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한도(歲寒圖) 세한도는 추사 김정희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1844년 제주도 유배시 그린 그림이다. 그림 끝부분에 추사가 추사체로 직접 쓴 발문(跋文) 있는데 제주도 유배지에서 귀양살이 하고 있는 작자에게 사제간의 의리를 잊지 않고 두 번씩이나 북경으로부터 귀한 책들을 구해 준 제자 이상적(李尙迪)에게 답례로 그려준 것이다. 이상적의 인품을 날씨가 추워진 뒤에 늦게 낙엽이 지는 소나무와 잣나무의 지조에 비유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이 그림은 한 채의 집을 중심으로 좌우에 소나무와 잣나무가 대칭을 이루고 있으며 주위를 빈 여백으로 처리하여 극도의 절제와 간략함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절제와 생략은 인위, 기교, 허식에 반발하는 작가의 심성을 표현하고 있다. 갈필의 속성을 드러내고 메마른 붓질을 통하여, 한 채의 집과 고목이 풍기는 고풍의 분위기가 추운 겨울의 분위기를 맑고 청절하게 표현하고 있으며 묵의 농담과 간결한 구성은 겸손,지조의 풍모를 나타내 감동을 준다. |
봄볕이 너무 좋은 춘삼월 추사 고택 마루는 봄에 기운이 스며 있었다. 밝은 표정으로 촬영을~~
하늘이 보이는 공간을 넣어 다시 한 점 부끄러운 삶을 위하여 라는 시귓을 생각하며 샷다를 눌렀다. 보기가 참 좋다.
형제들과 세베리노도 모처럼 함께 기념을 남겼다.
내실로 드는 문에서 총무님도.... 우연일까? 바로 옆이 집안에 곳간이 있는 장소다. 트레커들에 살림살이를 맡아.. 참 고생이 많으시다. 회비를 수납하고 지출을 정리한 후 매번 결산 보고를 하고 물품을 준비하는 일 등등 이 역시 불편한 일이다. 그러나 내가 불편하면 나 이외 사람들에게는 편함을 줄 수 있으니 이 또한 견딜 수 있는 일이 아니겠는가! 총무님 죄송~~꾸벅
사당으로 들고 나는 문이다. 그 앞에서 만난 아네스 자매님과 백송을 함께 구경한 후 아네스 자매님의 사진을 남겼다. 잠시 사당을 보며 봉다례에 대하여 회상하게 되었다. 옛적에는 어느 집이나 다 뒤켠에 사당이 있었다. 여식을 두고 있는 집안에서 딸아이의 출가 때 사용하기 위하여 차 잎을 준비하고 있었다. 혼례를 치루는 전날 딸 아이 부모는 보관해 두었던 차 잎을 꺼내 명주로 만든 주머니에 화선지로 싼 차 잎을 넣어 한복 치마 안섬에 달아 놓는다. 혼례를 치룬 후 며느리가 할 일은 새벽 이른 아침 맑은 정안수를 준비하여 부모님이 치마 안섬에 달아 놓은 차를 꺼내 달여 찻물을 찻잔에 넣은 후 사당에 계신 조상님들에게 올린다. 그것이 바로 봉다례의식이며 차례라는 어원이 되는 순간이었던 것이다. 차에는 다섯가지 맛이 스며 있는데 그 다섯가지 맛이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인생이 맛이라하여( 달고, 쓰고, 맵고, 시고, 덞고 ) 삶에 교훈을 주기 위하여 만든 행위 였던 것이다. 지금이야 그런 의식의 한계를 넘어 각종 제물을 진설하는 것으로 바뀌었지만... 한번 생각해 볼 일이다.
돌계단을 올라 솟을 대문을 열고 들어 서면 매화향이 근사한 곳이 바로 이 부근이다. 다가가서 관찰하자 움이 부풀어 있었다. 곧 터질 모양이다. 목단 꾳 옆에 서 있는 해시계가 눈 길을 끈다. 시방 몇시냐 묻는 말이 있다. 지금 해의 방향이 어디에 있느냐 묻고 있는 것이다. 해의 방향이 바로 시간이었기에 생긴 단어다. 이 말처럼 자신은 지금 어느방향에 있는가 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짐으로서 자신의 형편을 잘 추 수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성가대 단장 모니카 자매님! 개인적으로 인연이 깊은 분이다. 학교 동문이고 여행과 사진촬영을 함께해 온 도반이었다. 혈기가 있을 때 수많은 곳을 오고 가며 사진을 만들어 매년 전시회도 하곤 했는데..... 지금은 추억으로 남아 있다.
