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 그럼 작품의 의미적 국면을 형성하는 데 참여하는 마지막 요소인 <배경(背景)>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실까요? 종래의 시에서는 이 문제를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시란 시인의 사상과 감정의 표현이라고 생각하고, 화자(話者)의 행동과 발언만 주목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대로 접어들면서 배경의 문제는 주목받기 시작했습니다. 배경은 단지 작중 인물의 등장 무대 구실만 하는 게 아니라 존재(存在)를 구성하는 기본 요소이고, 같은 존재도 언제 어디에 놓이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지며, 시의 화제(話題)가 화자나 청자지향형에서 배경을 대상으로 삼는 화제지향형으로 바뀌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배경은 크게 <물리적(物理的) 배경>과 <상황적(常況的) 배경>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물리적 배경은 <시간+공간>으로 이뤄집니다. 그리고, 상황적 배경은 물리적 배경에 인간의 문제인 역사, 문화, 사회 등이 추가됩니다.
이들은 흔히 줄여 전자는 그냥 <배경(setting)>, 후자는 <상황(situation)>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런데, 전자는 인적 요소들이 빠져 있기 때문에 정적(靜的)인 속성이 강합니다. 그리고 후자는 인간의 문제를 포함하고 있어 가변적인 속성이 강합니다. 또 서정론(抒情論)에서는 배경을, 서사론(敍事論)에서는 상황을 더 중시합니다. 현재 시는 이 순간의 정서를 화제로 삼고, 서사는 사건의 진행 과정을 다루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배경은 다시 작품에 그려진 <텍스트 속의 배경>과 그 작품의 대상이 존재했던 <실제(實際) 배경>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리고 텍스트 속의 배경은 작중 인물의 등장 무대 노릇만 하는 <중성적 배경(neutral setting)>과, 인물의 성격을 부각시키고, 어떤 행동을 조장하거나 억제하는 <기능적(functional setting) 배경>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작품을 쓰려는 사람들이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서정적 장르에서 중시하는 물리적 배경을 중심으로 슬슬 시작해 볼까요?
당신은 <실제배경>과 <작품 속의 배경>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 질문은 아주 중요하니 곰곰이 생각하고 대답하세요. 이들의 차이를 모르면 언제나 중성적 배경만 채택할 테니까요.
뭐라구요? 텍스트 속의 배경은 시적 대상이나 존재했던 실제배경을 모방적으로 그리는 게 아니냐구요? 에이, 땡입니다. 실제배경과 작품 속의 배경의 차이는 입체적인 현실을 문자로 기호화한 정도에서 끝나는 게 아닙니다.
우선 실제배경은 <비의도적(非意圖的)>이고 <비인과적(非因果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좀 더 구체적인 예를 들까요? 지금 제 책상 위에는 램프 옆에 책받침대가 있고, 그 위에 이 글 초고의 프린트한 것들이 올려져 있고, 그 앞에는 스탬플러와 철침을 뽑는 도구, 다시 그 옆에는 라이터, 핸드폰, 재떨이, 지갑, 연필꽂이, 전화기, 화상 통신을 위한 PC 카메라와 마이크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뒤에는 바람에 펄럭이는 연분홍 커텐과 바다가 보이는 유리창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그 자리에 꼭 있어야 할 것들이 아닙니다. 그저 우연히 놓여져 있을 뿐입니다.
이와 같이 실제배경을 이루는 사물들은 우연히 그 자리에 놓여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글을 쓸 때는 이들 가운데 그 작품의 테마와 관계 있는 것들만 골라서 표현해야 합니다. 가령, '글쓰기의 어려움'을 주제로 삼아 글을 쓴다고 합시다. 이 경우, 핸드폰, 지갑, 화상 통신 기구들은 빠져야 합니다. 이들은 글 쓰기의 어려움에 별다른 관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텍스트 속의 배경은 그 <테마에 알맞은 것만 골라 의도적으로 배치한 풍경>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납니다.
그러나, 필요 없는 것들도 글을 쓰는 사람이 동기를 부여(motivation)하면서 인과관계를 맺어주면 달라집니다. 제 책상 위의 PC 카메라와 마이크는 지난 해부터 인터넷에 구축하고 있는 <한국문학도서관> 서울 프로그램팀과 업무를 연락하기 위해서이고, 탁상용 전화기가 있는데도 핸드폰을 함께 올려 놓은 것은 사방에서 걸려오는 전화를 받기 위해서이고, 호주머니 속에 들어 있어야 할 지갑이 나와 있는 것은 방금 신문값을 받으러 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문값을 주고 지갑을 책상 위에 펄썩 던지면서 원고 마감 날짜를 헤아려 보았다. 그때 컴퓨터 화면에서 뿅하며 화상 통신을 요청하는 신호음이 울렸다. 그리고 핸드폰과 탁상용 전화가 한꺼번에 울렸다. 아, 아. 이 원고를 언제 마치나 하는 생각이 스쳐갔다.'라고 인과관계를 맺어주면 불필요하게 보이던 것들도 모두 필요한 것으로 바뀌게 됩니다.
