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린 여행5 - 오코넬 스트리트를 따라 강을 건너 남쪽에 트리니티 대학을 구경하다!
2022년 4월 25일 성 패트릭 성당 St. Patrick's Cathedral 과 크라이스트 교회 Christchurch Cathedral
를 보고는 더불린 캐슬 Dublin Castle 을 찾아 왕궁 을 구경한후 동쪽에 템플바 Temple Bar 에 도착
하니 통나무 맥주통들이 보이니 여긴 아일랜드의 펍 Pub 으로 22개의 술집이 밀집해 있는 지역 입니다.
시가지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오코넬 스트리트 를 걸어서 더불린을 동서로 가르는 리피강 Liffy River
에 놓인 오코넬 다리 O'conell Bridge 를 건너 북쪽에 이르니 보행자전용 거리로 The Spire
와 동상들이 늘어서 있는데 1916년 부활절 봉기의 전장인 GPO(더블린 중앙 우체국)을 구경합니다.
북쪽으로 걸으면 Dublin Writers Museum 이 있으니 제임스 조이스, 버나드 쇼, 윌리엄 예이츠,
오스카 와일드, 조나단 스위프트, 조지 버클리, 사무엘 베케트 등 영문학을 완성시킨
기라성 같은 작가 자료들이 있다고 합니다만 아침부터 너무 오래토록 걸은지라 가지는 못합니다.
동아일보에 왕은철 교수의 스토리와 치유에 색다른 애도란 제목의 칼럼이 떠오르니 토머스 스턴스 엘리엇
이 “현대에 있어서 최대의 시인- 확실히 영어로 쓴 최대의 시인-아니 내가 알고 있는 어떤 말, 그 말을
사용해서 시를 쓴 시인 가운데서 최대의 시인” 이라고 말한 바로 그 윌리엄 예이츠 를 추모하는 글 입니다.
“당신도 우리 처럼 어리석었습니다.” 어떤 시인이 동료 시인을 애도하며 쓴 말이니 애도의
말 치고는 무척 낯선데, 더욱이 마흔 살 넘게 차이가 나는 거장을 향한 말치고는
무례하기 까지 하지만 ‘W. B. 예이츠를 추모하며’ 라는 W. H. 오든의 시 에 나오는 말입니다.
오든이 시를 쓴 것은 예이츠가 세상을 떠나고 몇달 지나서였는데 오든은 예이츠를 존경하면서도 그의 현실
참여에는 회의적 이었으니 예이츠는 아일랜드 민족주의 운동의 중심 에 있던 사람이었고 영국 식민주의
로 부터 정치적, 문화적으로 독립 하는 것이 그의 목표였지만 그러나 그의 노력에도 현실은 그대로 였습니다.
사실 그 시는 오든 자신에 관한 성찰이었으니 그가 누구인가, 대단히 정치적인 시인이었으며 사회적
정의에 민감한 좌파적인 시인 이었습니다만 그러나 그는 시가 사회적, 정치적 변화의 도구여야
한다는 생각에는 회의적 이었으니 그가 보기에 시가 역사의 흐름을 바꾸는건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가 나중에 한 말에는 시는 2차 세계대전 중 단 한명의 유대인도 살리지 못했으며 사실이고
지금도 그렇지 않은가? 시는, 아니 예술은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에서 단 한명의 목숨도
구하지 못하니..... 그래서 오든은 이렇게 선언하는데 “시는 어떤 일도 일어나게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영문학을 통틀어 가장 유명한 시구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인정하기 싫어도 이것이 현실 이니 그렇다면 절망만 해야 하는가, 불의와 폭력이 판을 쳐도
손을 놓고 있으라는 말인가, 아니다. 역사를 바꿀 힘은 시인에게 있는게
아니니 시의 본령에 충실 하자는 말이며 그렇다면 오든이 생각하는 시의 본령은 무엇일까요.
