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에서 만나는 인문학>울진 십이령과 영양의 외씨 버선길을 걷는다.
8월 14일(금요일)에서 16일(토요일)까지 연휴기간에 2박 3일에 걸쳐 울진 십이령과 영양의 외씨 버선길을 찾아갑니다. 보부상들의 애환이 서린 울진 십이령 즉 열두 고개 길은 역사와 자연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길입니다. 특히 소나무가 아름다운 소광리는 눈부신 조선 소나무를 실컷 볼 수 있는 곳이고 근처에 있는 불영사는 경관이 아름답기로 소문이 난 곳입니다.
십이령, 불영사. 조지훈 생가. 서석지, 남이포, 이문열 생가. 그리고 영양의 외씨 버선길을 걸으며 길 위에서 만나는 인문학을 체험하게 될 이번 여정에 참여를 바랍니다.
“울진군 북면 두천 1리는 울진중에서도 가장 궁벽 진 산골이다. 민가 몇 채가 드문드문 들어서 있는 이곳 두천 1리는 열두재를 지나 소천 거쳐 서울로 가던 중요한 길목이라서 서울 나들이길이라고 불렀다. 그 당시 선질꾼들은 이곳 십이령을 대개 사흘 만에 넘어 소천에 도착했는데, 그들의 출발이 울진이나 흥부에서 출발할지라도 이곳 두천리를 경과하지 않고는 바릿재를 지나서 가는 십이령을 넘을 수가 없었다. 그런 연유로 선질꾼들이 한창 많았을 때는 50여명의 행상들이 몰려들어 주막과 마방으로 흥청거렸다.
마을 동쪽을 흐르는 외두천 건너에 <울진내성행상불망비蔚珍乃城行商不忘碑>가 세워져 있다. 문화재 자료 제 310호인 이 비는 1890 년 경에 울진과 봉화를 왕래하면서 어염해조류를 물물교환하며 상행위를 하던 선질꾼들이 세운 비다. 당시 봉화 내성에 살고 있던 그들의 최고 지위격인 접장인 봉화사람인 정한조鄭韓祚와 반수班首인 안동출신 권재만權在萬이 그들의을 도와준데 대해 그 은공을 기리고자 세운 영세불망비라서 이 비를 이 지역 사람들은 ‘선질꾼비’라고도 부른다.
조선 후기에 세워진 이 비는 그렇게 흔하지 않은 철비鐵碑로 만들었는데 일제의 철재동원령 때에는 땅 속에 묻어두었다가 해방 이후 골기와로 비각을 세웠다. 그 뒤 1965년 경에 대구에 살고 있다는 후손이 찾아와 양기와로 비각을 보수하였다.
무쇠로 주조된 이 비는 2기로, 1기는 부러진 것을 이어 세웠다. 선질꾼들은 2.7장인 울진장과 3.8장인 흥부장에서 주로 해산물인 소금, 건어물, 미역 등을 구매하여 쪽지게에 지고 ‘열두재’라고도 부르는 12 령嶺을 넘었는데 울진에서 봉화까지 대략 그 길이가 1백 3십리 길이었다. 선질꾼들은 길을 걷다가 날이 저물면 외딴 주막이나 가뭄에 콩 나듯 어쩌다 있는 인가에서 머물면서 지게에 지고 가던 솥단지로 밥을 지어먹고 가기도 했다. (...)
이 샛재는 한나무정이 서쪽에서 전곡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고개 마루가 넓다고 한다.그 다음 고개가 큰 넓재다. 꼬채비재는 봉화군 소천면 분천리 자마리에서 울진군 서면 광회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높은 곳에서 낮게 날아가는 형국이라고 한다.
멧재를 지나고 낙동강 변의 배나들나루가 있는 배나들재를 넘으면 마지막 고개인 노릇재가에 이르고 그 고개가 열두 고개의 마지막 고개였다.
선질꾼들은 그 무거운 등짐을 지고서 사흘쯤을 뻑 세게 걸어 봉화장으로 가 그 주위에 있는 내성장, 춘양장, 법전장, 장동장, 재산장에서 잡화와 약품 및, 양곡, 포목 등을 그들이 가진 것과 교환하여 되돌아왔다고 한다. 다시 되돌아오는 데에는 대체로 열흘이 걸렸다고 한다.
