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이야기 3부- 패스트 팔로우(fast follow)가 아니라 퍼스트 무버(first mover)가 되기 위해
현대과학의 아버지 갈릴레이는 과학은 사물의 목적과 이유를 묻는 것이 아니라 사물의 메커니즘을 물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로부터 오늘날의 과학이 시작되었다.
과학 이전의 세계는 철학이 지배하는 세계였다. 그리스의 소크라테스에서 시작하여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를 거쳐 완성된 철학은 그 후 수천년동안 그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신학, 형이상학, 실증주의 형태로 발전해 왔다. 영국의 철학자 화이트 헤드는 이를 두고 서양철학은 플라톤의 각주에 불과하다라고 했을 정도이다. 오랜 세월 유럽의 사상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완성한 철학과 교회라는 권위에 의존했다.
갈릴레이로부터 시작된 과학은 그가 죽던 해에 태어난 뉴턴을 통해 급속도로 발전하기에 이른다. 갈릴레이의 재판으로 통해 눈을 뜨게 된 대다수의 개신교도들은 지동설쪽으로 입장을 선회한 반면, 카톨릭은 카톨릭교도였던 데카르트와 파스칼의 책들까지 금서로 지정하며 절대자와 자연을 동일시하려는 철학을 유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인간의 의식속에서는 신(神)은 사라지고 자연을 객관화하기 시작하며 이성을 중시하는 과학이라는 파도가 인류에게 밀려들기 시작한다.
과학이란 분과학문’(分科學問)의 준말로 철학에서 파생되어 나온 학문이라는 뜻이다. 철학은 존재하는 모든 대상을 탐구하는 학문이다. 따라서 일체의 사상(事像), 일체의 존재(存在)를 사유의 대상으로 삼는다. 하지만 과학은 개별적인 대상, 개별적인 존재를 탐구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다르다. 직관이 철학적 탐구방법 중 가장 중요한 도구라면 분석은 과학적 탐구방법의 가장 중요한 도구가 된다.
나는 서울과학기술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는데 이를 영문으로 표기하면 SEOUL NATIONAL UNIVERSITY OF SCIENCE AND TECHNOLOGY가 된다. 요즘 과학기술이란 마치 한 단어처럼 사용되어 과학( Science)이라는 단어가 마치 기술(Technology)을 꾸며주는 형용사와 같지만 거기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기술이란 과학적 지식을 이용하여 자연의 사물을 인간 생활에 유용하도록 가공하는 수단을 말한다. 혹자는 과학은 돈을 넣어 지식을 만드는 과정이고, 기술은 지식을 이용하여 돈을 만들어내는 과정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과학이 먼저이고 기술은 나중이라는 의미인데 인류의 문명의 발전사를 보면 오히려 반대인 경우가 많았다.
김치를 예로 들어보자. 김치는 가열하지 않아 각종 영양소가 살아있고, 발효과정을 통해 생성되는 젖산은 유해한 균의 증식을 억제하고 살균한다. 김치의 유산균은 항암작용, 노화방지, 콜레스테롤 저하 등 사람의 몸에 이로운 작용을 한다. 지금은 김치의 과학성이 인정되어 세계적인 음식이 되었고, 김장문화는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으로 등재되기까지 했다. 그렇다면 우리의 조상들의 김치담그는 기술은 그 과학적인 원리를 알고 만들었을까. 당연한 이야기지만 김치를 아주 맛있게 담그는 기술을 가진 할머니는 유산균의 성질에 대한 과학적 지식이 없어도 최고의 김치를 만들 수 있다.
라이트 형제가 비행기를 발명하였을 때 과학자들은 공기보다 무거운 물체는 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당시 뉴욕타임즈는 " 인간이 비행기를 만들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나는 것은 아마도 수만년 걸릴 것이다라고 혹평했다. 비행기의 양력의 원리를 제공한 유체역학 공식인 베르누이의 정리가 나온 것은 이미 18세기였지만 고졸 정도의 학력에 자전거포 직원이었던 라이트 형제가 유체역학을 알았을리가 없다. 당시 라이트 형제보다 훨씬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던 당대 최고의 과학자인 랭클리 (Samuel Pierpont Langley)는 비행기 제작 및 시험비행에 거듭하여 실패하고 있었다. 비행기의 양력을 설명하는 익형날개이론(airfoil wing theory)이 나온 것은 비행기가 발명되고 한참이 지난 후였다.
18세기 영국의 산업혁명을 촉발시켰던 증기기관의 발명도 열에 대한 과학적인 이론이 정립되기 훨씬 전의 일이었다. 열역학의 선구자인 프랑스의 물리학자 카르노는 그의 이론을 정립하여 1824년에 '불의 동력 및 그 힘의 발생에 적당한 기계에 관한 고찰'이라는 논문을 발표했지만, 그때는 이미 증기기관을 상용화시킨 제임스 와트가 이미 사망한 후에 일이었고, 열역학 0,1,2,3법칙이 정립된 것은 그 후로부터 한참 후의 일이다.
