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4월 10일(부활 제3주일 ) 요한 21,1-19; 사도 5,27ㄴ-32.40ㄴ-41
나는 올바른 신앙인?
오늘 복음은 갈릴래아 호수에서 고기를 잡던 제자들에게 부활한 예수님이 나타나신 이야기입니다. 초기 그리스도 신앙인들은 그런 발현의 이야기들로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알립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자 실망하여 각자 자기 고향으로 돌아간 제자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여 하느님 안에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각자 체험하면서 예루살렘으로 모여 들었습니다. 그들은 고향으로 가던 모습과는 이제 전혀 다릅니다. 오늘 제1독서로 들은 사도행전이 알리는 바와 같이 그들은 성전 경비대장과 수석 사제들 앞에서도 돌아가신 예수님이 살아 계시다고 증언합니다. 그 증언과 더불어 그리스도 신앙공동체, 곧 교회는 발족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라는 절망을 딛고, 그리스도 신앙인이 발생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살아 계시다고 말하면서 유대교 당국으로부터 박해당하고, 대부분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오늘의 사도행전은 유대교 당국으로부터 사도들이 심문당하고 비난받는 것은 유대교의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복음을 선포하였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사도행전은 오늘의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끝맺습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받았다고 기뻐하며 최고 의회 앞에서 물러나왔다.’(사도 5,41)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이 살아 계시다는 부활 체험이 그들에게 없었더라면, 제자들이 그런 역경에서 복음을 선포하지는 못하였을 것입니다.
|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catholicnews.co.kr%2Fnews%2Fphoto%2F201604%2F16325_35974_559.jpg) | | ▲ '기적적 고기잡이', 루벤스.(1618-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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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의 고기잡이 이야기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습니다. 제자들은 밤새 고기를 잡지 못했지만,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의 말씀을 따랐더니, 그들은 많은 고기를 잡았습니다. 제자들 중 여러 사람이 갈릴래아 호수의 어부 출신입니다. 그들이 고기를 잡는다는 말은 그들이 일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시작한 제자들의 일, 곧 복음 선포는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는 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멀리 떨어진 곳에서 제자들을 지켜보고 말씀하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당신의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일하는 제자들을 멀리서 지켜보며 말씀하신다는 제자들의 믿음이 반영되어 발생한 이야기입니다.
이어서 호숫가에서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식사하십니다. 예수님이 주관하시는 회식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을 초대하고, 빵과 생선을 집어 주십니다. 예수님이 살아 계실 때, 제자들과 함께 하시던 식사에 대한 회상이 가미된 장면입니다. 예수님은 평소에 제자들과 함께 식사하셨습니다. 그 식탁에서 듣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들에게 자유로운, 새로운 삶을 보여 주었습니다. 유대교의 율사와 사제들은 율법 준수와 성전의 제사의례를 강요하면서 그들이 강요하는 것에 충실하지 못한 사람들을 모두 죄인으로 매도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믿는 하느님은 벌을 주는 무서운 분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느님은 선하고, 용서하고, 살리는, 자비로운 분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이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셨다고 말하는 것은 예수님이 평소에 식탁에서 하시던 말씀들이 과연 하느님의 것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는 뜻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식사 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질문하십니다. ‘이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요한 21,15ㄴ) 베드로가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요한 21,15ㄷ)라고 고백하자, 예수님은 ‘내 어린 양들을 돌보라.’(요한 21,15ㄷ)고 말씀하십니다. 같은 질문과 대답이 두 번 더 반복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체포되어 대사제와 총독의 관저로 끌려 다니실 때,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 부인한 일이 있었습니다. 요한 복음서는 그 사실을 간과하지 않았습니다. 이 복음서는 수난당하시는 예수님을 세 번 모른다고 말한 베드로로 하여금 부활하신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세 번 고백하게 합니다. 그리고 그 고백이 있은 뒤에야 비로소 베드로를 사도로 다시 파견합니다.
“네가 젊었을 때에는 스스로 허리띠를 매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다. 그러나 늙어서는 네가 두 팔을 벌리면 다른 이들이 너에게 허리띠를 매어 주고서,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요한 21,18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하신 마지막 말씀은 “나를 따라라.”(요한 21,19ㄷ)라는 것입니다. 요한 복음서가 기록되기 40여 년 전 베드로는 이미 로마에서 십자가형으로 처형되었습니다. 그는 두 팔을 벌리고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오늘 제1독서로 들은 사도행전이 말하듯이, ‘사도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하게 된 것을’ 특권으로 생각하고 기뻐하였습니다. 그들에게 죽음은 스승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었습니다.
복음 선포는 인간의 혈기와 욕심으로 하는 일이 아닙니다. 신앙인은 해방과 용서를 필요로 하는 곳에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체험한 해방과 용서의 기쁨을 안고 갑니다. 예수님을 따라 십자가를 지고 자비하신 하느님을 알리는 것이 제자들이 한 복음 선포였습니다. 제자들에게 죽음은 스승이신 예수님을 따라 자비하신 하느님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당연히 겪어야 하는 결말이었습니다. 제자들은 그 죽음을 넘어서 예수님을 만난다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이 믿었던 하느님은 우리를 참으로 자유롭게 하십니다. 우리의 좁은 마음, 걸핏하면 미움에 빠지는 마음, 그리고 사람들 위에 군림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하느님은 우리를 자유롭게 하십니다. 인간이 우월감에 빠져 있으면, 주변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그들의 말을 알아듣지도 못합니다. 그 우월감은 자기가 가진 재물, 자기의 신분 혹은 자기의 학식 때문에 생길 수 있습니다. 신앙인들 중에는 자기가 올바른 신심을 가졌다는 자긍심으로 우월감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은 그런 우월감 없이 자유롭게 이웃을 섬기고 사랑하는 우리의 마음 안에 살아 계십니다. “종과 같이 섬기는 사람이 되라.”(마르 10,43)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부탁하셨습니다.
하느님은 인간을 차별하지 않으십니다. 교회 안에 발생한 신분들은 인간을 차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하는 그들의 역할, 곧 섬김을 나타내는 것일 뿐입니다. 신앙인은 예수님을 따라 삽니다. 중요한 것은 오늘 복음의 제자들과 같이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노력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해방과 용서의 기쁨이 우리 안에 또 우리 주변에 나타나야 합니다. 하느님은 용서하고 살리십니다. 그 해방과 용서를 자기 스스로 실천하여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 안에 살아 계시게 하는 사람이 부활을 믿는 그리스도 신앙인입니다. -서공석 요한 세례자 신부님
예수는 없다
예수는 없다. 죽었고 부활했다 하지만, 만질 수 없고 느낄 수 없고 그래서 믿을 수 없다. 오늘 우리 시대의 이야기가 아니다.(물론 우리 이야기일 수도 있다) 1세기 말엽, 요한 복음이 전해졌던 신앙 공동체의 이야기다.
