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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다운 무속인들의 모임(신내림굿 신병 빙의 치료 천도 퇴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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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스크랩 이영도 / 시조시인
마산덕구, 추천 0 조회 572 16.04.26 23:3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이영도(李永道 / 호 '丁芸')      시조시인

출생(사망)        1916. 10. 22 (1976. 3. 5) 경북 청도

데뷔                 1945년 대구의 동인지 《죽순(竹筍)》에 시조

                       《제야(除夜)》를 발표

학력                 독학

경력                 부산 남성여고, 마산 성지여고 교사

                        부산여자대학(지금의 신라대학교)에도 출강

                        부산어린이회관 운영 책임자

작품                 1954년 첫 시조집 《청저집(靑苧集)》 출간

                        1968년 오빠 이호우(李鎬雨)와의 공동시조집인

                       《석류(石榴)》 출간



     言約

 

 

  해거름 등성이에 서면
  愛慕는 낙락히 나부끼고

  透明을 切한 水天을
  한 점 밝혀 뜬 言約

  그 자락
  감감한 山河여
  귀뚜리 叡智를 간(磨)다.

 


 

     바위 
       -어머님께 드리는 詩

 

 

  여기 내 놓인대로 앉아
  눈 감고 귀 막아도
 
  목숨의 아픈 證言
  꽃가루로 쌓이는 四月

  萬里 밖
  回歸의 길섶
  저 歸燭道 피 뱉는 소리

 


 

     달무리

 

 

  우러르면 내 어머님
  눈물고이신 눈매

  얼굴을 묻고
  아. 宇宙이던 가슴

  그 자락
  鶴같이 여기고, 이 밤
  너울 너울 아지랑이

 


 

     외 따로 열고

 

 

  비 오고 바람 불어도
  가슴은 푸른 하늘

  홀로 고운 星座
  지우고 일으키며

  솔바람
  머언 가락에
  목이 긴 鶴 한 마리

  멀수록 다가 드는
  思慕의 空間 밖을

  萬里 더 지척같이
  넘나드는 꿈의 通路

  그 세월
  외따로 열고
  다둑이는 추운 마음

 


 

     蘭

 

 

  나직이 영창 밖으로
  스며드는 물빛 黎明

  그 숨결 이마에 감고
  새댁처럼 素心 눈 뜨네

  내 마음
  사래 긴 渴症 위를
  왁짜히 장다리꽃 튼다

 


 

     모란

 

 

  여미어 도사릴수록
  그리움은 아득하고

  가슴 열면 고여 닿는
  겹겹이 먼 하늘

  바람만
  봄이 겨웁네
  옷자락을 흩는다.

 


 

     天啓 
      -사월탑 앞에서

 

 

  신 벗고, 塔 앞에 서면
  한 걸음 다가서는 祖國

  그 絶叫 사무친 골엔
  솔바람도 설레어 운다
 
  푸르게
  눈매를 태우며, 너희
  지켜 선 하얀 天啓

 


 

     고비

 

 

  꽃 피고 싹 트이면
  골을 우는 뻐꾸기들

  목숨의 크낙한 分娩
  함께 앓는 이 고비를

  山河도
  끓이던 靑血
  아, 그 三月, 그 四月에......

 


 

     雪夜

 

 

  눈이 오시네, 사락사락
  먼 어머님 옷자락 소리

  내 新房 장지 밖을
  감도시던 기척인 듯

  이 한밤
  시린 이마 짚으시며
  약손인 듯 오시네.

  곰곰이 헤는 星霜
  멀고 험한 오솔길을

  갈(耕)아도 갈아도 목숨은
  연자방아 도는 바퀴

  갈퀴손
  어루만지며
  言約인 듯 오시네.

 


 

     恩寵

 

 

  잎잎이 가을을 흔들고
  들국화 낭랑한 언덕

  그 푸름 속 아른 아른
  고추감자리 난다

  당신 뜰
  마지막 饗宴 위로
  구름이 가네, 바람이 가네.

 


 

     노을

 

 

  먼 尖塔이 타네
  내 가슴 절벽에도

  돌아 앉은 人情 위에
  뜨겁던 임의 그 피

  悔恨은
  어진 깨달음인가
  "골고다"로 젖는 노을.

 


 

     光化門 네거리에서

 

 

  사월의 이 거리에 서면
  내 귀는 소용도는 海溢

  그날, 東海를 딩굴며
  허옇게 부셔지던 泡哮

  그 소리
  네 목청에 겹쳐
  이 廣場을 넘친다

  정작 바길 덤덤해도
  한 가슴 앓는 傷痕

  차마 바래일(漂白) 수 없는
  녹물 같은 얼룩마다

  千이요
  萬의 푸른 눈매가
  나를 불러 세운다.

