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홍모 목사, 영주교회
오늘 읽은 말씀은 구약의 전도서에 있는 말씀입니다. 전도서는 성경에서 가장 철학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인생의 가장 궁극적이고 근본의 문제입니다. 여러분, 구약의 전도서라고 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이 무엇입니까?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는 말이 제일 기억에 남지 않습니까? 성경에 "입술의 열매를 맺으시는 하나님"이라고 했는데, "헛되고 헛되며 헛되다"고 하면 자꾸만 허무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분명히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는 아름답고, 인생은 의미가 있다는데 계속 허무하다는 이야기가 나오니 언뜻 보면 성경에 이런 글도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전도서를 제대로 알고 보면 거기에는 가장 중요한 인생의 근본문제가 다루어지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성경에서 전도서는 지혜문학에 속하고 있습니다. 전도서라는 성경은 히브리어 성경에는 [코헬레트]라고 했습니다. 이 [코헬레트]라는 단어는 '회중을 소집하는 사람', '무리를 모으는 사람', '모여온 무리에게 말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회중을 소집하여 그들에게 인간이란 어떠한 존재인가를 알려주기 위하여 힘쓰는 사람, '설교자' 또는 '전도자'라는 뜻입니다. 헬라어로 번역된 70인 역 성경은 [에클레시아스테스]라고 합니다. 이 역시 '집회 또는 교회에서 말하는 사람', '밖으로 불리워진 무리에게 말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전도자는 지혜로운 교훈의 말씀을 모으고 가르치는 사람을 말합니다. 우리 성경의 전도서라고 함은 '전도자의 가르침이라'는 말로 전도서라고 합니다.
전도서라는 성경은 허무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지혜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 허무주의는 무신론적인 허무주의가 아니라, 유신론적인 허무주의를 말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며 무한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이요, 하나님의 무한하심에 비하여 인간의 연약함과 유한성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이 전도서는 하나님의 위대하심 앞에 겸손히 엎드려 깊은 신앙의 세계로 들어가라고 하십니다. 신앙은 나의 연약함과 부족을 시인하는데서 출발합니다.
저자는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 세속적인 목표나 동기를 가지고 인생을 영위할 때에는 진정한 즐거움이나 의미를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을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설교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수수께끼로 가득 차 있습니다. d 이 세상은 의문 투성이입니다.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인간'이라는 존재입니다. 잘 알 것 같으면서도 알 수 없는 것이 평생 살아가는 이 인생이라는 과정입니다.
구체적으로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전도자는 누구이겠습니까?
저자문제입니다. 저자는 자신이 솔로몬인 듯한 인상을 주면서 기록하고 있는데, 어디에서도 저자 자신이 솔로몬이라는 사실을 명백히 밝히고 있지는 않습니다. 저자는 자신이 다윗의 아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전1:1에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전도서의 저자는 다윗의 아들이며 예루살렘에서 위에 오른 솔로몬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유대의 전통적인 랍비들이나 현대의 많은 신학자들은 솔로몬의 저작을 인정하고 있으며, 솔로몬의 저작을 반대할만한 근거도 없습니다. 주전 10세기의 작품입니다.
인생을 논하는 전도자는 인생은 한마디로 "헛되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헛되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십니까? 그것이 쓰여진 의미는 '수증기','입김'이라는 의미입니다. 인생 70, 80년을 살았더니 남는 것이 없더라는 이야기입니다. 어떻게 솔로몬이 이런 결론을 내렸습니까?
전도자가 지혜로운 사람으로 지혜를 얻기 위하여 힘을 기울여 보았지만, 그것도 "해 아래서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었습니다. 전도자는 "해 아래서"라는 말을 잘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사실 철학적인 사고를 요구하는 용어입니다. 전도자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나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느니라"(전1:18)고 하셨습니다. 그는 그의 경험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1:12-2:26까지 자기의 경험을 바탕으로 설교하고 있습니다. 그는 시험적으로 '즐겁게 살아보자', '낙을 누려보자'고 했습니다. 술을 먹으면 좋을까하여 술을 마시기도 했습니다. 사업에 몰두하기도 했습니다. 농사를 크게 지어보기도 했습니다. 노비를 사기도 하고 집에서 노비를 낳기도 하면서 소와 양이 떼를 이루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나중에 술회하기를 "그 후에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수고한 모든 수고가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며 해 아래서 무익한 것이로다"라고 하셨습니다.