예수를 알고 그를 믿는다는 건, 그의 가르침을 적당히 따르며 삶의 지혜 정도로, 그의 몇몇 말이나 말씨를 그대로 따라하는 게 아니다. 예수를 알고 믿는 것은 인간 한계 너머의 일이다. 그래서 삶이 바뀌는 일이 예수를 알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제 삶을 바꾸거나 버리지 못하는 이는 제 삶으로 되돌아가게 된다.(요한 6,66 참조) 오늘 복음에 나타난 어부들은 제 삶을 뛰어넘었다. 자신들이 살아가는 현실의 한계를 체험했기 때문이다.
밤새 고기를 잡았으나 어부는 어부로서 제 일상의 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어부이되 어부임이 부질없이 돼 버렸다. 이른 아침 나타난 예수는 다시 그물을 던지게 한다. 물론 고기는 많았다. 대개 예수 덕에 엄청난 고기를 잡아 올렸다는 사실에 흥분한다. 예수 만나면 저리 풍요롭고 부(富)하게 된다 사실을 우리는 은근히 즐기듯 소망한다. 허나, 다시 짚어 보자. 밤새 고기를 잡지 못했지만 어부는 어부다. 고기 잡는 전문가에게 고기를 다시 잡아 보라고 다그치는 예수에게 괜스레 ‘뭐야?”, 싶다.
여기엔 말에 대한 신뢰의 문제가 숨어 있다. 예수의 말을 따르는 것은 ‘내가 해 봐서 아는데....’라는 논리, ‘나 중심적 논리와 관점’을 뛰어넘는 일이다. 복음의 제자들은 잠시도 망설이지 않고 그물을 다시 던진다. 엄청난 고기는 예수의 말을 따른 결과다.
우리는 물이 포도주가 된 요한 복음 2장의 이야기에서도 같은 논리를 발견한다.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마리아의 말에 예수는 거리를 유지한다. 자신의 때가 아니라며 예수는 거부한다. 이에 마리아는 종들에게 예수의 ‘말’을 들으라 부탁한다. 말에 대한 경청과 실천이 물을 포도주로 바꾸는 데 전제 조건이었다. 마리아가 예수의 거부 때문에 마음을 접고, 등을 돌렸다면 이야기는 어떻게 흘렀을까? 포도주는커녕 예수든 마리아든 혼인잔치의 뒤편으로 잊혀져 갔을 테다.
그물을 던지라고 말한 예수가 ‘주님’임을 깨달은 베드로는 물에 뛰어 들었다. 돌발적 행동이었으나 당연한 행동이다. 제 전문성이, 제 앎이, 제 경험이 보잘것없이 느껴질 때, 대개의 경우 부끄러워 숨기 마련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예수와의 아침 식사는 이어진다. 식사야 별 다를 바 없다. 다만, 예수의 식사는 공동 작업으로 가능하다. 고기를 잡으라 한 예수의 말과 고기를 잡은 제자들의 행동, 그리고 예수가 준비한 빵과 제자들이 가져 온 물고기가 만나 어우러지는 만찬이다.
무언가를 나눈다는 것이 앎을 이끌어 낸다. 지식이나 지혜의 일방적 흐름은 예수를 이해하고 믿는 데 적합하지 않다.(루카 24,30-31 참조) 예수더러 모든 걸 해 내라는 식, 예수를 믿으면 모든 앎과 지혜가 거저 주어질 거라는 태도는 신앙하는 데 매우 위험하다. 예수는 무슨 일을 하든 딱 반만큼 한다. 나머지 반은 우리를 통해 이루려 한다. 반쪽을 그냥 내버려 두느냐, 아니면 내 것을 모두 접고 그의 반을 위해 내가 무엇을 보태느냐 하는 문제가 우리 일상에 늘 놓여 있다.
이 문제는 한 존재가 다른 존재를 통해 제 삶의 가치를 담아내는 ‘사랑’의 문제다. 예수가 베드로에게 물은 사랑은 베드로가 예수를 세 번 배반한 일에 대한 회개(돌아섬)의 디딤돌이다. 사랑을 통해, 사랑 위에 하느님 백성은 만들어지고 다듬어지고 세련되어질 것이다. 그 하느님 백성이 예수와 베드로 사이에 형성된 사랑의 열매다.
예수는 여전히 없다. 여전히 만져지지 않는다. 다만 그 예수의 열매인 우리 신앙인은 오늘도, 내일도 여전히 존재하고, 존재할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있다. 여전히 느껴지고 만져지며 알게 된다. 우리 신앙인이 서로 서로 주고받는 사랑의 나눔에서 말이다.
예수는 없다. 죽었고 부활했다 하지만, 만질 수 없고 느낄 수 없고 그래서 믿을 수 없다. 오늘 우리 시대의 이야기가 아니다.(물론 우리 이야기일 수도 있다) 1세기 말엽, 요한 복음이 전해졌던 신앙 공동체의 이야기다.
예수를 알고 그를 믿는다는 건, 그의 가르침을 적당히 따르며 삶의 지혜 정도로, 그의 몇몇 말이나 말씨를 그대로 따라하는 게 아니다. 예수를 알고 믿는 것은 인간 한계 너머의 일이다. 그래서 삶이 바뀌는 일이 예수를 알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제 삶을 바꾸거나 버리지 못하는 이는 제 삶으로 되돌아가게 된다.(요한 6,66 참조) 오늘 복음에 나타난 어부들은 제 삶을 뛰어넘었다. 자신들이 살아가는 현실의 한계를 체험했기 때문이다.
밤새 고기를 잡았으나 어부는 어부로서 제 일상의 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어부이되 어부임이 부질없이 돼 버렸다. 이른 아침 나타난 예수는 다시 그물을 던지게 한다. 물론 고기는 많았다. 대개 예수 덕에 엄청난 고기를 잡아 올렸다는 사실에 흥분한다. 예수 만나면 저리 풍요롭고 부(富)하게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은근히 즐기듯 소망한다. 허나, 다시 짚어 보자. 밤새 고기를 잡지 못했지만 어부는 어부다. 고기 잡는 전문가에게 고기를 다시 잡아 보라고 다그치는 예수에게 괜스레 ‘뭐야?”, 싶다.