 


 

     石榴

 

 

  다스려도 다스려도
  못 여밀 가슴 속을

  알알 익은 고독
  기어이 터지는 秋晴

  한 자락
  가던 구름도
  추녀 끝에 머문다.

 


 

     丹楓

 

 

  너도 타라 여기
  황홀한 불길 속에

  사랑도 미움도
  넘어 선 淸이어라

  못내편
  그 청춘들이
  사뤄 오르는 저 香爐

 


 

     아지랑이

 

 

  어루만지듯
  당신
  숨결
  이마에 다사하면

  내 사랑은 아지랑이
  춘삼월 아지랑이
  장다리

  조오란 텃밭에
  나비
  나비
  나비
  나비

 


 

     團欒

 

 

  아이는 글을 읽고
  나는 繡를 놓고

  심지 돋우고
  이마를 맞대이면

  어둠도
  고운 愛淸에
  삼가한 듯 들렀다.

 


 

     生長 
       -진아에게

 

 

  날로 달 붓듯이
  자라나는 너를 보면

  무엔지 서러움이
  기쁨보다 느껴웁고

  차라리
  바라던 마음
  도로 허전 하구나.

 


 

     비

 

 

  그대 그리움이
  고요히 젖는 이 밤

  한결 외로움도
  보밴냥 오붓하고

  실실이
  푸는 그 사연
  장지 밖에 듣는다.

 


 

    塔3

 

 

  너는 저만치 가고
  나는 여기 섰는데.....

  손 한번 흔들지 못한 채
  돌아선 하늘과 땅

  愛慕는
  舍利로 맺쳐
  푸른 돌로 굳어라.

 


 

     그리움

 

 

  생각을 멀리하면
  잊을 수도 있다는데

  고된 살음에
  잊었는가 하다가도

  가다가
  월컥 한 가슴
  밀고 드는 그리움.

 


 

     무지개

 

 

  여윈 그 세월이
  덧없는 살음이매

  남은 日月은
  비단 繡로 새기고저

  오매로
  어리는 꿈에
  눈 부시는 무지개.

 


 

     白鹿潭

 

 

  차라리 스스로 달래어
  쓰느라니 고였는가

  그날 하늘을 흔들고
  아우성 치던 불길

  투명한
  가슴을 열고
  여기 내다뵈는 상채기.

 


 

     海女

 

 

  눈은 서늘한 눈은
  珊瑚빛 어린 하늘

  먼 갈매기 울음에
  부풀은 淸일레라

  여울져
  달무리 가듯
  일렁이는 뒤움박.

 


 

     이별

 

 

  정작 너를 두고
  떨쳐 가는 이 길인데

  嶺湖 千里를
  구비마다 겨운 봄빛

  山川이 뒤져 갈수록
  닥아 드는 體溫이여! 

 

 


 

이영도의 작품세계 / 사향 노루 지나간 뒤에는  <이은상>

 

  동양에 있어서 여류 시인의 작품들을 살펴본다면, 중국 고대로 올라가 서왕모(西王母)의 "천자요(天子謠)"까지는 굳이 들추지 않더라도, 노나라 도명(陶明)의 딸 도영(陶영)이 지은 황곡가(黃鵠歌)나 송강왕(宋康王) 때 한빙(韓憑)의 아내 하씨(河氏)가 지은 오작가(烏鵲歌)로부터는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수천년의 역사를 지녔고, 또 우리 국사상에 있어서도, 고구려 뱃사공 곽리자고(藿里子高)의 아내 여옥(麗玉)의 공후인과 신라 여인 설요(薛요)의 반속요(返俗謠)와 백제 행상의 아내가 부른 정읍사(井邑詞)로부터 손꼽을 수 있을 것이라. 