솔로몬은 인생을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살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인생 그 자체를 즐길 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이 열심히 일하고 인생을 즐겁게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원하시는 뜻이며,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그분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심판을 염두에 두며 자제하는 사람만이 인생 그 자체를 즐길 줄 아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그 기뻐하시는 자에게는 지혜와 지식과 희락을 주시나니 죄인에게는 노고를 주시고, 저로 모아 쌓게 하사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에게 주게 하시나니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2:26)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기뻐하는 사람에게 지혜와 희락을 주십니다. 또한 죄인들이 모으고 쌓아놓았던 것까지 빼앗아 옮겨주시는 은총을 받고 살아갈 것입니다.
전8:12 "죄인이 백 번 악을 행하고도 장수하거니와 내가 정녕히 아노니 하나님을 경외하여 그 앞에서 경외하는 자가 잘 될 것이요"라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 악인은 분명히 망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혹 예외가 있어 악인 백 번의 악을 행하고도 잘 살고, 장수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인생의 근본임을 알라고 하셨습니다. 누구를 쳐다보면서 우왕좌왕하실 것 없습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하시는 이인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누구 때문에 믿을 것도 없습니다. 불신자가 잘 산다고 내가 그를 따를 이유는 하나도 없습니다.
전도자는 인생을 논하면서 한마디로 '헛되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전도자는 인간사의 모든 것이 헛되다고 합니다. 사람의 수고도, 사람의 지혜도, 재물도, 존귀함이나, 쾌락도, 젊음과 힘도, 인간의 생명마저 헛되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전도자는 이러한 인간의 모든 것이 다 무가치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이 성경 전도서의 지배적인 분위기는 염세적이지만, 비관론자나 회의론자는 아닙니다. 세상의 일들을 다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고 하여도 인간의 유한성을 생각하면서 아무리 자신의 노력과 의지로 인생을 성실히 살았다고 해도 해 아래서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길을 유일하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길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은 수고함으로 위대한 일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그 결과 다소간의 즐거움을 얻을 수 있는 것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이 의롭게 사는 것은 불의한 것보다 낫습니다. 사람이 일생을 살면서 지혜로운 것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고, 죽음을 앞에 두고 있으면서도 세상의 것만 추구하고, 사후에 벌어질 세계를 불안하여 떤다고 하면 그분은 이 세상에서 어리석은 사람이요, 헛되고 헛된 인생을 사신 것입니다.
솔로몬은 인생을 화려하게 살아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내가 보았다"는 말을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안다"는 말도 사용합니다. 그리고 "내가 알 수 없다", "내가 발견할 수 없었다"는 말을 합니다.
전1:2에 대전제를 말씀하였습니다.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고 합니다. 한 구절 말씀에서 같은 말이 다섯 번 사용한 문장은 이곳뿐입니다.
3-4절입니다.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9-10입니다.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는 새 것이 없나니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우리 오래 전 세대에도 이미 있었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땅에서 수고하고 최선을 다해보지만, 단조로운 생활에 불과하고, 지루한 삶을 살다가 마칠 것이었습니다. 과거로부터 내려온 문화를 발전시키며, 과학을 발전시켰지만, 인생이란 해 아래서 수고하는 것들이 다 헛된 것들뿐입니다.
전5:10에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함이 없고, 풍부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함이 없나니 이것도 헛되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전5: 15에 "저가 모태에서 벌거벗고 나왔은즉 그 나온 데로 돌아가고 수고하여 얻는 것을 아무 것도 손에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라고 하셨습니다.
전도자는 외칩니다. 우리는 전도자의 하신 말처럼 "저가 비록 천년의 갑절을 산다고 해도 낙을 누리지 못하면 마침내 다 한 곳으로 돌아가는 것뿐이 아니냐"고 하셨습니다.