여기엔 말에 대한 신뢰의 문제가 숨어 있다. 예수의 말을 따르는 것은 ‘내가 해 봐서 아는데....’라는 논리, ‘나 중심적 논리와 관점’을 뛰어넘는 일이다. 복음의 제자들은 잠시도 망설이지 않고 그물을 다시 던진다. 엄청난 고기는 예수의 말을 따른 결과다. 우리는 물이 포도주가 된 요한 복음 2장의 이야기에서도 같은 논리를 발견한다.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마리아의 말에 예수는 거리를 유지한다. 자신의 때가 아니라며 예수는 거부한다. 이에 마리아는 종들에게 예수의 ‘말’을 들으라 부탁한다. 말에 대한 경청과 실천이 물을 포도주로 바꾸는 데 전제 조건이었다. 마리아가 예수의 거부 때문에 마음을 접고, 등을 돌렸다면 이야기는 어떻게 흘렀을까? 포도주는커녕 예수든 마리아든 혼인잔치의 뒤편으로 잊혀져 갔을 테다.
그물을 던지라고 말한 예수가 ‘주님’임을 깨달은 베드로는 물에 뛰어 들었다. 돌발적 행동이었으나 당연한 행동이다. 제 전문성이, 제 앎이, 제 경험이 보잘것없이 느껴질 때, 대개의 경우 부끄러워 숨기 마련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예수와의 아침 식사는 이어진다. 식사야 별 다를 바 없다. 다만, 예수의 식사는 공동 작업으로 가능하다. 고기를 잡으라 한 예수의 말과 고기를 잡은 제자들의 행동, 그리고 예수가 준비한 빵과 제자들이 가져 온 물고기가 만나 어우러지는 만찬이다.
무언가를 나눈다는 것이 앎을 이끌어 낸다. 지식이나 지혜의 일방적 흐름은 예수를 이해하고 믿는 데 적합하지 않다.(루카 24,30-31 참조) 예수더러 모든 걸 해 내라는 식, 예수를 믿으면 모든 앎과 지혜가 거저 주어질 거라는 태도는 신앙하는 데 매우 위험하다. 예수는 무슨 일을 하든 딱 반만큼 한다. 나머지 반은 우리를 통해 이루려 한다. 반쪽을 그냥 내버려 두느냐, 아니면 내 것을 모두 접고 그의 반을 위해 내가 무엇을 보태느냐 하는 문제가 우리 일상에 늘 놓여 있다.
이 문제는 한 존재가 다른 존재를 통해 제 삶의 가치를 담아내는 ‘사랑’의 문제다. 예수가 베드로에게 물은 사랑은 베드로가 예수를 세 번 배반한 일에 대한 회개(돌아섬)의 디딤돌이다. 사랑을 통해, 사랑 위에 하느님 백성은 만들어지고 다듬어지고 세련되어질 것이다. 그 하느님 백성이 예수와 베드로 사이에 형성된 사랑의 열매다.
예수는 여전히 없다. 여전히 만져지지 않는다. 다만 그 예수의 열매인 우리 신앙인은 오늘도, 내일도 여전히 존재하고, 존재할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있다. 여전히 느껴지고 만져지며 알게 된다. 우리 신앙인이 서로 서로 주고받는 사랑의 나눔에서 말이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님
[생활 속의 복음] “우리는 고기 잡으러 가네”
부활절. 예수님 제자들은 ‘엠마오’라는 정체불명의 휴가 여행을 어디로 떠난 것일까요. 바다낚시를 하러 떠난 간 것일까요? 그게 아닙니다.
자신들이 크게 기대를 걸고 뒤따랐던 스승이신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니 이제 무엇을 하며 지낼 것인가? 예루살렘에 남아 있으면 누가 밥을 먹여주나? 제자들은 이제 고향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됐습니다. 그들은 어부들이었으니 생업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일상생활로 돌아가라고 부활하신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밖으로 나가 배를 탔지만, 그날 밤 아무것도 잡지 못했다
부활을 맞이한 제자들이 일상으로 돌아갔지만, 별 볼일이 없게 된 것처럼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음에서 부활하신 지 2000년이 훨씬 지난 오늘도 우리는 그 부활하신 분을 만날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그분을 만나지 못한 채 부활만 외친다면 우리는 그저 형식적으로 성당 축제에 참여하고 끝나버리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 허무하게 됩니다. 성당에 더는 다닐 맛이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복음서는 우리도 그 제자들처럼 일상에서 밤새도록 한 마리의 물고기도 잡지 못하는 그 허탈한 곳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다고 알려줍니다.우리가 인생의 목표를 세워놓고 그것을 달성하면 행복감을 느낍니다. 그러나 그 순간은 잠시 지나갈 뿐이고, 그다음 허무함이 덮쳐오면 더 감당할 수 없어 매우 고통스러워하면서 살아왔습니다. 아무런 결실도 없는 삶을 살아가는 그 허탈한 인생살이는 저주받은 삶이 아닙니다. 이 순간이야말로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기회입니다.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다가오셔서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이렇듯이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일상생활에 관심을 많이 갖고 계십니다. 오늘도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의 일상생활 속으로 다가오셔서 현재 우리가 어떻게 사는지 물어보십니다. 우리는 무슨 문제로 고민하고 있는가? 어떤 결과가 있는가? 보람된 인생을 살고 있는가? 우리가 사는 삶에서의 고통과 보람과 꿈과 걱정거리들에 대해 부활하신 주님은 많은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
그 호숫가에서 잔뼈가 굵은 어부들에게 목수인 예수님께서 그물을 이쪽저쪽으로 내리라고 훈수를 두십니다. 저 같으면 그분 말씀을 듣고 실천하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어림도 없지요. 그런데 베드로 일행은 예수님의 그 말씀을 듣고 실행에 옮깁니다. 놀랍습니다. 더구나 깜짝 놀랄 결과가 벌어졌습니다. 고기가 너무 많이 걸려 그물을 끌어 올릴 수가 없는 지경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은 성부와 함께 세상을 창조하시던 그 말씀인 것을 잊고 있었군요.
지금도 예수님의 말씀이 성경을 통해서, 교회의 가르침을 통해서, 양심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들려옵니다. 내 상식에 어긋나기에 들어도 못 들은 척하면서 사는 것을 깊이 반성합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합리적이지 않다고 여겨도 주님 말씀을 즉시 실천에 옮기는 것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맞이한 제자들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려면 주님 말씀을 실천에 옮겨야 합니다. 주님 말씀을 듣지 않고 실천에 옮기지도 않고 내 상식 세계에만 머물러 앉은 채 마음 편하게 지내고 있는가? 그래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결코 만날 수 없습니다.
“주님이십니다”
오늘 우리도 이처럼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우리도 다른 사람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바로 우리 눈앞에 계시다고 증언해야 합니다. 우리도 다른 사람들이 증언하는 부활하신 분을 한시바삐 만나러 바다로 뛰어들어야 합니다.
“아침을 먹어라.”
