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처음 세례 받던 곳 [요한복음 10:40-42]
우리는 지난 2018년 4월 29일 요한복음 8장을 통해 - 한 무리들이 창녀를 예수님 앞으로 끌고 와서 - 돌로 쳐 죽이려고 했던 사건을 - 두 차례에 걸쳐 보았습니다.
그때 창녀를 가리키는 헬라어가 ‘코리’라고 했습니다. - ‘코리’는 몸을 파는 여성을 단적으로 표현하는 단어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코리’는 - 인생을 사는 목적이 - 세상에서 돈을 많이 벌어
육체적 기쁨을 우선시 하는 사람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한 마디로 - 세상을 살면서 - 육체적 기쁨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코리입니다.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 짧은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 신앙생활은 적당히 -
노는 생활은 왕성이 하는 것을 - 기쁨으로 생각하는 사람을 - 성경은 코리라고
부릅니다.
성경은 자신들이 코리임을 깨닫지 못하는 무리들이 - 또 다른 코리를 예수님
앞으로 데리고 와서 -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는 - 너희들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셨습니다. -
이때 죄 없는 자를 뜻하는 헬라어 - 호 아나마르테토스는 -죄지을 욕망까지 없는 사람. - 티끌만큼도 죄가 없는 사람을 뜻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앞에서 죄인임을 깨달은 그들이 - 모두 돌을 내려놓고
돌아갔습니다. - 여러분, 죄인들은 주님 앞에서 - 죄 사함을 받아야 합니다. -
그런데 그들은 죄에 대한 용서함을 받지 않고 그냥 돌아갔습니다. -
그러나 남아있는 한 명의 코리는 - 주님으로부터 용서함을 받습니다.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이러한 명령을 듣습니다. - 다시는 죄짓지 마라.
저는 여러분 모두가 주님의 말씀을 듣고 - 그냥 떠나는 자들이 되는 것이 아니라 -
용서함을 받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작년 2018년 12월 22일 - KBS 불후의 명곡 시간에 - 더원이라는 가수와 함께
올해 75세인 왕년의 가수 - ‘김도향’ 씨가 출연하여 - 옛날 그의 히트송 -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를 열창했습니다.
한밤중에 듣는 그 노래는 - 지나온 인생을 스스로 생각해 볼 만큼 충분한 호소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 그리고 이날 그들의 놀라운 가창력으로 인해 - 관객들은
박수를 치며 환호했습니다. - 참으로 화려하고, - 열정이 넘치는 무대였습니다.
그러나 한번 막이 오른 무대는 - 그 무대가 화려하고, 열정이 넘친다 할지라도 -
그 어떤 무대이든 상관없이 -시간의 차이만 있을 뿐 - 반드시 끝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무대의 막이 내림과 동시에 - 환호했던 관객은 돌아가고 - 화려한 조명은 꺼지고 - 울려 퍼지던 박수갈채도 -꽃다발 세례도 -모든 것이 함께 끝나고 맙니다.
인생무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의 막을 내리는 - 죽음의 그 시간이 이르면, - 내가 하고 싶은 것이 있다 할지라도 - 계속할 수 없습니다. - 화려했던 나의 삶의
이력도 -한 평생 모아 둔 재물도 -내 주변의 많은 지인들도 - 모두 끝나고 맙니다.
그렇다면, - 만약 오늘이 인생의 막을 내리고 - 세상을 떠나야 하는 그날이라면 -
여러분들은 - 여러분들의 삶에 대해 - 스스로 어떻게 평가하시겠습니까?
만약 지금 이 시간이 그 날이라면 - 여러분들은 어떤 마음으로 이 세상을 떠나시겠습니까? -오늘이 그날이라면 -어떤 심정으로 사랑하는 사람들과 헤어지시겠습니까?
그 날은 - 사랑하는 사람을 - 더 이상 볼 수 없는 날입니다. - 그 날은 - 사랑하는
사람에게 하고 싶은 말을 - 더 이상 할 수 없는 날입니다. - 그 날은 - 하고 싶은
일을 - 더 이상 할 수 없는 날입니다. - 그 날은 - 예고 없이 느닷없이 찾아옵니다.