이 책의 주제는 인생의 의미에 대한 열쇠를 찾는 것입니다. 인생이란 무엇이냐 하는 명제를 놓고 심사숙고하며 몸부림치는 책입니다. 전도자는 인생을 유심히 살펴보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여러 각도에서 관찰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성취감과 보람과 민족을 얻을 수 있을 것인지를 가지고 검토하고 씨름하고 있습니다. 결국 전도자는 하나님만이 인생의 열쇠를 쥐고 계시며 그 분만을 신뢰해야 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분만이 우리 인생의 참 목자가 되셨습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그 분의 손으로부터 날마다의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얻을 수 있으며 일상생활 속에서 그 분을 영화롭게 할 수 있습니다.
전도서의 결론입니다.
전12:1입니다. "너는 청년의 때 곧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하는 때가 곧 도래하는 것입니다. 이 전도서는 모든 사람이 들어야 하지만, 특별히 청년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전도서는 성경 중에서 가장 철학적인 책입니다. 우리의 참된 지혜는 잔치하는 집이 아니라, 초상집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성경 히브리서 9:27에 있는 말씀처럼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하셨습니다.
"누가 살아서 죽음을 보지 아니하고 자기의 영혼을 스올의 권세에서 건지리이까?" (시89:48)라고 하셨습니다. 죽음이라는 것은 인생의 공도요, 모든 사람의 결국, 즉 끝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는 이것을 그의 마음에 둘지어다"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 부정모혈을 통하여 태어난 사람으로 죽음을 현실로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성경에 보면 누구든지 그의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아간 사람을 보면 모두 죽음을 준비하고, 죽음을 태연하게 받아들인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자식들에게 신앙을 유산으로 남겨놓는 사람이었습니다. 죽음은 아무도 거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돈이 많이 있어도 그의 죽음을 한 시간이라도 늦추어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한 때 유명한 미국의 교수였던 [아담스] 박사가 학교를 은퇴하고 늙어서 쓸쓸한 인생의 여생을 지낼 때였습니다. 하루는 이른 아침에 그가 산책하려 길거리에 나왔을 때, 제자들을 만났습니다. 제자들이 다정하게 인사하며 "아담스 박사님, 요즈음 어떠하십니까?"하고 인사하였습니다. "아담스는 안전하지만, 아담스의 집이 말이 아닙니다."라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제자들은 소스라쳐 놀라서 "그렇게 유명한 박사님이 만년에 집 하나 없어서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렇게 물을 때 아담스 박사는 말하기를 "저의 집은 기둥이 흔들리고 기와가 떨어져 나가고 벽이 다 허물어졌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제자들이 놀라서 "저희들이 어떻게 하든지 기금을 모아서 박사님 집을 새로 지어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럴 때 박사님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나는 아무런 상관이 없지만 자네들이 보는 바와 같이 나의 집인 이 육체는 기둥인 두 다리가 흔들리며, 나의 지붕인 머리털이 다 빠져나갔으며, 나의 집의 벽인 이 몸은 살점 없이 앙상하게 되고 말았으니 이제 나의 집은 곧 무너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자네들이 어떻게 나의 집을 지을 수 있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이럴 때 제자들은 박사님의 말을 듣고 나서 웃으면서 박사님께서 농담한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아담스 박사는 말하기를 "사람이 세상에 한번 태어나서 죽는 것은 정한 이치요, 죽고 난 다음에는 이 세상을 떠나야된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도 안 믿는 사람의 차이는 죽음에 대한 인식의 차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불신자는 죽음 이후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에 죽음이 다만 두려움의 대상일 뿐입니다. 그의 인생에 있어서는 현세만이 그의 전부입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는 죽음 이후의 영생의 소망으로 가득 차 있으며 죽음이 결코 두려운 존재가 아니며, 우리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모든 것들이 바로 하나님 앞에 서는 마지막 날인 것처럼 죽음을 준비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연세 많으신 노인들이 그들 자신의 일생을 돌아보면서 "허무하다"고 하시는 말씀을 듣게 됩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이렇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성경에도 그렇게 쓰여 있습니다.
"너의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없어지는 안개니라"(약4:14)라고 하셨습니다. 잠시 후에 죽음을 맛보아야 하는 짧은 여정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죽음은 인생의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세계의 시작일 뿐입니다.
