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사는 캄캄한 밤 거친 바다에 널빤지를 던졌다”
그 널빤지를 만나 살아날 자 누구인가?
번뇌의 가지 자르느라 바쁠 것이 아니라
번뇌의 뿌리를 확 뽑아 버려야 한다
그러면 눈을 가리는 것들이 사라졌으니
언제나 주인공이 본래모습 그대로 드러난다
구지선사는 생몰연대가 정확하지 않다. 마조선사의 문하 대매 법상(大梅法常, 552~839)선사의 법제자인 항주 천룡(杭州天龍)선사의 법제자이다.
구지화상은 절강성(浙江省) 금화산(金華山)에 머물고 있었다. 어느 날 마조대사의 제자인 실제(實際)라는 비구니가 찾아왔다. 삿갓도 벗지 않고 방안에 들어와 구지화상이 좌선하는 자리를 세 바퀴 돌고 나서 말했다.
“한 마디 하시면 삿갓을 벗겠습니다.”
이렇게 세 번을 말했는데도 구지화상은 말을 하지 못했다. 그러자 비구니는 떠나려 하였고, 구지화상은 머물기를 청하였다.
“곧 날도 저물 것이니, 하룻밤 쉬어 가시지요.”
“한 마디 하시면 머물지요.”
구지화상이 아무 말도 못하자 비구니는 떠나 버렸다. 비구니에게 당한 구지화상은 자신의 모습에 참담함을 느꼈다.
“이러고도 내가 대장부라고 할 수 있겠는가!”
구지화상은 고승들을 만나 가르침을 받고자 바랑을 꾸린 뒤 잠자리에 들었다. 그런데 꿈속에서 산신이 나타나 말했다.
“곧 대보살이 나타나 스님에게 가르침을 줄 것이니, 이 암자를 떠나지 마시오.”
다음날 과연 한 노승이 찾아 왔는데, 바로 천룡(天龍)선사였다. 구지화상은 정중히 예를 갖춘 후에 전날 있었던 일을 설명하였다. 그리고는 간절한 마음으로 여쭈었다.
“무엇이 한마디입니까?”
그러자 천룡선사는 손가락 하나를 세워 보였다. 그 순간 구지화상은 큰 깨달음에 이르렀다. 그 다음부터 구지화상은 어떤 질문을 받더라도 오직 손가락 하나만을 세워보였다.
➲ 강설
일어난 현상을 통하여 이치를 깨닫는 것이 쉬운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열심히 공부한 사람이라면 어려운 일도 아니다. 그러나 현상이 일어나기 이전의 소식을 깨닫지 않으면 늘 바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니 번뇌의 가지를 자르느라고 바쁠 것이 아니라 번뇌의 뿌리를 확 뽑아 버려야 한다. 그러면 다시는 가지치기를 할 필요가 없어진다. 그 경지에 이르면 눈을 가리는 것들이 사라져 버렸으므로 언제나 주인공이 본래모습 그대로 드러날 것이다. 이런 사람은 언제 어느 때라도 가장 조화로운 모습으로 세상과 통할 것이다.
➲ 본칙 원문
擧 俱胝和尙 凡有所問 只竪一指
➲ 본칙
이런 얘기가 있다. 구지화상은 무릇 어떤 질문을 받아도 다만 손가락 하나를 세웠다.
➲ 강설
숨이 턱 막히는 소식이다. 아니 숨이 뻥 뚫리는 소식이다. 헤아리려고 들면 이빨도 들어가지 않고 손잡을 틈새도 없다. 그저 숨이 턱 막힐 뿐이다. 그러나 헤아림을 놓아버리면 이보다 더 통쾌한 소식도 드물 것이다. 익은 봉선화 열매(씨방)는 바람에도 터진다.
주인공은 어디에 있는가? 헤아린다고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 송 원문
對揚深愛老俱胝 宇宙空來更有誰
曾向滄溟下浮木 夜濤相共接盲龜
대양(對揚) 대등함. 필적함. 임금의 명령을 받들어 널리 알림. 여기서는 구지선사가 말로 설명하지 않고 손가락 하나를 세우는 것을 가리킴.
공래(空來) 통틀어. 어느 곳이건.
창명(滄溟) 큰 바다.
부목(浮木) · 맹구(盲龜) ‘뜬 나무’와 ‘눈먼 거북’은 잡아함 15권 406경 <맹구경(盲龜經)>에 설명한 ‘맹구우목(盲龜遇木)’의 얘기를 가리킴.
