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사용설명서Ⅱ-열세 번째 이야기]
가상과 현실의 경계를 포개다
–‘지속 가능한 미래’를 위하여
상상력이 낳은 미래 vs바이러스가 당긴 미래 / 이은화
〈아바타〉 2018년 재개봉 포스터
프롤로그-앞당겨 온 미래, ‘메타버스’*의 등장
편안한 적이 없는 지구촌은 여전히 전쟁 중이다. 보이지 않는 존재, 바이러스는 이미 사회의 많은 것을 바꾸고 있고 바꿀 것을 요구한다. 산업경제의 환경과 의료와 과학환경, 교육환경에서 삶의 스타일까지 바꾸는 총제적인 변화도 버거운데, 핵을 놓고 지구의 운명을 저울질하는 전쟁도 진행 중이다. 어느 쪽도 인류에게 우호적이지 않은 변화를 예고하지만 눈여겨볼 지식 습득 여정의 변화다. 인류의 지식 습득의 여정이 바뀐 현실 앞에 선 인류에게 불현듯 맞닥뜨린 바이러스가 앞당긴 미래는, 반길 수만도 없는 일찍 찾아온 미래 ‘메타버스’다. 이미 인터넷 혁명이 가져온 모바일 후유증에 사회의 시름은 충분히 깊다.
익숙한 world wide web(www,)으로 유입된 정보가 모두 지식은 아니다. 진실과 가짜가 섞인 모든 정보 가운데 습득해야 할 지식을 가리기는 쉽지 않다. 오히려 온라인에서 선택하고 집중한 세계에서 성향과 선호도로 쌓은 경험치는 모르는 사이에 합의한 거래였다. 성향과 선호도로 동질성을 획득한 집단이 공유한 것은 집단지성보다는 공동의 경험과 분화를 계속하며 상승시킨 가치였다. 막대한 사용료를 치르면서도 인식하지 못한 거래였다.
인터넷 사용료로 적당한 대가를 치르고 있을까. 공짜로 막대한 정보를 사용하고 공유하는 것 같지만 막대한 대가를 지불했다. 스스로 제공한 개인 정보는 대가이고 효용성이 높은 생각과 선호도로 값을 치렀다. ‘정보와 자료를 무료로 사용한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소비자가 아니라 제품이다’라는 어느 사회학자의 말속에는 ‘메타버스’는 우리의 외연이나 내면의 파악에서 끝나지 않고 끊이지 않는 욕구를 채워 줄 알고리즘과의 거래를 진행하고 있을 뿐이란 심각한 경고가 담겼다. 스스로 실시간으로 지구촌의 정보를 이용하고 있다지만 ‘메타버스’는 우리를 꿰뚫고 우리보다 우리를 더 잘 사용할 줄 안다.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다.
모바일이 만든 후계자인 ‘메타버스’의 시대에 탑승한 인류다. 앞당긴 미래는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첨단을 향해 달릴 것이지만 아날로그의 경험을 기억하는 인간의 몸은 분리되지 않은 채 메타버스의 경험에 빠질 것이다. 아직 초기 형태의 메타버스의 세계를 준비 중인 인류에게 조금 빠르게 주어진 벅찬 과제와 미래다. 그 개척의 선봉에 선 IT 강국 대한민국의 현주소가 자랑스럽다가도 빚어질 혼란에 대처할 준비에 대한 노파심은 거둘 수 없다. 미래를 꿈꾸고 상상했으며 실체를 예고하며 궁금증을 해소했던 선진들의 지혜가 궁금해진다.
철학하는 이들은 호기심이 많다. 무모해 보이는 호기심도 자신의 한계와 가능성을 타진하는 목적도 있을 터였다. 철학자가 사회와의 조율이나 시대정신을 옹호하지 못하고 철학의 일반화를 거부하는 이유는 상식의 틀에 안주할 수 없기 때문이지 사회와 맞서서가 아니다. 보는 것이 다가 아닌 상황을 읽는 분별력과 통으로 읽는 통찰력을 지닌 그들의 기록은 믿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상황을 어떻게 읽었는가를 배우는 것이다. 그래서 생각하는 사람이 등장한 이래 철저하게 진행해야 하는 아날로그적 사고로 빚는 사유思惟가 철학적 상상력의 실체다.
경험으로 쌓은 보편적 사고는 상식으로 시대를 잇고 있지만 그렇다고 보편적 사고가 사회의 갈등을 해결할 만능은 아니다. 철학이 필요하지 않은 시대는 없었지만 때로는 상식이 사회를 저당 잡은 시대도 있었다. 때때로 철학이 보편적 가치와 상충하기도 하는 이유다. 중세를 지탱했던 상식적인 사유들이 이미 오류를 가진 비상식이 되어버렸고 견고한 현대의 상식은 훗날 또 어떤 모습으로 비상식이 될지 모른다. 관습으로 굳어진 시대의 상식에 도전장을 내민 철학자들이었지만 사회의 상식은 그들의 상상력을 거부하거나 그러한 사유를 공허한 사변으로 치부해 철학자들이 시대의 이단아가 되기도 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사물의 본질을 고민하지 않았다면 근대 철학의 아버지로 일컫는 데카르트의 사상적 성취는 어려웠고, 베이컨이 세상을 읽던 프리즘은 일반적이고 편리한 상식의 길을 거부해서 얻어진 철학의 성과였다. 철학자들을 사상가들이라고 격상된 위치에 놓고는 있지만 보편적 상식이 철학자에게 상식이 될 수 없게 만드는 이율배반적인 잣대를 적용하는 이유도 있을 터였다. 철학이 상식적이며 실용적이지 못하다는 일반적인 함의에 드는 의구심이다.
실용적이란 실제로 일어나는 일에 진행에 도움이 되는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선까지를 수용하지만 철학적이란 말은 나아가는 일의 방향과 그 일이 옳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지에 관심이 있다는 의미다. 어떤 일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미 빚어진 일에 대한 고민과, 결과로 인해 미래에 끼치는 영향과 가치까지도 따질 수 있는 사유를 통틀어 판단하고 예단하는 ‘철학’이야말로 실용적인 이 시대의 학문일지 모른다.