십이령 들목인 두천리가 번성했을 때는 5.6십 명의 행상들이 몰려들어 주막과 마방이 흥청댔다고 한다. 울진에서 봉화까지 130리 길을 걷다가 날이 저물면 외딴 주막이나 어쩌다가 눈에 띄는 민가에서 머물면서 지게에 지고 가던 솥단지를 가지고 밥을 해먹고 가야 했는데, 그 때 선질꾼들이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부르던 노랫말이 <십이령 바지게꾼 노래>다.
“미역 소금 어물 지고 춘양장을 언제 가노, 가노, 언제 가노, 열두 고개 언제 가노, 시그라기 우는 고개 내 고개를 언제 가노, 한 평생을 넘는 고개 이 고개를 넘는 구나, 서울 가는 선비들도 이 고개를 쉬어 넘고, 꼬불꼬불 열 두 고개 조물주도 야속하다. 대마 담배 곡물지고 흥부장을 언제 가노, 오나 가나 바지게는 한 평생에 내 지겐가, 오고 가는 원님들도 이 고개를 쉬어 넘고, 꼬불 꼬불 열두 고개 언제 넘어 고향 가나.“
선질꾼이나 마상은 다른 지역의 보부상들과 같이 완전한 조직을 갖춘 단체가 아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 지역 출신들이 한 곳에 모여서 무리를 지어 출발했다가 무리를 지어 돌아왔던 것이 보부상 즉 선질꾼들의 생활이었다.(...)
소조동과 광천동의 이름을 따서 지은 이름인 울진군 서면 소광리召光里이다. 이곳에 나라 안의 이름난 소나무 군락지가 있다. 소광리 소나무 숲, 그 주인공은 바로 금강송이다. 나무 줄기가 붉어서 ‘적송(赤松)’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주로 내륙 지방에서 자란다고 ‘육송(陸松)’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여인의 자태처럼 부드러운 느낌을 준다고 ‘여송(女松)’이라 부르기도 한다.
예로부터 나라에서는 왕실 또는 귀족들의 관재로 삼기 위해서 소나무숲을 보호했었다. 굵게 자라서 안쪽의 심재가 황장색을 띈 고급재로 관재棺材로서 유용한 것을 황장목黃腸木이라고 하였다. 1420년 예조禮曹에서 “천자와 제후의 곽槨은 반드시 황장으로 만들며, 황장이란 송심松心이며, 그 황심黃心은 단단하고 오랜 세월이 지나도 썩지 아니합니다.” 백변白邊은 수습에 견디지 못하고 속이 썩습니다.“고 보고 한 것을 보면 소나무의 심재가 관재로 많이 쓰였음을 알 수 있다.
사명당 유정은 소나무를 주제로 청송사靑松辭라는 시를 지었다.
“소나무 푸르구나. 초목의 군자로다. 눈서리 이겨내고 비오고 이슬 내린다 해도 웃음을 t숨긴다. 슬플 때나 즐거울 때나 변함이 없구나. 겨울 여름 항상 푸르구나. 소나무에 달이 오르면 잎 사이로 금모래를 체질하고 바람 불면 아름다운 노래를 부른다.”
이곳 소나무 숲에 500년 된 소나무가 있다. 조선 성종 때 이 자리에 뿌리를 내리고 강산이 50번을 바뀌었는데도 그 푸르디 푸른 솔잎과 그 붉음 자태를 자랑하며 서 있는 금강송 아래에서 우리 인간들은 얼마나 작고 가녀린가?
신정일의 <걷고 싶은 길> 중
“신라 초에 이곳 영양 일대에는 고은현古隱縣(영양읍)과 청기현靑杞縣(청기면)이 되었다가 경덕왕 때 유린현有隣縣의 속현으로 되었다. 고려 초에 영양군으로 개명되어 예주禮州의 속읍이 되었다가 조선 전기에는 영해부에 소속되었다. <경상도지리지>에 의하면 그 당시 영양현이 40호에 1026명이었고, 청기현은 29호에 462명으로 실려 있다.
현종 5년인 1664년과 숙종 1년인 1675년에 영해부로부터 독립을 해줄 것을 요구하는 상소에 힘입어 1682년에 영양현으로 독립하였지만 석보면은 영해도호부에 속하였다.
