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 종주를 하면 이른 새벽 산행을 시작하게 된다. 자주 듣는 울음 소리가 있다. 자신의 영역에 누군가 틈입했다고 느낀 순간, 겁을 먹은 건지 아니면 나가라고 경고하는 것인지 혼란스럽게 내지르는 소리다. 굉장히 소름끼친다. 처음에는 길을 잃은 지 오래 돼 야성에 길들여진 들개의 울부짖음인가 싶었다. 하지만 들으면 들을수록 개과 동물은 아니란 생각이었다.
그러다 대간 종주 9회차로 지난 10일 속리산 아래 신의터재를 출발해 갈령까지 가는 길에 나는 녀석들을 세 차례나 만났다. 머릿속으로 녀석과 조우한 시간을 되새기며 걸었기 때문에 시간까지 기억하지만 여기 적시하면 어느 정도 녀석들을 만난 곳을 짐작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러진 않겠다.
첫 만남은 오르막이 끝나 문득 내가 길 위에 나타났을 때였다. 녀석이 나무 높이 10m 쯤에 올라가 있었다. 홱 날 돌아봤다. 눈이 마주쳤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나도 놀랐고, 녀석도 많이 놀란 눈치였다. 쏜살같이 나무를 내려와 반대편 수풀 속으로 들어갔다. 원숭이를 많이 닮았다고 생각했다. 덩치는 70cm정도로 꽤 큰 편이었다.
그런데 얼마 뒤에 또다른 녀석을 만났다. 나를 본 녀석은 그 전 녀석보다 훨씬 여유있는 걸음으로 종종 거리며 앞서 걷더니 일순간 수풀 속으로 종적을 감췄다. 그리고 소리만 들렸다. 재빠르게 몸을 숨기려 풀섶을 건드리며 나아가는 소리.
세 번째 녀석은 첫 번째 녀석과 거의 비슷하게 나무 위에서 낮잠을 느긋하게 즐기다 나를 발견하고 쏜살같이 나무를 내려와 풀섶에 몸을 숨겼다. 그 뒤 산행 내내 나는 머릿속으로 삵은 아닌 것 같고, 스라소니도 아닌 것 같고, 족제비와 아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족제비치곤 컬러가 화려한 편이고, 원숭이와 닮은꼴이란 점이 마음에 걸렸다.
다음날 늘재에서 갈령까지 가는 길에서도 녀석을 한 번 마주쳤다. 오전이었던 같고, 오후였던 것도 같고, 지금에 와서 생각하려니 당최 헷갈린다. 여튼 이른 아침 길에 들면 한 사람도 마주치지 않는 호젓한 길이라 그렇게 귀한 녀석들을 만난 것이다.
그런데 부처님오신날을 하루 앞둔 지난 14일 대야산 수직암벽에서 미끄러져 추락하는 뜻하지 않은 부상을 입은 뒤 블란치재에 세워져 곰넘이봉과 버리미기재 쪽으로 넘어가지 말라고 경고한 안내판이 23일에야 떠올랐다. 그 안내판에는 '이 탐방로는 백두대간 구간으로 삵, 담비 등 멸종위기 동물이 서식 보호 중'이라 적혀 있었다. 그걸 보고 '아 담비' 했던 기억도 함께 떠올랐다.
24일 새벽 나무위키에 '담비'를 검색하니 '한반도에는 노란목도리담비와 검은담비가 자생하지만 검은담비는 한반도 중남부에서 멸종돼 현재 남한에는 노란목도리담비만 서식한다'고 한다. 또 브런치 스토리 책공장 님의 글에 올라온 사진을 본 순간, 아 이 녀석이구나 싶었다. (물론 앞의 산행 때 휴대폰 카메라 앱을 켜 촬영하려 했으나 녀석들이 사라진 뒤였다)
나무위키의 설명에 따르면 아시아에 서식하는 노란목도리담비는 60cm 길이의 몸에 길고양이를 사냥할 수 있으며 고라니와 멧돼지, 산양 등 자신의 몸집보다 훨씬 큰 짐승들의 어린 개체를 잡아 먹기도 한다는 것이다. 말벌 등을 없애 양봉농가에 작지 않은 도움을 주기도 한단다. 또 2020년 상주 속리산에서 카메라에 포착된 적이 있단다. 대한민국 환경부에서 지정한 멸종위기 야생생물 Ⅱ급으로 보호받는 몸이다.
귀한 녀석들을 이틀 동안 네 차례나 조우한 셈인데 물론 확증된 것은 아니다. 사진을 찍지 못했으니 그저 내 눈에 그렇게 띈 것뿐이다. 담비가 나무를 그렇게 잘 타는지 확신하지 못했는데 웹 서핑을 통해 녀석들이 굉장히 편안하고 느긋하게 나무 위에서 지낸다는 것을 확인했다. 하지만 그 괴이쩍고 소름끼치는 소리의 주인공이 노란목도리담비인지 확신할 수 없다. 그저 그 울음의 주인공이 그 녀석이 아닐까 짐작할 따름이다.
조금 더 남쪽 구간에서는 하산 길을 잘못 들어 아주 외지고 벌목이 끝나 한적하고 황량한 산판 자락에 발을 들일라치면 고라니가 역시 괴이쩍은 울음을 토하며 겅중겅중 뛰어 달아나는 모습을 두 차례 정도 봤다. 멧돼지가 온산을 뒤집어놓은 듯한 모습을 본 것은 셀 수 없이 많다.
7~8년 전 대간 종주를 했던 한 선배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땅을 조금 파서 김장비닐 깔고 누워 낙엽을 모아 덮고 자곤 했다. 그런데 한밤중이나 새벽에 짐승이 다가오다가 흠칫 놀라 괴성을 지르곤 하는데 나도 놀라 소리 지른다. '내가 더 무섭다!'" 대간 길에 사람과 짐승이 누가 더 놀랐는지 재는 것 같아 우습기도 하다.
몸이 조금 나아지고, 한여름을 피해 가을에 대간 종주를 이어간다며 노란목도리담비나 그보다 훨씬 몸집이 작은 족제비 등을 더 자주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물론 이른 아침, 그들의 공간에 발을 들인 나의 무례함을 용서해달라고 싹싹 빌 것이다. 마음 속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