학문은 미래지향적이다. 진행방향과 과정이 있을 뿐이지 여정의 끝은 모른다. 그렇게 현재에 의문을 갖고 미래로 시선을 둔 사고는 앞서도 경험은 현실적일 수밖에 없다. 문학은 그 사유의 출구를 상상력으로 열었고, 과학은 실험과 탐구라는 미답의 영역을 두드렸다. 문학에서 그리는 미래는 상상력에서 끝나지 않고 가상공간에서 현실화시켰으며 우주 과학이 보이지 않는 것에 집중하지 않았다면 우주의 지평을 넓히지 못했고 인간에 대한 이해와 연구가 없었다면 지금의 과학 의료기술도 없었다. 그렇게 철학은 모든 분야에서 상상 속 미래를 앞당겼다.
글을 통해 가상공간을 현실로 불러내는 작가들은 사회의 악을 발견하고 그것의 잠재성을 읽어내 작품 속에 투사하고 걸러내는 사회의 레이더 역할을 자처하기도 한다. 학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경고는 ‘지속가능한 미래’를 위해서다. 학자들의 학문적 의구심에서 나온 질문이나 시선에 담긴 비판을 실현이 어려운 형이상학적이고 철학적 질문일 뿐이라고 치부해서는 안 되는 이유는 그 안에 담긴 경고와 경계의 화살은 현실을 겨누고 있기 때문이다.
촘스키*(1928~)의 경고– 시대의 상식에 딴죽을 거는 인류사의 위험한 시도 ‘신자유주의’
구순을 넘긴 노학자 촘스키, 그가 바라보는 세계의 시계는 비관적이고 불투명하다. 먼저 그가 지적하는 위험 수위를 알리는 경고음은 환경에서다. 기후변화가 아닌 기후위기는 최근 그의 연구 가운데서도 중심적인 주제였다. 자본주의 국가들이 지구를 위험한 ‘시간의 저울’에 올려놓으면서도 뒤에서는 탄소 배출을 절감하는 정책을 수립하면서까지 지구의 미래를 망치고 있다고 지구 온난화와 자본주의의 뗄 수 없는 관계를 강하게 비판했다. 학자로서의 그의 지적은 구체적이다.
그는 현재의 인류를 멸망으로 이끌고 있는 인물로 트럼프를 꼽았다. 트럼프의 주장대로 ‘화석연료를 극대화하고 기후 위기를 막기 위한 규제를 줄이는 것’은 위기의 지구에게 ‘사형 영장’이라고 규탄한 노학자의 말에서 다급함이 느껴진다. ‘만약 미래가 파괴되면 다른 어떤 것도 의미가 없게 된다.’는 돌이킬 시간조차 모자라는 미국이 아니라 지구촌이 받아 든 붉은 경고장이다. 촘스키의 사유와 비판은 현재에서 출발하지만 미래를 향한다.
그는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에 대한 우려의 시선보다 미국의 정치적 행위에 비판의 날을 세웠다. 유대인 후손으로 지금의 우크라이나 땅에서 태어난 촘스키는 푸틴의 침공 이유를 뒤틀린 욕심 때문이라고 단순하게 읽어서는 안 된다며 미국의 책임론을 더했다. 20세기에 겪은 몇 차례의 전쟁을 겪은 나라들(이란 과테말라 칠레 베트남 등)에 무기를 공급했던 미국을 지적하며 자유와 민주주의의 진작을 위한 ‘고양된 군사협력’이라는 명분 아래 또다시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공급하는 군사협력을 진행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국제 정세를 바라보는 그의 시각은 조국에게도 날카롭고 거리낌이 없다. 언어학자이면서 진보적인 시선으로 날카로운 사회비평을 해 온 그가 학자로서 신뢰를 받는 배경이다. 상식적인 견해와는 거리를 두서 현실정치에 비판적인 시선을 거두지 않는, 상식적인 시대정신보다 한 발 앞선 시대를 꿰뚫어 보는 철학적인 견해는 오랜 시간 시대의 요구를 읽는 학자로서도 독보적이다.
촘스키의 현실 정치 비판의 시작은 베트남전쟁이 한창이던 1960년대 말부터였다. 미국의 ‘롤링선더 작전’*으로 북베트남을 집중 폭격할 당시, 촘스키는 〈불법적 정부에 저항하라(1966)〉, 〈지식인의 책무(1967)〉 등의 글을 통해 미국의 전쟁 수행을 통렬하게 비난했다. 이를 계기로 베트남 전쟁의 반전운동이 본격화되었고, 이후 촘스키는 1969년에 첫 정치서적 《미국의 힘과 새 지배계급(American Power and the New Mandarins)》을 출간하며 조국이자 자유 진영의 본거지인 미국을 향해 직격탄을 날렸다. 그의 저항은 글로 끝나지 않았고, 1976년에 워싱턴에서 벌어진 대규모 반전시위에 참여했다가 투옥되기도 했다. 소외된 자들을 향한 시선을 거두지 않고 지속적으로 차갑고도 섬뜩하지만 석학의 경고는 이어진다. 그의 사상적 배경과 성장과정은 투쟁적 사유와 연결고리를 찾기 힘들다.
촘스키
촘스키의 일생을 보면 유대인으로서 핍박이나 고난의 시간을 비켜서 있다.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17세에 아이비리그에 들어가 순탄한 성장과 성공일변도의 안정적인 삶을 산 그의 시선과 목소리는 의외로 거친 광야를 향하고 소외된 이들을 향했다.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지닌 그의 종교적인 영향력이 없지 않았겠지만 민족이 속한 역사를 알기에 세계가 하나의 공동체로서 나아가야 할 방향으로 지속가능한 미래를 제시하는 촘스키는 ‘미국의 양심’으로 불린다. 그에게 쏟아지는 명예로운 찬사와 존경의 의의가 그의 학문적 성과와 이룬 업적에 머물지 않는 이유가 시대를 향한 날 선 비판을 쉬지 않으면서도 미래를 걱정하는 양심 때문이 아닐까. 그의 경계와 비판 이전에 작품 속 ‘메타버스’에서 제국을 비판한 작가의 경고 수위도 만만치 않았다.