정의(正義)로움은 하늘을 잘 지댕하는 자의 몫이다. 그리고 정의로운 생각과 행위는 아름다운 생명의 빛과 자연의 빛을 닮은 자유의 길로 가는 길목이다. 추사 김정희 선생의 존함을 생각해 보니 정의로움에 대하여 분명한 생각이 떠 올랐다. 그 뜻을 잠시 설명해 드리고... 경주 김씨 문중 명문가 집안이었다. 영조대왕 두째 따님과 혼사를 맺은 증조부 김한신. 영조는 딸을 위하여 광화문 우측에 월성위궁을 신축하여 사패로 내린다. 그러나 명줄이 참으로 짧았다. 30대에 세상을 등지고 부인이었던 공주도 곡기를 끊어 생을 마감한다. 열녀었다. 그때부터 양자를 드려 가문을 잇는 전통은 추사까지 되물림 되었고 추사도 상무라는 양자를 드려 가문을 잇게 된다. 추사는 10대 때에 직계존속들을 모두 잃는다. 아내마저 잃은 추사의 10대 시기는 참혹한 시기었다. 생모 마저 잃은 후 겨우 안정기를 맞이하게 된다. 김노영이 큰 아버지였지만 자손이 없자 작은 집인 김노경의 아들 추사가 대를 잇게 된 것이다. 추사의 아명은 원춘이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눔 끝에 묘역에 나란히 서서 사진을 찍은 후 자리를 옮겼다. 기념관을 그리고 공주의 묘역과 김한신의 묘역을 찾기에는 시간이 촉박했다. 양택과 음택이 멋지게 공존하는 자연의 공간이 바로 추사선생의 생가다. 그리고 많은 것들을 느끼게 해 준다. 반나절을 빌려 느릿하게 걸으며 추사선생에 대한 모든 것을 떠 올리며 여행을 추수려 볼 만한 곳이 바로 생가다.
이른 시간에 도착한 추사 생가, 안채를 비롯하여 사당, 묘역 등등을 오고 가며 마음의 겸손과 가난에 대하여 생각할 여백을 갖을 수 있었다. 여백의 공간은 자신을 보다 겸손함으로 가난한 심성으로 가꿀 수 있는 텃 밭인 것이다. 이젠 여사울 성지로 떠나야 할 시간이 왔다. 이곳에서 여사울 성지까지는 차편으로 15분 거리에 있다. 전교의 달인 이존창 선조님의 생가로 가기 위하여 모두 차에 올랐다. 솟대를 찍는 총무님께 재촉의 신호를 보낸 후 차 곁으로 다가 갔다.
여사울 성지:
여우들이 많이 살았다하여 붙여진 이름 여사울! 그렇다 전교에 있어 이존창 선조는 여우같이 굴었다. 그리고 이름처럼 존재함으로서 창성하는 것처럼 그의 손 길과 마음의 길을 통하여 전교는 내포지방을 휩쓸었다. 조선은 말기로 갈수록 내적으로 요동치고 있었다. 실사구시, 실학 등등은 많은 실학자를 태동시켰으며 그들의 영향으로 민심은 전통이란 그릇을 박차고 새로운 시대를 향하여 서서히 용오름하고 있었다. 양반은 아니었지만 중농으로서 부유한 살림을 지닌 집안에서 태어난 이존창선조는 학문에 목이 말랐다. 이벽선조에 의해 선택되어 실학과 천주교에 각별한 방법으로 접근하여 그 중심에 선 권철신 권일신 형제는 왕을 비롯한 모든 이들에게 존경 받는 대학자였다. 이벽선조는 이 점을 노리고 두형제에게 천주의 씨앗을 심었던 것이다. 이존창 선조는 당시 지명이 양근이었던( 버드나무가 많아 양근이라 불렀었다. 이후 지평과 합쳐진 후 지명이 양평으로 변경된다) 곳으로 이존창은 대학자를 찾아 나섰다. 하나를 가르치면 두 세개를 알아 나가는 이존창에게 특별한 매력을 느낀 사부는 특별한 방법으로 실학, 천주학을 정성껏 가르친다. 그리고 여사울로 돌아 온 이존창선조는 여사울에 기거하며 살던 30여 가구를 전부 천주학쟁이로 만들어 버린다. 그리고 소문을 듣고 신리 합덕에서 까지 민초들의 방문은 이어진다. 심지어 솔뫼와 그 밖에 내포지방까지 입소문이 나 전교는 바람을 만나게 된다. 박해 때 마다 잡혀 들어가 고초를 겪지만 배교를 조건으로 풀려 나지만 다시 돌아서서 전교에 다시 정성을 다 한다. 참으로 여우같은 행각이었다. 결국 김대건, 최양업 신부님 선대들도 이존창 전교에 힘 입어 입교를 하게 되고 혼맥을 맺게 되어 일가를 이루게 된다.
