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홍의 나쁜 생각792 - 그곳에 가면
그의 장황한 말을 끊임없이 들어야만 한다. 가끔 그곳에서 주최하는 음악회에 초대되어 기타 들고 찾아가면 그는 그의 장황한 말을 하고 싶어 음악회를 만든 것만 같다. 그래서 나는 내 연주만 하고 서둘러 돌아온다. 다신 가지 말아야지 생각하면서 그래도 잊지 않고 불러주니 고마운 마음으로 내 보잘 것없는 재능을 보태는 것이다. 그러나 그곳에 가면 한 가지 배우는 것이 있다. 항상 말을 줄여야 한다는 것. 시에 있어서도 말보다 이미지가 중요하다는 것. 그리고 별 표정의 변화가 없던 기타리스트 김광석도 생각이 난다.
그믐에 내용증명 / 김혜순
바닷속 깊은 곳에 있는 물 근원까지 들어가보았느냐?
그 밑바닥 깊은 곳을 거닐어본 일이 있느냐?
- <욥기>38:16
밤이 깊은데 심해에 사는 여자애가 내용증명을 하러 왔다
내용증명은 삼자가 나눠 가지는 법
우체국 여자는
한 장은 우체국 캐비닛에
한 장은 심해의 아이에게
마지막 한 장은 보낼 곳이 없었다
또 다른 여자애가 내용증명을 하러 왔다
사계절 눈물에 젖어 있는 엄마의 입술을 닦아주고 싶어요
혀처럼 안아주고 싶어요
우체국 여자는
만지면 터질 것 같은
심해 생물체 셋을 골라
증명서릏 우송할 수 있는지 심해어 사전을 주적였다
여자애의 엄마에겐 보내지 않았다
계속해서 아이들이 내용증명을 하러 왔다
바다의 바닥에도
에베레스트보다 높은 산이 있고
골짜기에 학교도 세워져 있고
성당도 있지만
믿음 위로는 올라갈 수 없죠
라고 말했다
조금 있다가 눈빛이 차가운 여자애가 내용증명을 하러 왔다
버리고 돌아서도 다시 따라오는 반려동물처럼 돌아왔다
얼음 성당 위는 너무 차갑고
얼음 성당 밑은 너무 고요해
한밤의 우체국 여자는
차가운 거울 같은 언어를 읽을 순 없었지만
한 장은 캐비닛에
그렇지만 두 장은 보낼 곳이 없었다
멀리 보이는 밤바다처럼 우꾹 솟아오른 책상 위에는
흰 종이로 만든 빙하의 퇴적층이 푸르게 치솟았다
남극의 아이들이 아무 때나 여자를 찾아와서
숨 쉴 때마다 소름이 돋고 흐느낌이 차올랐다
아침이 오면 종잇조각으로 변해버릴라
업무를 끝낸 여자가 차가운 아이의 몸을 껴안았다
수치와 노여움이 교대로 나타났다
우체국이 문을 닫을 무렵
다시 아이들이 내용증명을 하러 왔다
여자는 그들과 한방에 잠들었다
(다음 날 우체국에 갔더니 우체국 여자의 책상 위엔
옆자리를 이용하세요
라는 팻말이 놓여 있고
심해어 사전이 펼쳐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