“얼어붙은 연민의 바다” 를 깨고 “마음의 사막 속에서/치유의 샘이 시작되게” 하는 것이니 역사와 현실
에 상처받은 사람들을 언어의 힘으로 위로 하는 것이며 이것이 예술의 힘이자 한계요, 한계이자
힘으로 그는 위대한 시인 예이츠의 죽음을 애도하며 이러한 역설을 말하고 싶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윌리엄 예이츠 는 아일랜드 더불린의 영국계 프로테스탄트 집안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부터
문학을 비롯하여 오컬트나 아일랜드 신화 등 초월적 주제에 관심 을 품었고 이는
그의 문학적 성향에도 큰 영향을 미쳤으니 1889년 탐미적인 첫 시집을 발간한 이후로
그의 시는 사실주의적 묘사 를 발전시켜 나갔으니 그후 1923년 노벨 문학상 을 수상했습니다.
예이츠는 평생 신비주의나 심령론, 점성술 에 관심을 가졌으니 그는 일생동안 광범위한
주제의 글들을 탐독하고 초자연현상 연구단체인 “고스트 클럽 (The Ghost Club,
1911년)” 회원이 되었는데, 특히 에마누엘 스베덴보리의 글에 영향을 받았다고 합니다.
1892년 초에 예이츠는 “내가 신비로운 힘에 대해 끊임없이 연구하지 않았더라면 블레이크집에 단 한 단어
도 쓸 수 없었을 것이며, ”캐서린 백작부인(Countess Kathleen)“ 도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신비로운 인생 이야말로 나의 모든 행동과, 모든 생각과, 나의 모든 글의 중심이다.” 라고 저술했습니다.
신지학자인 모히니 차테르지(Mohini Chatterjee)가 연구했던 힌두교, 그리고 신비주의 등으로 부터 영감을
받은 예이츠의 관심은 훗날 그의 작품에서 큰 토대를 형성하게 되었지만 몇몇 비평가들은 지적
신뢰성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영향력을 무시하고 있으니 위스턴 휴 오든은 이러한 면에 “ 다 큰 성인
이 뻔한 마술과 쓸데없는 인도(India) 의식에 사로잡혀 우스운 꼴을 보여주고 있는 것” 이라며 비판했습니다.
Dublin Writers Museum 대신 오코넬 스트리트 옆 명품 쇼핑가라는 헨리스트리트 Henry Street 입구에
장난스러운 포즈를 취하며 서 있는 율리시즈, 더블린사람들, 젊은 예술가의 초상 의 작가 제임스 조이스
James Joyce 의 동상을 보는데 한국을 찾은 미국 대통령 바이든에게 말했다는 윤대통령의 말이 있습니다.
아일랜드는 조지 버클리, 조너선 스위프트, 제임스 조이스, 조지 버나드 쇼, 오스카 와일드, 윌리엄
예이츠, 사뮈엘 베케트, 브램 스토커, 프랭크 오코너 등 영문학사에 중요한 수많은
작가를 배출했으며 이 중에서 버나드 쇼, 예이츠, 베케트는 노벨 문학상 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윤 대통령이 아일랜드 태생의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의 작품 을 인용하며 건배사를 하자, ‘아일랜드계’
인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우리 함께 갑시다 (We go together)” 를 외치며 화답했는데 윤 대통령
은 바이든 대통령이 좋아하는 시인 예이츠를 인용한 것이니 예이츠는 1923년 노벨문학상을 받았습니다.
윤 대통령은 “예이츠는 ‘인간의 영광이 어디서 시작되고 끝나는지 생각해 보라. 나의 영광은 훌륭한
친구들을 가진데 있었다’ 고 했다” 라며 “한ㆍ미 양국은 서로의 훌륭한 친구다. 우리는 세계
시민 자유와 인권, 국제 사회의 평화와 번영 을 위해 굳게 손잡고 함께 걸어나갈 것” 이라 말했습니다.
아일랜드계인 바이든 대통령은 영국을 방문했을 당시 “가장 좋아하는 시인이 예이츠” 라고 밝히며 예이츠
의 작품 「1916년 부활절(Easter, 1916)」 을 언급했으니 아일랜드인들이 영국 통치에 반대해 봉기를
일으킨 사건과 관련된 작품으로 바이든 대통령은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는데
“여왕이나 왕실 인사들을 만나 고개를 숙이는 인사를 하지 말라” 는 어머니와 약속을 지킨 것이라 합니다.
예이츠를 언급한 윤 대통령에 대해 바이든 대통령은 건배사에서 “예이츠를 인용해주셔서 정말 감사드린다.