이존창의 딸 멜라니아는 김대건 신부님의 증조부 김진후 비오의 둘째 아들 김택현에게 시집가 김대건 신부의 조모가 된다. 사촌 누이 이 멜라니아는최양업 신부의 모친 이성례 마리아의 숙모가 된 것이다. 이런 연유가 있어 두 어린 소년은 훗날 모방신부님에 의해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사제의 길을 걷게 되는 것이다. 계속되는 박해로 집안이 위태롭자 이존창 선조는 집안으로부터 파문을 당하고 쫓겨 난다. 이존창이 없는 내포의 천주학은 실존할 수 없었다. 그 분에 박해를 딛고 내포지방은 천주학이 융성한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이다. 트레커들은 도착하자 마자 십자가의 길을 걸었다.
십가가의 길 14처를 마무리한 후 생가터 옆을 내려서는 트레커들...
이어진 11시 미사참례 후 제대 앞에 모여 촬영을 갖았다.
그리고 여사울 총회장님께 부탁하여 성당 2층을 빌려 점심을 챙기고 부스터와 주전자를 빌려 음용수를 만들었다. 그리고 십시일반 모금하여 성지 봉헌금으로 ..... 각자 지니고 온 점심을 나누며 오전 일정을 전부 소화 하였다. 점심을 챙긴 후 짐들은 차에 옮겨 놓고 마음만 갖고 신리성지로 가는 논두렁 길을 걸었다. 작은 꽃송이들이 지천에 깔렸다. 그리고 봄 기운이 훈풍을 타고 넘쳐 났다. 중간에 차를 탄 후 신리에 도착하였다. 신리성지는 대역사중이었다. 광활한 규모로 탈바꿈 중이었다.
신리성지:
성당외벽에 설치된 테라코타를 중심으로 모여 기념촬영을 시작으로 순례를 시작하였다. 파리외방전교회에서 스스로 조선을 선택하여 선교사를 파견한 것은 아니었다. 조선 백성인 천주학쟁이들의 열화 같은 요청에 의하여 선교사를 파견하게 된 것이다. 세계적으로 유래없는 광경이었다. 파리외방전교회에서 선교지로 떠나면서 부르는 노래가 있었다. 그 내용을 듣고 있노라면 가슴이 먹먹해 지고 뭉쿨해 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 일부를 적어 보면 다음과 같다.
떠나라 복음의 군대여, 그대들의 소망을 이룰 날이 왔다. 선교사들이여, 그대들의 발자취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친구들이여 이땅에서 안녕을, 언젠가 천국에서 다시 만날 것이오.
험난한 해풍과 풍랑 길고 길고 긴 바닷길의 여정 쉽지 않느 조선으로 가는 길 이었지만 강건한 신앙의 마음으로 전교를 위한 굳센 의지로 찾아 온 ,동방의 작고 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에 입국은 시련이었다. 고생끝에 도착한 변방 어렵사리 관군들을 피해 입국하여 깊은 산촌에 있는 교우촌을 찾아 들어 교우들을 통해 한글을 배우는 것으로 시작으로 전교의 귀틀을 잡아 나갔다.
그러다 모진 박해 시기에 잡혀 죽어가는 교우들이 안스러워 혹시나 자신들이 자수하면 그들을 풀어 주지 않을까 순진한 마음은 결국 갈매못에서 스스로 순교의 길로 접어들게 한다.
신리성지는 조선천주교회의 요람이다. 충청도 내포지방의 중심부에 자리한 신리는 한국천주교회 초기부터 끊임없이 예비자, 신자, 순교자가 배출되었다. 성지 내 초가집은 손자선(손도마, 1866 공주 황새바위에서 순교) 성인의 생가이다. 동시에 조선교구 제5대 교구장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안주교, 1866 오천 갈매못에서 순교)의 주교관이자 조선 교구청이었다. 안주교는 이곳에서 끊임없이 찾아드는 교우들에게 성사를 베풀고 신앙 진리를 가르치는 한편, 각지에서 활동하는 선교사제들의 구심점 역할을 하였다. 뿐만 아리나 초창기의 한글 교리서 저술과 간행, 조선교회의 상황과 순교사적들을 수집 정리하여 파리외방전교회로 보내는 일도 여기서 이루어졌다. 이 자료들이 훗날 한국천주교회사와 순교사의 토대가 된 이른바 <다블뤼 비망기>이다. 본디 “천주강생 1815년”에 지어진 생가는 박해시대 이래로 여러 차례 소유주가 바뀌었고 그 구조 또한 개조를 거듭해 왔다.