  이도 역시 천 수백 년의 역사를 지녔고, 그 이후 고려, 이씨 왕조를 통하여서도 자못 수 백명의 여류 시인과 그들의 아름다운 작품을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그 중에서도 시조 작품을 남긴 여성들만도 역대를 통하여 현부인, 궁녀, 기생들을 아울러 현재 문헌상에 나타난 이름이 자못 30명에 이르고 있음을 본다.
  그리고 우리 시대에 와서도, 일찍부터 여류 시조 작가가 나타나지 않은 것이 아니었지만, 그 중에서도 여름밤 구름을 뚫고 나타나는 달처럼, 모두를 쳐다보도록 맑고 환한 모습을 드러내보인 두드러진 여류 시조 작가가 누구였더냐 물으면, 아마 누구도 이 영도를 지적할 것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그것은 그가 확실히 시인이 도달해야 할 어떤 경지에 이르렀던 여인이기 때문이다.
  시인이 자연을 묘사하기는 쉽다. 그러나 그것 가지고서는 시인이 어느 깊은 경지에 들어갔다고는 보기 어렵다.
  시는 어떤 묘사로써 일삼기보다는 자연과 대화를 나눌 수가 있어야 한다. 물론 이것은 음악이나 미술 등 모든 예술에 다 통하는 말이기도 한 것이다.
  우리는 이영도의 시조 작품 속에서 그가 자연과 나누던 대화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또 어느것에서는 그가 자기 스스로 맑고 미묘한 정서 속에 휘말려 들어가서 숨가쁘게 심호흡을 하는 소리를 듣기도 하는 것이다.
  그는 무엇인가 갈구하고 있었다. 신의 문을 두들기며 대답을 들으려 했다. 그러나 마침내 세상 인연을 끊어버리고 신의 품속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것이 그의 일생이었다.
다만 사향노루가 지나간 위에는 발자국 닿은 풀끝마다 향기가 끼치듯이. 그는 어디론지 가버렸건만, 향내 머금은 작품들이 남아 우리 가슴에 풍기고 있다.

 

          출처 : "2001년 <시조문학> 봄호에서 '성일만' 정리" 일부 인용

 


 

시조시인 이영도에 관한 一考

 

경북 청도군 청도읍 내호리에 소재한 시인과 시인의 오빠이자

같은 시인인 이호우 시인을 기리는 "오누이' 詩碑가 있다.

현대시단에서 여류시조시인인 이영도 시인만큼 널리 회자되는 문인도

드물 것이라 생각된다.

 

당시로서는 유명하다고 자타가 인정할만한 집안의 딸로 태어났으면서도

교육의 혜택에서 비켜 앉은 점도 석연치 않는 사연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되는

인생역정이었고 이에 굴하지 않고 독학으로도 여느 사람못지 않은

실력을 갖추었었다는 점과 조혼과 이른 나이에 청산이 되어 구태어

독신을 지켰으며

그러함에도 시조시인으로서의 능력을 인정받았을 뿐 아니라 

명문의 교육기관에서 그의 역량을 발휘한 미모의 여성이라는 점 이외에,

당대의 걸출한 문인이자 유부남이었던 청마 유치환 시인과의 숭고한

사랑으로 유명할 뿐 아니라

특히

사후에 두 연인간에 주고 받았던 5,000 여통의 편지로 엮여진 청마의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네라>제하의 책이 발간되어 세간에

알려짐으로써 그 애틋한 사랑으로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던 것으로도

유명하기가 끝이 없다.

 

아래는 

이와 관련하여 작성된 다른 분의 기고를 옮겨 왔기에 소개를 드린다.

비록 문장의 성숙도에서는 기대에 미치지 못할 수도 있겠으나,

자료수집과 편집에 노고가 엿보임으로 약간의 수정을 거쳐 게재하였으므로

참고하시길 바란다.

  (잔물결) 

 

 


 

청도의 유천강(비파강 또는 동창천)을  소재로 이호우 시인의 여동생

이영도 시인의 제자중의 한 사람이 스승의 생가를 방문하고남긴 시편으로
우리들에게는 남다르게 다가올 싯귀로 여겨지기에 서두에 이렇게 옮겨 본다.

 


겨울 비파강 / 김남환

 


봄볕 부신 물무늬
하얗게 빛바래고

그 삼월 순금을 뿌린
아지랑이 그도 가고

먼 생각 휘어도는 곳
필(匹)로 펼친 긴 무심(無心)

젊은 날 이 언덕에
씨앗 뿌린 임의 사랑

삼천의 꽃나울로
차오르는 생각이여,

얼음 밑 타는 속울음
조각달이 듣고 있다.


   우리가 중 고등학교 다닐 때 국어 교과서에는
'정운'이라는 이름으로 올려진 빼어난 시조 몇 수가 실려 있었는데
이 '정운'이라는 시인이 바로 "이영도" 시인으로 '정운'은 그 분의 호이다. 
오빠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시조라고 하는 형식을 통해 시를 썼고
   그 역시 오빠를 추천해 준 가람 이병기 선생의 추천을 받아 문단에 나왔다.
오빠의 영향이 컸었으나
여성이라는 감수성과 스스로의 삶의 여정에서 생성된 구도자적 정서로는
오빠와 또 다른 국량을 보인 것으로 평가된다.
어쨌든 이 오누이가 쌍끌이로 현대시조의 새로운 지평을 개척한 것이다.