조나단 스위프트(1667~1745)의 투창, 《걸리버 여행기》–영국을 흔들고 인류를 비판하다
중요하지만 누구나 읽지 않는 책을 ‘고전’이라고 부른다는 농담은 농담 아닌 진담이 될 추세다. 고전이 시대를 초월해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다는 말에 전적인 동의는 어렵지만 특정한 시기의 시대정신을 담아낸 작품이 ‘고전’이 되는 이유는 당대의 가치가 뛰어나거나 불변해서가 아니라 시대마다 읽히는 방법과 해석의 다양성을 제공하기 때문일 것이다.
영국의 소설가이자 성직자인 특별한 이력의 조나단 스위프트가 작가로서의 천재성이 드러낸 것은 뛰어난 작품《지어낸 이야기》에서였다. 그는 성직자이면서 한때 정치에 뜻을 두었던 정치가였던 경험으로 풍자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사회가 절대적으로 믿는 가치를 흔드는 일은 많은 저항과 동요가 따르기 때문에 우의적으로 쓴 방법이 풍자라고 밝힌 조나단 스위프트다. 사회에 대한 감시망이나 안테나가 없다면 보이지 않는 어두운 부분과 악의적으로 숨긴 부분을 찾을 수 없음을 인지하는 작가들이 쓰는 풍자소설이다. 그의 풍자 대상은 영국에서 그치지 않고 인류로 확장된다.
그를 대표하는 걸작 《걸리버 여행기 1726년》는 원본과 번역된 이야기와 차이가 많이 난다. 발표 당시에 신랄한 현실 비판이 문제 되어 출판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많은 이들이 이야기 속에서 영국의 현실을 읽었고 세계를 향한 비판적인 시선에서 조나단 스위프트의 비전을 보았다. 그가 펼친 가상공간에서 다루어지는 풍자의 대상은 영국에서 출발하지만 인간에 대한 비판으로 나아간다. 영국의 비판에 그치지 않고 인류 전체를 향한 그의 비전 때문에 인류를 풍자한 최초의 작가라는 평가도 받는다. 그의 말을 빌리면 ‘비전이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기술’이라고 했다. 그에게 숨어있는 믿음이 비전으로 드러난 명작이 《걸리버 여행기》이다.
지배계급의 광기와 이성의 충돌로 아픈 근대는 어느 한 나라의 문제만은 아니어서 투창과 같은 붓으로 근대를 고발하는 작가들은 나라마다 있었다. 과거와 현재가, 낡은 것과 새로운 것은 대립과 조율만으로 융합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신석기시대가 오면 구석기시대를 버린 것이 아니라 덮어써야 했다. 이전 시대의 철학적 동력이 살아있어야 다른 시대정신을 담을 수 있는 이치다. 하지만 구시대와 신시대의 충돌은 문명과 야만으로 규정된 문화의 충돌로 보다 많은 문화를 역사 속에서 지워버렸고, 반동과 계몽으로 대립하는 계층 간의 충돌은 새로운 상위 계급을 만들기에 급급했다. 그렇게 근대의 정점에 섰던 영국이 겪는 문제의 종합편 《걸리버 여행기》는 세상을 담았다. 여행은 걸리버를 따라 상상의 나라로 떠나야 한다.
제국의 현실을 고발한 《걸리버 여행기》 속으로 –상상의 나라 속에서 찾은 불편한 이름 ‘야후’
소인국(릴리퍼트)에 도착한 걸리버는 사소한 일로 대립한 두 나라의 전쟁에 참여한다. 두 소인국은 계란의 넓은 쪽을 깨는 관습과 좁은 쪽을 깨는 관습을 서로에게 강요한다. 가운데를 깨면 되지 않느냐는 걸리버의 제안은 양쪽 왕국 모두에게 거부당한다. 영화나 만화로 각색된 《걸리버 여행기》는 1부 이야기인 소인국 이야기가 주된 내용을 이루다 보니 여행기의 전체 내용처럼 알려졌다. 등장인물들을 통해 인간의 보편적 편견인 아집과 단체로 행하는 이기적인 관념인 독선에 대한 묘사는 작가의 시선이 인간에 대해 우호적이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면서도 걸리버의 시선을 통해 서로 타협할 여지는 남겨 두었다. 그들이 향할 미래가 통합이거나 열린 미래이기보다 ‘지속 가능한 미래’라는 가능성을 열어 준 것이다. 이것이 작가가 발견한 낯선 미래의 땅(메타버스)에서 인류의 생존전략방향이다.
영화로도 제작된 《걸리버 여행기》는 많은 부분을 숨기고 삭제했지만 무삭제판 원본은 동화와 달리 당시 출판 편집자가 일부 내용을 수정하면서 저자인 스위프트와 싸울 정도의 현실비판이 담긴 걸리버가 겪은 표류기 형식의 4부로 구성된 작품이다. 작가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였던 영국의 비판으로 채운 3부는 걸리버가 학자들의 나라에 간 이야기로 구성되어있다, 인간이 지금까지 쌓아 올린 문명과 지적 성취라는 것이 무의미하고 보잘것없는지를 풍자한다. 그중에서도 하늘에 떠 있는 섬 라퓨타는 앞선 문명을 이용해서 다른 인간들을 지배하는 제국의 상징이다. 라퓨타의 지상 식민지들 중 하나인 린달리노(Lindalino)가 항거해서 자치를 얻어내는 과정은 당시 영국의 지배를 벗어나고자 항거했던 식민지의 시선을 적극적으로 그림으로서 사회가 힘의 논리나 경제의 논리로 진행되지 않음도 보여준다. 상상력이 펼친 환상적인 여행 이야기임에도 당시로서는 제국시대의 질서에 위배되는 위험한 생각일 수도 있었고 기득권을 누리는 정치인들에게는 반갑지 않은 반체제 작품이었다.