1964년부터는 강당의 형태로 개축되어 공소로 사용되었으나 본당 중심의 사목이 강화되면서 방치되기에 이른다. 이후 성지개발이 본격화 되고 한국교회사연구소로부터 생가의 옛 사진이 발견됨에 따라 원형 복원을 위한 본격적인 조사가 전문가들에 의해 진행된다. 2004년 마침내 손 성인의 생가이자 안주교께서 사시던 주교관이 본래의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 복원된 생가(주교관)의 기둥과 뼈대는 옛날 그대로이다. 대들보, 서까래, 주춧돌, 문지방 디딤돌, 집 지은 연도를 적은 상량문 등 상당 부분의 실물들이 그대로 사용되어 성인들의 숨결과 손 때가 그대로 묻어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신리 성지는 순교자들이 태어난 집과 마을, 거닐던 길 그리고 경작하던 농토도 그 지명들과 함께 그대로 유지되어 순교자들의 자취를 생생히 느끼게 한다. 특히 손자선 성인의 생가와 함께 안주교와 오신부, 민신부 그리고 황석두 루가 등 성인 네 분이 붙잡힌 ‘거더리’의 집 (신리 99번지)도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그 역사적 가치를 더해 준다. 신리 성지는 이처럼 순교자들의 고향인 동시에 순교자들의 안식처이기도 하다.
조선의 제 5대 주교셨던 다블뤼 주교께서도 오늘같이 찬란하고 봄볕이 초가지붕 처마밑으로 피어 오른던 날 툇마루에 앉아 그 동안 조사하여 모아 두셨던 비망록을 보셨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자매님들을 툇마루 앞줄에 나란히 나란히 앉도록 조치를 한 후 촬영을 해 두었다.
모니카 자매님이 카메라를 달라 하신다. 냉큼 전한 후 끝에서 앉으려 하자 다른 자매님들도 달려들 오신다. 실로 오랜만에 찍느자에서 찍히는 자로 변신해 보니 이 또한 즐거움이 살아 있는 듯하다. 카메라를 응시하다. 봄하늘로 시선을 돌려보았다.
운무가 낀 것처럼 하늘에 파람이 명료하지 못하다. 우리들은 살아 가면서 다양한 마음과 시선으로 나 이외의 것들을 보며 살게 된다. 그것을 시선이라 하는데 시선에도 여러 종류가 있는 것 같다. 사랑, 애정, 동정, 이해, 긍정, 나쁜 ,편견, 오해, 모함에 필요한 자료 탐색의 시선 등등으로 시선은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하는 시선은 애정과 사랑이 우정이 특히 평화의 진실함이 담긴 시선이 최고의 시선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편견의 시선처럼 더 나쁜 시선이 있을까! 그런 시선을 받는다는 생각이 미치면 사람은 상대적으로 반발계수를 키우기 마련이다. 그런 시선의 자극으로 저질의 시선으로 상대를 다시 바라보게 되는 것이 바로 나쁜 시선의 결과이다. 시선의 종류에 따라 사람을 편하게 하고 어렵게하며 힘들게 까지 하는 일을 종종 경험하게 되는 것이 재속의 삶이다. 시선하나에도 사랑과 평화가 필요하다는 사실, 절실하게 생각하며 살아 갈 일이다. 고운 시선으로 응대한 사진 결과는 이토록 아름답다. ㅎㅎㅎ.
부두막, 아궁이, 군불, 우리내 살림은 이토록 조촐하고 군더덕이 없는 살림이었다. 이 모습을 사부께서 경험하셔셔야 하는 것이었는데... 참으로 아쉽다. 우리 민족처럼 겸손했던 민족이 또 있을까! 물질만능의 늪에 빠져 있는 현실이 초가와 부억을 통하여 크게 다가 왔다. 작은자 몫을 감사해 하고 겸손되게 받으며 늘 행복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일, 그리고 그 사실을 이웃과 함께 나누는 일이 바로 평화와 선이 아닌가하며 초가에서 사색을 정리한 후 신리 성당으로 다가 갔다. 수녀님께서 맑고 평화가 가득서린 커피를 준비해 주셨다. 여럿이 모여 나눔을 하는 일은 늘 기쁘고 행복한 일이다. 꼭 거룩함을 마시는 일 같다하면서 한모금을 다시 한모금을 마신 후 목례를 드린 후 성당의 제대를 찾았다. 요즈음 많은 불편함이 깃든 육신 씻어내기 위함이었다.
기도가 끝나갈 무렵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일어 서서 돌아 보니 아네스, 세실리아 자매님께서 오셨다. 스마트폰으로 이곳저곳 찍으시기를 기다린 후 제대 앞에 모셨다.