-그날은 누구에게나 반드시 찾아옵니다. -그날은 나의 변명이 필요 없는 날입니다.
한문 죽을 사자를 파자를 하면 - 세 글자가 됩니다. - 한 일자 - 저녁을 가리키는 석자 [夕] - 그리고 칼을 뜻하는 비수비자 [匕]입니다.
그래서 죽음이란 - “한 밤 중에 느닷없이 날아오는 비수와 같은 것입니다. -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 - 어디서 - 어떻게 우리의 삶의 시간이 마감 될지 모릅니다.
분명한 것은 - 인생이란 무대의 막이 - 마지막으로 내릴 때, - 그 무대를 내려오는 사람은 두 부류로 나뉘게 될 것입니다. -첫째는 자신이 지금까지 바보처럼 살았음을 그제야 깨닫고 - 눈물을 흘리며 - 두려움 속에서 후회하는 사람과, - 두 번째로는 - 부족하지만 - 그래도 바른 길을 걸을 수 있었음을 -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 날은 후회하는 날이기도 하는 날입니다. - 무엇보다도 그 날은 천국과
지옥이 결정되는 -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는 날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 -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여기고, 세상을 즐김으로 신앙을 등한시 한 사람에게는 형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의 상 주심입니다.
그럼으로 이 땅에서 불의와 타협하지 아니하고, -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의 뜻 안에 거하는 자는 - 누구든 하나님 나라에서는 - 높임을 받을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은 - 약 8800개의 히브리 단어로 구성되어있습니다. -신약성경은 5800개의 헬라어 단어로 구성되어있습니다. - 이 숱한 단어들 가운데에 - 하나님께서 인간의 삶에 대해 평가를 하실 때 표현한 단어 가운데 - 평등이라는 단어가 없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인간의 생명의 가치는 모두 평등합니다. - 그러나 인간이 -
이 세상에서 살아온 삶의 결과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는 - 결코 평등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성경이 우리에게 일깨워주는 하나님은 - 평등의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
하나님은 뿌린 대로 거두게 하시는 - 공평의 하나님이십니다. - 우리가 어떻게
이 세상을 살아왔는지에 대해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 우리가 살아 온 과정을
토대로 - 우리에게 벌 또는 상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상주시는 하나님을 가볍게 여깁니다. -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제가 길을 가는데 유치원생이 저에게 - 자기 앞에서 노래를 잘 부르면, - 자신이
가지고 있는 사탕을 상으로 준다고 했을 때 - 제가 그 아이 앞에서 - 사탕이라는 선물을 받기 위해 - 열과 성을 다하여 노래를 부르겠습니까? - 부르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 나에게 상을 주겠다는 주체가 - 나보다 어리고,
나에 비해 형편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 만약에 유치원생이 아니라, - 나보다 월등한 신분의 사람이라면 - 열과 성을 다하여 노래를 부를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의 심판을 이야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상 주심과 심판을 믿지 못한다면 - 그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상을 우습게 여기고 - 하나님의 심판을 가볍게 여기고, -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 아닙니까.
내가 하나님보다 더 크다고 생각하기 때문 아닙니까. -내가하는 내 일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보다 -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 아닙니까.
하나님은 -입으로는 하나님이시지만 - 실제로는 나보다 못한 분이라는 생각이 나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 아닙니까? - 내가 피조물이요 - 하나님이 창조주이심을 정말로 믿는다면 - 하나님의 상을 사모하고, -심판을 두려워 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하나님은 상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뿌린 대로 거두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기도를 뿌리면, 응답을 거두고 -헌신을 뿌리면, 미래를 거두는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공평의 하나님이십니다. - 생각을 해 보십시오. - 설렁설렁 사는
사람과 - 주님의 길을 좇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어 놓았던 사도바울이 - 하나님으로부터 똑같은 평가를 받는다면 그 하나님은 결코 - 정의의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사도바울은 - 하나님의 나라에서 우리보다 - 더 높은 평가를 받아야 합니다. -
그것이 하나님의 정의이고, - 하나님의 공평입니다.
