다고 한다(당시는 허가 없이 연회를 여는 것을 법률로 금했고 3명 이상 이유 없이 모여 술을 마시면 벌금 4냥을 내야 했다). 이 때 마을사람들은 모두 모여 조상신 또는 마을신에게 제사를 지내면서 이런 은혜를 베풀어 준 황제라는 존재에게 감사하게 된다. 이 때 제사 현장에서 앉게 되는 자리 순서는 곧바로 마을사람들간의 서열이 되는데 황제가 내린 작위를 많이 가진 사람이 상석을 차지하게 되었다. 황제는 작위를 가진 만큼 형벌을 감해 주었고 사냥 노획물의 분배에서도 작위의 많고 적음에 따라 차별이 가해졌다. 이렇게 되자 작위의 위력이 분명해졌고 이를 하사하는 황제의 존재는 사람들의 뇌리 속에 강력한 권위로 낙인 찍히게 된 것이다.
이리하여 황제는 만인 위에 군림하는 존재로 확고하게 자리 잡게 되었다.
10. 3년이나 지속된 스파르타쿠스의 봉기
기원전 73년 봄 70여 명의 사내들이 베수비오 산을 향해 필사적으로 도망치고 있었다. 이들은 카푸아에 있는 검투사 양성소에서 탈출한 노예들이었다. 그 지도자의 이름을 따 스파르타쿠스의 봉기라고 부르는 이 노예들의 투쟁은 3년이나 지속되면서 로마 사회를 뒤흔들게 된다.
로마 사회는 노예제를 기본으로 하는 사회였다. 이들 노예들은 농업과 목축, 광산 등 주요 생산 부문에 종사했다. 특히 라티판디움이라고 하는 대농장에서 포도, 올리브, 곡물 생산을 위해 매우 많은 노예가 일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노예들의 처지는 문자 그대로 비참한 것이었다. 빈틈없는 감시의 눈길 아래 쉴 새 없이 고된 일을 해야 했으며, 도망치지 못하도록 쇠사슬에 묶여 일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노예들을 `말하는 도구`라고 했는데 이만큼 적절한 표현도 없을 것이다. 노예는 인간이 아니고 부서지면 갈아치울 수 있는 물건에 불과했던 것이다.
생산 활동에 쓰이는 노예 이외에도 로마 시민의 오락을 위한 노예도 있었다. 이들이 바로 검투사 노예였다. 노예끼리 칼을 들고 한 쪽이 죽을 때까지 싸우는 검투사 경기는 기원전 2세기경부터 로마 시민들이 가장 즐기는 오락의 하나였다.
그런데 이러한 노예들의 주요 공급원은 전쟁이었다. 스파르타쿠스의 봉기가 일어났을 때 이탈리아에만 약 150만 명의 노예가 있었는데 그들 대부분은 로마의 대외 전쟁에서 잡혀 온 전쟁 포로들이었다. 그리고 로마가 침략 전쟁을 거듭하고 정복지를 넓힐 때마다 노예들의 수도 늘어갔다.
하지만 노예들의 수가 늘어갈수록 노예들의 반란도 많아졌다. 로마 사람들은 그들을 가리켜 `말하는 도구`라고 했지만 그들의 몸 속에도 자유를 갈구하는 인간의 붉은 피가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스파르타쿠스의 봉기가 일어나기 전에도 이미 여러 차례 노예 반란이 일어났고 그 때마다 잔혹하게 진압되었다.
스파르타쿠스도 어느 노예와 마찬가지로 전쟁 포로였다. 그는 트라키아(지금의 불가리아) 사람이었는데 포로로 끌려 와 처음에는 광산에서 일하다 카푸아에 있는 검투사 양성소로 팔려 왔다. 하지만 스파르타쿠스는 동료를 죽이고 살아 남거나 아니면 동료의 손에 죽어야만 하는 검투사 노예의 운명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와 그의 동료들의 자유를 향한 열망은 기원전 73년 활화산처럼 타올랐다.
도망한 노예들은 베수비오 산을 근거지로 삼아 세력을 키우기 시작했다. 이탈리아 남부의 농장이나 목장에서도 노예들이 탈주해 와 대열에 합류했다. 그리하여 7만이 넘는 대군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이들은 겨울을 보내면서 다음의 행동 방향에 대해 숙고했다. 처음에는 로마와 직접 대적하려 했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알프스를 넘어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스파르타쿠스도 그러했지만 도망친 대부분의 노예들은 트라키아나 갈리아(지금의 프랑스) 출신이었다. 그들에게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곧 자유를 의미했다.
기원전 72년 봄 노예 군대는 아드리아 해를 따라 알프스를 향했다. 이들은 알프스로 향하는 중에 여러 차례 로마 군을 물리쳤다. 이들은 이미 도망친 노예가 아니라 한겨울 내내 어려운 훈련을 받고 엄격하게 규율이 잡힌 노예 군대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들에게도 알프스의 추운 눈보라는 넘을 수 없는 장벽이었다. 6개월의 긴 행군을 했기 때문에 알프스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겨울로 접어들고 있었다. 여기서 봄이 오기를 기다릴 수는 없었고 게다가 식량도 떨어져 갔다. 그들은 다시 남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그런데 오랜 행군으로 인해 노예군은 점차 세력이 약해졌다. 게다가 내부 불화마저 생겼다. 스파르타쿠스를 비롯한 노예들은 이탈리아를 떠나고 싶어하지 않았으며 로마의 시민권을 얻고자 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노예군을 이루고 있던 노예와 농민의 의견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었다. 한편 시간이 감에 따라 로마군은 전열을 정비하면서 더욱 강해졌다.