우리는 잠시 파리외방전교회에 대하여 살펴 볼 필요가 있다.
국력이 강성했던 스폐인과 포르투갈에 바틴칸은 선교와 관련된 보호권을 주지만 포르투갈 선교권 아래에 예속되어 있던 조선은 전교에 많은 제약이 따른다. 교황령에 의하여 파견된 선교사들과 잦은 마찰로 인하여 전교가 제대로 이루워 질 수 없었던 것이다.
보호권을 회수 한 후 조선 천주교도들의 요청으로 파견되기 시작한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들인 수많은 신부님들을 통하여 조선은 비로서 박해시기 안에서도 교세의 외연을 넓혀갈 수 있었다. 한불통상조약 이후로 종교의 자유를 획득하게 된 조선의 천주교의 교세는 날로 높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하느님 당신을 찬미합니다. 나는 주님 당신을 신뢰합니다.(Te Deum laudamus, Te Dominum confitemur)" 프랑스 중심가에 위치한 파리 외방전교회(外方傳敎會) 본부 정원에 있는 팔각정에서 신학생들이 선배 선교사들의 순교 소식을 전해듣고 불렀다는 감사가(歌) '떼 데움'(Te Deum) 가사 중 일부다. 팔각정에는 제2대 조선교구장 앵베르 주교,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 등 한국에서 순교한 뒤 성인 반열에 오른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 10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한국 가톨릭 교회는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흘린 피 위에 세워졌으며 파리 외방전교회의 한국 선교 역사는 곧 한국 가톨릭 교회의 역사나 다름없다.
한국 가톨릭 교회와 파리 외방전교회의 인연은 미사를 집전할 신부가 필요했던 조선의 신자들이 1811년, 1827년 두 차례에 걸쳐 교황청에 편지를 보낸 것으로 시작된다. 신해박해(1791)와 신유박해(1801) 등 모진 탄압에도 신앙을 지켰던 조선의 가톨릭 신자들은 교황에게 성직자 파견을 요청하는 서한을 보냈고, 신자들의 간절한 바람을 전해 들은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B. 브뤼기에르 주교는 모두가 기피하는 조선의 선교사로 자원했다. 하지만 브뤼기에르 주교는 초대 조선교구장으로 부임하던 중 중국 네이멍구 지역에서 병사(病死)하고 만다.
브뤼기에르 주교의 죽음과 조선 조정의 모진 박해 소식은 그러나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의 조선행을 막지 못했다. 선교사들은 3년이라는 긴 항해 끝에 조선 땅에 하나 둘 도착했다. 프랑스 남서부의 가톨릭 성지 루르드(Lourdes)의 '무염시태('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라는 뜻) 성당'에는 선교사들이 동해의 거친 풍랑을 헤치고 무사히 조선 땅에 도착한 것을 성모 마리아에게 감사하는 감사비(碑)가 새겨져 있다. 이 감사비는 1876년 무염시태 성당 축성식 때 성당 벽 돌판에 새긴 것으로, 성모는 한국 가톨릭 교회의 주보 성인(主保聖人.수호성인)이기도 하다.
제2대 조선교구장 앵베르 주교는 1838년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를 조선 가톨릭 교회의 주보 성인으로 정해달라고 교황청에 요청했다.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은 들어보지도 못한 조그만 나라 조선에, 그것도 배 타고 3년이나 걸리는 조선에 서로 선교사로 가겠다고 했다"면서 "2대 조선교구장(앵베르 주교)은 선교사들이 동해의 거친 파도를 뚫고 한국에 무사히 도착한 것에 감사해 무염시태 성당에 감사비를 봉헌하기에 이른다.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은 한국 가톨릭 사제 양성에도 힘썼다. 앵베르 주교, 모방 신부 등은 세 명의 소년을 마카오로 유학 보냈는데 이 세 소년이 바로 최초의 한국인 사제인 김대건 신부와 최양업 신부, 최방제 신부다.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은 1886년 조불(朝佛)수호통상조약이 체결돼 종교활동의 자유를 얻을 때까지 모진 박해와 탄압을 받았다.
수녀님과 자매님들 봄볕 아래에 서서 평화와 선의 시선으로 사진을 만들었다. 기쁨이 넘치는 사진이다. 수녀님과 다음을 약속드리며 손을 들어 인사를 드렸다.
