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즈다운 헤라클레스, 125년경, 대리석, 높이 193.5㎝, 로스앤젤레스 게티 빌라 소장
꽃 앞에서 꽃을 그리워하다
초가을 햇살이 아름다운 날 전시회를 열었습니다. 어느덧 마흔네 번째 개인전이 됩니다. 작품의 명제 ‘꽃의 시간’이란 제게 순수의 시간을 말합니다. 각박하게 돌아가는 세상의 시간이 아니라 꽃을 마주하는 순간 만나는 오롯한 서정의 시간입니다. 꽃을 바라보는 동안 내면에 흐르는 아름다운 정서, 선한 나를 마주하게 되는 감성의 시간을 의미합니다.
‘꽃의 시간’이란 작품 제목을 처음 사용하게 되었던 것은 2012년입니다. 깊은 슬럼프에 빠졌던 시기였습니다. 슬럼프가 있을때 마다 늘 찾던 곳이 꽃과 나무가 있는 자연이었는데, 그곳에서 말라비틀어진 꽃대, 흩어진 꽃잎들을 한동안 바라보았습니다. 그것들은 화석(化石)이 되어가고 있고 그저 복구될 수 없는 생명의 자취고 흔적으로 존재하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곧 자연은 소생하고 순환되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그라지던 시간의 무덤에서 돌아와 다시 생환의 가치를 지니게 되는 것. 어쩌면 죽은 것들은 없었던 것입니다. 기억 속에서만 사멸되었을 뿐. 저는 시간의 저편을 건너간 것들에게 생명의 빛깔을 입히고 싶었습니다. 그것은 위축되었던 저를 살리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제 화폭에는 마른 꽃잎들이 자리했고, 그것을 소생하는 신비로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안진의 作, 꽃의 시간, 90.5x72.7cm, 장지에 석채 혼합재료, 2019
자연을 보며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스스로에 대한 위로의 시간이었습니다. 자연을 통한 삶의 성찰과 사색의 명상적 시공간을 화폭에 담아내고 싶었습니다. 그 무렵 시작된 작품들을 그래서 ‘꽃의 시간’으로 불렀습니다. 꽃의 시간은 그저 위로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꽃과 같은 마음, 선한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 세상의 시간은 바뀌고 비로소 저의 시간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번 전시에는 또 다른 부제가 함께 했습니다. ‘꽃의 시간, 꽃 앞에서 꽃을 그리워하다’입니다. 이제 꽃을 바라보고 꽃을 대상화하고 꽃에 말을 거는 것을 넘어서, 꽃과의 사귐이 아니라 꽃의 은유가 아니라 그저 꽃 자체가 되고 싶었습니다. 자연과 일체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임을 압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가슴에 생채기를 내고, 고독하기를 감행합니다.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류시화의 시입니다. 애절한 그의 시구처럼 저도 꽃에 매달려봅니다. 눈꺼풀에 주렁주렁 슬픔을 매달고 한낮의 열기에도 섬뜩해지는 오한을 느끼며, 가슴에 시리게 파고드는 통증을 견뎌봅니다. 삶은 죽음을 전제로 하고 만남은 이별을 전제로 하고, 자연과의 일체 역시 한낱 꿈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 아픈 고독의 끝을 통과하고 자유를 만나고 싶습니다.
아주 오랫동안 자연은 저의 모든 감각을 열어주는 제한 없는 곳이었습니다. 그 자연 안에서 고귀한 생명력과 존재의 가치를 담아내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꽃 앞에서 꽃을 그리워하며 다시금 꽃의 내면을 깊이 바라봅니다. 보고 있는 동안 저의 시선은 그 꽃처럼 되어가는 기쁨이 만들어집니다. 꽃이 담긴 눈망울은 어쩌면 우리가 살아내야 할 세상을 향한 눈길이 아닐까요. 제 그림 속 꽃들은 이제 날개를 달기 시작합니다. 어디에도 갇히지 않고 훨훨 날아가는 자유의 풍경이 되고자 합니다.