부활의 기쁜 소식은 이렇게 매일 먹어야 하는 음식을 함께 먹자고 초대하시는 말씀과 함께 우리에게 울려퍼집니다. 예수님은 밤새도록 고생한 그 어부들이 이제 아침을 든든히 먹고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챙기십니다. 그분의 자상하심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이 잡힌 물고기를 지고 가서 가족들과 함께 나누러 가려면 아침을 든든히 먹고 힘을 내야 합니다.
부활의 그 풍성한 삶을 가까운 이들과 나누려면 우리도 힘을 내야 합니다. 부활은 우리에게서 멀리 떨어진 곳의 일이 아닙니다. 삼시 세끼 잘 챙겨 먹으면서 우리 가족부터 시작해 알려야 할 기쁜 소식입니다. 우리 삶이 죽음을 넘어 풍성한 결실을 가져오는 것이 부활이라는 사실을 가까운 곳에서 함께 생활하는 사람들과 나누라는 주님의 분부십니다. -주수욱 베드로 신부님
2016년 4월 10일 다해 부활 3주일 요한 21,1-19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요한 21,17)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bbs.catholic.or.kr%2FArchives%2FGBweb%2Fweb%2F2016%2F20160409%2FThe%2520Appearance%2520to%2520the%2520Seven%2520Disciples%28%EC%9A%94%ED%95%9C21%2C1-14%29.jpg)
The Appearance to the Seven Disciples 사랑의 불씨를 다시 지펴주시는 주님
십자가에 처형되신 예수님께서는 세 번째로 티베리아스 호숫가에서 일곱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아침이 될 무렵 밤새도록 아무것도 잡지 못한 제자들로 하여금 그물이 찢어지도록 많은 고기를 잡도록 해주시고, 손수 아침을 준비하시어 같이 식사하시며 극진한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가 먼저 그분을 알아봅니다(21,7).
티베리아스 호숫가에서 고기를 잡고 있던 일곱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체포되고 돌아가시자 두려움과 좌절에 빠진 나머지 스승을 버리고 도망갔던 이들입니다. 그들은 모든 희망을 걸었던 예수님께서 돌아가시자 예전의 일터로 돌아와 고기를 잡고 있었던 것이지요. 죽음을 넘어서는 빛을 보지 못한 채 밤의 어둠 속에 있었던 그들은 예수님의 ‘숯불 사랑’으로 사랑과 희망의 불씨를 되살리게 됩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그렇게 제자들을 절망과 당혹감, 좌절감과 죄책감으로부터 벗어나도록 이끈 빛이었습니다. 제자들이 겪었던 이 과정은 내 안에서도 되풀이되곤 합니다. 극심한 고통 중에 하느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을 때, 아무에게서도 사랑을 느끼지 못할 때, 사회적 불의 앞에 무기력함을 느낄 때, 믿었던 사람에게서 배신을 당하고 오해를 받을 때 쉽게 내가 원하는 일상에 안주해버리곤 하지요.
참으로 그런 어둠의 순간이야말로 더 깊이 주님을 만나고 체험할 수 있으며, 사랑이신 주님께서 가까이 계심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때에도 주님께서는 사랑으로 다가오시어 내 일상의 그물이 터지도록 풍요롭게 해주시고, 생명을 시작하는 아침밥을 차려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일상이 피곤하고 고달플 때일수록 내가 만든 동굴이 아니라 주님을 애타게 찾아야 할 때입니다.
제자들이 아침을 먹은 뒤 예수님께서는 으뜸 사도인 베드로에게 세 번에 걸쳐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십니다. 첫 번째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21,15)고 묻습니다. 다른 제자들보다 ‘더’ 사랑하느냐고 물으신 것은 '양들을 쳐야 할' 으뜸 사도로서 지닌 막중한 사랑의 책임을 상기시켜 주신 것이지요.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세 차례나 거듭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시자 슬퍼하며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21,17) 하고 대답합니다. 그는 예수님이 체포되시고 난 뒤 세 차례나 그분을 모른다고 부인하며 배신했었지요. 아마도 그는 예수님의 질문에 그 쓰라린 아픔이 다시 떠올랐을 것이고 죄책감과 수치심에 휩싸였을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그런 베드로의 심정을 너무도 잘 아시면서도 거듭 사랑을 확인하셨을까요? 무엇보다도 사람 낚는 어부가 되고 양들을 치며, 교회의 반석이 되는데 반드시 필요한 것이 바로 사랑이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또한 그 질문을 통해 베드로 스스로 자신 안에 있던 죄책감과 수치심을 회피하지 않고 직면함으로써 정화된 사랑을 지니길 바라셨을 것입니다. 거듭 되는 질문은 사랑과 희망의 불씨였던 것입니다.
매순간 나의 어둠과 절망, 실패와 고통, 죽음의 상황, 죄책감과 수치심의 한복판으로 다가오시어 다시 사랑의 불씨를 되살려주시는 주님께 감사드려야겠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지펴주시는 사랑의 모닥불에 나의 고통과 시련, 사회적 불평등과 불의를 올려 희망을 숨쉬는 오늘이길 기도합니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부활 제3주일, 사도5,27ㄴ-32.40ㄴ-41 요한묵5,11-14 요한21,1-19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사랑하라, 찬미하라, 기뻐하라-
방금 부른 부활의 기쁨이 가득 담긴 오늘의 화답송 후렴도 흥겨웠습니다.
“하느님 나를 구하셨으니 내 당신을 높이 기리려 하나이다.”
부활의 기쁨이 가득 담긴 계속되는 알렐루야 부활축제시기에 활짝 만개한 온갖 봄꽃들이 온통 알렐루야 하느님을 찬미하는 듯합니다. 얼마전 써놓은 ‘부활의 봄’이란 자작시를 나눕니다.
-봄 있어야/온갖 꽃들 만발滿發한 부활의 봄 있어야 여름도 가을도 겨울도 있다
봄 없으면/온갖 꽃들 만발滿發한 부활의 봄 없으면 여름도 가을도 겨울도 없다
임을 진정/사랑하는 이의 내면內面은 늘 신망애信望愛 꽃들 만발한 부활의 봄이다-
오늘 복음 말씀 묵상하던 중 즉시 한 눈에 강론 제목을 찾아 냈습니다. 바로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과 아침 식사를 마친 후 베드로를 향한 세 번의 물음입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아니 베드로뿐 아니라 오늘 미사에 참석 우리 모두를 향한 물음입니다. 주님은 당신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했던 베드로의 사랑을 거듭 확인하십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평생 화두로 삼아 자주 자문해야 할 물음입니다.
오늘은 부활축제시기를 맞아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세 권고에 대한 묵상을 나눕니다.
첫째, 주님을 사랑하십시오.
