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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욱!
"큭!"
남자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의 눈에는 믿을 수 없다는 빛이 가득
했다. 그가 손을 허공으로 뻗어 허우적거렸으나 그 무엇도 잡히지 않
았다. 결국 그의 몸이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렸다.
스윽!
청호문이 남자의 가슴에 박힌 창을 뽑아 들었다.
이것으로 끝이었다.
청호문 주위로 검은 창을 든 무인들이 몰려들었다. 그들의 갑주와
창에서는 모두 진득한 선혈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청호문은 잠시 자
신의 부하들을 둘러보다 뒤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치열한 접전이 벌어졌던 장원의 정자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본
래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정자 위에는 사무독이 앉아 있
었다. 장원에서 치열한 접전이 벌어지는 동안 그 누구도 사무독이 앉
아 있는 정자에는 접근조차 하지 못했다.
"풍허장에 있던 천왕성의 무인 삼백 명을 모두 몰살시켰습니다. 더
이상 사천성에는 천왕성의 무리들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수고했다."
청호문의 보고에 사무독이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에 초토화가 된 풍허장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이 이곳에 들어오기
전만 하더라도 이곳에는 삼백 명의 사람들이 살아 숨 쉬고 있었으나
지금은 개미 새끼 한 마리도 살아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것은 사무독
이 원하던 결과였다.
"사천에서의 알이 모두 끝난 이상 내일 안휘성으로 떠난다. 준비
하도록."
"존명!"
"본성에서도 이쪽의 일정에 맞춰 지원군을 준비해 달라고 전서를
넣도록."
"이미 문상께서 모든 준비를 끝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저희가
움직이는 즉시 본성에서도 움직일 겁니다."
"잘됐군."
사무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입가에 만족스런 미소가 떠올랐
다. 그가 청호문과 흑기대를 보며 말했다.
"안휘성에 가면 본격적인 싸움이 시작될 것이다. 오늘은 푹 쉬도
록......"
그의 말에 청호문을 비롯해 흑기대의 얼굴에 기대의 빛이 떠올랐
다. 그들이 원하는 싸움은 이 정도가 아니었다. 그들은 더욱 큰 자
극을 원했다. 어느새 그들은 사무독에게 물들고 있었다.
사무독의 눈에는 피로 물든 태호의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정도련은 구대문파가 모여서 만든 힘의 집약체였다. 그러나 정도련
에도 한 가지 문제가 있었으니 아홉 문파가 모였기에 힘의 분배와
함께 어떤 역할을 맡아야 하느냐는 큰 문제였다.
이것은 매우 미묘한 문제로 구파의 힘의 균형이 맞지 않으면 자칫
분열을 일으킬 수도 있었다. 때문에 구파에서는 정도련에서 서로의
역할 배분을 하는 데 매우 신경을 썼다. 그중에서도 정도련의 실질
적인 운영을 책임지는 련주를 뽑는 데 특히 심혈을 기울였다.
련주가 되는 가장 큰 요건은 바로 무공이었다. 무공이 약한 자가
련주가 될 수는 없었기에 그들은 우선 청송진인을 정식으로 련주로
추대했다. 아직도 그들은 기억하고 있었다. 그가 소림에서 적무강과
벌였던 충격적인 비무를. 그때의 광경은 그들의 뇔 깊숙이 각인이
되어 있었기에 별다른 반대는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차후 천하가
안정 정국에 이르면 비무대회를 통해 련주를 추대하기로 했다.
우선은 정도련에 파견된 각파의 장로들이 정도련에 새로이 구성되
는 조직들의 운용을 맡기로 결정했다. 아직은 여러모로 부족하고 어
설펐지만 일단 그렇게 역할 분담이 끝나자 정도련은 활기차게 돌아
갔다.
서문아의 동생 자격으로 정도련에 들어온 서소문은 정보 조직을
구성하는 책임을 맡았다. 그를 후원하는 역할은 남궁성이 맡았다.
그리고 서문아는 그 어떤 직책도 맡지 않고 단지 식객의 자격으로
정도련에 거주했다. 처음 정도련 건물이 지어질 당시만 하더라도 성
벽 위에 모습을 자주 드러냈던 그녀는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사람
들의 시야에서 모습을 감췄다. 분명히 정도련 내에 존재하기는 했지
만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기에 그녀에 대한 궁금증은 더
욱 커져만 갔다.
서문아는 정도련의 가장 깊은 심처에 홀로 머물고 있었다. 그녀는
인공적으로 동산을 만드록 진법에 따라 나무를 심어 외부에서 외인
이 함부로 들어오지 못하게 만든 숲 속에 있었다.