[퍼온 글] / 출처; 2019.10.01 06:55에 받은 자유칼럼그룹의 e메일 / 필자소개; 안진의(홍익대학교 미술대학 동양화과 교수. 삶의 중심은 그림이지만 그림과 함께 일상을 풀어내는 방법은 글이다. 꽃을 생명의 미학 그 자체로 보며 최근에는 ‘꽃과 문명’이라는 화두를 붙잡고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저서 <당신의 오늘은 무슨 색입니까>)
100회 맞는 전국체전
개화기, 조선인에게 근대 스포츠는 낯설었다. 어느 양반이 땀 흘리며 정구를 하는 서양인을 보고 “그런 일은 하인이나 시킬 것이지”라며 혀를 찼다던가. 하지만 스포츠는 학교 체육을 중심으로 속속 도입됐고, 점차 나라 잃은 조선인들의 한을 분출하는 장으로 정착해간 것 같다.
▷1920년 11월 배재고보 운동장. 하얀 두루마기를 입고 야구모를 쓴 월남 이상재 선생이 시구를 하는 장면이 전해진다. 조선체육회(대한체육회의 전신) 주도로 열린 ‘제1회 전조선야구대회’다. 올해 100회를 맞는 전국체전의 효시가 됐다. 이듬해에는 정구와 축구를 더해 ‘조선체육대회’로 이름을 바꿨다. 당시 조선 민중은 스포츠에 열광했다. 대회 입장권이 대인 10전, 소인 5전이었고 입장권 판매로만 200원의 수입을 얻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관중 2000명 이상이 들어찼다는 계산이다.
▷조선체육회는 일제가 만든 ‘조선체육협회’에 대항해 1920년 7월 민족진영이 결성했다. 그해 4월 1일 창간된 동아일보의 변봉현 기자는 창간 열흘 뒤인 10일부터 3회에 걸쳐 ‘체육기관의 필요를 논함’이란 제하의 칼럼을 써서 분위기를 띄웠다. “8월 만국의 운동경기대회인 올림픽이 벨기에 수도 브뤼셀에서 열리는데, 국제 올림픽 대회에 왜 우리가 참가할 수 없는가. 권리가 없는 게 아니고 사용치 않음이다”라는 내용이다. 조선의 이름으로 조선의 청년들이 나가 실력을 겨루자는, ‘독립하자’는 말을 우회적으로 한 것이다.
▷현대사의 굴곡 속에서 우여곡절도 많았다. 전국체전은 1938년 조선체육회가 강제 해산되면서 중단됐다. 1945년 다시 열린 26회 대회에는 손기정 선수가 기수로 나섰다. 1955년 시작된 성화 봉송 첫 주자도 물론 선생이었다. 6・25전쟁 발발로 1950년 대회는 열리지 못했지만 1951년엔 광주에서 약식이나마 개최됐다. 1980년에는 5・18민주화운동으로 광주에서 열릴 예정이던 대회가 전북(이리 전주 군산)에서 분산 개최됐고, 1983년 대회 중에 아웅산 폭탄테러 사고가 나자 폐회식은 ‘북괴 만행 규탄 체육인 궐기대회’로 포장됐다. 메이저리그나 유럽축구 등 볼거리가 많아지면서 체전에 쏠리는 관심은 예전 같지 않지만, 여전히 전국 유망 선수들을 키워내는 터전이다.
▷4일 서울 잠실경기장에서 제100회 전국체전이 개막한다. 일주일간 2만5000여 선수가 47개 종목을 놓고 경합한다. 불꽃축제 등 대형 공연도 진행될 예정이라는데, 화려한 행사 이전에 ‘건민(健民)과 저항’을 창립이념으로 했던 100년 전 선조들의 뜻을 한 번씩 되새겨 보는 건 어떨까.