기독교는 어떻게 사느냐 하는 문제를 다루는 것입니다. 어떻게 사느냐 하는 물음의 해답을 가장 빠르게 얻어내려면 어떻게 죽어야 하는가를 통하여 찾을 수 있습니다 . 우리는 잘 죽기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죽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으면 살 준비도 되어있지 않은 것입니다. 성서의 가르침은 삶의 문제를 다루는 동시에 죽음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전7:4 오늘의 본문은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자의 마음은 연락하는 집에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초상이 나면 우리 온 교우들이 마음을 기울여 조문해야 합니다. 초상이 나면 고인의 영점 앞에 드는 몇 살에 돌아가셨으며 지금 나의 나이는 몇 살인지를 물어야 합니다. 그 분은 무엇을 하시다 돌아가셨는데, 나는 지금 무엇을 위하여 살고 있는지를 물어야 합니다. 그분은 어떠한 평판을 듣고 사셨는데, 우리는 죽으면 추모하는 사람들이 무엇이라 할 것인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초상은 우리 집에 곧 생길 것입니다.
백년대계를 꿈꾸고 계획을 세워도 오늘 하루만 산다는 심정으로 살아야 바로 살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 집을 나서며 오늘도 무사히 건강하게 주님 은혜 안에서 살게 해 주시기를 마음 속으로 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한 가지 더 보태야 합니다. 오늘이라도 나에게 죽음이 다가 온다면 준비된 사람으로서 죽음을 맞이할 수 있게 해 달라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벌써 몇 해가 지났습니다만 공항 근처에 있는 한 교회에 설교하러 가다가 올림픽 대로에서 일어나는 교통을 사고를 보는 순간 "참 인생이 순간이구나" 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아차하는 순간 벌써 사고가 난 것입니다. 불과 1.2초 사이에 일어난 일입니다. 영화에서나 보는 장면이 눈 앞에 펼쳐지는 것입니다. 잠실 쪽으로 가는 건너편에서 차가 추돌하여 공항 쪽으로 가는 반대편으로 튀어 오르는데, 저보다 앞에 가던 차를 들이받고 옆 차선의 차를 또 들이받고, 굴러가는데 그러한 아수라장을 뚫고 지나칠 수 있었다는 것은 정말 감사한 일입니다. 나는 죽음과는 거리 먼 사람이라고 할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나와 사망은 한 걸음 사이"라고 하였습니다. 시90:4에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순간 같을 뿐임이니이다"라고 하셨습니다. 5절에는 "주께서 저희를 홍수처럼 쓸어 가시나이다 저희는 잠깐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현재 세계에서는 하루동안에 죽는 사람이 170만 명입니다. 1초에 죽는 사람이 약 20명입니다. 인천보다도 큰 도시가 하루에 하나씩 쓸어져 없어지는 것입니다. 모세의 말처럼 홍수처럼 쓸어 가는 것입니다. 죽음 앞에 솔직해져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죽음 앞에 겸손해져야 합니다. 죽음 앞에 솔직하지 않고 겸손하지 않기에 그는 오래 살 것으로만 알기에 바로 살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종말론적 심정으로 살 때 겸손해지고 솔직해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만 산다고 생각한다면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을 가장 먼저 해야할 것인지가 확실해질 것입니다.
영국의 대 설교가였던 스펄죤 목사님은 40대 초반부터 고치기 힘든 어떤 지병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가끔 이런 말을 자주 했답니다. "오늘 설교가 마지막 설교가 될 것 같아서 같은 말이지만 내가 꼭 하고 싶은 그 설교를 또 하겠습니다"라고 이미 했던 설교를 또 하셨지만 그때마다 온 교우들이 큰 은혜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저도 오늘 마지막 설교하는 심정으로 저와 여러분들이 하루밖에 못산다면 무슨 말을 해주어야 하는 심정으로 설교를 준비했습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이 예배에 참석하시고 설교를 듣는 것도 같아야 한다고 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설교를 듣는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더 이상 예배를 드릴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긴박한 심정으로 들어야할 것입니다. 그렇게되면 예배드리는 자세가 달라지고 매일 듣던 소리라도 다르게 들릴 것입니다. 사실 내일이라는 것은 아무도 보장해 주지 않는 날입니다.
사순절 기간입니다.
우리 주님은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는데, 평안을 추구하고, 높은 자리에 올라가서 대접이나 받으려고 가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이 사순절기간에 구원의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자 우리가 종말론적인 심정으로 하루하루를 산다고 할 때에 꼭 확인하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몇 가지 있습니다. 저는 이제 저와 여러분들이 죽기 전에 반드시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들에 대하여 말씀 드립니다.