그것은 그녀 스스로의 결정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존재가 얼마나
정도련에 부담이 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외부에 출입하는
것을 스스로 삼갔다. 그리고 서소문과 남궁성을 제외한 그 어떤 사
람의 출입도 허락하지 않았다. 때문에 정도련의 수뇌부 인사들까지도
그녀가 숲 속에서 어떻게 지내는지 알 수가 없었다.
서문아는 커다란 나무 앞에 조용히 서 있었다. 그녀의 봉목은 무
척 서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휘잉!
바람이 불어와 그녀의 고운 머릿결을 흩날리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녀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녀는 눈을 반개한 채 전면을 바라보
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전면에는 풍혼이 허공을 향한 채 바닥에
꽂혀 있었다.
웅웅!
풍혼이 나직하게 울었다. 무척 작은 소리였지만 분명 풍혼은 울고
있었다.
문득 서문아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제야 너의 울음을 들을 수 있구나. 그동안 오래 기다렸지?"
그녀는 마치 오랜 친구에게 하는 것처럼 이야기했다. 그러자 풍혼
의 진도이 더욱 심해졌다.
서문아의 입가에 웃음이 어렸다.
예전에도 풍혼의 울음을 느끼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지
금처럼 확실하게 들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마치 귀가 새로 탁
트인 것만 같았다.
서문아는 이곳에서 새로운 무공의 경지를 엿보고 있었다. 이제까
지 풍혼을 만질 때와는 느낌이 달랐다. 그전까지는 단지 살인에 필요
한 도구로, 그리고 자신이 익힌 창식을 펼치기 위한 무기로써 풍혼을
펼쳤다. 그러나 지금은 풍혼의 모든 것이 손에 잡힐 듯 느껴졌다. 그
것은 이제까지 그녀가 느껴 보지 못했던 새로운 경험이었다.
환골탈태를 한 이후 모든 것이 변했다. 환골탈태는 육체뿐만 아니
라 정신까지도 크게 성숙하게 만들었다. 사고력은 더욱 깊어졌고, 무
공을 바라보는 시야도 더욱 넓어졌다. 때문에 하루가 다르게 그녀는
강해지고 있었다.
지금 그녀를 견디게 하는 힘은 적무강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그리
고 그에 대한 사랑이었다. 떨어져 있다 보니 그에 대한 그리움은 더
욱 절절해져 갔다. 천왕성을 상대로 일인대전을 벌이는 자신의 남자
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또다시 짐이 되지 않는 것뿐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그렇게 무공에 열중했다.
"돌아오세요. 언제든지 당신이 쉴 곳이 되어 줄게요. 그리고 당신
이 돌아왔을 때 편히 쉴 수 있게 이곳을 지킬게요."
그것은 적무강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지만 스스로에게 다짐을 하는
말이기도 했다.
그녀는 자신의 바람이 적무강에게 전해지길 빌었다. 그녀의 시선은
청해성이 있는 하늘을 향하고 있었다.
천왕성주 사도경은 잠시 창가에서 자신의 대지를 내려다보았다.
삼백 년이란 시간 동안 그들이 삶의 터전으로 가꿔 온 대지. 지금은
푸르름이 넘치지만 예전에 이곳은 도저히 사람이 살 수 없을 정도의
척박한 대지였다. 흙은 검정색으로 죽어 있었고, 대지에는 풀 한 포
기 자라지 않았다. 그러나 이곳에 들어온 마도육문의 조상들은 와신
상담하는 심정으로 터전을 일궜다.
무신 마광도의 방문을 받은 이들, 패배는 그들의 자존심에 씼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패배를 인정하기에 그들의 자존심은 너무나 컸
고, 그렇기에 이곳에 들어오는 극단적인 처방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
러나 그들의 결정 때문에 그들의 후손은 삼백 년이란 시간을 이곳에
서 보내야 했다.
"모든 것이 그들의 계산대로 된 듯했지만 단 한 가지만큼은 그들
도 미처 예상을 하지 못했지, 흘흘~! 마도육문이 단결하지 못하고
분열을 거듭해서 지난 세월을 허송세월했다는 것. 그렇기에 숙적인
십자성을 지난 삼백 년의 세월 동안 그냥 방치해야 했다는 것. 정말
우스운 일이지. 아마 이 사실을 그들이 미리 예측했다면 그따위로
천왕성을 만들지는 못했겠지."
그는 잠시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이젠 주름이 가득한 노인의 손
으로 변한 자신의 손, 이 주름을 타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선혈이
흘렀는지 모른다. 그는 아직도 자신의 손을 타고 흐르던 선혈의 느
낌을 잊지 않고 있었다. 자신의 위치는 수많은 사람들의 시신을 밟
고 만들어진 자리였다.
그가 창밖의 풍경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말했다.
"어찌 되었느냐?"
