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5/02 1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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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김정호는 지인의 도움으로 무교동의 꽃잎이란 통기타 업소를 경영하기도 하였다.
무교동 골목은 그 당시 ‘낙지골목’으로 유명했다. 그 부근인 지금 영풍문고 자리에 ‘이름모를 소녀’를 만들고 부른 김정호가 경영하던 ‘꽃잎’이라는 통기타 업소가 있었는데 그곳은 그의 매니저 이상기와 친형처럼 김정호를 보살피던 최무성씨가 경제적 이중고까지 겪는 그를 위해 76년 10월 무교동에 '꽃잎'이라는 생음악 레스토랑을 맡겼다.
그래서 김정호는 꽃잎이라는 카페를 운영했고 '무교동 꽃잎'은 지금의 라이브 레스토랑이었는데
어두운 조명 아래 호프집처럼 꾸며놓고 양식과 생맥주를 팔았으며 낮에는 DJ 음악을 틀어주고
저녁에는 통기타 가수들이 노래를 불렀었다. 이곳에서 강은철, 김학래, 남궁옥분 등 여러 가수가
대중가수로서의 싹을 틔였다.
당시 편지를 부른 임창제씨가 메인 DJ를 봤고 당시 무명이었던 임하룡씨가 가수를 소개하며
사회를 봤었다. 83년 재개발로 꽃잎이 헐릴 때까지 꽃잎은 그의 유일한 음악무대였다.
이 해에 김정호는 좌절속에서도 작곡에 전념하며 생의 전부인 음악을 포기하지 않았다.
한달 중에 20여일은 한적한 남이섬이나 우이동 월벽산장에 칩거하며 꺼져가는 음악혼에 불을
지폈다.
이 글을 쓰면서 김정호는 타고난 재주에 비해서 왜 그리도 가난에 허덕였는지 궁금했다.
이승규 기자는 그의 글에서 그 이유를 밝히고 있다.
김정호에겐 숨겨진 미담도 많다.
남달리 정이 많았던 그는 정성기 때 어려운 후배들에게 용돈을 나눠주기 일쑤였고 딱한 친구에겐 오토바이를 사줘 생활할 수 있도록 했다. 원로가수 B씨가 어렵다는 얘길 전해 듣고 쌀 3가마니를 B씨도 모르게 사준 일도 있었다.
(당시 연예기자였던 원형걸씨의 회고담)
"업소 출연료 50만원 받아 줬다. 지금 가치로 계산하면 천만원 정도가 되는 큰 돈이다.
헌데 며칠 후에 차비가 없다는 것이었다.
어쨌냐고 물었더니 어머니를 드렸다고 하는데 아무래도 이상한 생각이 들어 확인을 해봤다.
역시 아니었다. 남몰래 다시 알아봤더니 친구들을 도와준 것으로 밝혀졌다.
오토바이를 한 대 사면 살아갈 수 있다는 친구에게 얼마.. 다른 친구에게도 얼마..이런 식이었다.
자신이 신세를 진 사람에게는 꼭 갚아야 했고 어려운 친구나 사람을 보면 참지 못했다“
그의 ‘인기 가수를 둔 친구들’은 거의 매일 밤 그의 출연업소에서 기다리다 차비 명목의
용돈을 가져가 빈털터리가 된 적도 여러 번 있었다“고 회상하며 김정호가 건강을 해친 이유를 얘기해 주었는데 ”그는 술은 별로 하지 않았지만 담배를 많이 피웠다. 초기증세 때 약을 건네주면 먹지 않고 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인천 요양소에서 6개월이면 완치될 수 있다는 진단을 받고도 그는 도중에 뛰쳐나오곤 했는데 월수입이 2백만원선(현재 화폐가치)이었으나 창작곡을 만든다고 거의 우이동 그린파크(호텔)에 묻혀 지낸 탓으로 실제 수익은 형편없었다. 그만큼 노래에 모든 것을 걸었다.
돈도 건강도 팽개친 채....“ 라고 김정호의 전 매니저 이상기씨가 회고했다.
김정호가 데뷔해서 숨을 거둘 때까지 매니저로 함께 했고 .... 그가 떠난 뒤 헌정음반을 제작하는가 하면, 1986년에 세워진 노래비 제작에도 앞장 섰던 이상기씨는 이런 기억을 갖고 있다.