오늘 복음에서 착안한 말씀입니다. 거듭 말씀드립니다. 주님을 사랑하십시오. 바로 이 말씀 안에 모든 답이 들어있습니다. 모든 문제는 내안에 있고 모든 답은 주님 안에 있습니다. 주님을 진정 사랑할 때 모든 답은 저절로 나옵니다.
분도 규칙에 꼭 2회 나오는 같은 어투의 구절도 의미심장합니다.
‘그 무엇도 그리스도의 사랑보다 앞세우지 마라’, ‘그 무엇도 하느님의 일보다 앞세우지 마라.’ 결국 모두에 앞서 주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항구히, 한결같이 주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주님 사랑에 대한 자발적 응답이 우리의 사랑입니다. 온누리에 가득한 주님의 사랑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온 누리에 아름다움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차고 넘치는 주님의 사랑입니다. 하느님 사랑의 결정적 열매가 예수님의 아름다운 부활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실의에 빠진 제자들을 만나 사랑으로 일으켜 세우신 후, ‘와서 아침을 들라.’ 성찬에 초대하십니다. 이런 넘치는 사랑을 베푸신 후 베드로를 향한 세 물음을 통해 베드로는 물론 우리의 당신 향한 사랑을 확인하십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 물음에 베드로의 답을 통해 사도의 결연한 사랑의 의지가 잘 드러납니다. 베드로와 함께 우리 모두 대답해야 할 정답은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입니다. 이에 대한 주님의 당부 및 명령의 말씀입니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나를 따라라.”
주님의 양들인 형제들을 예외없이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바로 이런 사랑으로 주님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막연한 추상적 사랑이 아니라 형제들을 사랑함으로 주님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너무나 선명한 삶의 목표가 주님을 따르는 삶입니다. 진정 주님을 사랑하는지 주님 사랑의 진위를 확인할 수 있는 형제적 사랑의 실천입니다.
둘째, 주님을 찬미하십시오.
오늘 제2독서 요한 묵시록에서 착안한 말씀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라’에 이은 ‘주님을 찬미하라’입니다.’ 순서로도 맞습니다. 사랑과 찬미는 함께 갑니다. 사랑의 친미입니다. 주님을 사랑할수록 주님을 찬미합니다.
영혼 건강에 찬미의 상비약보다 더 좋은 상비약은 없습니다. 악마가 기절초풍하는, 가장 질색하며 싫어하는 말마디가 ‘주님을 찬미하라.’입니다. ‘악마여 주님을 찬미하라’, 악마를 퇴치하는데 이보다 더 좋은 권고도 없습니다.
늘 주님을 찬미하는 삶이어야 하겠지만 주님 부활을 경축하는 주일은 더욱 그러합니다. 하여 우리 수도자의 주일 아침 기도서 제목도 ‘찬미의 노래’이고 주일 아침마다 ‘주님을 찬미하라’, 무려 1시간에 걸쳐 찬미의 노래를 바칩니다.
수도자는 물론 믿는 이들 모두가 '찬미의 기쁨'으로 살아갑니다. '그래서'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찬미의 기쁨을 능가할 수 있는 것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하여 우리 수도자들은 초대교회의 전통을 2000여년이 지난 지금도 그대로 계승하여 오늘 제2독서 묵시록의 찬미가를 매주 화요일 모든 천사들과 함께 죽으시고 부활하신 파스카의 주님이신 어린양을 찬미합니다.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은 권능과 부귀와 지혜와 힘과 영예와 영광과 찬미를 받을 자격이 있나이다.”(묵시5,12)
천사들뿐 아니라 부활의 봄을 맞이한 모든 피조물들 역시 하느님과 부활하신 파스카의 예수님, 어린양을 찬미합니다.
“어좌에 앉아 계신 분과 어린양께 찬미와 영예와 영광과 권세가 영원무궁하기를 바라나이다.” (묵시5,14).
셋째, 늘 기뻐하십시오.
오늘 제1독서 사도행전에서 착안한 말씀입니다. 사랑의 기쁨, 찬미의 기쁨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가정에 관한 주교 시노드 후속 문헌으로 반포하신 권고 제목이 바로 ‘사랑의 기쁨(Amoris Laetitia)’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면 저절로 주님을 찬미하게 되고, 주님을 찬미하면 저절로 샘솟는 기쁨입니다.
역시 '그래서'가 아닌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기쁨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참 좋은 선물이 평화와 더불어 기쁨입니다. 오늘 박해받는 사도들이 바로 이런 기쁨의 모델입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받았다고 기뻐하며, 최고 의회 앞에서 물러 나왔다.”
부활하신 주님의 선물인 기쁨이 영적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음을 봅니다. 과연 사도들은 기쁨의 대가들입니다. 아무도 앗아 갈 수 없고 세상이 줄 수 없는 영원한 기쁨이 바로 부활의 기쁨입니다.
믿는 이들의 결정적 표지가 바로 기쁨입니다. 우울이나 심각함은 결코 영성의 표지가 아니라 하느님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기쁨, 믿음의 기쁨, 희망의 기쁨, 복음의 기쁨입니다. 제 집무실 문 벽에 주님 성탄 때 사랑하는 형제가 붙여준 ‘산타 모자를 쓴 제 모습에 바오로의 말씀이 적혀진 사진’이 지금도 한 눈에 들어옵니다.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필리4,4).
과연 바오로 사도는 기쁨의 사도, 기쁨의 대가입니다. 감옥에 갇힌 수인으로서 이런 기쁨을 권고했다는 사실이 기쁨의 진정성을 입증합니다.
사실 파스카의 주님을 믿는 이들에게는 1년 365일 매일이 성탄의 기쁨, 부활의 기쁨입니다. 어제 읽은 필립보 네리 성인의 ‘기쁨 없는 덕은 참된 덕이 아니다.’라는 말씀도 생각납니다.
어제 명동 가톨릭 회관에 피정지도차 외출했을 때 지하철 역 유리창에 쓰여져 있던 ‘좋은 이름’(엄기원)이란 시를 소개합니다.
-‘아버지’/그 이름만으로도/우리 가족에겐/하늘이다 우리는 날개를 펴고/마음대로 날 수 있는 것이다
‘어머니’/그 이름만으로도/우리 가족에게/보금자리다 우리는 날개를 접고/포근히 잠들 수 있는 새들이다-
아버지를 하느님으로, 어머니를 성모님이나 교회로 대입하여 묵상해도 은혜로운 시입니다. 그러니 이런 하느님 아버지를 성모 어머니를 모신 교회 가정의 하느님의 자녀들인 우리들이기에,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찬미하고 늘 기뻐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부활하신 파스카의 주님은 부활 제3주일 미사를 통해 당신께서 바라시는 속내를 우리 모두에게 진솔하게 밝히셨습니다.