"그는 자신의 거처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분명 방 안에는 그 혼자밖에 없었지만 허공에서 누군가의 목소리
가 흘러나왔다. 그러나 사도경은 이런 광경에 무척 익숙한지 아무렇
지 않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적진 한가운데서 휴식을 취하고 있단 말이로구나. 정말 그는 나
의 예상을 매번 벗어나는구나. 정말 재미있어. 흘흘!"
"그는 매우 위험한 자입니다."
"흘흘!"
사도경이 미묘한 웃음을 흘렸다. 이에 암중의 목소리가 침묵을 지
켰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에 사도경이 입을 열었다.
"넌 내가 왜 십자성의 정벌을 명령하였는지 아느냐?"
"고인 물은 썩기 때문이라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잘 알고 있구나. 삼백 년 동안 대를 거듭해 온 싸움을 통해 분명
천왕성은 강해졌다. 그러나 그만큼 자존심도 강해졌지. 비록 서열은
정해져 있지만 그들이 원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수평적인 관계, 수직
적인 상하 관계만큼은 극명하게 거부를 하고 있지. 만약 나의 무공
이 그들을 압도할 정도가 아니었다면 그들은 내 명령을 결코 듣지
않았을 것이로다. 난 오랫동안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해야 할지 생
각했다. 그런데......"
사도경의 노안에 주름이 잡혔다. 그것은 그가 기분 좋을 때 짓는
웃음이라는 것을 암중의 남자는 잘 알고 있었다.
"......뜻밖에 도마란 남자가 나타나 아까운 친구들이 목숨을 잃었
어도 나는 그를 탓하지 않는다. 그것은 도마가 강자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힘을 완벽하게 파악하고 적의 역량을 가늠할 줄 아는......
세상엔 그 정도의 남자가 흔치 않지. 그런 남자이기 때뭉네 인정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등장은 무엇보다 나에게 뜻밖의 호재이기
도 하다. 어지러운 천왕성을 일거에 정리할 수 있는."
온화한 사도경의 얼구에 한 줄기 섬뜩한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너
무나 순식간이었기에 암중의 남자조차 눈치 채지 못했다.
사도경이 말을 돌렸다.
"다른 문파들은 어찌 되었느냐?"
"낭혈문은 좌천기의 죽음 이후 외부의 출입을 금하고 있습니다. 하
지만 이미 그들은 천왕성에 완벽하게 예속되었습니다. 문주를 잃은
패천문 역시 외부와 단절을 하고 있지만 소문주에 대한 세뇌 작업이
이미 끝났기에 별문제는 없을 것입니다."
"수고했구나. 이제 밀종문과 광검문만 남았군."
"그렇습니다."
"좋구나! 그밖에 다른 일은?"
"서운사가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런가!"
사도경이 재미있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
"흘흘! 그는 일인자의 재목이 못 되지. 분명 힘이 있으면서도 자신
의 힘을 완전히 믿지 못하고 암중으로 움직이는 것을 즐기지. 일인자
라는 것은 비록 무모할지라도 반드시 직접 움직여야 할 때가 있는
법인데 말이야. 그는 그 점을 깨닫기 전에는 영원히 일인자의 자리에
오를 수 없을 게야."
"그리고 광검문주가 외유를 다녀오면서 도마와 동행했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그는 지금 자신의 거처에서 자신의 검을 돌아보고 있
습니다."
"흘흘! 검우, 그 아이는 아직 젊기에 무모하지. 난 그 아이가 마음
에 든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는 뇌정문 출신이 아니다. 그것이 안타
깝구나. 그렇지만 않았다면 나의 후계자 자리를 줘도 아깝지 않을 것
을. 비록 아깝긴 하지만 이젠 그 아이를 정리해야 할 때. 미리 준비
를 하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꾸부정한 그의 허리가 펴지면서 패도적인 기운이 줄기줄기 뻗쳐
나왔다. 지금의 그는 더 이상 주름 많은 늙은이가 아니었다. 삼백 년
의 세월 동안 마도의 절대자로 군림해 온 천왕성의 성주, 바로 그 자
체였다.
"도마가 머무는 거처에 대한 금제를 모두 풀도록. 그에 대한 최후
의 시험을 하겠다. 과연 그가 나를 만날 자격이 있는지."
"존명!"
금제를 푼다 함은 적무강이 머물고 있는 거처에 누구라도 자유롭
게 출입할 수 있다는 말과 동일했다. 그리고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암중의 남자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흘흘! 도마라...... 잔는 과연 나를 위해 무엇을 해 줄 것인가?
나는 무척이나 기대가 된다네. 중원에서 온 나의 장난감이여."
그가 적무강이 머물고 있는 방향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의 미소는 근원을 짐작할 수 없는 섬뜩함이 담겨 있었다.
아직 천왕성의 무인들은 천왕성주 사도경의 진면목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완벽한 폭군이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할 수 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