1895년 영양군으로 승격하여 안동부에 속하였고, 1914년 군면 통폐합시에 행정구역이 조정되어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조지훈의 고향 영양
영양읍지에 “이곳이 교통이 불편하고 흉년이 잦아 풀뿌리와 나무껍질로 목숨을 이을 때가 많았으나 조선 숙종 때 현이 부활된 뒤에 이웃인 안동과 예안의 유학의 영향을 받아 점차로 글을 숭상하게 되었고 주민의 성질이 착하면서도 인내력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 영양에는 “당대에 타관에서 들어오면 돈을 벌 수 있으나 당대에 다시 떠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근거 없는 말이 돌기도 했다.
경2-9조지훈 생가
봉화군 경계에는 일월산과 오십봉, 주산․수산 등의 높은 산들이 펼쳐져 있어 영양에서 울진으로 가려면 여러 산을 넘어가야 했다. 그 중 백암산(白岩山)을 넘어 동해로 가는 고개 이름이 울릿재였다. 봄․가을마다 곡식을 관청에 바치려고 넘어갈 때 고갯길에 도사리고 있던 호랑이와 도둑들에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런 연유로 울면서 넘어갔기 때문에 울릿재 또는 읍령(泣嶺)으로 불렀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영해도호부편 산천’조에 “서읍령은 부의 동쪽 40리에 있어서 온 고을에 전송하고 영접하는 곳이 되어 있다. 세상에서 전하는 말에, ‘크고 작은 사신의 행차가 만약 처음으로 재를 넘으면 반드시 흉한 일이 있다’ 하여, 사람들이 다 피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영양군 청기면 청기리에서 영양읍 서부리로 넘어가는 고개인 예우름재는 행곡령 또는 여림현으로 높이 579미터의 고개이다. 조선시대 청기고을 사람들이 영해부로 부역하러 다닐 때 너무 험준해서 넘어 다니기 어려우므로 그 괴로움을 한탄하며 넘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 영양군 일월면 주곡리 주실 마을에서 박목월. 박두진과 함께 청록파 시인으로 알려진 조지훈(趙芝薰)의 옛집이 있다.
본명은 동탁東卓이며 호가 지훈인 그는 어려서 할아버지에게 한문을 배웠고, 3년간 영양보통학교를 다니다가 서울로 올라왔다. 1939년 혜화전문학교(지금의 동국대학교) 문과에 입학해 〈백지〉 동인으로 참여했고, 조연현 등과 친하게 지낸 조지훈은 1941년 대학을 졸업하고 일제의 탄압을 피해 오대산 월정사에서 불교전문강원 강사로 있었다. 그때 WQJ했던 책들이〈금강경오가해 金剛經五家解〉·〈화엄경〉 등의 불교서적과 노장사상, 당시(唐詩)였다. 1942년 조선어학회 〈큰사전〉 편찬위원으로 참여했고,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검거되어 신문을 받았다. 8·15해방 이후 동국대학교 강사를 거쳐 고려대학교 교수가 된 조지훈은 6·25전쟁 때는 문총구국대 기획위원장으로 중부전선에서 종군했다. 1968년 한국시인협회 회장 등을 역임한 조지훈은 1968년 토혈로 사망하여 경기도 양주군 마석리에 안장되었는데 그의 나이 48세였는데 그가 지은 <지조론志操論>은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남아 숨 쉬고 있다.