생소한 거인의 나라인 브롭딩낵, 하늘을 나는 섬인 라퓨타, 말의 나라 후이넘스 랜드, 소인국인 릴리퍼트를 통해서 당시 영국의 두 정당인 토리당과 휘그당이 민중들은 무시한 채 권력 투쟁을 벌이던 영국 정치계와 당시의 방만했던 과학계를 비평의 대상으로 삼으며 팽창하고 있던 영국을 풍자했다. 정치인과 학자를 고발하고 비난하던 스위프트는 옥에 갇힐 각오로 임할 인쇄업자에게 원고를 맡기겠다는 절박한 마음으로 출판했다고 한다.
조나단 스위프트
작품의 탄생까지 작가의 삶을 재단했던 작품은 서서히 잊히고 동화의 한 부분으로 어린이들의 상상력 고취를 위한 소인국과 거인국 부분이 알려져 있는 내용의 대부분인 작품에서 눈여겨볼 소설의 주제는 4부에 담겨있다. 걸리버가 들린 곳은 지혜로운 말(馬)들이 지배하는 나라로, 그곳에서는 ‘야후’로 불리는 인간들이 말들의 노예로 생활한다. 이상적인 덕성을 갖춘 말들의 눈을 통해 드러난 추악한 인간의 면모는 바로 현실의 인간 모습이다. 잘 알려진 포털사이트의 이름 ‘야후’는 말들이 인간을 낮춰 부른 이름이다. 풍자로 얻은 이름이지만 그 ‘메타버스’에 예속된 인류의 이름이란 중의성이 짙은 불편한 이름이다. 그 신세계는 다른 이들의 지배를 받는 유니버스라는 점에서 일찍 등장한 ‘메타버스’이다.
다시 읽는 《걸리버 여행기》가 새삼스런 상상력으로 다가오지 않겠지만 작가의 붓이 지적한 인류의 현실을 직시하며 인간에 대한 애정으로 작가의 고민에 동참해 볼 고전으로 손색은 없을 듯하다. 현실에 비판의 시선을 더한다 해도 도래할 미래가 아름답지만은 않음을 알지만 품는 희망은 비전에서 와야 하지 않을까. 같은 공간을 지나며 이상과 현실의 경계를 넘나들며 존재의 실체를 고민했던 진실게임은 조선에도 있었다.
진실 게임의 진화–실존의 고민과 삶의 의미를 찾아 떠난 여행 《구운몽》
조선시대에 현실과 꿈의 공간을 넘나들며 어느 쪽도 확신할 수 없는 존재에 대한 진실게임에 접근한 작품이 서포 김만중 (1637~1692)의 《구운몽》이다. 서포가 당쟁에 휘말려 유배를 떠나 홀로 남겨진 어머니를 위해 하룻밤에 지었다는 《구운몽》은 효자로서의 김만중을 부각하기도 하지만 서포는 풍간 소설 《사씨남정기》로도 유명한 글쟁이다. 자기가 잘하는 것으로 소통할 줄 알았던 서포는 시대를 어떻게 비판하고 삶을 어떻게 고민해야 하는지를 안 시대의 철학자이자 작가였다. 실존과 욕망의 깊은 고민에 당대의 종교가 투영된 것은 시대의 정신을 통합하며 불교에서 답을 찾으려고 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작품 《구운몽》에는 어머니에게 전하고 싶었던 위로와 본인이 찾고자 했던 실존과 실체의 고민을 다룬다. 성진의 고민은 양소유를 통해서도 해소되지 못한 고민이 심화되면서 끝나는 열린 서사는 덧없는 인생무상이 주제이지만 꿈과 현실을 오가는 이중 서사구조로 이상과 현실의 경계를 허문 판타지를 제공한다, 가상과 현실을 포개며 고민한 사유는 실존의 실체에 대한 의문이며 구도자와 보편적 인간으로서의 고민이 담긴 주제였지만 당시에 많은 이들에게 읽혔던 이유가 무거운 철학 주제보다 흥미로운 극의 전개가 주는 판타지는 아니었을까.
필자가 주목하는 《구운몽》의 재미는 현실보다 화려한 꿈속의 삶에서 온다. 양소유의 탄탄대로를 달리는 출세 과정은 당시의 삶의 궁극적 목적이었던 입신양명의 배경이었고 그가 지닌 지위와 갖춘 환경은 성공한 인생을 그리기 위한 도구로 보인다. 양소유는 전 생애를 통해 두 명의 처와 여섯 명의 첩을 거느리는데, 모두 다른 매력을 가진 여성들이다. 양소유의 활발한 애정 행각으로 인해 《구운몽》은 애정소설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국문학사를 통틀어 뛰어난 환몽 소설이다. 꿈속이지만 추방당한 양소유가 인간계에서 이룬 잠재된 인간의 욕망과 현실적으로 이루고자 하는 욕구를 대리 만족한 카타르시스의 공간이다.
성진이 기억을 더듬어보니 처음에 스승의 꾸지람을 듣고 풍도로 잡혀갔다가 인간 세상에 환생해 양씨 집 아들로 태어나고 일찍이 장원급제하여 한림학사의 관직에 올랐으며, 나가면 삼군의 장수요 들어오면 백관을 총괄했다. 그러고는 상소하여 물러나기를 청하여 모든 일을 떠나 한가롭게 지내면서 두 부인, 여섯 낭자와 함께 노래하고 춤추는 것을 보고 거문고 타는 것을 들으면서 단란하게 술을 즐겼다. …(중략)… 대사가 큰 소리로 물었다. ‘성진아, 인간 세상의 재미가 어떻더냐?’ 성진이 머리를 조아리고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 ‘크게 깨달았습니다. 제자가 어리석어 마음을 바르게 먹지 못했으나, 스스로 지은 죄라 누구를 원망하며 누구를 탓하겠습니까. 응당 흠 많은 세상을 탓하면서 영원히 윤회하는 재앙을 받았을 텐데, 스승님께서 하룻밤의 꿈을 통해 제 마음을 깨닫게 하셨으니, 스승님의 큰 은덕은 비록 천만 겁이 지나더라도 갚을 길이 없습니다.’
