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인권 관련 역사적 현장을 보존하고 시민들에게 널리 알리기 위해 근현대사에서 인권 탄압에 맞서온 명동성당과 중구 세종대로의 6·10항쟁 선언 현장 등 인권 수호의 생생한 역사를 간직한 장소에 ‘서울시 인권 현장 바닥동판’을 설치하였다
(2019년 6월 기준 총 61곳에 설치되어 있다)
∇= 국가 폭력, ○ = 시민 저항, □ = 제도 내 폭력
주소는 답사하면서 동판의 위치를 기준으로 하였다
<중구 16곳>
① 자유언론실천 선언 현장 (서울시 종로구 세종대로 152, 세종로 139-8)
1974.10.24
이곳에서 동아일보·동아방송 언론인들이 검열에 맞서 자유언론실천을 선언하다
1974년 3월 동아일보사 기자들을 중심으로 노조가 결성되었다
1974년 10월 동아일보의 서울농과대학생 데모사태 보도건으로 편집국 간부들이 수사기관에 연행되는 사태가 일어났고 이에 맞서 동아일보사 기자 180여 명은 1974년 10월 24일 ‘자유언론실천선언’을 발표했다
이와 함께 다음 3개항의 결의를 채택했다
① 신문 방송 잡지에 대한 어떠한 외부간섭도 우리의 일치된 단결로 강력히 배제한다
② 기관원의 출입을 엄격히 거부한다
③ 언론인의 불법연행을 일체 거부한다
이에 정부는 광고탄압이라는 방식을 동원해 자유언론실천운동을 제압하고자 했다
광고탄압은 12월 중순부터 본격적으로 행해져 동아일보에 대한 무더기 광고해약이 속출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독자와 시민들은 격려광고와 돕기운동을 통해 언론자유실천운동을 뒷받침했다
하지만 광고탄압이 장기화 되고, 경영주가 정부에 타협하게 됨으로써 자유언론실천투쟁은 이에 앞장섰던 기자들과 방송제작사 직원 대부분이 해고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② 청계천 광장 (서울시 중구 태평로1가 1)
시민광장, 민주주의와 인권광장, 표현의 자유의 광장, 시대의 쟁점이 있을 때마다 다시 태어나는 광장
서울 중구 청계천이 시작되는 세종로에 조성된 자연 친화적인 생태환경을 갖춘 광장이다
청계광장의 명칭은 청계천복원사업이 이루어지고 있던 2005년 서울시에서 열린 지명위원회에서 확정되었다
연중 다채로운 시민 문화행사 및 축제가 진행되기도 하며, 2016년 10월 29일에는 박근혜 대통령 퇴진운동의 제1차 촛불집회가 이곳에서 열리기도 했다
③ 한성권번 터 (서울 중구 청계천로8, 무교동 96)
1918~1942
일제강점기에 제도적으로 여성인권을 탄압한 대표적인 기생조합이 있던 자리
‘권번’은 일제강점기에 생겨난 일종의 기생조합으로, ‘한성권번’은 여성인권을 탄압한 대표적인 기생조합으로 알려져 있다
요릿집 출입을 관리하고 기생의 놀음차(화대)를 대신 받아주는 일종의 소속사 기능을 하면서 기생들의 입회비, 월회비, 수입 일부를 수수료 명목으로 떼어가며 기생들을 조직적으로 착취했다
④ 민족일보 터 (서울시 중구 태평로1가 62-13)
1961.2.13 ~ 5.19
혁신계 일간지 민족일보, 창간 석 달 만에 여기서 폐간되고 발행인이 조용수는 처형되다
1961년 2월13일 <민족일보>를 창간했다
사시로는 ‘민족의 진로를 가리키는 신문’ ‘부정부패를 고발하는 신문’ ‘근로 대중의 권익을 옹호하는 신문’ ‘조국의 통일을 절규하는 신문’ 등을 내걸었다
특히 <민족일보>는 중립화 평화통일론을 역설했다
통일이야말로 역사적·절대적 과제라 전제하고, 통일을 이룰 방법은 남과 북이 평화 공존할 수 있는 중립화의 길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민족일보> 는 박정희 군부에 의해 3개월여 만에 폐간되었고, 5·16 쿠데타 세력은 조용수 사장을 간첩으로 몰아 처형했다
2008년 법원은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⑤ 6·10 항쟁선언 현장 (서울시 중구 정동 3-8)
1987.6.10
6월 시민항쟁의 함성, 여기서 시작되다
1987년 6월 10일부터 6·29선언이 있기까지 약 20일 동안 계속된 '고문살인 은폐 및 호헌 철폐 국민대회'가 열렸던 6.10 민주화운동의 시작점이다