1.주님을 사랑하십시오. 2.주님을 찬미하십시오. 3.늘 기뻐하십시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당신께 사랑의 찬미를 바치는 우리 모두에게 기쁨과 평화를 가득 선물하십니다.
아멘. -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2016년 다해 부활 제3주일
너 나를 사랑하느냐?
예수님께서는 오늘 베드로에게 세 번씩이나 당신을 사랑하느냐고 물어보십니다. 사랑을 확인할 때 어떤 누구도 한 순간에 세 번씩 사랑을 확인하지는 않습니다. 베드로가 하룻밤에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였기 때문에 그 죄를 씻어주시기 위해서 세 번 사랑하느냐고 물어보았을 수도 있습니다. 베드로는 세 번씩이나 같은 질문을 하시는 예수님을 보며 눈물이 났습니다. 그러나 대답은 또박또박 다 합니다. 백번을 물어보았다고 한다면 백번 다 대답하였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 대한 사랑이 그만큼 완전해졌기 때문입니다.
세 번씩 반복해서 물어보시는 예수님의 의도는 베드로에게 당신께 대한 완전한 사랑을 요구하시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가 가장 완전한 사랑이듯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당신께 대한 완전한 사랑을 요구하십니다. 그 이유는 바로 당신의 양떼를 맡기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당신을 사랑하느냐고 물어보신 다음 “내 양떼를 잘 돌보아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왜 당신의 양떼를 베드로에게 맡기시면서 동시에 당신께 대한 완전한 사랑을 요구하십니까? 바로 당신의 양떼를 위해서입니다. 목자들이 주인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당연히 주인의 양떼도 사랑하지 못하고 쉽게 잃고 말 것입니다.
예수님께도 아버지로부터 맡겨진 양떼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양떼 중 한 마리도 잃지 않았습니다(요한 17,2). 예수님께서 아버지께서 당신에게 맡기신 양떼를 한 마리도 잃지 않으셨던 이유는 아버지를 그만큼 사랑하셨기 때문에 아버지의 양떼도 잃지 않으려고 온 힘을 다 쏟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제 당신이 하시던 소명을 베드로를 대표로하는 교회에 맡기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의 구성원들은 자신에게 맡겨진 양떼를 한 마리도 잃지 않기 위해서 그리스도께 대한 완전한 사랑을 지니고 있는지 수시로 자신의 사랑을 확인해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얼마만큼 내가 예수님을 사랑하고 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사랑하신 모범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 번에 걸쳐 베드로에게 사랑을 확인하였습니다. 만약 베드로에게 물어보시는 그 세 번의 사랑이 같은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었다면 굳이 세 번씩이나 물어보지 않으셔도 되셨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서로 다른 사랑의 척도로서 우리도 그 세 번의 질문에 제대로 답을 할 수 있는지 확인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제가 사랑을 하고 있다고 스스로 느꼈을 때는 그 사람이 눈 뜰 때부터 눈 감을 때까지 생각이 나고 꿈에서도 나타난다는 것이었습니다. 미운 사람만 자꾸 생각이 나는 줄 알았더니 사랑하면 그렇게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랑의 첫 번째 질문은, “너는 나를 항상 ‘기억’하느냐?”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사랑을 우리가 잘 기억할 수 있도록 성찬의 전례를 제정하면서 이렇게 덧붙이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성모님은 성전에서 잃었던 예수님을 찾았을 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마음 속 깊이 간직하였다.’라고 합니다. 또한 마리아 막달레나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랍뿌니’, 즉 ‘스승님’이라고 합니다. 이 모든 것이 바로 ‘배우고 기억한다’는 의미이지만 동시에 ‘사랑한다’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체를 영해 그 분과 한 몸이 된다고 하면서도 살아가면서 그 분이 사신 것처럼 살려고 매 순간 그 분을 기억해내지 않는다면 실제로는 그 분과 한 몸이 된 것도 그 분을 충분히 사랑하는 것도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은 포도나무고 우리는 가지이니 당신 안에 항상 머물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기도고 기억하는 것이고 배우는 것입니다. 매 순간 ‘그 분이라면 어떻게 생각하시고 말하시고 행동하셨을까?’를 떠올리며 그 분이 사신 것처럼 살 때 바로 ‘너 나를 사랑하느냐?’의 첫 번째 질문에 베드로처럼 당신을 사랑한다고 대답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사랑을 하면 또 변하는 것이 있는데 상대 앞에서 계산을 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돈을 쓸 때도 계산을 하게 되지만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있는 것은 무엇이든 퍼 주고 싶어집니다. 일명 제비들이나 꽃뱀들이 노리는 것이 이것입니다. 자신을 좋아하게 만들어서 다 뜯어내려고 하는 것입니다.
카인의 제물을 하느님께서 즐겨 받으시지 않은 것은 그가 아까워하며 봉헌하였기 때문입니다. 봉헌에 감사하는 마음이 없다면 이미 하느님과 계산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병적조사를 합니다. 하느님 앞에서 계산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자신에 숫자를 세게 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전염병으로 죽게 됩니다.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 때도 필립보와 안드레아는 계산을 합니다. 200데나리온어치를 사도 안 된다고 하고,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그들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합니다.
그러나 베타니아에서 한 여인은 300데나리온어치나 하는 향유를 깨뜨려 예수님의 발에 발라드립니다. 지금으로 치면 2000만 원 정도 하는 향유를 단숨에 쏟아버리는 것입니다. 유다는 그것을 가난한 사람에게 주었어야 한다며 그녀를 나무라지만 사실 그것은 그가 계산만 하고 사는 도둑이었기 때문에 일부러 자비로운 척 했던 것입니다. 하느님께 모든 것을 받았기에 하느님께 아끼는 것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그녀의 그런 행동이 영원히 기억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또한 과부가 몇 푼 안 되지만 자신의 전 재산을 넣었을 때 그것을 칭찬하십니다.
우리가 조금이라도 봉헌하고 있다고 느낄 수 있는 것은 바로 ‘십일조를 내는 일’입니다. 만약 그것도 바치고 있지 못하다면 여전히 우리는 계산을 하며 사는 사람이기에 두 번째 예수님의 질문에 당신을 사랑한다고 감히 대답할 수 없을 것입니다.
3. 사랑하면 느끼는 것이 ‘나보다는 상대를 먼저 생각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좋아하는 음식이 나오면 그 사람부터 생각이 납니다. 경치 좋은 곳에 가면 ‘그 사람을 데려왔으면 좋았을 걸!’이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것이 있으면 무조건 상대가 먼저 떠오릅니다.