1. 구원의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 주 예수님이 누구인가를 분명히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되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오늘 저녁에 죽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때 모든 이들과 작별을 해야 하지만 만나야 하는 한 분이 계십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과 대면해야 합니다. 그분은 예수를 아느냐, 예수를 믿느냐고 물으실 것입니다. 예수님을 아는 것이 심판의 기준이 되기 때문입니다.
감리교의 창시자이신 [요한 웨슬레] 목사님이 미국에 선교사로 갔을 때에 [오글로 소프]라는 목사님이 묻기를 "예수 그리스도를 아십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목사에게 예수를 아느냐고 묻는 것은 얼마나 불손한 태도입니까. 웨슬레는 "예 압니다 이 세상의 죄를 대신하신 분이십니다"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자 [오글로 소프] 목사는 다시 묻기를 "그 예수 그리스도가 당신에게는 어떤 분이십니까?"라고 또 물었습니다. 그러자 웨슬레는 우물쭈물 대답을 하긴 했습니다. 마는 그때부터 그의 마음속에서는 진통이 시작되었습니다. "왜 나는 자신 있게 대답을 못하였을까?" 나의 믿음이 어딘가 잘못이 있나보다 뼈아픈 고통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선교사를 그만두고 영국으로 다시 돌아갔습니다. 그는 영국으로 돌아가서 "내가 오늘 저녁이라도 이 세상을 떠난다면 이런 상태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까!" 이렇게 열병을 치르듯 진통하는 가운데 어느 조그만 모임에 참석하여 드디어 하나님이 그에게 빛을 던져 주심으로 거듭난 체험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때부터 기독교 역사에 샛별처럼 빛나는 요한 웨슬레가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의 신앙이 아직도 바로 되어 있지 아니하시다면 이 시간을 통해 해결 받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어떠한 관계입니까. 분명하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되시길 바랍니다
2. 나의 교회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 성도들은 교회를 제쳐놓고 하나님과 가까워질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교회와의 관계가 분명하지 않고는 예수님과의 관계가 분명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와의 관계가 분명하지 아니하고는 충성된 교인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는 교회에 위선이 많아서 못나가겠다고 합니다. 맞는 이야기입니다.
교회는 위선자도 있습니다. 그런데 의사들 중에 위선자가 있다고 해서 아플 때 병원에 안가겠습니까. 학교 교사들 중에 위선자가 있다고 해서 자녀들을 학교에 안 보내겠습니까? 내 교회 나의 목사님이 있어야 합니다.
3. 잘못된 것을 바로 잡아야 합니다. 회개해야 합니다.
사람은 처음도 좋아도 하지만, 마지막이 좋아야 합니다. 전도자가 말한 것처럼 "일의 끝이 시작보다 낫다"고 하셨습니다. 잘못된 모습을 남겨놓고 죽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의 모습은 바로 영원한 사람입니다. 죽으면 다시 고칠 수 없습니다.
4. 돈 문제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죽는데 돈 문제가 무엇이 그렇게 중요 하느냐 하실 지 모릅니다. 그러나 돈 문제야말로 대단히 중요한 것이며, 항상 깨끗이 해야 합니다. 죽을 때 빚을 지거나 돈을 떼먹고 죽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부득이 부채를 지는 일이 있다면 분명한 약속을 하고 그 약속을 꼭 지키려고 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빛을 지고 갚지 못할 때 기독교를 들먹입니다. 자기는 왜 예수를 안 믿느냐 하면 예수 믿는 이들에게 돈을 떼었다고 핑계를 댑니다. 빚을 지고 갚을 수 있는데도 갚지 않는다 하면 정직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세상은 부정직한 사람은 존경하지 않습니다. 돈 관계에 항상 깨끗한 사람을 좋아합니다. 그러므로 자기 부채는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갚는다고 하는 굳은 결의가 있어야 합니다. 사람에게 대한 빚만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빚도 중요함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많은 날들이 있을 지라도 하루밖에 못산다는 생각으로 하루하루 순간 순간을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할 것입니다.
아무 때라도 위로부터 소환장이 날아오면 미련 없이 이 세상을 떠날 수 있는 후회 없는 생애를 사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출처:은혜목회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