동양에서도 과학보다는 기술이 먼저 발달했다. 오늘날 근대 과학의 혁명적 발전에 기폭제가 되었던, 화약, 나침반, 종이는 모두 중국에서 발명되었지만 이들의 원리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어 그 기초적인 원리를 파헤치기보다는 그저 생활에서 써먹을수 있을 정도의 지식이면 충분했다. 그 결과 유럽인은 나침반으로 길을 찾고, 화약으로 무장하고 중국에 도착하여 종이로 만든 항복문서에 사인을 받아내었다. 이처럼 기술은 항상 과학보다 앞서 있었다.
유럽에서 근대초기에는 과학과 기술의 긴밀한 관계는 없었고, 과학자와 기술자간의 교류도 활발하지 않았다. 이러한 분위기를 깬 것은 독일이다. 오늘날 세계적인 화학회사가 된 바이엘(Bayer)이나 바스프(BASF)사는 과학자들의 기초학문에 대한 자문을 구했고, 이를 통해 얻은 기술로 제품을 개발하기 시작하며 막대한 부를 창출하게 된다. 이러한 전통이 이어져 오늘날의 기술 강국 독일이 만들어진다. 지금도 독일은 기초학문과 이를 기술에 접목시키는 산업생태계가 세계 어느나라보다도 잘 갖추어져 있다. 독일은 막스 프랑크 연구소,프라운 호퍼 등과 같은 기초학문을 연구하는 기관들을 통해 과학의 기술의 유기적인 접목을 시도하며 현대 과학기술문명을 선도해가고 있다.
발명왕 에디슨은 전구를 발명하던 중 에디슨효과라고 불리는 "진공에서 금속을 가열할 때 열전자가 방출되는 현상"을 발견했지만 기초과학지식이 없었기 때문에 그 원인을 제대로 밝혀내지 못했다. 그러나 훗날 물리학자인 오언 리처드슨(Owen Willans Richardson)은 에디슨 효과의 원리를 연구했고 이로 인해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다. 이처럼 20세기 이전 큰 역할을 하지 못했던 기초과학은 20세기 이후에는 새로운 형태를 보이면서 발전하기 시작한다.
20세기 최고 발명품이라 불리는 트랜지스터도 에디슨효과를 이용한 진공관을 대체하기 위한 연구에서 시작된 것이다. 트렌지스터는 벨 연구소에 근무하던 3명의 과학자-쇼클리(William Shockley), 바딘(John Bardeen), 브래튼(Walter Brattain) 발명한 것으로 이들은 모두 뛰어난 물리학자였다. 이 세명의 과학자들은 우연한 계기를 통해 개발된 발명품들과 달리 처음부터 진공관을 대체하는 신기술을 개발하기 위해 물리학적인 기초과학에서부터 연구를 시작하였다.
근대 이전에는 과학적 원리가 일상생활에 적용되어 새로운 기술이 탄생하기도 하고, 훌륭한 기술이 먼저 탄생하여 과학의 발전에 기반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오늘날 기술의 발전은 기초과학 없이는 불가능하다. 1044년 중국은 중국초석이라 불리는 질산칼륨을 이용해 인류 최초로 화약을 발명했지만 기껏해야 불꽃놀이용으로만 사용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서구는 화약을 이용한 총과 대포를 만들어 식민지를 늘려나가기 시작한다. 점차 자연속에서 화약의 원료가 되는 질산칼륨을 구할수 없게 되자 화약을 인공적으로 만들어내기 위한 연구를 시작했고, 1909년에 독일의 과학자 프리츠 하버가 공기중에서 질소를 만들어내는 공중질소합성법을 완성함으로써 값싸고 성능이 뛰어난 화약을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게 된다. 이 모든 것이 그 기술의 원리를 이해하기 위한 시도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한국은 짧은 기간을 통해 놀랄 만한 경제성장을 이루었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과학보다는 당장 돈이 되고 써먹기 쉬운 기술개발에 매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태생적 한계로 인해 당장 돈이 되지 않는 기초과학의 대한 연구를 등한시 하는 풍조가 생겨났다. 막대한 비용이 들어가는 연구의 결과가 상업적으로 활용가치가 떨어진다면 기업이든 국가이든 아무도 연구비를 주지 않으려 할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기초과학의 연구는 순수하게 자연의 원리를 밝히기 위한 연구 목적 자체뿐만이 아니라 상업적인 기술개발에도 큰 기여를 한다.
시대가 바뀌었다. 과거에는 실제가 이론을 앞서고 기술이 과학보다 먼저라는 생각이 앞섰지만 이제는 이런식으로는 서구문명의 기술을 따라갈 수 없다. 동양이 서양에 비해 기술력이 뒤쳐진 이유는 과학이 아니라 기술을 더 신봉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기술의 개발은 과학에 대한 기초적인 지식이 없이는 생산되지 않는다. 이는 마치 기초체력과 기본기 없는 운동선수가 성장하지 못하는 이유와도 같다. 한국에서 노벨상 수상자가 배출되고, 기술강국으로 더 큰 도약을 하기 위해서는 이제는 남들이 갔건 길만 쫓아가는 패스트 팔로우(fast follow)가 아니라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개척해 나가는 퍼스트 무버(first mover)가 되어야만 한다.
출처 : 세이프티퍼스트닷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