이곳에 살던 천주학쟁이들의 순교는 참으로 가혹했다. 시신에 목이 사라진 것이다. 박해시기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신부님들이 순교를 당하자 프랑스는 커다란 함선을 이끌고 강화도 침공하여 국가문서를 탈취하고 내포지방에 있던 대원군의 부친인 남원군의 묘를 파헤쳤다. 당시 예법으로는 엄청난 일이 벌어진 것이다. 조상의 묘가 뭉개진 것을 안 대원군은 광분했다. 프랑스대박에게 부친의 묘를 알려 준 자들은 바로 천주학쟁이라는 판단에서 내포지방 천주교신자들을 잡아 가혹하게 죽인 후 목을 가져 간 것이다. 이런 연유가 믿는자들을 동진하게 만든 것이다. 성거산, 배티, 베론, 연풍, 풍수원 등등의 교우촌들은 박해를 피하기 위해 만들어진 산촌이었다. 신리에서 약 2km를 서쪽을향해 걸어 나가면 궁리보건진료소가 있는 국도가 나온다. 국도에서
이정표 따라 걷다 우측으로 300m 걷다보면 대전리 공동묘지가 나온다. 이곳에 목없는 순교자 무덤이 모셔져 있다. 그곳을 향해 우린 트레킹을 시작하였다. 여사울에서 구양교까지 걷고 신리성지에서 줄무덤까지 트레킹을 잡아 나갔다. 가시덤불과 찔레꽃 가시를 요리저리 피해가며 도착한 줄무덤, 간소한 제물을 차리고 제주인 파스카형제님께서 헌주와 함께 절을 올려 드렸다. 그리고 다함께 절을.....
그리고 그 뒤에 모셔져 있는 손자선 순교자 일가의 무덤을 찾아 참례하였다. 봄빛이 느릿하게 다가 온다. 합덕성당으로 옮겨 가기 위하여 절로서 참례를 마무리 짓고 합덕성당으로 자리를 옮겨야 한다.
손자선 성인의 순교 이후 그 시신이 신리의 선산에 묻혔다. 그리고 이름이 알려져 있는 33분의 순교자 외에도 성지 인근에는 ‘32기의 목이 없는 무명 순교자 묘’와 ‘14기의 손씨 가족 무명 순교자 묘’, 그리고 해미에서 순교하였다고 전해지는 묘 3기가 있다. 이 묘들은 주민들의 증언을 토대로 연차적으로 발굴되어 대전리 공동묘지에 초라하게 보존되게 된 것이다.
합덕성당은 일찍부터 신교육이 들어온 곳입니다. 합덕성당에 세워진 매괴학교는 한말 애국계몽운동 시기 천주교가 교육계몽와 전교활동의 일환으로 1907년 세운 당진지역 최초의 신교육기관이다.
그리고1908년부터는 인근에 부모 잃은 고아들을 거두어 각 교우 가정에 양육비를 지급하며 기르게 하는 사회사업을 시작하였다. 성영회(Saint Enface)는 1843년 프랑스에서 창설된 고아 구호 단체로 죽을 위험에 처한 아이들에게 대세를 주고, 버려진 아이들을 거두어 양육함을 목적으로 하였는데, 1852년 입국하신 메스트르 신부님께서 도입하셨다. 1939년경에 고아원 아동 수가 300명을 돌파하였고, 1947년에 백 필립보 신부님께서는 성당 한쪽에 고아원을 설립하였고, 성가소비녀회를 청하여 고아원 운영을 위탁하였다.
합덕 성당은 성모승천 대 축일이 되면 성당 계단 밑에서부터 신작로 삼거리까지 합덕 장 상인들과 인근 지역의 보부상들이 몰려와 장터가 개설되어 대 축일을 더욱 흥겹게 만들었고, 1931년도 성모승천 대 축일에는 연 이틀 동안 2천 명의 관중들이 성녀 소화 데레사의 성극을 관람하였다고 한다. 또 백비리버 신부님께서 1950년 8월 14일에 성사를 주시다가 인민군들에게 잡혀가셨기에 합덕 성당의 성모승천 대 축일은 더더욱 의미가 깊다.
또한 합덕 성당의 장관을 이루는 행사는 바로 성체와 성혈대축일에 거행한 성체거동이다. 이 성체거동은 6,25때도 거행되었는데, 이 성체거동은 신자들에게 대 축일을 알리고, 성체신심을 키우며, 지역 주민들과 일치하고 화합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 성체거동은 매년 성체와 성혈 대축일에 거행되고 있다.
한국 최초의 사제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탄생지이다. 증조부 김진후(1814년 순교),종조부 김한현(1816년 순교), 부친 김제준(1839년 순교), 그리고 김대건 신부(1846년 순교) 등 4대의 순교자가 살던 곳으로 김 신부의 신앙이 싹튼 곳이며, ‘한국의 베들레헴’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김대건은 이곳(현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 당시에는 면천 고을 솔뫼)에서 1821년 8월 21일 태어났다. 그러나 이미 증조부와 종조부가 순교한 천주학 집안이어서 가세는 기울대로 기울었고 또 어느 새 새로운 박해가 닥칠지 몰라 조부 김택현은 김대건이 7세 무렵에 경기도 용인군 내사면 남곡리 ‘골배마실’이라는 산골로 이사했다.