[퍼온 글] / 출처; 동아일보 / 서영아(동아일보 논설위원) / 2019-10-01 03:00
신체 부위의 이름
우리말 톺아보기
신체 부위의 이름들을 톺아보면 합성어 및 파생어에서 유래한 이름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먼저 귀와 눈 사이의 움푹 들어간 곳을 ‘관자놀이’라고 하는데, 관자놀이는 ‘관자’와 ‘놀이’의 합성어이다. 관자(貫子)는 조선시대에 양반들이 상투를 틀 때 머리가 흐트러지지 않게 머리에 두르는 망건을 상투에 동여매는 당줄을 꿰는 단추 모양의 고리를 말하는데, 망건을 쓰면 관자가 눈과 귀 사이의 움푹 들어간 부위에 닿게 되어 얼굴 맥박이 뛸 때마다 관자가 움직인다는 데에서 관자놀이의 명칭이 유래했다. 관자놀이에서 ‘놀이’는 ‘일정하게 움직이다’는 의미의 동사 ‘놀다’의 어간에 명사형 접미사 ‘-이’가 결합한 말이다. 관자놀이는 눈과 귀 사이의 맥박이 뛰는 곳이기 때문에 급소로 알려져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무릎과 발목 사이의 뒤쪽 근육 부분을 이르는 ‘종아리’는 발꿈치를 뜻하는 한자 ‘종(踵)’에 접미사 ‘-아리’가 결합한 파생어에서 유래했다. 국립국어원 ‘어휘 역사 정보’에 따르면 17세기 문헌에 ‘죵아리’의 형태로 처음 나타났는데, 당시에 치음이었던 ‘ㅈ’이 근대 국어 시기에 구개음으로 바뀌어 ‘죵’과 ‘종’의 발음이 구별되지 않으면서 19세기 문헌부터 ‘종아리’로 쓰이게 되었다.
팔 밑의 오목한 곳을 이르는 ‘겨드랑이’ 역시 겨드랑이를 뜻하는 명사 ‘겯’에 접미사 ‘-으랑’이 결합한 파생어에서 유래했다. ‘어휘 역사 정보’에 따르면 17세기 문헌에 ‘겨드랑’과 ‘겨랑’의 형태가 함께 나타났고 18세기 문헌에는 여기에 접미사 ‘-이’가 결합한 ‘겨드랑이, 겨랑이’의 형태가 나타났으며 19세기 문헌에는 ‘겨드랑이’로 통합되어 현재에 이르렀다. 현재 ‘겨드랑이’와 함께 ‘겨드랑’도 동의어로 사전에 등재되어 있다.
[퍼온 글] / 출처; 한국일보 / 유지철(KBS 아나운서) / 2019.09.30 04:40
루드베키아
問鼎天下의 지혜
역대 최대 규모 열병식 준비한 중국
"천하를 통치하는 건 무력 아닌 德"
중국 사서에 적힌 열병(閱兵)의 기원은 신화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하(夏) 왕조를 연 치수의 달인 우(禹)임금이 부족 우두머리들을 불러모았을 때 병장기를 깃털로 장식하고 악기를 연주해 환영했다고 한다.
기원전 11세기 춘추시대를 연 주(周)나라 무왕도 상(商)나라 대군과 최후의 결전을 앞두고 대규모 관병(觀兵)식을 거행하며 “하늘을 대신해 무도한 주(紂)왕을 벌하겠다”고 맹세한다. 이 시대 열병식은 엄격한 군율을 세우면서도 인접 제후들에게 군 위용을 과시해 겁박하는 수단이었다고 한다.
사회주의 중국이 건국한 뒤 인민해방군 열병식은 모두 18차례 열렸다. 국공내전에서 승리한 직후인 1949년 10월 1일 개국 행사의 하이라이트로 열병식이 채택된 데 이어 이듬해 열병식에서 주더(朱德) 총사령은 “조선전쟁의 발발에 즈음해 해방군은 전투를 준비하라”고 명령한다.
문화대혁명에서 살아남아 군권을 장악한 덩샤오핑이 1984년 주관한 열병식에서는 중국제 전략미사일이 처음으로 외신 카메라에 잡혔다. 중국의 열병식이 국경절 ‘구경거리’를 넘어 국제정치적 의미를 지니게 된 것도 이때부터다. 2015년 박근혜 전 대통령까지 주빈으로 참석한 열병식 주제는 ‘항일 및 반(反)파시스트 전쟁 승전기념’이었지만 한국, 일본, 동남아시아 등 인접국은 미국과 한판 붙을 수도 있다는 중국의 결기를 읽었다.
