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내가 보고 있는데 마침내 옥좌들이 놓이고, 연로하신 분께서 자리에 앉으셨다. 그분의 옷은 눈처럼 희고, 머리카락은 깨끗한 양털 같았다. 그분의 옥좌는 불꽃 같고, 옥좌의 바퀴들은 타오르는 불 같았다. 10 불길이 강물처럼 뿜어 나왔다. 그분 앞에서 터져 나왔다. 그분을 시중드는 이가 백만이요, 그분을 모시고 선 이가 억만이었다. 법정이 열리고, 책들이 펴졌다. 13 내가 이렇게 밤의 환시 속에서 앞을 보고 있는데,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하늘의 구름을 타고 나타나 연로하신 분께 가자, 그분 앞으로 인도되었다. 14 그에게 통치권과 영광과 나라가 주어져, 모든 민족들과 나라들,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를 섬기게 되었다. 그의 통치는 영원한 통치로서 사라지지 않고,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않는다.
복음 요한 1,47-51
그때에 47 예수님께서는 나타나엘이 당신 쪽으로 오는 것을 보시고 그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 48 나타나엘이 예수님께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 하고 물으니, 예수님께서 그에게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하고 대답하셨다. 49 그러자 나타나엘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 50 예수님께서 나타나엘에게 이르셨다.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해서 나를 믿느냐? 앞으로 그보다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다.” 51 이어서 그에게 또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부모의 사랑을 가장 큰 사랑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는 순수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어떻습니까? 맞는 것 같습니까? 실제로 부모님들이 자식들에게 바라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그저 고생하지 않고 행복하게 잘 사는 것뿐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종종 자녀에 대한 아쉬움을 표시하시는 분들을 만나게 됩니다.
“신부님, 제가 이 아이들을 어떻게 키웠는지 아세요? 그렇게 집이 어려웠는데도 불구하고 하고 싶은 공부 다 시키고, 필요한 것은 다 사주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부모를 만나러 오지도 않아요. 어쩌면 이럴 수가 있지요?”
괘씸한 자녀라고 할 수도 있지만, 이 부모 역시 문제가 하나도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부모의 말에는 ‘내가 이렇게 애를 썼으니, 너도 사람이라면 어느 정도는 해야 되지 않겠냐?’라는 의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즉,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았던 순수한 사랑보다는 보상받으려는 사랑이 생긴 것입니다. 물론 인간이기 때문에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어렸을 때에 단순히 의무감이 아니라, 키우는 재미 그 자체에 집중했다면 어떠했을까요? 부모를 찾아오지 않는 것이 서운하기도 하겠지만, 그렇게 억울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그냥 독립해서 가정을 잘 꾸리며 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순수한 사랑은 사랑을 하고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하고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순수성이 사라질 때에 미움과 다툼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 것이지요. 주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이 바로 이렇게 어떤 대가를 바라지 않는 순수한 사랑이었습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죄에 물들어 있는 우리를 향해서 “어떻게 그럴 수 있냐?”면서 꾸짖지 않으십니다. 계속해서 기회를 주시고 함께 하면서 응원해주십니다.
오늘은 성 미카엘, 성 가브리엘, 성 라파엘 대천사 축일입니다. 대천사는 중대한 사건을 전하는 이들이지요. 미카엘은 요한 묵시록에 나오듯이 우리의 원수와 싸우도록 파견되어, 우리들이 악을 멀리해야 함을 전해줍니다. 그리고 동정 마리아에게 가브리엘이 파견되어 예수님의 잉태 소식을 전했으며, 라파엘 천사는 토비아의 눈을 고쳐주어서 하느님의 치유를 전해주었습니다.
대천사들이 전하는 중요한 사명들은 바로 인간을 위한 한 없는 사랑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주님의 사랑에 어떻게 응답해야 할까요? 주님의 사랑을 본받고 따를 수 있어야 합니다. 즉, 어떤 보상을 원하는 삶이 아니라,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는 순수한 사랑으로 나의 이웃들에게 다가설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억울함이나 서운함을 단 한 번도 체험하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요? 예수님께서도 억울하게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다는 것을 기억할 때, 우리의 억울함과 서운함을 충분히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나의 억울함과 서운함을 크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 안에서 느끼는 기쁨과 사랑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역시 대천사의 임무처럼 세상에 사랑을 전하는 또 다른 역할을 담당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회복이란 예전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본래의 나와 새로운 관계를 잘 맺는 것이다(기시미 이치로).
대천사들입니다.
약점
미국 휴스턴 대학의 사회복지학 연구원인 브레네 브라운 교수는 10년간 자신의 약점을 없애는 방법을 연구했습니다. 그런데 모든 방법을 동원했지만 결국 실패로 돌아갔지요. 그녀는 너무나 참담한 마음으로 자료를 정리하다가 우연히 약점으로부터 자유로운 이들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들은 공통적으로 ‘약점을 드러내는 용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 모든 자신의 취약성과 수치심에 귀를 기울이라.”
이렇게 귀를 기울이면서 자기 스스로를 받아들일 수 있을 때 안정적이고 마음이 온전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약점이 있는 내 자신 역시 분명히 나인데 왜 그런 나를 인정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을까요? 이렇게 약점을 드러내는 용기 있는 사람만이 지금의 삶을 기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TED 강연 중인 브레네 브라운 교수.