저희 어머니는 생선 머리만 드셨고, 밭에서 받았던 빵과 우유를 드시지 않고 우리에게 가져다 주셨고, 우리가 삼겹살을 먹을 때다 배 부르시다고 드시려하지 않으셨습니다. 상대를 위해서 ‘나를 잊는 것’이 사랑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이 당신 자신을 생각하셨다면 우리를 위해 십자가 고통을 받으실 필요가 없으셨습니다. 다만 우리를 위해 당신 자신을 잊으시고, 아니 버리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입니다.
“나를 따르려거든 ‘네 자신을 버리고’ 매일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한다.”
사랑을 위해 자신을 버리는 것이 바로 사랑인 것입니다. 사랑은 ‘나’를 버리는 것이지 ‘나’를 먼저 찾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먼저 찾는 것을 우리는 ‘이기주의’라고 하고 사랑의 반대말로 여깁니다. 나를 죽일 때 비로소 상대와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자기 자신만 생각한다며 그를 ‘사탄’이라고 하였고, 오상의 비오 성인은 자신의 ‘자아’가 바로 마귀라고 하셨습니다.
성모님의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는 자기 비움이 없었다면 구원은 거기에서 끝나버렸을 것입니다. 그 분의 자기 비움을 통해서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어 그 분이 성모님의 육체로 세상에 태어나게 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정말 마지막 세 번째 질문까지,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을까요?
베드로는 예수님을 배반한 것으로 극도로 겸손하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이제 자기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탄이라 불렸던 자아는 죽었습니다. 그래서 이 세 번의 질문에 끝까지 대답할 수 있었고 교회의 첫 번째 수장이 되실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도 우리에게 당신을 사랑하시는 만큼 당신 귀한 양떼를 맡기십니다. 우리는 먼저 그리스도의 도구가 되기 이전에 그 분을 얼마만큼 사랑하는지 항상 점검하고 더 사랑하려고 노력하는 것을 멈추지 말아야겠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신부님
[아! 어쩌나] 338. 성장한다는 것은?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eb.pbc.co.kr%2FCMS%2Fnewspaper%2F2016%2F04%2Frc%2F628762_1.1_titleImage_1.jpg) | |
문: 성장하라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그러나 막상 내적 성장을 하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물음에 대하여 명확한 답을 얻기는 어렵습니다. 내적 성장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답: 성장은 발달론적 관점에서 말하자면 성숙해지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습니다. 내적인 성숙함을 향해 가는 사람들을 창조적인 사람이라고 합니다. 창조적인 사람이란 창조 욕구를 표현하는 사람, 인격 내부의 긴장 상태를 재조정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반대로 창조적이지 못한 사람은 공포감으로 말미암아 고정된 행동양식에 자기를 묶어버리려는 사람, 동결시키려는 사람을 신경증적인 사람이라고 합니다.
사람이 창조적이 되지 못하고 신경증적인 사람, 심리적 노예 상태로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인가? 자기 대상 욕구 (self object need)에 문제가 생겨서입니다. 아이들은 자기 대상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보호자에게 그런 기능을 요구합니다. 아이들은 강력하고 튼튼한 부모와의 합병을 통하여 외부의 위험이나 곤란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 합니다. 그리고 차츰 부모의 이런 기능을 내면화함으로써 혼자서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내면화가 실패하면 혼란, 막연한 불안감에 빠집니다. 그래서 신경증적인 사람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왜 문제인가? 왜 우리는 내적 성장을 해야 하는가? 왜 창조적인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그런 상태로 살아가게 되면 심리적 노예가 되기 때문입니다. 심리적 노예 상태란 자기 생각이나 감정에 대한 주관이 없이 타인에 의해 주어진 것을 아무 생각 없이 따라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병적인 순종을 하는 소위 ‘로봇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로봇 인간들은 평소에는 일사불란하게 살아가지만, 피라미드 구조의 상부가 붕괴되면 새롭게 살아갈 엄두도 못 내고 다 같이 죽는 혹은 다 같이 소멸하는 집단자살 증후군을 보입니다. 패전 시 집단자살한 일본군들, 집단자살을 하는 사교집단들이 바로 그런 경우가 될 것입니다.
하느님이 개인에게 주신 창조성을 스스로 부인하고 집단이 주는 병적인 메시지를 계시처럼 여기고 자신을 포기하는 가장 바람직하지 못한 인생을 살 가능성이 높은 것이 신경증적인 사람들의 공통점이기에 종교나 국가는 개인이 창조적인 사람이 되도록 가르쳐야 하고 그런 환경을 조성해야 합니다. 개인 역시 내면적인 신경증적 상태를 극복하고 창조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해야 합니다. 창조성을 추구하면 신경증적인 상태가 자아를 점령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런 부조화한 상태가 거대한 창조의 원동력이 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종교이건 사회이건 지도자들이 독재 성향을 가지면 개인들이 창조적이 되는 것을 꺼리는 경향이 강합니다. 꺼려할 뿐만 아니라 우민화 정책을 통하여 국민들의 의식이 깨어나지 못하게 하고, 종교 같은 경우 공포스러운 교리들을 통하여 사람들의 의식을 지옥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신자들은 지옥에 대한 공포심에 죄를 짓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하지만, 내적으로는 신경증적인 상태가 되어서 종교의 노예가 되어버립니다. 교주에게 모든 것을 다 바치고 자기 생각이나 감정을 포기해 버린다는 것입니다. 사교집단이 사용하는 종교범죄 행위의 희생자가 되는 것입니다. 국가의 경우 우민화 정책을 사용하는데 대표적인 것이 주입식 교육, 답이 정해진 교육을 시키는 것이고 계속해서 전쟁이나 혹은 재난에 대한 메시지를 주어서 국민들을 불안하게 만듭니다. 불안감이 창조성을 잡아먹는 바이러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사람들이 신경증적인 상태가 지속되면 사교집단 신자들처럼 집단자살 증후군을 보일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입니다. 또한 집단적인 감정 고조로 인하여 전쟁 가능성도 높아지기에 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홍성남 마태오 신부님(가톨릭영성심리상담소장, 상담전화: 02-727-2516)
피조물들의 절규에 응답하고 행동하라
[교황생태회칙 「찬미받으소서」 해설] 37·끝. 사회회칙 「찬미받으소서」 길을 나서며…
우연히 어느 방송인의 이야기에서 프란치스코 교종의 호소, ‘쉼’의 영성을 들었다. 그는 ‘휴식’이라는 한자어 ‘休息’을 풀어주었다. ‘休’는 나무 옆의 사람을 형상화한 것이며, ‘息’은 ‘나’와 ‘마음’의 관계 곧 ‘나’의 ‘마음’을 살피는 것, 혹은 ‘나’를 ‘마음’으로 헤아려 살피는 것을 형상화한 문자라는 설명이었다. 개인으로서든 공동체들로서든 우리에게는 그 ‘휴식’이 시급히 그리고 반드시 필요하다는 뜻으로 들었으며, 그 짧은 이야기가 마치 회칙 「찬미받으소서」를 요약하는 듯했다.