김대건은 그곳에서 16세 때인 1836년 모방신부에 의해 신학생으로 뽑혀 최양업(토마스)와 최방제(프란치스코)와 함께 마카오로 유학하여 신학을 공부했고 상해에서 페레올 주교 집전으로 신품을 받았다. 1845년 입국한 김신부는 선교 활동에 힘쓰는 한편, 동료 최양업 부제와 외국선교사 신부를 맞이하기 위해 힘쓰다 1846년 6월 5일 체포되었다. 1846년 9월 16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사제 생활 1년 1개월만의 일이었다. 1859년 9월24일 가경자, 1925년 7월5일 복자품, 1984년 5월 6일 성인품에 올려졌다. 김신부는 조선 최초의 방인 사제이며 현실을 직시하고 진리를 외치던 선각자였다. 또한 우리니라 최초의 서양학 유학생이며 조선의 최장거리 여행자이기도 하다. 1845년 초 우리나라 조선전도를 만들었다. 저서로는 22편의 서한이 있고, 한국 교회사에 관한 비망록 등이 있어 79위 시복자료가 되었다. 대전교구에서는 1996년 김대건 신부 순교 150주년 기념사업으로 김신부 생가 복원을 결의하고 2004년 9월 22일 생가 안채 복원을 완성하였다. 1998년 7월 25일 충청남도는 성 김대건신부 생가터를 충남 지방문화재 제146호 기념물로 지정하였다. 2005년 10월에 김대건 신부 기념관을 완공하였다.
이곳 성지 이름과 어울리는 소나무 숲이다. 솔은 으뜸이란 뜻이고 뫼는 산이란 뜻이다. 솔뫼 성지란 이름이 어울리는 소나무 숲 속 소나무들은 휘어지고 구부러지고 뒤틀리고 겹겹이 붙은 소나무 껍질은 거북이 등처럼 견고하다. 만고풍상을 이겨낸 인고의 성정이 느껴지는 나무가 바로 소나무다. 조선 천주의 길을 닮아 있다. 최초 숲의 근간은 초(草)로부터 시작된다. 그러다 작은 관목이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그 나무가 바로 침엽수들이다
어느정도 침엽수들이 숲을 이루고 나면 그제서야 활엽수들이 생겨 숲을 더욱 더 번성하게 한다. 그러즈음 스스로 무리지어 그 좋은 환경을 활엽수와 풀에게 내 주고 산등성이 부근으로 자리를 옮겨 가는 식물이 바로 소나무다. 그런 배려의 마음이 우리를 감복시켜 우리들 삶 깊숙히 소나무를 자리 잡도록 한 것 같다. 우리 선조들의 일상적 삶 안에 소나무는 절대적인 동반자로서 삶 안에 구성원이었다. 수많은 수종(樹種) 중에 공(公, 공변될)자가 붙여진 나무가 소나무다. 귀한 나무라는 뜻인 송(松)이라 대접 받는 나무는 소나무가 유일하다. 소나무로 지은 집에서 태어나 소나무 삭정이로 밥을 짓고, 소나무로 만든 그릇에 담아 먹었다. 관솔로 붉은 밝혀 소나무 책상에 앉아 글을 읽고 양식이 떨어지면 소나무 속껍질로 대신하고 여인내들이 기거하는 방에 들였던 장롱이나 반다지는 향기와 결과 빛이 고운 소나무 뿌리를 다듬어 만들어 세상의 고약한 악취를 몰아 내었다. 소나무와 함께 산 모습이 바로 양댁의 삶이며 죽어서도 소나무 만든 초가집 뒤 양지바른 소나무 아래에 소나무로 짠 작은 집에 들어 깊은 영면에 드는 일이 바로 음댁이었던 것이다. 소나무는 바로 내가 살아야 할 본 모습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올곧은 심지, 강한 이겨냄, 지독한 인내와 겸손을 위하여 스스로 가지를 구부리고 휘어지게 하는 겸손의 극치는 분명 욕심으로 부쩍부쩍 커가는 활엽수와 근본이 다르다.