‘네가 흥을 타고 갔다가 네 흥이 다해서 돌아왔는데 내가 무슨 관여를 했다는 말이냐? 또 네가 제자가 아직 인간 세상의 윤회하는 일을 꿈으로 꾸었다고 하는데 이것은 네가 아직도 꿈과 인간 세상을 나누어서 둘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너는 아직 꿈을 깨지 못했다. 장자가 꿈에 나비가 되었다가 나비가 변하여 장자가 되었다고 하니, 나비가 꿈에 장자가 된 것인가, 장자가 꿈에 나비가 된 것인가는 결국 구별할 수가 없었다. 어떤 일이 꿈이고 어떤 일이 진짜인 줄 알겠느냐, 지금 네가 성진을 네 몸으로 생각하고 꿈을 네 몸이 꾼 꿈으로 생각하니, 너도 몸과 꿈을 하나로 생각지 않는구나. 성진과 양소유, 누가 꿈이며 누가 꿈이 아니냐?’ -《구운몽》 중에서
《구운몽》에서 주인공 성진이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뜻을 꿈속에서 양소유는 영웅의 일생을 실현하지만 인생무상을 느낀 후 다시 현실로 돌아와 보니 오히혀 허무한 공간이 꿈속이었음을 깨닫는다. 영웅 양소유의 투쟁 이야기보다 여인들과의 결합 이야기가 비중을 차지하는 꿈속에서 이룬 욕망의 성취는 허무함을 더하는 요소가 되며 꿈에서 깨어나서도 고민이 한층 깊어지는 결말은 다른 몽유 소설과 영웅소설에서 볼 수 없는 신선한 구조다.
서포 김만중
제도와 규율에서 자유롭지 못한 조선 시대의 여성들에게 《구운몽》 속의 여덟 여자가 보여 주는 자주적이고 당당한 모습은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묘사이었을 것이다. 남성이 주인공인 것은 맞으나 개성이 뚜렷한 매력이 있는 8명의 여성들의 묘사로 뜻밖의 여성 서사가 되었고 윤리에 얽매이거나 자신의 속마음을 억압하지 않는 이들은 한 집에서 사는 동안 함께 시를 짓고, 해석하고, 서로 필법을 자랑하며 존경하는 사이로 묘사된다. 현실에서 꿈으로 다시 현실로 시공간을 뛰어넘는 구성에 뛰어난 배경 묘사와 인물의 심리를 세밀한 묘사와 문체로 흥미와 사상적 깊이를 더한 문학성과 작품성을 동시에 지닌 폭넓은 독자들을 끌어들인 작품이 되었다.
구도자 성진으로 시작된 이야기는 양소유가 등장하는 꿈에서도 한시적으로 실현 가능한 무대에서 욕망과 목적을 이루고자 하는 삶의 전형은 바뀌지 않지만 여전히 불완전한 구조 안에서 자유와 평등이 양립할 수 있는 세계가 펼쳐진다. 다른 개인과 다른 개인의 조화가 답이었다. 개인과 개인의 조화는 차별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차이에서 오고 이것이 깨지면 인류를 지탱해 온 휴머니즘은 붕괴될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양소유를 중심으로 서술한 꿈 이야기는 여성의 차별 없는 우애를 보여 준 이상적인 공간이었다.
당대를 공유한 조선의 여인들이 이 소설에서나마 허락된 작은 우정과 자유를 통한 위로도 받을 것이었다. 김만중은 유배지에 갇힌 몸이었지만 그 시대 제한적이지만 허락된 영역(꿈) 안에서 제한적이지만 여성의 일탈(소망)과 자유로 어머니를 위로하고 싶었을지 모를 일이다. 가상의 공간이라기보다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이상이 실현된 ‘메타버스’의 공간이기에 가능했다. 성진이 돌아가고픈 《구운몽》은 의 공간은 어디쯤일까. 성진에게 혼란의 주체였던 두 번째 자아의 실체가 환상적인 모습으로 등장하기까지 오랫동안 작가들은 붓에 미래를 걸었다.
제2의 자아 ‘아바타’의 등장-진짜보다 진짜 같은 가짜 《아바타》
제2의 성공적인 자아의 등장만으로도 충격을 안겼던 영화 〈아바타〉는 2009년 개봉하면서부터 폭발적인 기록을 갱신했다. 지구촌에게 경이로운 경험을 선사했던 제임스 카메론 감독(1954~)은 스토리에서부터 무한한 상상력을 자극했다. 영화〈아바타〉는 자신보다 더 자신 같은 ‘아바타’의 등장과 환상적인 공간과 신비스러운 시각적인 효과에 힘입어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주며 세계가 열광한 세기의 영화의 반열에 올랐다. 오래전 화제작 ‘타이타닉’(1997년)의 감독인 제임스 카메론이 14년 동안 준비한 영화, 〈아바타 (2009년)〉의 이야기다.
때는 2150년, 다리를 쓰지 못하는 퇴역군인 제이크(샘 워싱 턴)에게 주어진 특별임무가 주어진다. 지구의 에너지 고갈 문제 해결을 위해 신비한 판도라 행성의 토착민인 나비족과 자신의 DNA를 결합한 새로운 생명체로 나비족에 침투하여 자원의 획득을 돕는 것이었다. 제이크는 ‘아바타 프로그램’을 통해 현실에서 갖지 못한 완벽한 몸과 기술을 갖춘 자유로운 존재로 신비로운 판도라 행성에서 환상적인 체험을 한다. 판도리 행성의 침투에 성공한 후 위기에 처한 자신을 도운 나비족의 아름다운 여인인 네이티리(조 샐다나)와 교감을 나누며 사랑에 빠지게 되면서 지구를 위한 임무수행이 아닌 나비족을 도와 지구와의 전쟁을 치르게 된다. 눈이 현란한 신비로운 영상만큼 아름다운 명분에 응원했던 사랑이야기다. 공멸이 아닌 상생이었다.