왜 그리스도인들이 오늘날 세속주의에 물들어 가는가? - 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지 않는가?
궁극적으로 그날이 왔을 때 -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 상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도 - 소망도 없기 때문입니다. - 지옥과 천국이라는 - 상벌에 대한 결과를
가볍게 생각한다든지 -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 그래도 그날은 올 것입니다.
제 개인에게 물으신다면, - 저는 하나님의 셈하심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상 주심도
믿습니다. - 만약에 그것을 믿지 않는다면, - 저도 제 살고 싶은 대로 살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그날이 오면 - 하나님의 셈하심을 받아야만 합니다. - 선택이 없이 - 천국과 지옥이 결정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심판 - 그 하나님의 셈하심의 근거는 - 다른 사람의 삶이
아니라 바로 내 자신의 삶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 그리스도인으로서 의무는 다하지 않고 - 세속에 빠진 자에게는 - 하나님의 상은 결코 없습니다.
그래서 무릇 우리가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 내 나이의 많고 적음과 상관없이
어느 날 비수처럼 내게 날아올 그날을 의식하면서 - 그날을 준비하고 - 내 자신을
매일매일 성찰하면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그날 어두운대로 쫓겨나 - 이를 갈면서 울지도 않을 것이고 - 땅을 치면서
통곡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하시면서 - 복음에 주리고 - 하나님의 의에 목말라 해 본적이 있으십니까?
우리 주변을 보면 -재산은 지켰지만 - 화목이 깨진 가정이 얼마나 많습니까?
- 육적인 건강은 지켰지만 - 영적인 불구자들은 또 얼마나 많습니까? -
노후대책은 철저하게 세웠는데 - 영혼의 대책은 전무하신 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복음을 깊이 만나지 못해 - 주일은 꼬박꼬박 지키면서 열심히 헌금도 했지만, -
실제 삶 속에서는 - 진리의 생명력이 없이 -거짓된 기쁨으로 - 거짓된 평안으로 - 거짓된 감격으로 - 믿음 없는 - 무기력한 삶을 살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잠시 있다가 없어지는 세속의 것들에게는 목숨을 걸면서도 - 죽음 이후에 대해서는
- 천국과 지옥에 대해서는 -속수무책으로 사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가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해 오면서 - 나는 무엇을 했는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십자가의 복음 때문에 -내가 정말 포기한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십자가의 복음 때문에 - 정말 내려놓은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십자가의 복음 때문에 -내가 정말 희생한 적은 있었습니까?
이 세상 뿐 아니라 -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 바른 인식을 가진 사람만 - 포기할 것
을 포기하고, -희생할 때 희생할 수 있습니다.
오래 전에 - 중고 서점을 들렀을 때, 저의 시선을 사로잡는 책 제목이 있었습니다.
‘Where did the time go?’ - [그때 그 시간은 어디로 갔는가?]
제 능력으로는 영어로 된 그 책의 내용을 파악한다는 것은 - 어려움이 있었지만, -
그 제목만은 대단한 의미를 지닌 질문이었습니다.
‘그 때 그 시간은 어디로 갔는가?’ - 시간은 절대로 사람을 기다려 주지 않습니다.
시간은 한 곳에 멈추어 - 정체되는 법도 없습니다. - 시간은 끊임없이, - 그리고
어김없이 흘러갑니다. - 그렇다면 - 그 모든 시간들은 대체 어디로 갔습니까?
20, 30대 젊음과 발랄함은 - 어디로 사라졌습니까? - 남편이나 아내로 살아온 지난 수십 년의 시간은 - 어디에서 찾을 수 있습니까? -이미 백발의 노인이 되었습니까? - 그렇다면 일생이라 불리는 - 그 숱한 시간들이 - 다 어디로 가 버린 것입니까?