런던에선 그럴수 없었을 텐데” 화답했으며 바이든 대통령은 “오늘 매우 생산적인 회담을 나눴다” 며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서로를 개인적으로 알아갈 기회를 가졌다는 것” 이라고 말했습니다.
National gally of Ireland 와 관세청 (더블린 건물이 수수한 조지안 양식인데 비해 이
건물은 화려한 빅토리아양식으로 식민지 자원 수탈을 상징한다) 을 보지 못하고
리피강 Liffy River 을 오코넬 다리 O'conell Bridge 로 건너서 남쪽으로 내려 갑니다!
그래프튼 스트리트 Grofton Street 거리를 구경하고는 트리니티 대학 Trinity College
으로 들어가니 학생들 외에도 관광객들 이 많이 보이는데..... 400년의 역사를
가진 더불린의 명문 대학교로 건물이 고풍스러우며 리피강 남쪽 짝수 번지에 있습니다.
아일랜드는 세계적인 높은 교육열을 자랑하니 문맹률이 낮은 편이며 아일랜드의 대학들은 미국이나
영국과는 다르게 대학의 서열화가 없으니 아일랜드의 대학들은 모두 평균적이고 균등한 질 의
교육을 제공하고 있으며 그 중에서 가장 번영한 대학은 더블린에 위치한 트리니티 칼리지 입니다.
아일랜드는 스위프트, 조이스, 버나드 쇼, 오스카 와일드, 예이츠, 베케트 등 자랑스러운 영문학 작가들을
배출했음에도 아일랜드 정부는 전통적인 켈트 문화를 보존 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니
게일어로 쓴 작품 창작을 장려 하고 모든 공적 문서나 안내문을 게일어와 영어를 함께 병기 하고 있습니다.
아일랜드의 전통 음악은 켈트 음악 으로 알려져 있고, 주변국과 아일랜드의 현대 음악에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전통 악기로는 틴 휘슬, 보란, 일리언 파이프 등이 있습니다.
아일랜드는 세계적 뮤지션 들을 배출했는데 더 클랜시 브라더스, 치프턴스, 더 더블리너스, U2, 코어즈,
크랜베리스, 데미안 라이스, 웨스트라이프, 엔야, 클라나드, 켈틱 우먼, 글렌 핸사드가 있으며
특히나 U2 는 수십년간 전 세계적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아일랜드를 대표하는 밴드 입니다.
벨파스트 협정의 두번째 협정 이름도 AGREEMENT BETWEEN THE GOVERNMENT OF THE 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NORTHERN IRELAND AND THE GOVERNMENT OF IRELAND
인데, 영어 위키피디아에서는 표제어를 Ireland 는 아일랜드섬을 국가는 Republic of Ireland 를 사용
하지만, 다른 언어에서는 아일랜드섬은 아일랜드이고 국가는 아일랜드(국가) 혹은 아일랜드 로 표기합니다.
아일랜드 공화국 (Republic of Ireland) 이라는 국호는 공식 국호도 아닐 뿐더러 아일랜드에서는
선호되는 명칭이 아니니 유럽연합 차원에서 아일랜드 공화국이라고 표기하지 말라고 요구
하는데 그러나 FIFA 에서는 북아일랜드를 Northern Ireland, 독립국 아일랜드를 Republic of
Ireland 로 표기하도록 하였기 때문에 FIFA 에서는 아일랜드 팀이 스스로 이 표기를 쓰고 있습니다.
아일랜드를 일컫는 표현으로는 Irish Republic 도 있으니 1919년 아일랜드 독립 운동가들이 선포
했던 국호로 한국어로는 Republic of Ireland 나 Irish Republic 이나 '아일랜드 공화국'
이라고 번역될수 있지만..... 아일랜드 독립운동 진영에서는 본래 아일랜드섬 전체
독립 을 원했고 그것을 목표로 하여 선포된 국호여서 둘은 내포하는 의미가 완전히 다릅니다.
