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산등을 타고 내려왔다.
산줄기를 따라 곱게 펼쳐 놓은 단풍들을 바라보며, 소백산을 넘어 고향 가는 길은 예나 지금이나 한결 같다. 한가위 둥근달이 그러하듯이...
지난 수년간 몇 번이나 맘이 앞서고야 말았다. 오늘은 꼭 그 곳에 가고 싶었다. 영주시 문수면 수도리 무섬마을. 내성천과 서천이 모여 낙동강으로 흐르는 물줄기 위에 놓여 있는 그 마을의 외나무다리가 보고 싶었다. 새벽 일찍 출발한 덕분인지 아침에 시골집에 도착하였다. 어머니가 소담스럽게 준비해 놓으신 아침밥을 먹으면서도 마음은 이미 무섬마을로 향했다. 정성껏 준비한 노고를 뒤로하고 어머니 마음에 서운함을 안겨드렸다. 갈 채비로 바삐 움직이는 모습에 영문도 모르는 채 의아해 하시는 어머니와 함께 무섬마을로 향했다.
시골길을 따라 곱게 핀 코스모스가 옛 추억을 희미하게나마 떠올리게 했다. 이 길로 어린시절 소풍을 떠났던 기억들. 어린아이의 조잘거림과 선생님의 호각소리, 김밥, 사이다, 고구마, 삶은 계란, 이 모두가 추억이다. 이정표지판에 갈색으로 무섬마을이라는 안내를 받았다. 무섬마을을 들어가려면 지난 세월의 흔적들이 군데군데 남아있을 법한 좁은 콘크리트다리를 지나야 했다. 차 한 대 지나 갈려면 반대편에 마주한 차는 잠시의 시간을 내어주어야 했다.
이 다리 또한 적지 않은 세월을 보낸 듯 했다. 다리를 지나자 나타난 만죽재(晩竹齋) 고택이 우리를 맞는다. 전형적인 ‘ㅁ’자형의 전통한옥으로 집안의 내력(來歷)이 엿 보이는 듯하다. 쭈빗쭈빗하며 현관을 살피는데 지체 높으신 양반이 어슬렁거리며 ‘뉘시오’ 하고 부를 것만 같다.
낙동강 줄기 상류에는 냇물이 산에 막혀 물돌이동을 만들어 놓은 마을이 세 군데나 있다. 안동의 하회마을과 예천의 회룡포마을 그리고 영주의 무섬마을이다. ‘물위에 떠있는 섬’이라 하여 무섬마을이다. 한옥과 초가집들이 옛 모습을 닮아서인지 세월이 멈춘 듯 했다. 이 마을에는 강을 가로질러 놓여 있는 옛 다리 하나가 있다. 약 150미터 남짓한 나뭇길이다. 다리 높이는 60센티 정도이고 다리 폭은 30센티 정도이다. 통나무를 반으로 갈라서인지 나이테가 횡으로 누워있는 외나무다리이다. 냇물로 고립된 이 마을에 들고 나기 위해서, 콘크리트다리가 놓이기 이전에는 외나무다리가 유일한 통로였다. 은빛 고운 모래를 안고 말없이 유유히 흐르는 냇물위에 한 줄기 외나무다리는 마을의 희노애락과 함께하였을 것이다. 강 양안의 모래사장을 사이에 두고 가로질러 희어져 있는 다리 모습이 흡사 할머니 등줄기처럼 보였다. 세월의 무게가 업혀있는 듯 애잔한 마음으로 다가 왔다.
강둑에 조용히 앉아 유심히 강을 바라보았다. 이 다리를 지나 옛 사람들이 오가고 물건이 오가고 읍내의 소식들이 오갔을 것이다. 옛날, 오뉴월 장마철 배부른 마나님의 순산 때, 읍내장터에 나가 미역을 고르고 골라 사가지고 오는데, 해질녘 한차례 굵은 빛줄기는 이 외나무다리를 건너는 마당쇠의 마음을 조급하게 하였을 것이다. 가마타고 강 건너 시집 온 새댁은 점점 커져만 가는 한가위 둥근달 아래 폭 좁은 다리를 보면서 친정 오누이들을 그리워하며 눈물을 흘렀을지도 모른다. 까닭모를 양반은 읍내 시장에서 추석분위기에 취해 대포 한잔 거나하게 하고 교교한 달빛을 받으며 흥에 겨워 도포자락을 휘저어 가며 위태롭게 외나무다리를 건널 때, 뒤 따르던 돌쇠는 짚신을 벗어서 허리춤에 차고 냇물로 망설임 없이 들어가 공손히 두 손으로 위엄을 지탱했을지도 모른다. 죽어서도 쉽게 나갈 수 없었다. 무섬마을에 흉사라도 나면 동네 장정들이 상여를 메고 그 외나무다리를 사이에 두고 중심을 잡으면서, 이승의 순탄치만 않았던 삶에 조그만 미련이라도 남아 있을 사자(死者)를 위해, 상여는 느릿느릿 강을 건너갔을 것이다. 뒤따라 오열하며 걸어갔을 상주들의 행렬이 절제된 듯 가지런히 보였던 것은 순전히 외나무다리 덕분 일듯 하다. 이 모든 일련의 생각들이 주마등처럼 내 일인 양 스쳐지나간다.
지난 세월동안 한 치도 소홀함이 없이 제 구실을 묵묵히 지켜냈던 외나무다리가 이제는 콘크리트다리에 자리를 내주고서 멀지 감치 뒷전에 물러나 앉아 있는 모습이 뒷방의 할머니 생애를 고스란히 닮아 있었다. 지금 그 외나무다리 위에서 젊은 남녀와 어린 아들이 세월을 거슬러 할머니 생애를 탐미하고 있다. 외나무다리 위를 지나쳤을 수많은 짚신과 꽃신의 사연들. 강둑에서 묵묵히 지켜보고 계시는 어머니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어머니 또한 품속에 외나무다리 추억하나 쯤 끄집어내고 계실듯하다. 뚝방길 삼대(三代)가 나란히 벤치에 앉아 같은 기억을 담고 있다. 흐드러지게 핀 코스모스를 따라 강물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할머니 생애처럼 소리 없이 흐르고 있다. 오늘, 세월 닮은 추억 하나가 저 다리위에 걸터앉았다. 추억이라고 항상 즐겁게 다가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누구든 옛 추억에 대하여 과분하게 후한 점수를 주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 아닌가 싶다. 이 외나무다리를 보면서...
2012. 10. 19
JAKE K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