01- 이름모를 소녀
02- 고독한 여자의 미소는 슬퍼
03- 그날
04- 꽃잎
05- 꿈속의 사랑
06- 나그네
07- 나는 가야해
08- 날이갈수록
09- 눈동자
10- 님
11- 달맞이 꽃
12- 무정한 사람
13- 별리
14- 봄 여름 가을 겨울
15- 빗속을 둘이서
16- 사랑의 진실
17- 사의 찬미
18- 외기러기
19- 외길
20- 잊으리라
21- 저 별과 달을
23- 하얀나비
24- 행복의 나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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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조용호. 1973년 '이름 모를 소녀'로 가요계 데뷔. 1985년 폐결핵으로 34세의 아까운 나이로 요절할 때까지 소박하고 작은 것에 대한 사랑을 어둡고 깊고 그윽한 필링으로 노래했던 가수. 경기도 금촌 탄현기독교공원묘지 그의 비석엔 생전에 남긴 불후의 명곡 '하얀 나비'가 묘비명을 대신하여 남아있음. 사후에 '님'이 실린 유고 앨범과 추모 앨범이 잇달아 발표됨. 이것이 김정호에 관한 짧은 약력이다. 그러나 그의 약력은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다. 그의 약력은 과거의 것도 현재의 것도 아니다. 그의 약력은 그칠 줄 모르고 타오르는 그의 노래처럼 미래의 어느 한 지점에 가 붙박여 있다. 그것은 이미 선행적인 시간의 축을 벗어나 궤도를 이탈하여 무한히 질주하는 별의 운명과 닮아있다. 그것이 바로 김정호의 노래이다.
김정호팬 카페 상반기 행사(2008년6월9일) 중에서 인용함
팬인 여성한분이 정성어린 모습으로 묘비를 닦고있다
김정호 팬카페운영진 참배모습
김정호와의 마지막 인터뷰
그는 52년 3월 27일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85년 11월 29일, 그는 떠났습니다. 33년 8개월간의 짧은 생애- 마치 '33과 3/1' 속도로 도는 레코드판처럼 그의 삶의 수치는 그 시점에서 멈췄지요.
제가 가졌던 그와의 인터뷰, 그 기억이 지금 새삼스럽습니다. 이미 15년 전 일을 떠올리기 위해 지금 이렇게 '꼼삐따(!)' 앞에 앉아 있으니-. 이제는 그만 묻어둬도 좋을 얘기를 새삼 떠올리느라 며칠이 우울하게 갔습니다. '김정호의 노래에 대한 추억'을 '윈버드'에서 보는 순간 그에게서 느껴왔던 애잔한 슬픔과 더불어 마치 빚을 지고 있다는 느낌이 한꺼번에 다가왔습니다. 필경 요 며칠 동안은 집에서건 사무실에서건 무슨 고민이 있는 사람처럼 보였겠지요.
지금 대충 헤아려보니 그의 잠적은, 75년 대마초 사건으로부터 시작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79년, 대마초 가수들이 모두 해금되어 하나, 둘씩 활동을 재개할 때도 그는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행방불명설' '잠적설'이 나돌기 시작한 것도 이 때부터로 온갖 추측 보도도 많았지요.
그러던 그가 84년, 홀연히 나타났습니다. 83년 6월부터 11월까지, 5개월이라는 최장 녹음시간을 기록한 4집 앨범으로. 호흡조차 힘들어져 한 곡 녹음하는 데도 수십 번씩 끊어, 편집해야 했던 이 앨범, 그리곤 결국 '유작'이 되어버린 앨범을 들고-. 이 앨범이 나온 뒤에도 그는 공개석상을 기피했습니다.
라디오에서는 이 앨범 중 '고독한 여자의 미소는 슬퍼'가 제법 방송을 타고 있었지만 그는 어느 새 '얼굴 없는 가수'가 되어 있었습니다. '폐결핵가수'라는 낙인은 이미 오래 전부터 찍혀져 있었기 때문에 그 동안 요양소에서의 격리 생활은 공개적으로 얘기되었고, 이 노래가 같은 요양소에서 보게 된 어느 환자를 모티브로 만들었다는 애틋한 얘기만이 화제가 된 채. 그러면서 또 몇 달이 지나갔습니다.
제가 그를 찾아내야겠다, 그리고 그 동안의 얘기를 들어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이 무렵이었습니다. 그와의 인터뷰를 위해 석 달을 집요하게 매달렸습니다. 부끄럽지만, 당시 주위에서의 제 별명은 '진돗개'였습니다. 한번 물면 놓지 않는다고-.
온갖 안테나를 동원해 그의 연락처를 알아내는데 성공했습니다. 정말 어렵게 그와 통화를 시도했는데, 그는 완강히 거절했습니다. 들을 얘기도, 하고 싶은 얘기도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매스컴-, 즉 TV- 라디오는 물론, 여타 신문사나 잡지사의 제의까지 모두 거절했다면서, 되려 저를 설득시키려 했습니다. 지금은 어느 누구도 만나지 못하는 입장을 이해해달라고도 했고, 또 통과의례처럼 자신이 사람들 앞에 나설 수 있을 때 가장 먼저 연락하겠다는 말도 빼놓지 않았습니다. 저도 이 즈음에서 그와 인터뷰한다는 것을 포기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정작 이러한 내 마음을 움직였던 것은 건강 여부를 묻는, 저와의 네 번째 통화에서였습니다. 이전처럼 전화를 먼저 끊지 않는다는 것과 기침소리 사이에 더듬더듬 말하길 '지금 힘들다, 그럼에도 더 고통스러운 것은 무료함(?)'이라고도 했고, 또한 이미 '소외'된 자신에 대해 관심을 가져주는 것이 '한편 고맙다'-라는, 그 것 때문이었습니다.