시간은 흘러갑니다. - 그러나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 흘러가는 시간은 보이지 않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 그러나 흘러가는 시간은 반드시 - 눈에 보이는 형체로 남습니다.
지나간 우리 인생 속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처럼 흘러가 버린 그 숱한 시간들은,
바로 이 순간 -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있는 - 현재의 ‘삶’이란 형체로 남아있습니다.
지금 누군가의 삶이 진리의 열매로 두드러져 보인다면, -그가 이제껏 자신의 시간을 진리 안에서 - 바르게 사용하였음을 의미합니다.
어떤 이의 삶 속엔 허망한 욕망의 열매만 가득하다면, - 그는 지나간 세월 동안
금보다 더 귀한 자신의 시간을 - 허망하게 탕진한 자임에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지금 내가 살아가는 모습이 - 지금 내가 살아가는 환경이 - 눈으로 볼 수 없는 지나온 시간을 -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실체입니다.
그렇다면, ‘그때 그 시간은 도대체 어디로 갔는가?’ - 이제 우리는 이 질문에 분명하게 답할 수 있습니다. - 그때 그 모든 시간은 - 지금 내 삶 속에 이렇듯 고스란히
쌓여 있고, - 또 남아 있습니다. - 지금 나의 삶의 모습으로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향해 보여 드려야 할 진리의 열매를 - 지금 자신의 삶 속에
지니지 못한 자라면, -그가 누구이든 -그리고 부귀영화를 누리던 - 산해진미를 먹든 - 그는 지금까지 - 죽음 이후를 생각하지 못한 바보처럼 살아왔음에 틀림없습니다.
의미 없는 시간을 탕진하는 - 현재의 삶에 종지부를 찍지 않는 한, - 예기치 않은 순간 - 인생무대의 막이 떨어져 내릴 때, - 그는 탄식의 노래를 부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
십자가 위에서 당신의 일생을 마무리하신 주님께서는 -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루어야 할 뜻을 다 이루셨고, - 행하여야 할 일을 다 행하셨고, - 거두어야 할
열매를 다 거두셨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 - 당신께 주어진 일생이란 시간을 - 조금도 헛되이 낭비함 없이,
진리를 위해 - 옳고 - 바르고, - 아름답게 사용하셨다는 뜻입니다. - 한마디로,
주님께서는 - 이 땅에서 - 결코 바보처럼 사시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에 드러난 그분의 삶을 통해 - 그분의 시간이 얼마나
거룩하게 쓰였는지, - 얼마나 진리를 위해 사용되었는지, -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했었는지를 - 똑바로 보고, - 똑바로 읽고, - 똑바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위해 사용되었던 - 시간의 축적인 그분의 삶 자체가 -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거룩이었고, - 일말의 후회도 없이 “다 이루었다”고 당당하게
당신 인생의 마지막 무대를 장식하셨습니다.
분명 육신을 입고 오신 인간임에도 - 어찌 예수님께서는 그토록 후회 없는 삶, -
완전한 삶으로 일관할 수 있으셨겠습니까? - 그 해답을 오늘 본문 40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 요한복음 10장40절
“다시 요단 강 저편 요한이 처음으로 세례 주던 곳에 가사 거기 거하시니”
여기에서 요한이란 세례 요한이요, - 요한이 처음으로 세례 주던 곳이란 요단강을
의미합니다. -그 곳은 주님께서 공생애를 시작 하실 때 -요한으로부터 친히 세례를
받으신 곳이기도 하였습니다.
바로 그곳을 찾아가신 주님께서 - 거기 거하셨음을 - 본문이 밝혀 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거하셨다는 단어는 - 그저 한두 시간 정도가 아닌, - 최소한 며칠 동안 머무셨음을 뜻합니다.