고약함을 버리지 못하면 너그러워 질 수 없다. 하느님의 반영인 온갖 사물을 통하여 귀하고 귀한 은혜로운 삶의 교훈을 얻게되는 일이 태반인데 우린 스스로 문명이란 허울 때문에 좋고 아름다운 시선을 외면하고 사는지 모르겠다. 이른 아침부터 이어온 성지 순례 길을 통하여 하나의 공간을 만들고 솔뫼를 떠나려는 순간이 찾아 왔다. 점(點)은 하나의 시작이다. 점과 점을 이어 나가면 면(面)이 생기고 면과 면이 자신을 스스로 내 놓을 때 비로서 공간(空間)이 생기는 것이다. 그 공간은 혼자만의 공간이 아니고 공동체의 공간이건만 우린 간혹 내것이라는 착각을 일으킬 적이 많이 있다. 소나무 여럿이 모여 아름다운 평화의 군무를 추는 것 같은 소나무 숲 풍광 하나만으로도 솔뫼는 으뜸 성지가 아닌가 한다. 소나무처럼 어진 겸손이 우리들에게 필요함을 느끼며 3월 순례의 발걸음을 멈춰야 할 시간이 왔다. 소나무 숲에 깃든 평화의 군무가 어른거려 자꾸 그 속을 들여다 보았다. 그리고 느릿한 봄볕을 배웅하며 차로 돌아와 작은 호수 산그늘에 있는 마음에 고향 집을 찾기 위하여 출발하였다.
첫댓글 내포지방 순교성지순례 계획대로 약속한 일정을 지켜주시고 봉사하심에 감사드립니다![꽃](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2_7.gif)
![꽃](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2_7.gif)
특히 신리성지에 목 없이묻치신 32구에 무명순교성지 참배 한 저희모두는 숙연한 마음을 모아
제 를올리고 기도로써 예 를표하고나니 한결마음이 가벼워지는듯 했습니다
신리성지에서 수녀님께서 따끈하게내려주신 커피향은 못잊을것같습니다 .....고맙습니다
여사울성지에서 미사도드리고 십자가의길도 함께하며 형제애를 나눌수있음에..감사드립니다
세베리노 형제님 감사합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항상 감사한 마음으로 평화를 나누겠습니다. 꾸벅~~
야고바 트레킹은 순례의 여정을 다니는 참다운 징표입니다.
정의와 자유와 평화의 속살은 바로 트레킹과 참 성지순례! 그렇습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봄내음이 스며드는 날 바람은 좀 차가웠지만 성지를 주로 하는 트레킹 너무 마음 흐뭇했습니다. 우리 트레킹모임이 지속될수 있다는 그 자체가 반가웠구요 항상 여유로운 마음으로 참여할수 있다는 것이 행운입니다. 감사합니다. ^_^
항상 제자리를 지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부지런히 힘차게 동행해 주시는 자매님의 일거일수족 타인들에게 귀감입니다. 환절기 건강하셔요. 수고하셨습니다.
사진 속에서 진정으로 참행복이 이런 모습인거죠
행복하십니까
울리는 대답을 할 수 있는 이런 행복을 어디에서 또 찾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 기회는 받을 만한 분들이 초대되는 하느님의 선택사항 이시기도 합니다.
다녀 올 때마다 모세처럼 다볼산의 눈부신 변화를 전해 주세요.
변경된 민트 누구신가 했는데 감 잡혔네요
요즘 수고많으셨어요
마니 기다렸는데.... 다시 기다리는 시간을 통하여 자매님을 그리워 할 것입니다. 모든 트레커들과 함께..
함께 나눌 수 있는 형제회가 있다는것 처럼 행복함이 없는것 같습니다.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뜻깊은 순례길의 만남을 주선해주신 주님과 일정을 꼼꼼이 기획하여 모든이를 한마음으로 나갈 수 있도록 노력해주시는 안동훈세베리노형제님, 알뜰히 엄마처럼 챙겨주시는 총무님, 그리고 늘 함께 참석하시는 형제.자매님들 너무 고맙습니다. 그리고 저도 함께 동행할 수 있어 행복합니다. 순교자들의 끈질긴 삶을 본받아 우리들의 트레킹도 오래 계속되기를 기도하며 바램니다. ^.^
언제나 계신듯 안계신듯 옆에서 자리를 지켜주시는 형님게시니 ,,,행복합니다![러브](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exticon74.gif)
가깝지 않는 오고 가시는 동선이 불편하신데도, 항상 밝은 모습으로 소녀같은 열정으로 참여해 주시는 모습이 참 근사하십니다. 자매님은 트레킹 종신회원이십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멋진 덕담 감사한 마음으로 받으며 더욱 더 분발 하도록 하겠습니다. 평화의 마음을 전합니다.
우리들의 4월트레킹날 기쁘게 만나뵈어요.
모두 모두 행복한 만남을 생각하고 그리워하며 주님의 참 평화와 함께... 안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