부처님께서 베살리의 원숭이 연못 옆 중각강당에 있을 때의 일이다. 어느 날 제자들과 함께 연못 주변을 산책하시던 부처님께서 문득 아난다에게 이런 것을 물었다.
“아난다야, 큰 바다에 눈먼 거북이 한 마리가 살고 있다. 이 거북이는 백 년에 한 번씩 물 위로 머리를 내놓는데 그때 바다 한가운데 떠다니는 구멍 뚫린 나무판자를 만나면 잠시 거기에 목을 넣고 쉰다. 그러나 판자를 만나지 못하면 그냥 물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런데 이때 눈먼 거북이가 과연 나무판자를 만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래도 눈먼 거북이는 넓은 바다를 떠다니다 보면 서로 어긋나더라도 혹시 구멍 뚫린 나무판자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리석고 미련한 중생이 육도윤회의 과정에서 사람으로 태어나기란 저 거북이가 나무판자를 만나기보다 더 어렵다. 왜냐하면 저 중생들은 선(善)을 행하지 않고 서로서로 죽이거나 해치며, 강한 자는 약한 자를 해쳐서 한량없는 악업을 짓기 때문이니라. 그러므로 비구들이여, 너희들은 사람으로 태어났을 때 내가 가르친 ‘네 가지 진리(四聖諦)’를 부지런히 닦아라. 만약 아직 알지 못하였다면 불꽃같은 치열함으로 배우기를 힘써야 한다.”
➲ 송
노련한 구지화상의 멋진 대응 썩 좋다네.
온 세상을 통틀어 다시 누가 있으리오.
강설
설두스님은 구지화상의 손가락 세우는 지도법을 대단히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와 같은 이가 다시 또 있겠는가하고 밝힐 정도니까. 하긴 그보다 완벽한 대응이 어디 있으랴. 손가락 하나로 모든 것을 다 밝혀버렸으니, 정말 탁월한 선지식이다.
문제는 그 지도법에 따라 깨달음에 이르기가 결코 쉽지가 않다는 것이다. 복잡한 사람은 손가락 하나 세운 것을 두고도 다시 스스로 복잡하게 얽혀 들어가니까.
그럼 손가락 하나만 세우면 만사형통일까?
구지선사에게는 동자승 제자가 있었다. 동자승은 법을 묻고자 찾아온 스님들을 향해 스승 구지선사가 어떻게 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어느 날 스승이 출타한 사이에 법을 묻고자 찾아온 스님이 있었다. 그 스님은 구지선사가 어떻게 지도하는지를 동자승에게 물었다. 동자승이 객스님에게 예를 갖춘 후에 질문을 하라고 말했다.
객스님이 큰절을 올리고 자신이 궁금한 것을 물었다. 그러자 동자승이 손가락 하나를 세워 보였고, 객스님은 너무나 감사하다며 인사를 하고 떠났다.
구지선사가 돌아오시자 동자승은 자랑삼아 낮에 있었던 일을 말씀드렸다. 구지선사가 동자승에게 말씀하셨다.
“나에게도 그대로 할 수 있겠느냐?”
“예!”
“불법이 무엇이냐?”
동자승이 손가락을 세웠다. 그때 구지선사의 칼이 번쩍하더니 동자승의 손가락이 잘렸다. 피가 흐르는 손을 움켜주고 비명을 지르는 동자승을 구지선사가 불렀다.
“얘 동자야!”
동자가 돌아보자, 구지선사가 손가락을 세워 보였다. 바로 그 순간 동자가 깨달았다.
동자승은 무엇을 보았는가?
자칫 잘못하다간 손가락만 잘리고 소득이 없을지도 모른다.
➲ 송
일찍이 큰 바다 향해 나무를 던져 띄워,
밤 파도 속에서 눈먼 거북 제도하였네.
➲ 강설
구지선사가 손가락 세운 것은 캄캄한 밤 거친 바다에 널빤지를 던진 것과 같다. 그러나 그 널빤지를 만나 살아날 자가 누구인가? 먼 나라 흘러간 얘기 듣듯이 하다간 파도에 목숨을 보전키 어려울 것이다. 사람 몸 받기 어렵고, 불법 만나기 어려우며, 선지식 만나기 어렵고, 깨닫기 어렵다. 그러나 불가능한 일은 없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