1987년 6월 10일 오후 6시 유시춘(작가)과 지선스님이 성당 종루에 올라 분단 42년을 끝내자는 의미에서 42번의 종을 치면서 민주화운동이 시작되었다
그녀들이 울리던 종소리에 맞춰 동시에 전국의 많은 성당과 교회에서도 종을 울려 호응을 했고, 주위의 거의 모든 차량이 경적을 울려 민주화 항쟁의 시작에 동참했다
결국 전두환 정부는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에 굴복해 대통령 직접 선거와 국민의 기본권 보장, 구속되거나 연금된 정치 인사들의 석방 등을 내용으로 하는 6 · 29 민주화 선언을 발표하였다
이에 따라 헌법이 개정되었고, 국민들은 16년 만에 대통령을 자신의 손으로 뽑을 수 있게 되었다
⑥ 덕수궁 대한문 앞 (서울시 중구 세종대로 99, 정동 5-5)
만민공동회, 3.1운동 등 역사의 고비마다 새 뜻을 일으켜 온 왕조시대의 광장이자 늘 오늘인 광장
덕수궁(경운궁)에서 고종이 승하한 날짜는 1919년 1월 21일이다
고종의 승하는 독살에 의한 것이라는 소문이 국민들 사이에 퍼져 나가 국민들의 배일 감정을 극도로 높였고, 전국에서 사람들이 망곡(望哭)하기 위하여 상복을 입은 채 서울로 모여들었다
이들은 대부분 대한문 앞에 모여 있었는데, 파고다(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문을 읽은 만세 부대들이 들이닥쳐 문상객들도 자연스레 시위대가 되었다
1919년은 묘하게도 한국 근대사의 거인들이 30년마다 세상을 뜬 시작이 되었다
1919년에는 고종 황제가, 1949년에는 독립운동의 거성 김구 선생이, 1979년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2009년에는 민주화 시대의 상징 김수환 추기경, 노무현, 김대중 대통령이 차례로 세상을 떠났다
2009년 노무현 대통령 서거 직후 대한문에는 분향소가 들어섰고, 어마어마한 추모객들로 장사진을 이루었다
⑦ 대법원 터 (서울 중구 덕수궁길 15, 서소문동 37)
1923~1995
일제와 독재시대에 다수의 인권침해 판결을 내렸던 사법부 자리
일제는 저항하는 조선인들을 가두고 죽이는 도구로 이 집을 지었다
수많은 독립투사와 애국지사가 이곳에서 억울한 판결을 받아 투옥되거나 불귀의 객이 되어야 했다
분단된 남쪽의 나쁜 권력은 이 집을 정권 유지 보조 수단으로 써먹었다
이 집에서 수많은 민주화 운동가와 선량한 시민을 또 그렇게 만들었다
진보당 사건이 그렇고 인혁당 사건이 그렇다
1970∼80년대 학생운동을 하던 많은 이들도 이 집에서 비슷한 판결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일제와 나쁜 권력의 하수인 노릇을 하던 이 집은 67년 만에 강 건너로 이사했지만, 이 집에서 거리낌 없이 나무망치를 두드렸던 자들에 대한 기억마저 지워진 건 아니다
아름다운 그림을 상설 전시한다고, 집에 대한 부끄러운 역사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핍박과 저항은 어떤 관계를 통해서도 변치 않는 '상수'라는 사실을 뱀의 얼굴을 한 이 집조차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⑧ 장애인 운동가의 인권투쟁 현장 (서울시 중구 무교로 6, 을지로1가 16)
2011.1.2
장애인활동지원 권리와 인권위 독립성 확보를 위해 우동민 열사 등이 투쟁한 곳
우동민 열사는 2010년 12월, 장애인활동지원법의 올바른 제정과 현병철 당시 인권위원장 퇴진을 촉구하며 인권위 건물을 점거하고 농성했다
2010년 12월 3일부터 10일까지 청사(당시 서울 중구)에서 진행된 점거농성에서 중증장애인 활동가를 위한 활동보조인 출입과 식사 반입을 제한하고 건물 내 엘리베이터 및 난방 가동 등을 중단했다
우동민 열사는 이명박 정권 당시 인권위의 반인권적 탄압으로 농성 3일 만에 폐렴 증세로 응급실로 이송됐고 이듬해 1월에 급성 폐렴 증세로 사망했다
국가인권위원회는 2010년 장애인단체의 인권위 점거농성에 참여했다가 숨진 우 씨에 대한 인권침해 사실을 인정하고 7년 만에 공식 사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