최후의 격전장은 이탈리아 남부의 아폴리아였다. 로마 군대를 지휘한 사람은 이 해에 새로 집정관이 된 대부호 크리수스였다. 그는 도망하는 병사는 사형에 처한다고 다그쳐 스파르타쿠스의 군대와 마주했다. 기원전 71년 초가을 대전투가 벌어졌다. 노예 군대는 죽기로 싸웠으나 6만 명이나 적의 손에 희생당했고 스파르타쿠스와 나머지 노예들도 포위되었다. 스파르타쿠스는 창에 찔린 채 숨을 거둘 때까지 방패를 휘두르며 적을 무찔렀다고 한다.
이후 살아 남은 노예 군대는 산에 숨어 게릴라 활동을 통해 잠시 명맥을 유지했으나 기원전 70년 폼페이우스의 군대에게 패했다. 이 때 사로잡힌 6,000명의 노예들은 카푸아에서 로마로 이어지는 아피아 가도에 줄지어 십자가에 매달렸다.
결국 노예들의 봉기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하지만 로마의 지배자들에게 자유와 해방을 갈구한 스파르타쿠스의 봉기는 악몽과도 같은 것이었고, 이에 대한 충격은 로마 사회의 또 다른 계급 모순인 대지주를 중심으로 한 부자와 빈민 사이의 갈등과 결합되면서 공화정의 얼굴을 한 로마 사회를 제정으로 변화시키게 되었다.
11. 거세된 사마천이 눈물로 쓴 <사기>
사마천이 <사기>를 쓰기 시작한 것은 28, 9세경이고 50세가 다 되어 죽을 때까지 수정을 계속했다. 그러니까 약 20년의 작업 기간을 거친 셈이다. 그 전에는 아버지의 명에 따라 각종 서적을 섭렵하고 중국 각지를 떠돌아다니면서 견문을 넓혔다. 사마천의 아버지 사미담은 사마씨의 집안이 상고 이래로 사관의 직을 세습해 왔다는 사실을 자랑스레 아들에게 들려 주곤 했다. 그 자신이 한나라 조정의 태사령(문서의 수집과 관리를 믿는 직책)이었던 사마담은, 그러나 자신이 훌륭한 사서를 짓지 못한 것을 통분하여 임종 직전 아들에게 유언했다.
“우리의 선조는 주나라의 태사였다. 이제 내 대에 와서 끊어지려는가! 너는 반드시 태사가 되어 선조의 가업을 이어라. 이제 한나라가 일어나고 천하가 통일되었는데 나는 태사가 되고서도 이를 기록하지 않았으니, 아아, 두렵도다. 너는 명심하여라!”
옆에서 눈물을 흘리며 듣고 있던 천은 “소자 불민하오니, 선인들의 문헌들을 빠짐없이 정리해 쓰겠습니다”라고 맹세했다.
이 같은 상황이 젊은 사마천을 사기 집필에 몰두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37세(기원전 99)때 그를 덮친 `이릉의 화`는 그를 죽음의 벼랑으로 몰고 갔다.
사마천이 천거한 장군 이릉이 흉노와의 전투에서 분전 끝에 중과부적으로 항복하여 포로가 되자 한무제를 비롯하여 조정의 모든 신하는 그를 규탄했다. 이 때 사마천만은 이릉을 변호하다 무제의 진노를 사 궁형(죄인의 생식기를 자르는 형벌)에 처해지게 되었다. 공자는 위나라 영공이 환관과 같은 수레에 탔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나라로 떠났을 정도로 당시 지식인들은 궁형을 혐오했다.
사대부로서 가장 큰 치욕을 당한 사마천은 `하루에도 창자가 아홉 번이나 뒤틀렸으며, 집에 있으면 마치 무언가를 잃은 것처럼 불안하고 나가면 어디를 가야할지 모르는 사람처럼 우왕자왕` 극도의 수치감에 시달렸다. 사마천은 사대부라면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부끄러움을 씻어야 할 처지에 빠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살하고 싶지 않았다. 친구 임안에게 보낸 편지에서 사마천은 열심히 자기합리화를 하고 있다. “그 옛날 주문왕도 유리에서 구금된 적이 있고 이사는 승상이었으나 다섯 가지 형벌을 모두 받았으며 한신 장군도 차꼬를 받았습니다. 이 사람들 모두 지위는 왕후장상에 이르렀고 명성은 이웃 나라에 알려졌지만 그 곤욕을 당해서도 자결할 결단을 내리지는 못했습니다”라고 유명인들의 행적을 들추기도 하고 “제가 불행하여 양친을 일찍 여의고 형제 친척이 없는 홀몸이니 제 처지는 어찌되겠습니까”라며 동정을 호소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가 자살을 마다한 진짜 이유는 이미 초고가 완성된 <사기>에 대한 집착 때문이었다. “노비라도 능히 자결할 상황이로되 내가 그것을 못할 리가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