영국으로부터 독립 과정에서 국력의 현격한 차이로 투쟁에 한계를 보인 아일랜드 독립진영 과 제1차
세계대전에 지치고 국내 반전여론을 우려했던 영국이 타협해 북아일랜드를 제외한 아일랜드
자유국 이 수립되는데 1932년 명분상 아일랜드 통일을 추구했던 에이먼 데 벌레라와 아일랜드
공화당이 집권하면서 국명을 'Eire' 로 변경하자 영국 측에서는 독립국 'Eire' 의 정치 체제를
설명하고 북아일랜드와의 혼동을 피하기 위한 맥락에서 'Republic of Ireland' 를 쓰기 시작합니다.
오늘날에는 북아일랜드까지 포함한 아일랜드 통일을 주장하는 강성 아일랜드 민족주의 진영 에서 Irish
Republic 이라는 표현을 즐겨쓰지만 정부의 공식적인 문서나 담화가 아닌 일반인들의 비공식적인
표현이나 언론 매체의 표기 등에서 현재의 아일랜드를 Irish Republic 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는데
아일랜드어로는 Irish Republic 그리고 Republic of Ireland 모두 Poblacht na hÉireann 이라고 합니다.
아일랜드는 한자 음차로는 애란(愛蘭) 이니 쓰이는 일은 찾아볼 수 없지만 근대 기록에서는 종종 찾아볼
수 있으며 그외 애란토(愛蘭土), 애이란(愛爾蘭) 등의 음차 표기도 있으며 아일랜드 국기의 가로,
세로 비율은 2대 1이고 가로폭의 1/3씩 초록, 하양, 주황의 3가지 색이 수직으로 그려져 있으니
초록색은 섬나라와 가톨릭 을, 주황색은 개신교 를, 흰색은 두 종교 집단의 평화와 이해 를 상징합니다.
이 국기는 1848년 청년 아일랜드 운동의 기수 토마스 프린시어스 오먀허르 가 최초로 도입하고 1916년
자유 아일랜드의 상징이 되었는데 1922년에 아일랜드 자유국으로 독립하면서 정식 국기로 채택
되었으며 색상 배치가 반대인 코트디부아르의 국기와 거의 유사한데 아일랜드의 국기가 조금 더
오래된 것으로 19세기 중엽에 처음으로 등장했는데 색상 배치가 이탈리아의 국기와도 거의 유사 합니다.
그런데 국기를 이런 식으로 만든 이유가 있었으니 바로 18세기와 19세기 전반기, 즉 "대니얼 오코넬과
대기근" 이전의 독립 투쟁을 주도했던 개신교계 민족주의자들에 대한 예우 였던 것이라고 합니다.
원래 아일랜드의 전통적인 국기는 성 파트리치오 깃발 로 현 유니언 잭의 빨간색 'X' 자 심
부분 이기도 하지만 이 깃발은 원래 성 파트리치오의 깃발이 아니니 성 파트치오
는 원래 순교자가 아니었으므로 그의 고난(?)을 상징하는 십자가가 따로 없었다고 합니다.
이 문양은 전통적으로 잉글랜드 국왕을 대신해서 아일랜드를 통치한 피츠제럴드 가문의 문장 인데
이걸 억지로 잉글랜드의 성 제오르지오(세인트 조지) 기, 스코틀랜드의 사도 안드레아스
(세인트 앤드루)기와 짝을 맞춘 성 파트리치오기로 둔갑시킨뒤 유니언 잭에 합쳐 버린 것이라고 합니다.
현재 성 파트리치오 기 는 아일랜드섬 내에서 아일랜드섬 전체와 성 파트리치오를 상징하는 깃발로 취급을
받고는 있으나 아일랜드 민족주의자들은 역사적 경위를 문제삼아 영국의 침략자들이 만든 아일랜드의
상징 이라면서 사용을 거부 하고 있다는데, 아일랜드 남부가 아일랜드 자유국을 거쳐 아일랜드로 독립
한 이후에는 쓰이지 않고 북아일랜드 국기로 쓰였으나 지금은 북아일랜드에서도 쓰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입장하려 줄 선 곳은 Book of Kells 로 스코틀랜드 지방에서 전도하던 수도사들이
9세기경에 4대 복음서를 라틴어로 번역 한 것으로 바이킹의 침입시 더불린으로
피난해 왔는데 현존하는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성서 며 2층은 Old Library 로...
관람 신청은 인터넷에서 미리 해야 하는가 봅니다? 나의홈페이지 : cafe.daum.net/baikal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