회칙은 ‘자기 파멸’과 ‘상호 파멸’의 무모함을 멈추자고 호소한다. 그리고 잠시 멈춰서 ‘우리의 공동 가정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태들’을 맑은 정신으로 바라보자고 권한다. 그러면 하늘과 땅과 물과 벗에게서 들려오는 절규를 생생하게 들을 것이라고 한다. 곳곳에 ‘균열이 난 상처’를 또렷하게 보게 될 것이라고 한다. 회칙은 기후 변화와 대기 오염의 두려움, 자원(물)의 빈곤과 뭇 생명의 절박함, 오물 덩어리로 변하는 이 행성의 비참함에 공감하는 정도에 그치지 않는다. 우리와 똑같이 하느님을 닮은 이웃이 얼마나 처절하게 살고 있으며, 공동체가 얼마나 황폐하게 되고 있는지, 그리고 이 지구가 얼마나 심각한 불균형으로 휘청거리고 있는지를 깨닫고 행동(동행)하는 여정에 나서게 될 것이라고도 한다(회칙 제1장 참조). 이를 회칙은 ‘생태의 전환’의 길로 나서는 것이라 밝힌다.
‘어디에서부터 무엇을 할 것인가?’ 회칙은 그 근본적 원인을 ‘인간’에게서 특히 ‘근대’의 인간관과 세계관에서 찾는다. 구체적으로는 인간의 제자리 곧 이 세상에서의 ‘올바른 자리’에서 벗어난 근대의 ‘주체’ 의식에서부터 출발한다. 거기에 인간의 ‘창의력’이 더하여 ‘과학’과 ‘과학기술’을 발전시켰지만, 그 오ㆍ남용과 함께 ‘경제’ 및 ‘금융’이 결탁하여 ‘진보의 신화’라는 ‘거짓’과 ‘무차별적이고 획일적인 패러다임’이 강고하게 구축되었다고 진단한다. ‘과도한’ 혹은 ‘폭압적 인간중심주의’와 ‘실천적 상대주의’(제3장 참조)는 왜곡된 개인주의와 공리주의와 실용주의의 가면을 쓰고 여전히 기승을 부리며 ‘새로운 사태’를 끊임없이 일으키고 있다.
, 회칙에서 분명하게 밝히듯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답을 주려 하지 않는다. 다만 ‘생태 재앙’이 제기하는 도전의 시급성과 광대함과 심각함을 자각한다면, 그에 걸맞은 응전과 지향이 필요하며(제4장), 그 길로서 모든 이의 정직하고 진실한 ‘대화의 길’을 제시한다. 그리고 그 대화의 길에 교회도 나서야 한다고 호소한다(제5장). 참된 평화의 길을 구축하는 데 따라야 할 원칙들을 교종은 이미 자신의 권고 「복음의 기쁨」에서 밝혔다. 물론 이 원칙들은 특정 이념이 아니라 복음적 근거를 갖는다. 첫째, 시간이 공간보다 위대하다. 이는 생태 전환의 과정 모색에 인내를 갖고 대화에 참여할 것을 요구한다. 둘째, 일치는 갈등을 압도한다. 이는 갈등 요소(차이)를 생태 전환의 과정에 연결시키는 것을 요구한다. 셋째, 실재들은 관념들보다 위대하다. 이는 생태 전환의 과정에 개인으로서든 공동체로서든 구체적인 행동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것을 요구한다. 마지막으로, 전체가 부분보다 위대하다. 이는 생태 전환을 위한 투신에 있어 다양성과 함께 그 조화의 중요함을 잃지 않는다는 의미다.
회칙은 인류의 생태 전환에 기여하는 것을 ‘사명’으로 밝히면서, 그 사명을 수행하는 것이야말로 ‘인류 가족에 대한 사랑과 존경을 가장 웅변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라는 공의회의 선언을 충실히 따른다. 이를 위해 교회와 그리스도인에게는 건전한 영성과 교육이 요구되는데, 그 영성과 교육의 토대를 제2장 창조의 복음에서 제시한다. 무엇보다도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만남을 강조한다. 그 만남은 ‘관상’의 태도를 불러올 것이다(제6장).
여기서 소개하고 싶은 ‘그림’ 하나가 있다. 지난해 12월 8일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폐막 50년을 기념하며 교종은 1년을 ‘자비의 특별희년’으로 보내자고 우리를 초대하였다. 이때 모습을 드러낸 ‘그림’에는 예수님의 어깨에 얹혀 있는 우리의 얼굴과 예수님의 얼굴은 겹쳐 있는데, 그 두 얼굴에는 눈이 세 개밖에 없다. 한 눈이 바로 예수님과 우리의 ‘공동의 눈’이다. ‘관상’이란 이 ‘공동의 눈’으로 ‘나’만이 아니라 천지 만물을 헤아리는 태도다. ‘예수님과의 인격적 만남’과 ‘관상’은 ‘생태 전환’에 대한 투신을 불러온다.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느님의 뜻에 투신하셨던 것처럼 말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하느님 백성인 교회의 사목 목표를 ‘쇄신과 정화’, ‘복음화’ 그리고 ‘대화’라고 선언했다. 교종은 복음과 보편 교회의 공의회 가르침에 따라 그 ‘사목’에 헌신한다. 말씀의 봉사자로서 교종이 권고 「복음의 기쁨」을 통해 교회의 쇄신을 가르쳤다면, 회칙 「찬미받으소서」는 가장 시급한 ‘복음화’의 과제로서 ‘생태의 전환’을 선포한 것이다. 그리고 그 쇄신과 복음화 사명 수행을 위해 거침없이 대화의 길로 나서고 있다. “당면한 ‘실재’를 자세히 그리고 완전히 분석하는 것이 교종의 임무는 아니지만, 저는 모든 교회 공동체가 … 시대 정신을 식별하고 확인하며, 선한 정신의 움직임을 선택하고 악한 정신의 움직임을 거부하기를 … 권고합니다”(「복음의 기쁨」 51항). 이번 호로 회칙 「찬미받으소서」 해설을 마칩니다. -박동호 안드레아 신부님
[그림으로 보는 복음묵상] 대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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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니오 나는 아니오 나는 저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오
납니다 내가 맞아요 내가 바로 저 사람의 제자입니다
닭아 질문은 바뀌지 않았지만 대답이 달라졌단다
예수님께서 세 번째로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요한 21,17) -임의준 프란치스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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