1일 열리는 중국 건국 70주년 기념 열병식도 마찬가지다. 1만5000 정병(精兵)이 톈안먼 광장을 행진하는 사이사이에 160대의 공군기와 580대의 첨단 군사장비가 등장할 예정이다. 남중국해를 오가는 미국 항공모함과 한국의 사드(고고도 미사일방어체계) 포대를 일순 타격할 수 있는 무기부터 일본의 레이더망과 미 본토를 사정거리 안에 둔 대륙간 탄도미사일 등도 더욱 개량된 버전으로 카메라에 노출될 것이다.
덩샤오핑이 유지로 남긴 도광양회(韜光養晦)는 ‘최강 미국이 눈치채지 않도록 은인자중하며 국력을 기르라’는 의미였다. 그러나 종합국력이 미국의 턱밑에 이른 중국이 더 이상 은인자중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중국이 남중국해 무인도에 군용 활주로를 닦자 미국은 동북아에 중거리 미사일을 배치할 계획을 공개했다. 두 강대국이 코를 맞대고 대치하면 불똥은 인접국으로 튀기 마련이다.
중국 춘추전국 시대는 군사강국 진(秦)이 열국을 병합하면서 막을 내리지만, 이 시기 전반에 걸쳐 가장 영향력이 컸던 나라는 800년 사직을 지킨 초(楚)였다. 남방 오랑캐 취급을 받았던 이 나라 장(庄)왕은 북방 터줏대감 진(晉)과의 전면전에서 승리하고 춘추오패에 오른 인물인데, 후대 중국 사회에선 장왕의 칭패(稱覇)보다 천자의 나라인 주의 서울(오늘날 낙양) 지척에서 벌인 무력시위가 더 자주 회자된다. 이를테면 장왕의 열병식이다.
초군의 위세를 염탐하러 온 천자의 대부 왕손만에게 장왕은 “주 왕실의 구정(九鼎)은 도대체 얼마나 무거운가”라고 물었다. 정은 제후들이 열망하는 천하대권의 상징이었다. 초 군의 창 날만 녹여도 그따위 정은 수십 개 만들 수 있으니, 무력으로 접수할 수 있다는 ‘무엄한’ 비유였다. 왕손만은 “천하를 통치하는 것은 덕이지, 정의 무게가 아니다”는 현답으로 장왕의 대군을 물리게 했다.
중국의 역대 최대 규모 열병식을 앞두고 문정천하(問鼎天下)의 고사가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
[퍼온 글] / 출처; 한국경제신문 / 박래정(베이징LG경제연구소 수석대표) / 2019.10.01 00:04
이동과 소통이 자유로운 건강한 사회
[지구 이야기]
구성원에게 다양한 기회가 주어지고 계층 간 이동과 소통이 용이하면 건강한 사회로 평가된다. 고인 물이 썩는 것처럼 폐쇄적인 사회는 생기를 잃기 마련이라 많은 나라들이 계층 내, 계층 간 순환을 원활하게 만들기 위한 제도들을 만들어 낸다.
지구도 마찬가지이다. 지구는 물리적 환경에 따라 지(地)권, 수(水)권, 기(氣)권으로 구분된다. 여기에 생명체가 살아가는 환경을 더해 생물권이 추가되기도 한다. 지권은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지구를 말한다. 지권은 지각, 맨틀, 핵이라는 구조로 세분화된다. 수권은 지표를 덮고 있는 바다, 기권은 지구를 둘러싼 대기권을 말한다. 겉으로 보기에 이들 권역들은 명확히 구분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권역별로 끊임없는 순환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지구 중심부 ‘핵’에 저장된 열에 의해 맨틀에서는 거대한 대류 운동이 일어나고 지표에서는 지각판이 만들어지고 소멸하기를 반복한다. 이 지각판 운동은 맨틀 물질 순환과 열 순환에 큰 역할을 한다. 수권에서는 염도와 수온 차이로 해류 순환이 일어나고, 기권에서는 온도와 압력 차이로 대기 순환이 일어난다.
권역별 순환 운동의 공통적 원동력은 열이다. 핵에서 나오는 열과 태양 복사열, 지구 표면에서 반사되는 지구복사열이 바로 그것이다. 최근에는 인간이 만들어 내는 온실효과가 또 다른 중요 인자가 되고 있다.