교회는 제4차 라테라노 공의회와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천사들의 존재를 신앙 교리로 선언하였다. 그러나 천사들에 대한 여러 학설에 대해서는 유권 해석을 하지 않았다. 다만 미카엘, 가브리엘, 라파엘 대천사 이외의 다른 천사의 이름은 금하고 있다. 천사들의 축일도 오늘의 세 대천사 축일과 ‘수호천사 기념일’(10월 2일)을 정하여 천사 공경을 권장하고 있다.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이 말씀은 ‘야곱의 사다리’를 연상시킵니다(창세 28,12). 야곱은 자신을 죽이려는 형 에사우를 피해 도망가는 길에 베텔에서 꿈을 꾸게 됩니다. 야곱은 하늘이 열려 있고 천사들이 하늘과 땅을 잇는 층계를 오르내리는 광경을 보게 됩니다. 그는 천사들의 층계를 통해 하느님의 집에 이르는 길, 하늘의 문을 발견합니다. 하느님과 인간을 잇는 유일한 통로는 그리스도이십니다. 십자가에 오르신 그리스도께서는 야곱의 꿈을 충만하게 완성시키십니다. 우리가 지는 십자가들은 하늘과 땅을 잇는 층계가 되어 그리스도의 온전한 인간성에 도달시킵니다. 역경과 위험 가운데 하늘 나라로 순례하는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십자가 층계를 한 걸음씩 올라가게 도와주는 존재, 하느님의 집에 도달하게 인도하는 존재가 천사들입니다. 우리를 도와주는 많은 천사 가운데 대표적인 세 천사를 성 미카엘, 성 가브리엘, 성 라파엘 대천사라고 부릅니다. 천사는 보이지 않는 존재이므로 그들이 맡은 임무에 따라 이름을 붙입니다. ‘하느님의 힘’으로 국가를 수호하는 대천사가 성 미카엘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된 분’으로 예언의 뜻을 알려 주는 대천사가 성 가브리엘입니다. ‘하느님의 치유’로 우리를 살려 주고 안내하는 대천사가 성 라파엘입니다. 하늘에서 하느님을 섬기는 천사들에게 우리를 보살펴 주시도록 전구하여 하늘의 문에 도달하도록 합시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저는 세례명이 ‘가브리엘’입니다. 오늘이 축일입니다. 유아세례를 받았기 때문에 제가 정하지는 않았지만 저의 세례명을 좋아합니다. 가브리엘은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마리아에게 하느님의 뜻을 전하였고, 요셉에게도 하느님의 뜻을 전하였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가브리엘의 이야기를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였고, 구원의 역사가 시작될 수 있었습니다.
주변을 보면 천사와 같은 분들이 있습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도움을 주는 분들입니다. 지난 화요일에 대전 가톨릭 대학교에 갈 일이 있었습니다. 부제님들이 강의를 부탁하였기 때문입니다. 서울역에서 전의역으로 가는 기차표를 예매하였습니다. 조치원에서 천안, 천안에서 서울로 오는 기차표도 예매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난처한 일이 생기고 말았습니다. 제가 가는 날, 철도 노조에서 파업을 시작하였고, 제가 예매한 기차는 운행이 중지되었습니다. 대전까지 가는 길이 멀기도 하고, 길이 막힐 것 같아 걱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정말 천사처럼 버스를 예매 해 주신 분이 있었습니다. 스마트한 세상입니다. 인터넷으로 조치원 가는 버스를 예매하였고, 스마트 폰으로 버스표를 전송해 주었습니다. 저는 덕분에 편하게 다녀올 수 있었습니다.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 합니다. 눈은 외부의 사물을 보기도 하지만, 눈은 내 마음을 표현하기도 합니다. 믿음의 눈, 사랑의 눈, 희망의 눈으로 보면 세상은 그렇게 아름답고, 즐겁습니다. 하지만 시기의 눈, 증오의 눈, 불신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 세상은 온통 회색 빛깔로 보이게 됩니다. 우리의 시력이 아무리 좋아도 세균, 바이러스와 같은 것들을 볼 수 없습니다. 그것들은 있지만 너무 작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눈이 아무리 좋아도 빛이 없으면 볼 수 없습니다. 우리가 보는 모든 것들은 빛에 의해서 반사된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주변을 보면 아름다운 나눔을 실천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카플’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목적지가 같은 분들을 연락해서 승용차를 함께 이용하는 나눔입니다. 연말연시에는 사랑의 나눔이 있습니다. 어린아이가 돼지 저금통을 가져오기도 하고, 군인들도, 기업체를 운영하는 분들도 이웃을 위한 나눔에 동참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평생을 모은 재산을 기꺼이 신학교를 위해서 기부하신 분도 있습니다.
예전에는 이런 나눔이 더 많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김치를 해도 함께 나누고, 잔치가 있으면 이웃을 초대하였습니다. 누군가 돌아가시면 마을 사람들이 모두 돌아가신 분의 장례를 위해 함께 수고하였습니다. 현대사회에서 예전에 농경시대에 있었던 방식의 나눔이 계속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바쁘고 분주한 현대사회에 살면서도 나눔의 아름다운 모습을 계속 이어나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나눔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바로 천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