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내 서점에 들렀다가 산책 삼아 걸어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한 제자를 만났다. 반가움에 와락 손을 붙잡고 오랫동안 놓아주지 않은 것은 내가 아니라 그 제자였다. 나를 바라보는 눈빛 또한 강렬하여 그 옛날 내가 그를 바라보던 간절한 눈빛을 보는 것만 같았다. 철이 들고 어른이 된다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싶었다. 그는 잡았던 손을 푸는가 싶더니 나를 힘있게 껴안으며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 정말 보고 싶었습니다”. 6년 전, 그는 5교시만 끝나면 어김없이 학교를 무단 이탈하는 이른바 문제아였다. 교사로서 할 수 있는 방법을 다 동원하여 그를 지도해보았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땡볕에 얼굴이 익을 정도로 함께 운동장을 돌아보기도 하고, 도망간 아이를 다시 붙잡아와 교정이 깜깜해질 때까지 계단에 앉아 얘기를 나누다가 밤 하늘의 별을 보며 헤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 다음날도 그는 5교시가 끝나면 예외 없이 학교를 빠져나갔다. 다음날 아침 제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오히려 신기할 정도였다.
그에게 내린 최종 처방은 일종의 ‘홀로서기’였다. 나는 그에게 보름 동안의 시간을 주었고, 그 기간 동안 어떤 행동을 해도 벌을 주거나 간섭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다. 그후 그의 담임교사로서 내가 한 일은 매일 아침 그를 자리에서 일어나게 한 뒤, 앞으로 보름이 되려면 며칠이 남았는지 앵무새처럼 반복해서 말해준 것뿐이었다. 그런 기억이 그에게도 남아 있을까 궁금했다.
“너 혹시 기억나니? 선생님이 너에게 열흘인가 보름인가 기회를 주었었지”
“보름이었습니다. 선생님”
“그래, 기억하고 있구나. 그런데 그 보름 동안 네가 어떤 생각을 하며 지냈는지 몹시 궁금했거든. 네 친구들 말로는 넌 대학생이 되어서도 강의를 빼먹은 적이 없었다지. 언제부터 마음을 돌리게 된 거냐?”
“거의 마지막 날까지 도망을 갔어요. 그런데 용택이가 저랑 같이 도망을 간 적이 있는데 용택이만 운동장을 돌게 하시고 저에게는 아무 말씀도 안 하셨어요. 그후에도 계속 도망은 갔지만 그 생각이 자꾸만 나면서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의 말을 듣다가 나는 그의 입에서 나온 ‘부끄럽다’는 단어에 귀가 번쩍 띄었다. 그러면서 뭔가 확연히 깨달아지는 것이 있었다. ‘그를 구원한 것은 바로 부끄러움이었구나. 만약 성급한 마음으로 그를 억압하거나 멸시했다면, 마음에 미움을 품기라도 했다면 그의 부끄러움이 빛을 잃을 뻔했구나’
그날 그는 나와 헤어지면서 이렇게 말했다.
“용택이도 선생님 무척 보고 싶어해요. 언제 같이 한 번 찾아뵐 게요”
용택이는 그의 가장 절친한 친구이다. 지금도 해묵은 교무수첩에는 그 해 그가 읽은 일곱 권의 책 이름이 빼곡이 적혀 있다. 그는 섣불리 싸움질을 하는 학생은 아니었지만 권투를 배운 경력 때문인지 은연중에 최고의 주먹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 만큼 책과는 거리가 먼 학생이었다. 그러니 학기 초에 책을 권하는 담임선생을 어이가 없다는 듯이 쳐다볼 만도 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왜 나는 그에게 끈질기게 책읽기를 권했던 것일까?
그것은 내 안에 그려진 어떤 그림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내가 교사로서 아이들에게 그려 주어야 할 최소한의 밑그림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 교육이 상품화되고 학교에서 배운 지식들이 재화 축적이나 신분 상승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면서 학교 교육이 포기해버린 인간의 아름다움에 대하여 나는 책을 매개로 제자와 대화를 나누고 싶었던 것이다. 돈만 있으면 안 되는 것이 없다고 굳게 믿고 있는 듯한 그에게 돈보다 더 소중한 가치를 위해 삶을 바치고 있는 책 속의 주인공들을 만나게 해주고 싶었으리라. 그러다가 슬그머니 자신이 부끄러워지는, 그런 구원의 순간과 마주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첫댓글그의 말을 듣다가 나는 그의 입에서 나온 ‘부끄럽다’는 단어에 귀가 번쩍 띄었다. 그러면서 뭔가 확연히 깨달아지는 것이 있었다. ‘그를 구원한 것은 바로 부끄러움이었구나. 만약 성급한 마음으로 그를 억압하거나 멸시했다면, 마음에 미움을 품기라도 했다면 그의 부끄러움이 빛을 잃을 뻔했구나’
첫댓글 그의 말을 듣다가 나는 그의 입에서 나온 ‘부끄럽다’는 단어에 귀가 번쩍 띄었다. 그러면서 뭔가 확연히 깨달아지는 것이 있었다. ‘그를 구원한 것은 바로 부끄러움이었구나. 만약 성급한 마음으로 그를 억압하거나 멸시했다면, 마음에 미움을 품기라도 했다면 그의 부끄러움이 빛을 잃을 뻔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