당시 VR사용자에게 얼마만큼의 상호작용을 주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는 감독의 인터뷰는 VR로 영상을 경험한 이들이 호소했던 신체적 이상증세도 보고되었던 신기술의 오류였다. 좀 더 익숙하게 사용할 수 있는 자연스러운 사용자 경험과 환경은 시간이 필요했던 VR 기술이 상용화되는 데는 5년 정도가 걸릴 것이라는 예측이 그때 전문가들이 내린 진단이었다. 이제 13년 만에 〈아바다 2. 2022. 12〉의 등장을 예고한 카메론 감독은 그가 고민했던 부분에 대한 답을 어떻게 제시할 지보다 감독은 어벤저스 시리즈의 기록을 갱신에 대한 자신감으로 영화에 대한 성공을 예견했다. 이미 13년 전의 작품으로도 3D, 4D 영화에 버금가는 기술력을 인정받은 영화 〈아바타〉의 열기를 어떻게 이을 것인지 후폭풍이 궁금하다.
제임스 카메룬 감독
제이크가 사랑했던 행성 판도라는 《구운몽》의 구도자 성진이 양소유의 몸으로 모든 것을 이룬 꿈속의 공간과 닮았다. 이질감 없이 받아들이는 다른 차원의 경험이 그들에게 어색하지 않다는 점도 다가올 미래를 대처하는 우리의 모습이다. 하지만 성진에게는 공간 선택의 여지가 주어지지 않는 한계였지만 제이크는 자신의 선택을 믿고 감행할 수도, 포기할 수도 있는 공간의 한계를 극복했다는 점에서 차이점은 드러난다.
행성 판도라는 인간이 살기 힘든 독성이 있는 대기를 가진 금기의 공간으로 묘사되지만 이미 지구에서 행성의 진입 문제를 극복 가능한 ‘아바타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이야기의 현실성은 지구의 문제가 반영된 생태문제와 에너지 문제에서 확인된다. 서포 김만중이 종교 안에서 짚었던 인간 실존의 문제는 여전히 해결하지 못했지만 〈아바타〉에서는 인류 미래를 향한 다양한 가능성 가운데 하나를 제시하면서 인류의 미래를 향한 프로그램은 진일보했다. 영화에서 보여주듯 목표지향적인 무모한 도전이 답이 아니라 ‘지속 가능한 미래’에 대한 도전이어야 한다는 점을 분명해졌다. 머뭇거릴 여유를 주지 않는 인류의 시계는 빠르게 흐른다.
이질적인 세계를 이해하게 만든 영화 〈아바타〉는 이미 다른 세계의 존재처럼 자신보다 더 자신을 닮은 ‘아바타’란 존재를 신뢰하게 만들었고 사회는 ‘아바타’ 열풍에 빠졌다. 고유명사가 되어버린 ‘아바타’는 생명력을 얻었고 하나의 현상이 아니라 무한한 증강현실의 공간 ‘메타버스’의 주인공이 되었다. 실제로 인류를 강타했던 그 후폭풍의 연장선상에서 〈아바타 2. (2022. 12)〉의 예고에 관심은 뜨겁다.
이제 눈앞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질 메타버스의 공간은 실체를 드러내고 실제보다 더 현실적인 인간의 모든 생활을 재현하고 장악하고 있다. 앞으로 메타버스가 담당할 영역은 인류의 상상력을 초월하고 그 영향력은 막강할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시대를 뛰어넘어 이월된 공간은 이미 오래전부터 존재했고 시대마다 예고된 ‘메타버스’의 힘은 강해지고 있다. 이대로 괜찮을까.
‘메타버스’의 명암-철학으로 추구하는 환호와 반성의 시선
SF소설 《스노우 크래쉬》(1992. 닐 스티븐슨)에서 '메타버스'라는 용어와 초기 개념의 등장 이후, 가상공간에서도 현실 세계와 같은 생활의 모든 분야가 구현되는 플랫폼이라는 의미로 확장되었다. 우리에게 익숙한 VR, AR 등이 포함된 메타버스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가상현실에 대한 이해가 먼저다. 현실의 지구공간의 확장 기능과 디지털 환경인 가상공간의 융합인 ‘메타버스’의 등장으로 가상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해졌다. 발달한 가상현실과 증강현실 기술은 차세대 인터넷 시대를 주도할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떠오르면서 인간의 모든 활동영역으로 빠르게 확장 중인 매력적인 공간으로 인류는 빨리듯 흡수되었다.
‘메타버스’에서는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장착한 멋진 아바타가 자신을 대신하여 소통하고, 시간과 장소의 제약 없이 무엇이든 경험할 수 있으며, 원하는 사람끼리 모여 이상적인 세상을 직접 만드는 창의적 인물도 될 수 있는 유비쿼터스*의 공간이다. 무엇을 상상하든 상상 그 이상의 것을 보여주는 신세계로 불리는 가상공간은 자신의 완성과 욕구와 만족을 채우는 ‘메타버스’에서 가능한 긍정적인 효과다. 이제 그 핵심적인 요소에 대한 이해와 겪는 변화에 대한 예측을 시작해야 한다.
교육이 중요한 ‘메타버스’의 세계다. 미래 사회의 키워드로 떠오른 ‘메타버스’의 정의가 정확히 무엇이고 실제로 어떤 것이 가능한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노력 중이다. 많은 미래학자들이 메타버스의 영향을 인터넷의 영향에 견주며 이를 두고 상업적 논리로 뛰어난 마케팅 전략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미래 세상에서 구축될 세계의 한 축이 될 거라고 예상한다. 어느 전망도 틀리지도 않지만 모두 옳다고 할 수도 없다. ‘메타버스’는 거센 힘으로 인류를 끌고 가겠지만 새로운 세상에서 적절한 적응과 올바른 응대는 준비되고 있을까라는 의구심은 깊다.
