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인권 관련 역사적 현장을 보존하고 시민들에게 널리 알리기 위해 근현대사에서 인권 탄압에 맞서온 명동성당과 중구 세종대로의 6·10항쟁 선언 현장 등 인권 수호의 생생한 역사를 간직한 장소에 ‘서울시 인권 현장 바닥동판’을 설치하였다
(2019년 6월 기준 총 61곳에 설치되어 있다)
∇= 국가 폭력, ○ = 시민 저항, □ = 제도 내 폭력
주소는 답사하면서 동판의 위치를 기준으로 하였다
⑬ 조선어학회 터 (서울시 종로구 율곡로 3길 74-23, 화동 129-1)
1921~1942
문맹을 퇴치하고, 우리 말글의 보루로서 언어 주권을 지키던 학회가 있던 자리
주시경과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장지영, 최현배, 이희승 등)이 1908년에 국어 연구와 발전을 목적으로 창업한 국어연구학회의 맥을 이은 조선어학회가 있던 곳이다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몇 인사는 감옥에서 죽기까지 하면서 아픔을 치룬 후 해체 위기를 극복하고 1945년 해방 후에야 다시 모여 '한글학회'로 이어졌다
조선어학회 사건 수난자 모임인은 조선어학회 사건이 1942년 10월 1일 발발한데서 ‘십일회’라 칭했다
⑭ 국보위 터 (서울시 종로구 삼청로 30, 소격동 165-10)
1980~1981
삼청교육대 등 가혹한 인권탄압을 기획한 국가보위비상대책 위원회의 자리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1980년 5월 시국을 수습한다는 명분으로 국회를 해산하고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를 설립했다
그 산하에 사회정화위원회가 있었다
국보위는 1980년 8월 사회악 일소 특별조치 및 계엄포고령 제19호를 공포하고 삼청교육대라는 강제구금시설을 만들었다
(8월 27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전두환 국보위상임위원장 이 11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국보위는 국가보위입법회의로 개편되었다)
국가보위입법회의는 신군부의 원활한 민정이양을 위한 모든 조처를 마련한 후 11대 국회의 개원과 더불어 해산되었다
⑮ 4·19 최초의 발포하는 현장 (서울시 종로구 효자로 13길 45, 효자동 150)
1960.4.19
경찰 발포로 시민·학생 1백여 명이 쓰러진 자리
1960년 4월 19일, 대학생, 고등학생, 일반 시민, 심지어는 어린아이까지 합세하여 시위 인원은 10만 명을 육박하게 되고, 대규모 시위대로 번져 국회의사당, 경무대, 이기붕 자택 쪽으로 진출을 시도하였다
처음 경찰은 공포탄과 최루탄을 사용해 시위대를 진압하려 했지만, 그것으론 막지 못해 이내 실탄을 사용해 무차별 발포를 시작합니다
이 순간 21명이 사망, 172명이 부상을 당하게 된다
이 진압은 하루 종일 이어져 하루 동안 희생된 사람은 총 104명이 이르게 되자 계엄령까지 선포되어, 시위대와 경찰 또는 계엄군 사이에서 전쟁과도 같은 격전이 벌어진 날이었다
⑯ 궁정파출소 터 (서울시 종로구 자하문로28길 12, 청운동 89-113)
1955
하녀와 노동자의 중간위치에 있던 식모가 누명을 쓰고 고문을 당하는 등 인권이 유린되었던 곳
‘식모’는 한자에서도 알 수 있듯이 부엌일을 해주는 여자를 말하며 유사어로는 식비(食婢)가 있다
‘식비’는 한자 그대로 부엌일을 하는 여자 종이다
식모는 1960년대까지는 ‘하녀’라 불리기도 했고 현대에 와서는 ‘가정부(家政婦)’라고도 하는데 모두 노비제도에 연원을 두고 있다
식모에 대한 폭행은 도둑 누명과 관련한 게 많다