이 즈음에서 저와 매우 가까웠던(-그와도 가까웠던) '몇몇'의 도움으로 그와의 인터뷰 시간과 장소가 정해졌습니다. 그러나 그는 세 번씩이나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실바람, 바람, 바람-', 당시의 이 노래 구절처럼, 그 때 제 심정이 꼭 그랬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결국, 그와 만날 수 있었습니다. 어느 샌가 그도 마음의 반쯤은 열어놓고 있었던 게지요. 다만 조건은 그냥 만나는 것, 그리고 자기와 나누는 얘기는 절대로 기사화하지 말아달라는 것-.
그의 아파트에서였습니다. 그 핏기 없는 얼굴, 그리고 기침소리 속에 겨우 나누던 얘기들-. 정말이지, 이러한 식의 기사는 저도 결코 쓰지 않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송창식의 고집에 관해 얘길 했으며 김수철의 '별리'를 처음 들었을 때의 느낌에 관해 서로 격의 없이 의견을 나누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그는 제 얘기에 따라 빙그레 웃기도 하고, 간호원이 주사를 놓으러 왔을 때는 저에게 '잠깐이면 되니 기다리라'고도 했습니다. 그가 주사를 다 맞길 기다리는 동안에서야 비로소 저도 마감 때라 빨리 집에 가 밀린 원고들을 써야 한다는 게 생각났습니다. 어느 새 세시간이 지났다는 것도 그제야 알았습니다.
그 때부터 몇 번이나 일어서려 했지만 그가 자꾸 괜찮다고 했습니다. 그러던 그가 자신의 노래 '님'을 들어보았느냐 물었습니다. 물론 저는 그 때까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그는 매우 섭섭한 듯 해하더니 그 음반을 테이블에 올려놓았습니다.
'님-'.
그 때, 그 느낌이란-, 그 노래를 듣는 내내 저는 매우 놀랐고 마침내 엄습해오는 불길함까지도 어쩌지 못했습니다.
스킬보이스라는 록그룹을 결성하며 미8군 무대로 진출한 임창제가 이수영과 함께 듀엣 <어니언스>로 데뷔하려하자 자신의 일처럼 뛸 듯이 기뻐했던 김정호. 작곡한 노래들을 선물로 주었다. 어니언스의 데뷔앨범속에 수록된 김정호의 곡들은 두사람의 합의하에 임창제 이름으로 먼저 발표를 했다.
만약 히트를 하게 되면 그때가서 '이곡들은 김정호가 만든곡들'이라고 깜짝발표를 하고 '김정호에 대한 궁금증이 높아질 때 데뷔를 한다'는 계획이었다. 의리있는 임창제는 대표곡 <작은새>외에도 <사랑의 진실> <외기러기> <저별과 달을> 등 모든 곡들이 대히트를 하자 약속대로 KBS라디오방송에서 사실을 발표했다.
'김정호가 누구냐'는 대중들의 궁금증이 더해가면서 임창제의 손에 이끌려 73년 '이름모를 소녀'라는 데뷔곡으로 김정호는 대중들앞에 수줍게 모습을 드러냈다. 70년대를 풍미하며 지대한 음악적 영향력을 끼친 천재대중음악가의 등장이었다.
작은 가슴으로 큰 족적을 남긴 藝人
어니언스의 히트곡 <사랑의 진실> <작은 새>의 진짜 주인공이 밝혀지자 미8군무대에서 기타를 치며 <사월과 오월> 멤버로 잠시 활동을 하던 김정호는 TBC방송 신광철 PD에 의해 패티킴의 스페셜프로에 게스트로 출연하게 되었다.
이미 전국그룹사운드경연대회에서 가수왕으로 등극하며 솔로데뷔를 꿈꾸던 조용필과 함께 김정호의 동반 게스트 초청은 파격이었다. 폭발적인 반응속에 두사람은 대중들속으로 탄탄한 첫발을 내딛었다.
김정호는 이복형제에게 핍박받고 무대에서 숨을 거두는 허무맹랑한 내용으로 제작, 재상영 금지처분이 내려지기도 했다. 86년 10월 동료들에 의해 세워진 무덤앞 노래비에 새겨진 <하얀 나비>의 ‘때가 되면 다시 필걸. 서러워 말아요‘라는 노래구절처럼 인생을 구슬프게 노래한 그의 영혼은 <하얀나비>같이 그를 그리워하는 대중들의 곁에서 영원히 순백색의 날개짓을 하고 있다.
최규성 가요칼럼니스트
[출처] 하얀 나비 가 되어 우리곁을 떠난 가수 김정호<>|작성자 사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