이미 ‘메타버스’에서 활성화된 계정과 아이템은 돈벌이 수단이자 범죄 도구로 악용되는 비관적인 사례는 놀랄 일이 아니다. 자본에 의한 경험치가 가치가 되는 이 거래에서 빈번하게 거래사기도 발생한다. 사이버 폭력과 범죄행위는 가상세계를 넘어 현실에까지 영향력을 끼쳐 법적 제재로도 제어하기 어려운 수준이다. 법은 늘 사회문제를 앞서지 못하기 때문이다.
신기술의 도입 때마다 반복되는 인간에 대한 윤리 문제다. 과학과 의학에서 대두된 윤리문제는 영역에 관계없이 심각하다. 발달하는 의학과 과학의 기술이 인류의 편리와 안녕과는 거리가 생기고 신기술은 경제적인 성과에 주목하기 시작하면서 주식시장이라는 숫자로 가치를 키우며 경제 사회에 공룡이 되었다. 가상공간의 경제규모는 표현되는 숫자가 무의미해진 가운데 기업윤리의 부재는 더 큰 사회문제로 비화되지만 무너지는 윤리의식을 법으로 제어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윤리와 도덕의 필요성은 오래전부터 도덕 철학으로 계보를 잇고 있지만 문제는 끊이지 않았다.
신기술을 활용하면서 더 편리한 삶과, 경제적 획득을 위한 더 많은 기회가 생기지만 동시에 그동안 함께 억눌렸던 내적 욕구의 분출의 결과는 긍정적이지 않다는 데서 문제는 시작된다.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한 신기술을 도입하기 전 기술의 윤리적 허점에 대해 논의해야 하지만 ‘얼마나 빨리 발전해서 얼마나 많은 이익과 성과를 거두었느냐’에만 집중한 결과는 내용이 생산적이고 윤리적인지는 채 점검하지 못했다. 여전히 ‘메타버스’ 범죄가 발생하지만 그것에 대한 경각심이 적은 이유다. 사실이 진실이 아니라는 현실에 실망할 필요도 없지만 현실에 대한 비판과 지성의 반성이 없이는 ‘지속가능한 미래’는 없다. 어느 시대나 인간의 욕구와 욕망의 억압의 결과를 정확하게 예측하기 어려워도 제어할 수 있는 장치로서의 도덕적인 양심의 필요성이 강조되어왔다.
사피엔스 사피엔스의 다양한 활동과 관심사의 기초가 되는 상상력이라는 자유로운 사유를 추동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철학의 도움이 필요하다. 예부터 일정한 종교적 전통에 참여하고 전통의 중요한 요소를 당연하게 받아들이기도 하면서 인류의 사유와 사고를 재단해 온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철학의 활용 사례다. 정치적 종교의 폐해와 인류와 종교가 얽힌 지난한 역사를 간과할 수도 없지만 인류의 정신적인 기저에서 ‘신과 함께’하는 정서도 배제할 수 없다. 양심에 따른 이타적이고 정직한 삶과 사랑을 베푸는 삶이라는 공동의 궁극의 목표가 인류가 지향하는 최고의 가치이며, 이성으로 양심과 가치의 의미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지성이 철학이다. 그 철학을 지속적으로 이어왔던 선진들을 도덕철학자라 일컫는다.
플라톤과 칸트를 비롯해 아리스토텔레스와 데카르트의 발자취를 좇아 철학자라고 부르고 여전히 인류가 따르고 있다. 그들의 비판적이고 의심하는 힘이 더해지면서 시대의 상식은 새로운 상식의 세계로 나아갔다. 그러한 감각이 위축되거나 제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상황은 인류의 최악의 재앙이 될 수도 있다. 철학자들의 리얼리즘과 미래를 상정하는 상상의 공간인 메타버스의 경계에서 ‘지속적인 미래’는 만나 질까.
현실적인 대책은 사회 결정권자인 기성세대의 변화가 먼저다. ‘메타버스’를 이해하고 배우면서 문제에 대처하는 법을 알려줘야 한다. 단순히 메타버스를 활용할 줄 아는 디지털 역량뿐만 아니라 그 안에서 벌어질 수 있는 윤리적 문제까지 고민하는 디지털 윤리 역량을 길러야 하는 인문학적 소양도 필요한 일이다. 개인이 사회의 일원이 아니라 개인이 모여 이루는 사회다. 최소한의 규제법만으로 힘든 쉽지 않은 영역이라는 이유로 머뭇거리는 사이에도 ‘메타버스 시대’의 경고 수위는 올라간다. 빠르지 않다. 안타깝게도 옛날의 진실게임으로 즐기던 신세계의 맛을 알아버린 돌이킬 수 없는 세대는 ‘메타버스’에 진입했다.
에필로그-‘사피엔스 사피엔스’와 ‘아바타’의 경계에서 ‘메타버스’를 준비하는 자세
한 가지씩 궁금해지는 것이 는다는 사실이 이제는 조금 반갑다. 감각을 초월해서 보이지 않던 세계와 경험으로 상상할 수 없었던 공간이 궁금해졌다는 사실은 이 시대의 상식이 확장될 기회와 시간이 맞닿아 있음도 보여준다. 그럼에도 필자는 철학에 빠져 즐겨보자고 다른 이들을 설득해야 하는 하는 비효율적이고 비생산적인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게 내가 알고 있는 익숙한 것들과의 결별은 철학이 동반자로 나를 선택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상식과의 소통을 끊겠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알고 있던 것들이 한계를 가진 얕은 지식이라는 사실을 알아가는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싶었다.