파출소서 옷 벗기고 고문(1962년 11월 7일), 순경이 6시간 고문(1964년 1월 5일), 경찰가족이 인두로 지지고(1965년 10월 29일), 반치 골방에 가두고 화상 입히는 일(1965년 12월 3일) 등이 있었다
(궁정파출소와는 무관한 사건이다)
⑰ 형평사 터 (서울시 종로구 세종대로 175, 세종로 81-3)
1923.4.25
이곳에서 백정들의 신분해방운동이 시작되다
일본 관서지방에서 전개된 수평(水平)운동의 영향을 받아 1923년 4월 25일 진주에서 창립된 백정들의 인권해방운동 단체로 창립 목적을 계급 타파, 공평한 사회 건설, 모욕적 칭호 폐지, 교육의 균등과 지위향상, 사회참여 의의의 앙양, 동지의 화목·협력·상조 등에 두고 백정이라는 기록을 호적에서 삭제할 것을 조선총독부에 요구하는 등의 활동을 벌였다
1924년 3월 천안에서 열린 조선형평사 혁신대회에서 형평운동의 혁신과 본부의 서울 이전을 결의함에 따라, 다음달 서울 시내 도렴동 144번지에 본부를 설치한 후 1926년 운니동 23번지에 사옥을 매입해 본부를 이전하였다
1931년 4월 제9회 대회에서 신파의 해소 건의안이 부결되어 해소문제는 구파의 승리로 일단락되었지만, 이후 활동이 위축되어 침체일로를 걷다가 1937년 5월 일제의 압력으로 해체되었다
조선의 신분제 잔재를 없애고 평등사회로 나아가고자 한 구체적이며 실질적인 인권 운동으로 평가되고 있다
⑱ 옛 사상계 터 (서울시 종로구 종로 60-1, 종로2가 102-3)
1953~1970
군사독재와 유신시대를 비판한 시사 월간지 사상계, 여기서 찍어내고 폐간하다
한국전쟁 중이던 1952년 4월 당시 피난 수도이던 부산에서 문교부장관 백낙준(白樂濬)은 국민사상연구원이란 기구를 발족했고 9월에 그 기관지로 ‘사상’이란 잡지를 창간한다
피난 정부의 기관지로 출발한 잡지였다
이때 국민사상연구원의 기획과장으로 잡지를 편집했던 사람이 장준하(張俊河)였다
‘사상’ 잡지는 1952년 12월 제4호를 발간한 뒤 접고 말았다
1953년 4월 1일 장준하는 ‘사상’의 속간을 위해 편집했던 내용을 중심으로 ‘사상계(思想界)’를 창간한다
그는 “동서고금의 사상을 밝히고 바른 세계관과 인생관을 수립하여 보려는 기도(企圖)는 변함없다”고, 사상의 창간정신을 계승했음을 밝혔다
1970년 5월호에 실린 담시(譚詩) ‘오적[五賊(다섯 가지 도적놈들)]’으로 잡지는 폐간당한고 발행인 부완혁은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되면서 사상계 시대는 막을 내렸다
장준하는 1975년 8월 등산길에서 의문의 추락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⑲ 고대생 4·18 피습 현장 (서울시 종로구 창경궁로 77, 예지동 176)
1960.4.18
그날 그들이 흘린 피가 1960년 4월 19일 민주혁명에 불을 댕기다
1960년 4월 18일 고려대학교의 3천여 명의 학생들은
<진정한 민주이념의 쟁취를 위하여 봉화를 높이 들자>는 선언문을 낭독, 국회의사당까지 진출하여 재선거 실시를 요구하였다
고려대 총장이던 유진오씨가 학생들 앞에 나와 정부요로에 반영시키겠다고 약속을 한 후 학생들은 종로에서 을지로 방향으로 해산을 시작했다
학교로 돌아가던 중(밤 9시 30분경) 종로 4가 천일백화점 앞에서 정치깡패 이정재, 임화수 일당들에게 습격을 받아 일부 학생들은 큰 부상을 입었다
1960년 4월 19일자 피습사건이 보도되자 서울시내 각 시위가 촉발되어 결국 자유당 독재의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 종로구를 마치고 중구로 넘어갑니다
첫댓글 서울시에서 잊혀 가는 서울의 근현대사(1894년 동학농민운동 ~) 속 인권사적 가치가 높은 곳을 시민, 전문가, 종교계 등에서 추천·발굴하여, 인권현장을 기억하고 시민들이 생활 속에서 접근하기 쉬운 인권 공간 조성했군요. 이백 님 덕분에 좋은 정보 알게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