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바지
나는 청바지를 즐겨 입는다. 밥을 먹을 때 음식이 떨어져도, 비오는 날 흙탕물이 튀어 도 신경이 쓰이지 않아 좋다. 거기에다가 아무데서나 주저앉아도 신경이 쓰이지 않는 자유까지 선사한다. 이런 나를 가리켜 늙은이가 주책바가지라는 흉보는 사람도 더러 있다.
내가 처음 부임한 곳은 마을 옆 작은 공립학교였다. 부임 인사를 하는 날에도 학생시절 즐겨 입던 작업복을 입고 출근했다. 교무실에 들어가 보니 모든 선생님들이 검정 계통의 양복에 넥타이까지 하고 있었다. 조금 멋쩍긴 했지만 그냥 인사를 했다.
대학에 다닐 때에는 군복을 검은 색으로 염색한 작업복을 주로 입었다. 일부 멋을 부리는 학생 말고는 대부분의 친구들이 즐겨 입는 옷이었다. 작업복을 입으면 중고등학교에서 입던 교복과는 달리 학교 뒤 소나무밭을 헤매고 다니다가 잔디밭을 만나면 누워 낮잠을 자도 거리낄 게 없었다. 그러다가 3학년 땐가 교복에 모자까지 쓰라는 지침이 떨어져 다시 제복을 입으면서 자유를 잃었다.
그래서였을까, 4학년 1학기말 시험 기간이었던 것으로 기억 된다. 아랫도리는 여전히 작업복이지만 윗도리는 허름한 남방 하나로 지내던 터라 때 낀 남방을 빨래하고 나니 마땅히 입을 게 없어 집에서 주로 입던 모시 중의와 적삼을 입고 학교에 갔다. 어머니께서 손수 길쌈하여 지은 조끼 비슷한 것으로 오른쪽 앞자락에 호주머니가 달린 옷이었다. 중의는 갈랑이가 풍덩하고 길이가 길지 않아 입고 벗기가 수월하고 적삼은 호주머니가 달려 있어 담배쌈지와 지갑을 담을 수 있었다. 한여름 더위에 그 걸 입으면 시원하고 자유로웠다. 그 차림으로 학교에 나타난 나를 보다 나를 잘 모르는 학생들도 미소를 지으며 지나갔고 나와 가까이 지내는 친구들은 환한 웃음을 지으며 내 앞에 모여들었다.
여름방학을 하는 날, 학생 때 입던 모시 중의와 적삼 차림으로 학교에 갔다. 교문 안에 들어서자 운동장에서 놀고 있던 학생들의 시선이 내게 쏠렸다. 조금은 어색했지만 아니들의 미소 머금은 시선에 미소로 화답하고 교무실에 들어섰다. 교무실에 있던 선생님들의 시선이 따갑게 꽂혀왔다. 정장 양복 차림으로 종업식 준비를 하던 교무주임과 교감 선생님은 아예 눈살을 찌푸리더니 시선을 돌렸다. 조금 뒤에는 교장 선생님께서 부른다는 전갈을 받고 교장실에 들어갔더니 말끔한 정장차림의 노신사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내 위아래를 훑더니, 학교가 동네 사랑방이냐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때의 분위기에 눌려 아무 말 못하고 있긴 했지만, 조선말 단발령斷髮令에 저항하여 내 목을 끊을지언정 내 머리카락은 자를 수 없다고 했던 선비들의 모습이 언뜻 스쳤다. 공직자의 외형이 곧 업무수행의 척도요, 윤리의 척도인양 착각하는 풍토가 가슴에 사무쳤다.
그 공립학교에서 2년을 채우지 못하고 도청수재지에 있는 개신교재단의 학교로 전근했다. 어릴 때부터 어머니를 따라 시골 교회에 다닌 덕분에 세례교인이 아니면 취임이 불가한 이 학교 교사가 된 것이다. 학교 분위기는 공립학교에 비해 비교적 자유로웠다. 대부분의 선생님들은 노타이이거나 잠바 차림이었고 정장 차림은 많지 않았다. 나중에 보니 장로인 교감 선생님의 출근복은 한결같이 풍덩한 면바지에 누르스름한 잠바 차림이었다. 주초酒草를 엄금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숨을 쉴 만한 분위기였다.
그러나 담배를 끊지 못해, 날이 궂은 날은 내 몸에 밴 냄새로 다른 교인들의 눈치를 살피는 일이 미안해 3년을 못 채우고 사직하고 말았다.
불혹의 문턱에 전근한 학교는 카톨릭 외국 교육재단에서 서립한 학교였다. 이 학교에 첫 출근을 하여 버릇대로 도장을 꺼내들고 출근부를 찾았으나 없었다. 의아하여 내 또래 동료에게 물으니 원래 없다고 했다. 교사들 각자가 해야 할 업무를 차질 없이 수행하기만 하면 어떤 제재도 받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나중에 보니 특별한 사안이 없으면 직원조회도 종례도 없었다. 전달사항이 있을 때 교무실 흑판에 제시하였다. 대신 해야 할 일을 소홀이 했을 때는 어김없이 교장실 호출을 받았다. 선생님들의 옷차림도 자유로웠다. 내가 청바지를 즐겨 입게 된 계기이다.
청바지는 험한 일을 하는 노동자들이 주로 입는 옷이라 한다. 그래서 일 것이다. 질겨 쉽게 찢어지지 않고 먼지가 묻어도 툴툴 털면 그만이다. 입기 수월하고 활동하기에도 편하다. 의관衣冠을 정제하는 것이 선비의 덕목이었던 시대는 지난 지 오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