우리가 문학과 철학으로 학습하는 역사다. 주류의 시각으로 기록되고 학습된 역사는 ‘우리의 역사는 찬란했다’라며 추상적인 개념으로 무장한 자부심을 고양시키는 과목이 되기도 하지만 역사는 현재 진행형인 지각 변동이 큰 역동적인 지적 활동이다. 진실에 다가가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이 필요한 역사에서 주류의 기록보다 상황에 대처한 비주류의 이해와 해석은 철학적 사유에서 비롯된다.
가상공간이 갖는 비현실성은 상상력을 담보로 한다고 믿었던 시대를 어리석게만 보았다면 인류의 뛰어난 사상적 배경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비관적인 현실을 직시하지 않았다면 과학과 의학이라는 세계는 존재할 수 없었다. 실용적이고 생산적인 영역의 최고봉인 과학이 철학에서 비롯되었고 문학의 주제가 철학을 담고 있다는 데서 인간 존엄과 인간성 회복에 목적을 둔 학문이 철학임에랴. 그래서 보이지 않는 미래도 철학이 답이다. 그렇다면 무의식적으로 접하는 철학도 인류에게 ‘메타버스’로 실어 나를 도구다.
다시 인류는 시험대 위에 올랐다. 모두의 이상과 꿈을 실현해 줄 ‘메타버스’에 탑승한 이들에게 경계가 없는 지구촌이다. 아직 온전한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신세계는 많은 것들을 바꾸고 새로운 질서를 요구하고 있다.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고 원하는 것을 다 얻을 수 있는 세계를 추구하는 질서의 핵심은 윤리적인 양심과 배려에 있다. 실제로 다 경험하지 못한 ‘메타버스’가 더 잔인하고 폭압적인 힘이 난무할 수도 있는 난장판이 될 여지는 충분하다. 그래서 중요해지는 세계관은 이타적 양심과 윤리적인 도덕에서 와야 한다.
여전히 변화의 가능성은 양심과 도덕적인 윤리다. 사회와 세계와의 조화는 개인과 개인의 조화에서 시작해야 한다. 그것을 실행할 키워드가 종교라는 단어의 틀은 썼지만 예부터 인류가 고민했던 인간 사이의 예의는 진부하지만 사랑으로 배려하는 우애에서 오지 않았을까. 모든 종교가 ‘사랑’으로 완성되는 대의명분을 갖는 이유는 사람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신이 가진 사랑의 속성은 충분하고 그 사랑을 표현할 대상으로 인류를 선택했다는 생각이다.
르네상스에서 시작된 인간의 대한 각성이, 올바르지 못한 종교의 부패가 도화선임을 알기에 명분을 위한 맹목적인 변질된 사유를 믿음이라고 포장하지는 않는다. 인간 지성의 본산인 철학의 근거가 종교의 근원적 접근이었던 것을 기억한다면 진지한 문제에 대한 심각한 사고의 과정은 필수다. 모든 상황이 진지하고 무거울 수는 없지만 현재 벌어지는 현실적인 문제에 깊이 개입된 현상들에 주목하다 보면 질문은 자연스럽다. 그렇게 답을 모색하는 질문은 현실의 삶에서 시작하지만 이상과 희망의 근거는 막연한 희망적 미래가 아니라 ‘지속 가능한 미래’를 위한 철학에서 찾아야 한다.
보이지 않지만 보이는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가상공간이야말로 잠재된 억압과 욕망의 제어장치가 필요하다. 이미 인간의 본성을 시험하고 있는 ‘메타버스’ 공간에서 오가는 실체 없는 코인이 빚은 경제의 여파는 혼란 속에 자본주의의 근간을 흔들고, 본인임을 증명하는 것도 실물만으로 부족한 시대다. 실존하는 자신보다 중요한 제2의 자아가 익명성까지 장착한 ‘아바타’로 숨어버린 ‘메타버스’에서 지향할 가치는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서로를 배려하고 존중하며 지켜야 할 도덕과 양심은 더욱 강조될 것은 분명해 보인다. 훈련이나 학습으로 한계가 있는 인성에 대한 자각은 종교의 힘을 빌리지 않고는 형이상학적 염원으로 끝날 수 있다. 르네상스가 인간 존재의 부활이었다면 무너져가는 인간의 존엄성과 경제의 가치로 판단하는 가치 기준의 하락을 막을 희망도 철학이 펼쳤던 도덕과 양심을 기반으로 인간에 대한 이해와 자각에서 오는 통증이 있어도 ‘지속가능한 미래를 향한 위로’여야 한다. 그렇다면 어느 때보다 불안한 시간을 통과 중인 세계를 향한 ‘지금도 충분히 괜찮다’는 위로는 무기력해져야 하지 않을까.
*참고 각주:
1. 메타버스-가상과 초월을 의미하는 `메타(meta)`와 세계·우주를 뜻하는 `유니버스(universe)`의 합성어로 가상현실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가 사회·경제적 활동까지 이뤄지는 온라인 공간을 총칭한다.
2. 촘스키-미국의 언어학자, 사회비평가. 언어학 분야의 혁명적인 이론인 변형생성문법의 창시자 가운데 한 사람.
3. 롤링선더 작전-베트남 전쟁 중 미국 공군과 남베트남 공군에 의해 1965년 3월 2일부터 1968년 11월 2일까지 북베트남에 가해진 융단폭격 작전.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냉전 중 벌어진 폭격 가운데 가장 막강한 화력을 퍼부은 폭격으로 막대한 민간인 희생자를 발생시킨 전략적인 실패로 귀결된 작전.
4. 풍간 소설-완곡한 표현으로 잘못을 고치도록 권하는 소설을 의미
5. 유비쿼터스-물이나 공기처럼 '언제, 어디에나 존재한다.'라는 뜻의 라틴어 모든 사물을 네트워크로 연결하여 시간과 장소에 관계없이 다양하게 이용할 수 있게 하는 기술로, 1988년 미국의 마크 와이저(Mark Weiser)가 '유비쿼터스 컴퓨팅'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처음으로 등장하였음.
첫댓글 매달 연재되는 [역사사용설명서] 중에서
특히 7월 <상상력이 낳은 미래 vs바이러스가 당긴 미래>는 정독을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