지구에는 각 권역 내 순환뿐 아니라 권역 간 이동과 상호 작용도 있다. 수권과 기권 간에는 바닷물이 수증기로 전환되는 증발산 현상, 수증기가 물로 변환하는 강우 현상으로 직접 순환 과정을 만들어 낸다. 변환된 수증기와 물은 이동한 권역에서 새로운 역할을 수행한다. 해류나 해수온도 변화로 기후와 기상 환경이 변화하기도 한다. 반대로 엘니뇨, 라니냐 현상처럼 기권의 온도와 바람 세기의 변화가 해류와 바닷물 온도를 변화시키기도 한다.
지권은 화산 활동과 판구조 운동을 통해 기권에 영향을 미친다. 화산 활동으로 맨틀 내에 포함된 막대한 가스와 수증기가 대기 중으로 배출된다. 지각판의 상호 충돌로 만들어진 지표면 융기와 산맥 형성이 기후 변화를 초래하는 등 특징적 기상 현상을 만들기도 한다. 높은 산맥을 넘는 바람이 고온 건조해지는 푄현상과 산맥을 기준으로 강수량과 강설량 차이가 나타나는 것은 좋은 사례이다.
반대로 기권은 강수와 바람으로 지표에 침식과 퇴적 작용을 일으켜 지표를 변형시킨다. 지권과 수권의 연결통로는 지각판이 새롭게 만들어지는 중앙해령과 지각판 충돌대이다. 중앙해령으로부터 나오는 고온의 맨틀 물질로 바다엔 칼륨과 염소 이온들이 풍부해지고 마그네슘이 감소한다. 반대로 지각판 위에 쌓인 해양 퇴적물 내에 포함된 많은 물들은 지각판이 충돌대를 통해 지구 내부로 이동시킨다. 물이 풍부해진 맨틀 물질은 건조한 맨틀 물질에 비해 낮은 온도에 용융돼 화산 활동을 일으키기도 한다. 이처럼 지구의 각 권역은 끊임없이 순환하고 섞이면서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
지구에서 볼 수 있는 권역 간 이동 통로는 사회의 계층별 이동을 용이하게 하는 제도, 교육, 정책으로 볼 수 있다. 권역 간 이동 에너지원인 열은 우리 사회 구성원의 뜻과 열망에 비견될 것이다. 지구 내 모든 순환에서의 매개체는 물인 것처럼 사회에서 매개체는 사람이다. 건강한 사회를 위해 우리 모두가 노력해야 하는 이유이다.
[퍼온 글] / 출처: 서울신문 / 홍태경(연세대 지구시스템과학과 교수) / 2019-10-01 03:24
아이에게 코딩교육을 시켜야 할까요?
호기심 스스로 해결하는게 공부
코딩은 상상물의 온라인 구현
자기 생각 만드는 교육 절실
궁금한 걸 알게 되면, 뇌에서 보상을 표상하는 도파민이 분비된다. 해답 그 자체가 즐거움이 된다는 뜻이다. 궁금해했던 걸 배우면, 그 지식은 우리 머릿속에 훨씬 더 오래 남는다. 그게 바로 진짜 공부다. 그래서 공부가 재미있을 수밖에 없다. 공부는 원래 ‘도파민이 가장 많이 분비되는 활동’ 중 하나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공부는 ‘코티솔이 가장 많이 분비되는 활동’이다. 즐거움이나 보상은커녕, 스트레스 호르몬이 뇌를 흠뻑 적실 정도로 고통스러운 과정이다. 왜 암기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는, 궁금하지 않은 지식을 억지로 머릿속에 집어넣으라고 한다. 주어진 시간 안에 외운 것을 토해내야 하고, 이를 점수화해서 다른 학생들과 비교당한다. “요즘 학교 공부, 재미있니?”하고 물어보면, “어떻게 공부가 재미있어요? 말도 안 돼.” 의아한 얼굴로 답한다. 대한민국의 공부는 호기심이 거세된 가짜 공부다.
학교가 12년 동안 청소년들에게 제공해야 할 가장 중요한 교육은 무엇일까? 그것은 ‘무언가를 배운다는 것이 매우 즐거운 과정이라는 경험’, 즉 지적인 즐거움을 만끽하게 해주는 것이다. 그러면 평생 배우고 학습하는 인간으로 살아간다.