“지조란 것은 순일한 정신을 지키기 위한 불타는 신념이요, 눈물겨운 정성이며,
냉철한 확집(確執)이요, 고귀한 투쟁이기까지 하다. 지조가 교양인의 위의(威儀)
를 위하여 얼마나 값지고, 그것이 국민의 교화에 미치는 힘이 얼마나 크며, 따라
서 지조를 지키기 위한 괴로움이 얼마나 가혹한가를 헤아리는 사람들은 한 나라
의 지도자를 평가하는 기준으로서 먼저 그 지조의 강도를 살피려 한다. (중략)
지조를 지키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자기의 신념에 어긋날 때면 목숨을 걸
어 항거하여 타협하지 않고, 부정과 불의한 권력 앞에는 최저의 생활 최악의 곤
욕을 무릅쓸 각오가 없으면, 섣불리 지조를 입에 담아서는 안 된다. 정신의 자
존 자시(自恃)를 위해서는 자학과도 같은 생활을 견디는 힘이 없이는 지조는 지
켜지지 않는다. (중략)
변절이란 무엇인가? 절개를 바꾸는 것, 곧 자기가 심신으로 이미 신념하고 표방
했던 자리에서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철이 들어서 세워놓은 주
체의 자세를 뒤집는 것은 모두 다 넓은 의미의 변절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욕하
는 변절은 개과천선의 변절이 아니고, 좋고 바른 데서 나쁜 방향으로 바꾸는 변
절을 변절이라 한다. (중략)
차돌에 바람이 들면 백 리를 날아간다는 우리 속담이 있거니와, 늦바람이란 참으
로 무서운 일이다. 아직 지조를 깨뜨린 적이 없는 이는 만년을 더욱 힘쓸 것이
니, 사람이란 늙으면 더러워지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아직 철이 안 든 탓으로 바
람이 났던 이들은 스스로의 후반을 위하여 번연(飜然)히 깨우치라.
한편 이곳 영양군에서 태어난 소설가가 <사람의 아들> <젊은 날의 초상>등의 소설을 지은 이문열(李文烈)이다.
그가 태어나 태를 묻은 영양에서 영덕군 창수면으로 넘어가는 고개가 창수령인데, 이문열은 소설 젊은 날의 초상에서 창수령을 이렇게 묘사하였다.
“창수령 해발 7백 미터, 아아, 나는 아름다움의 실체를 보았다. 창수령을 넘는 동안의 세 시간을 나는 아마도 영원히 잊지 못하리라. 세계의 어떤 지방 어느 봉우리에서도 나는 지금의 감동을 다시 느끼지는 못하리라. 우리가 상정할 수 있는 완성된 아름다움이 있다면 그것을 나는 바로 거기서 보았다. 오, 그 아름다워서 위대하고 아름다워서 숭고하고 아름다워서 신성하던 그 모든 것들……”
영덕길과 울진 십이령 길을 가고자 하는 분은 속히 신청하십시오.
1. 일시: 2014년 8월 14일(목요일)에서 토요일까지 2박 3일간
2. 출발시간 및 장소: 서울 저녁 8시 30분 양재역 12번 출구 국립외교원. 앞 출발
전주 저녁 6시 전주 종합경기장 앞 출발
3. 참가비: 12만 5000원.(입장료 포함)
4. 어디로 가나요:
울진 십이령, 불영사. 조지훈 생가. 서석지, 남이포, 이문열 생가. 외씨 버선길
5 안내 도반. 신정일,(새로 쓰는 택리지 경상도) 저자
6. 신청방법: 댓글로 신청하고 참가비 입금해야 완료
7. 참가비 입금계좌: 국민은행 754801-01-479097 사단법인 우리땅걷기
8. 참가비 입금 후 취소 시 환불 규정
(1) 행사일 5일전 인지: 은행 수수료를 공제 후 전액 환불
(2) 행사일 4일전부터 3일전까지: 참가비 50%를 공제후 환불
(3) 행사일 2일전부터 당일까지(미참가 포함): 환불액 없음
위와 같이 행사 참여 취소 시 행사비 환불을 명심하시어 불필요한 낭비를 줄이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회비를 입금하시고 대기자로 기다리셨다가 참여를 못하시는 회원님들의 불편함을 없게 하고자 함이오니 이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9. 문의전화: 010-8954-2554 또는 010-9144-2564
10. 주의사항: 모든 걷기의 안전에 대해서는 참석자 본인이 책임을 지셔야 합니다. 카페나 진행자는 안전사고에 대하여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습니다.
@이프로 장해숙 참가댓글을 삭제한게 죄입니다/저의 말씀은 입금확인된 참가자가 몇명인데, 참가인원이 초과되었으니 대기자로 처리됨을 매일 정리하라는 말입니다 /
이프로님은 마치 내가 참가비만내고 참가시켜 달라는 얘기처럼 들리는군요/ 사단법인체로 등록하고 정부보조를 받는지는 모르지만 독점적 사고가 하늘을 찌르겠네요/ 전주에서 서울로 버스를 운행하는 고비용적 모객등 불합리한 고비용을 해결하는데 노력하시기바랍니다/ 말귀를 못알아들으면 차후 다시 말씀드리지요!