이와 같이 텍스트 속의 시간과 공간은 작중 인물의 것으로서, 실제배경을 작품 속으로 옮겨올 때는 인물의 심리 상태에 따라 <확대>·<대등>·<축소>·<삭제>되어 나타납니다. 다음 작품만 해도 그렇습니다.
술시(戌時)의 항구,
노인 한 분이 낚싯대를 접고
선술집 벽에 기대어 졸고 있다.
벽에 걸린 그림 속,
바람을 안은 프랑스 범선(帆船)이 한껏 부풀어오르고
등 푸른 참치 떼가 수면 위로 날아오르는데
그때마다 하이얀 비말(飛沫)이 갑판을 쌔리는데
술시의 항구,
아무 것도 잡히지 않는 바다를 깔고 앉아 노인이 졸고 있다.
- 강중훈, [술시의 선술집 간판] 전문
술시(戌時)는 밤 7시에서 9시 사이입니다. 이 시각 선술집 안에는 '프랑스 범선'을 그린 액자만 걸려있을 리가 없습니다. 노인이 앉아 있는 탁자와 의자도 있을 테고, 겨울철이라면 난로가 켜져 있을 테고, 그 위에는 물주전도 있을 테고, 주방에서는 부글부글 술안주가 끓고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액자 속 풍경만을 확대하여 묘사한 것은 액자 속의 바다는 고기가 풍부한 살아 있는 바다임에 비하여 노인의 바다는 어족 자원이 고갈된 바다고, 그로 인해 인간의 삶마저 활기를 잃었음을 그리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액자 속의 바다는 이 작품의 테마를 드러내기 위해 확대(擴大)된 <은유의 바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기능적인 배경이 되려면, 작중 인물의 성격(character)을 드러내고, 그의 욕망을 실현하기에 적합하도록 조직되어야 합니다.
밤비가 내리네
어둠을 흔들며 조용히 내리네
그리움이 늘어선 언덕에
마른 수수잎 소리가 들리네
아련한 파도 소리
고향집 울타리에 철석이는데
낮닭 우는 소리도
가슴에 차오르네.
- 차한수(車漢洙), [손·47 : 고향] 전문
이 시는 꼭 비가 내리는 밤에 썼다고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어쩌면 환한 대낮이나 폭풍우 치는 밤에 썼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비가 내리는 밤에 썼었어도 다른 것을 그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대낮으로 설정했다면 이만큼 절실한 작품이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조용히 내리는 비와 어둠은 누구나 생각에 젖어들게 만듭니다. 그런데, 대낮으로 설정하면 그런 도움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폭풍우 치는 밤으로 설정하면 어색한 작품이 되었을 겁니다. 그런 밤에는 누구나 밖으로 나가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 기능적인 배경이 되려면 그 배경이 화자의 심리 상태를 은유해야 합니다. 다음 작품은 1930년대에 쓰여진 것으로서 그리 상큼한 맛은 없지만 풍경 전체가 작중 인물의 심리상태를 은유하고 있습니다.
일층(一層)위에있는이층(二層)위에있는삼층(三層)위에있는옥상정원에올라서남쪽을보아도아무것도없고북쪽을보아도아무것도없고해서옥상정원(屋上庭園)밑에있는삼층밑에있는이층밑에있는일층으로내려간즉동(東)쪽에서솟아오른태양(太陽)이서(西)쪽으로떨어지고동쪽에서솟아올라서쪽에떨어지고동쪽에서솟아올라하늘한복판에와있기때문에시계(時計)를꺼내본즉서기는했으나시간(時間)은맞는것이지만시계는나보담도젊지않으냐하는것보담은나는시계보다는늙지아니하였다고아무리해도믿어지는것은필시그럴것임에틀림없는고로나는시계를내동댕이처버리고말았다.
- 이상(李箱), [운동(運動)] 전문
다른 사람이 이 작품을 썼다면 아마 '옥상 정원 올라서…'부터 쓰기 시작했을 겁니다. 그런데, 이 작품은 1층에서부터 2층과 3층을 거쳐 옥상까지 올라가는 과정을 모두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내려오는 과정도 각층을 모두 거론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띄어쓰기조차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시인을 심리학적인 방으로 연구하는 사람들은 이와 같은 반복을 상동증(常同症)이니 음송증(音誦症)이니 하고, 무엇인가 명확하게 말하기 어려울 때 나타나는 병리 현상이라고 규정합니다. 그러나, 또 다른 관점에서 보면 이동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변화가 없음을 드러내는 이 작품은 인생은 아무리 발버둥쳐도 새로울 것이 없다는 시인의 가치관 내지 작품의 테마를 은유하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