주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직전, - 요한이란 이름의 선지자가 요단강에 나타나 사람들에게 회개할 것을 촉구하면서 -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세례란 - 지나간 모든 죄를 깨끗이 씻음 받음과 동시에, - 바르고 정결한 삶을
살겠다는 고백과 결단의 예식이었습니다. - 말하자면 세례란 - 철저하게 죄인인
인간을 위한 예식입니다.
그런데 그 세례의 현장에 - 공생애를 시작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 곳에 모인 군중들에게 - 구원의 말씀을 선포하시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 죄인이 받는 세례를 받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주님을 알아본 세례 요한은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 자신과 같은 죄인 앞에 무릎을 꿇으시고, -죄인이 받아야 할 세례를 친히 받으신다는 것은 천부당만부당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황급히 주님을 만류하였습니다. [마태복음 3장14절]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그 때 주님께서 요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이와 같이 한다는 것은, -주님께서 죄인인 인간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 앞에 무릎을 꿇으시고서야
의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성자 하나님의 자존심을 - 그처럼 인간 앞에 내려놓지 않고서는 -
더러운 인간을 위해 십자가를 지실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권위를 그와 같이 벗어 던지지 않고는 -추악한 인간을 위해 십자가에 달리실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발아래에 무릎 꿇는 심정이 아니고는 - 인간을 사랑할 수도, - 섬길 수도, -
인간을 위해 돌아가실 수도, - 그리스도의 삶을 완성하실 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인간을 위해 - 인간 앞에 무릎을 꿇으시고, -더러운 죄인이 받는 세례를 친히 받으셨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 그러나 내가 정말 상대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 높은 마음을 가지고는 불가능합니다. - 높은 마음으로는 가식적으로는 사랑할 수는 있어도 - 참된 사랑은 불가능합니다. -내가 낮아질 때에만 가능합니다.
오늘 본문은 - 주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먼저 인간 앞에서 무릎 꿇어 세례 받으시던 그 곳을 찾아가시어 - 며칠 동안 거하셨음을 밝혀 주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 주님께서 단 한 순간도 - 당신의 시간을 헛되이 탕진함이 없이, -
주어진 그리스도의 삶을 - 다 이루실 수 있었던 해답입니다.
주님께서는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시되, - 그러나 처음 자리를 되짚어 확인하시는 데에 전혀 소홀함이 없었습니다. - 인간 앞에 무릎 꿇던 현장으로 되돌아가, 그 때 품었던 마음을 되새김으로, - 끝까지 초지일관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주님께서는 - 단 한 시간도 의미 없이, - 헛되이 낭비치 않으셨습니다.
인간 앞에 무릎 꿇는, 그 첫 마음을 견지함으로 - 섬김과 봉사의 삶을 일관하실 수 있었고, - 죄인 앞에 무릎 꿇는 그 첫 마음을, - 끝까지 지킴으로 죄인을 위해
당신의 목숨을 버리실 수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그 첫 마음을 상실하셨던들 - 그 모든 것은 있을 수 없는 일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처음으로 되돌아가 -처음 품었던 마음을 확인하는 것은 -이래서 중요합니다. 여기서 마음은 육적인 칼디아가 아니라 - 예수님을 알게 하는 누스를 말합니다.
주님을 만남으로 인해 나의 중심이 된 - 순수하고 사심 없는, - 그리고 더러운 욕망으로 오염되지 아니한, -첫 마음의 바탕 위에서만 -낭비 없는 인생, - 바르고 참된 인생, - 후회하지 않을 인생이 세워지는 법입니다.
남편이 아내에게 처음으로 사랑을 고백하는 날, - 그 때 남자의 마음은 여자 앞에 무릎 꿇는 심정일 것입니다.
그 심정으로 - 이 생명 다하도록 오직 당신만을 사랑하고, - 당신만을 위해 살리라 굳게 다짐한 -그 첫 마음을 남자가 잃지 않는다면, -이 세상 어느 여인이 남편으로 인해 잠 못 이루며, 남 몰래 눈물을 흘리겠습니까?