@山經表 산경표님의 댓글에 답을 드리기위해 전화를 드렸으나 전화를 받지 않아 이곳에 답을 드립니다
참가댓글 신청을 삭제한것은 죄가 아니라 산경표님과 총무 인 제가 소통할수 있는 길을
차단해 버렸기에 정리하는데 시간차가 있었던거라고 생각합니다
대기자이오니 입금하시고 기다리라고 답을 드린것은 아직 기행에 대기신청자를 받는중이고
먼저 신청한 사람이 취소를 하면 함께 가실수 있기에 입금 하시고 기다려 주십사 말씀드린것 입니다
우리땅걷기 는 사단법인 으로 등록은 되어 있으나 정부 보조는 받지않고 회원님들의 참가비로 진행합니다
최소의 경비로 최대의 효과를 내려고 무단히 노력을 하고 있는 오프라인 기행 답사 단
@山經表 체 이지요
독점적 사고가 하늘을 찌르듯 보셨다면 그것은 산경표님이 느끼신것이니 그것에 답을 드린진 않겠습니다
우리땅걷기 기행에 얼마나 참석하셨기에 이런글들을 누구나 읽을수 있는 오프라인에 거침없이 쓰실수 있는지 제가 느끼기엔 산경표님의 독점적 사고가 하늘을 찌릅니다
저희 총무진들은 각자 자기 직업을 가지고 일을 하는사람들이고 월급을 받지 않고 기행의 순조로운 진행을 위해서 봉사하는 총무님들이오니 누가 가지 않도록 적절한 단어를 사용 해주셨음합니다 서로에게 상처를주는 단어 사용은 금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로 마음에 상처를 입다보면 누가 이많은일들을 봉사로써 총무 을할수있을까요 ?
@山經表 결국은 기행 경비를 올려 상근 간사를 채용해야 하지 않을까요 ?
아직도 산경표님 말귀를 제가 못 알아 들었나요?
전주에서 서울로 버스를 운행하는 것은 저희 진행 일정이고 고비용적 모객등 불합리한 고비용이라 생각 하시면 참가를 안하시면 됩니다 저희 카페는 문화 사학자 역사 관련 저술 활동을 왕성하게 활동하시는 우리땅걷기대표 신정일 작가님과 우리강산을 두발로걸으면서 문화답사 기행을 목적으로 하는 단체 입니다
이점 아시고 신청 참가 해 주셨음 합니다
모든 참가 신청은 본인의 선택이라고 봅니다
참가합니다/신현희 010-7929-8460/여/서울출발 /입금완료
참가합니다/김은녀 010-4787-6122/여 /전주출발/입금완료
대기 신청합니다..
대기신청/010-2377-7983/자리 있으면 연락 부탁 드립니다.
입금완료 입금자 블루제이
사정이 생겨 기행 참가를 취소합니다
참가비 환불 부탁드립니다
농협 242-12-044722 박인숙
일이 생겨서 기행 참가를 취소합니다. 죄송합니다.계좌번호는 문자로 보내겠습니다
갑자기 일이 생겨 취소합니다
죄송합니다
계좌번호 농협 511065-52-029799 김은녀
타이슨님 참가/ 남2/ 010-2256-1881/ 서울탑승
대기자 명단에 올려주세요. 정지윤 외 1명 /010 2610 1802/ 전주출발. 미입금
취소자가 나오면 연락 드리겠습니다
현제는 44명 마감입니다
@이프로 장해숙 입금확인 했습니다
총무님~~^^ 대기자 명단에 올라 갈 수 있을련지요^^/김은경/010 4324 3453/서울/미입금
어쩌나요 마감입니다
많은 아쉬움을 남기며~
이번 기행은 취소해야 할듯 싶어요...
다음 길 에서 반갑게 뵙기를요^^
박희순 김형선
대기자명단 올립니다 박양덕 전주출발
대기명단에 올릴수 있을지요..
민보영 서울 010 6249 1249 입니다
현재는 마감입니다.
@반야 ♤ 네^^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