인간의 생물학적 수명은 점점 길어져만 가는데, 지식의 수명은 점점 짧아지고 있다. 20대 초반 대학에서 ‘전공’이라는 이름으로 몇 년 공부한 것으로 남은 인생을 살아갈 수 없는 시대로 접어들었다. 학교에서 구겨 넣은 지식은 결국 모두 잊히겠지만, 평생 스스로 독서를 즐기고 학습을 놓지 않는 어른으로 성장시킬 수만 있다면, 이보다 더 좋은 교육은 없다.
“20년 후에 가장 유망한 직업이 뭔가요?” 이보다 더 어리석은 질문도 없다. 20년 전 우리가 인공지능 전문가나 데이터 사이언티스트를 생각하지 못했듯이, 20년 후 어떤 직업이 유망할지 아무도 알 수 없다. 다음 세대를 교육하기 위해, 미래 유망한 직업을 전략적으로 접근했다가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미래에 낭패를 보기 십상이다.
교육의 목표는 세상이 아무리 바뀌고, 미래에 필요한 지식이 무엇이 되든, 그것을 배우는데 주저함이 없고, 혼자 너끈히 학습할 수 있는 평생 학습자를 길러내는 것이다.
“제4차 산업혁명 시대, 아이들에게 코딩교육을 해야 할까요?” 최근 들어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일 게다. 컴퓨터 코딩이란 그저 프로그래밍 언어를 배우는 것이라 생각한다면, 굳이 청소년 시기에 배울 필요는 없다. 괄호 넣기 문제를 풀 듯이 학원에서 따분하게 배우는 코딩만큼 해로운 것도 없다.
코딩이란 우리가 꿈꾸는 모든 것들을 컴퓨터 안에서 실제로 구현하는 흥미로운 과정이다. 심지어 세상에 아직 나오지 않는 것들을 상상하게 하고, 자신이 상상한 것을 온라인 안에서 실제로 존재할 수 있도록 창조하는 과정이 코딩이다. 자유롭게 상상하는 과정이 생략된다면, 그 후 무엇을 구현하든 그 과정은 고통스러울 뿐이다. 자신이 상상한 것들이 컴퓨터 안에서 구현되는 즐거움을 맛본 청소년들은 ‘코딩의 매력’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학교를 졸업한 청소년들은 무능하기 짝이 없는 어른으로 성장한다. 교과서가 통째로 머릿속에 들어있지만, 다들 찍어내듯 똑같은 남의 생각, 칠판에 고인 지식이라 상상의 질료가 되기 어렵다. 그저 암기만 하였기에, 살아있는 지식이 되기 어렵다.
말로는 우주선도 만들 정도로 그럴듯하게 떠벌릴 수 있지만 실제로는 라디오 하나, 나박김치 하나 만들 줄 모르는 사람들이 바로 대한민국 청소년들이다. 우리는 그들에게 인간의 본성과 우리 사회, 그리고 시대정신을 가르치고 그 안에서 사람들에게 정말 필요한 무언가를 생각해내는 능력을 길러주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폭넓은 독서와 글쓰기를 통한 깊이 있는 사고, 즉 인문학과 사회과학적인 사고과정을 가르쳐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만들 줄 알게 해야 한다.
내가 상상한 걸 실제로 구현하기 위해서는 기초과학과 공학기술에 대한 구체적인 학습이 필요하다. 내가 원하는 걸 만들기 위해 ‘힘과 운동’을 공부하고 2차 함수를 학습한다면, 그보다 더 머릿속에 쏙쏙 들어오는 학습법은 없다.
어릴 때부터 예술에 대한 폭넓은 경험을 제공해야 한다. 그저 모나리자 앞에서 사진만 찍고 오는 루브르 미술관 방문이 아니라, 우리 도시의 작은 미술관 그림 앞에서 두 시간씩 생각하는 기회를 제공해줘야 한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바로 이 가장 중요한 교육들만 빼고 다 가르친다.
[퍼온 글] / 출처: 중앙일보 / 정재승(KAIST 바이오및뇌공학과 교수) / 2019.10.01. 00:26
노숙자(盧淑子, 1943년생, 서울대학교 회화과 졸업) / 붉은 인동 / 53 x 45.5, 종이에 채색, 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