자식이 태어나는 순간, - 이 세상의 부모는 - 모두 자식 앞에 무릎 꿇는 엄숙한
마음이 됩니다. - 그리고는 하나님께서 주신 하나님의 자식을, -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키우리라 굳게 다짐합니다.
부모가 그 첫 마음으로 한평생 자식을 대한다면, - 어찌 자식이 부모 때문에
상처받고 괴로워할 수 있겠습니까?
학업을 마친 청년이 - 사회에 첫발을 내디딜 때의 - 정의로운 마음으로 일생을
살아간다면, - 어찌 이 사회가 - 이토록 총체적으로 부패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인들이 무릎 꿇어 세례 받는 순간 - 겸손하고 거룩한 마음을 상실치 않는다면, -구원의 은총을 깨닫고 - 주님을 좇아 살리라 결심하던 첫 마음을 상실하지 않는 한, 어찌 그리스도인과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지탄의 대상이 될 수 있겠습니까?
인생이란 귀한 시간을, - 더 이상 낭비하지 않기를 원한다면, -인생의 무대에 막이 내리는 순간 바보처럼 살았음을 탄식하지 않으려면, - 이제 우리는 처음 시작하던 첫 자리로 돌아가 처음의 마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 마음을 날마다 새롭게 해야 합니다. - 그 첫 마음으로 날마다 주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주님과 함께 하지 않는다면, - 우리의 첫 마음은 이내 헌 마음으로 오염되고
맙니다. - 모 교회를 섬기시는 - 한 권사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람의 앞에는 많은 길들이 놓여있습니다. - 그 길들은 모두 비슷비슷해서 똑같아
보입니다. - 그러나 그 많은 길들 중에서 옳은 길은 -언제나 한 길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 주님과 함께하는 길입니다. - 저는 30년 전 아이들의 아버지가 천국
가셨을 때, - 내 사랑하는 자식들이 일평생 주님과 함께하는 길을 걷기 원하는
마음으로 남편의 비석에 찬송가 456장을 새겨 넣었습니다.’
주와 같이 길 가는 것, 즐거운 일 아닌가. 우리 주님 걸어가신 발자취를 밟겠네.
한 걸음 한 걸음 주 예수와 함께 날마다, 날마다 우리는 걷겠네.
여러분! 우리 모두 주님을 처음으로 만났던 그 때, - 그 처음으로 돌아가십시다.
그 때의 그 마음으로 - 주님과 함께 - 한 걸음, 한 걸음 다시 시작하십시다.
흘러가는 우리 인생의 시간은 사라지지 않고 - 눈에 보이는 삶의 형체로 남습니다. - 오늘 내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 내일 그 형체가 결정되게 됩니다.
여러분 모두 - 인생의 막이 내릴 때 -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 - 이 노래와는
상관없이 -후회없는 삶을 감사하는 노래를 부르는 주인공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430장 - 주와 같이 길가는 것 - 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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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져 버린 것 같은 그 많은 시간들이, - 실은 나의 삶이란 형체로 지금 고스란히 남아 있음을 깨닫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되돌아보건대 정말 바보처럼 살아왔음을 주님 앞에 고백 드립니다. - 그러나 더 이상 바보처럼 살기를 원치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나의 인생이 끝나는 순간, - 바보처럼 살았음을 한탄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기를 원합니다. - 이제 처음으로 되돌아가, - 처음 마음을 회복케 하여 주시옵소서.
그 처음 마음으로 주님과 한 걸음, 한 걸음 - 진리의 길을 동행하게 해 주시옵소서.
그 처음 마음으로 가족 간을 사랑하며, - 사회의 빛과 소금이 되며,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지속하게 해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눈에 보이는 나의 삶 자체가 -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나의 응답이며,
사랑하는 자녀를 위한 가장 가치로 운 유산이게 해 주시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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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무한하신 사랑과
보혜사 성령님의 감화감동 충만한 역사가
주님 앞에 가졌던 초심을 잊지 않고 살기를 소망하는 주님의 사람들과 비전교회
위에 - 지금으로부터 영원토록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