 
   이 시인의 운명은 좀 기구한 데가 있었다.
10대 후반에 대구의 이름 있는 가문의 청년과 결혼했지만
그렇게 만난 남편이 폐병으로 일찍 죽는 바람에 약관 21세에

딸 하나를 두고 과부가 되어 버렸다.
   남편을 치료하기 위해 언니가 약국을 경영하고 있는 통영으로 이사를 했고
그 통영에서 그렇게 남편이 먼저 세상을 떠나버린 것이다.

 

정갈한 몸가짐과 매무새에 상당한 미인으로 알려진 여류 시인!
남편을 잃은 후 10여년이 지난 뒤 직장을 찾던 중 시인은
통영여자중학교에 수예 선생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바로 그 학교에서 운명적인 사람을 만나게 된다.
청마 <유치환> ‘바위', '깃발'로 대표되는 중엄하고도 예리한 싯귀로
대단한 인식의 파괴력을 보여준 당대 최고의 시인!
그 청마와 운명적인 사랑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이미 결혼한 신분의 유부남인 청마였지만
청아한 아름다움의 여류시인을 보자 먼저 마음이 빼앗겨 버린 것은 청마였다.
이미
이영도 시인의 주변에는 내노라 하는 남성들이 기웃거리고
심지어 미모에 반해 상사병에 월담을 감행하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하였는데
어쨌든 가장 매력적인 남성이 가장 매력적인 아름다움을 뿜어내고 있는 여류시인을

보고는 그냥 빠져 버린 것이다.
같은 학교에 교사로 근무하던 두 사람은 청마 쪽의 3년간의 끈질긴 구애에
드디어 여류시인이 마음의 문을 열면서 본격적인 마음의 연인관계로 발전하게 되는데---.

 평생을 서로를 범하지 않으면서 마음의 연인으로 서로의 격조와 품위를 지켜주며
절제의 미학으로 꽃을 피우는 이른바 플라토닉 사랑---.
두 사람의 사랑은

20년 후인 1967년 청마가 불의의 교통사고로 청마가 갑자기 사망하자
연인 간에 오고 간 편지들이 <사랑했으므로 행복하였네라>라는 책으로 출판되어
세상에 알려 지면서 60년대 후반이후로 대단한 화제가 된다. ‘
세기의 사랑’ 운운하며---.  

 

다음의 시편은 애정의 초기,
마음으로는 원하지만 윤리적 내면으로는 선뜻 받아들일 수 없는
그때의 여류시인의 미묘한 감정이 잘 녹아나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오면 민망하고
   아니 오면 서글프고
   행여나 그 음성 귀 기우려
   기다리며
   때로는 종일을 두고
   바라기도 하니라
   정작 마주 앉으면
   말은 도로 없어지고
   서로 야윈 가슴 먼 창만 바라다가
   그래도 일어서 가면
   하염없이 보내니라.


어쨌든
이렇게 시작된 마음의 연인관계는 서로에게 내밀하게 심화되어
향후 수백 통의 편지를 주고받으며 깊이를 더해 간다.
때로는 싯귀로 때로는 신파극조의 사랑타령으로, 산문으로---.
여류시인이 31세 되던 해에 시작된 사랑은 20년을 넘기고
1967년 청마가 교통사고로 급서하면서 비로소 끝이 난다.
그 날도 청마는 여류시인과의 만남을 위해 집에서 나오다가 자동차사고로---.

(한편, 청마의 아내도 남편의 플라토닉(?) 외도를 알고 있었지만
"무릇 시인이라면 저 정도의 연심(戀心)은 있어야 한다"며 눈을 감아 주었다고 하니
그 남편에 그 아내---)

 

그 후로 여류시인은
청마를 잃은 슬픔을 속으로 삭이고 계속 교편을 잡았고
부산에서 대학에도 강의를 나가는 등 교육자의 활동을 이어 나갔다고 한다.
부산어린이회관장을 역임하는 등 복지사업도 적극적으로 수행했고---.

  

우러르면 내 어머님
눈물 고이신 눈매

얼굴을 묻고
아, 宇宙이던 가슴

그 자락

학 같이 여시고, 이 밤
너울너울 아지랑이.

(‘달무리’전문)


이호우 시인은
당시로서는 상당한 수준의 학문과 학교를 나왔으나
이영도 시인의 학력은 별로 알려진 바가 없다.
일찍 결혼을 한 것을 보면 오직 독서와 의지적 노력으로 지식을 쌓았고
사물을 보는 눈을 예리하고 섬세하게 기른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시집을 가서도 시아버지의 눈을 피해 창문을 가리고
팔이 시릴 정도로 밤새워 독서를 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문학계에서도 생전에 이미 중요한 위치를 인정받아
노산 이은상을 비롯한 남쪽의 주요 문인들과도 깊은 교유를 나누었다고 한다.
많은 문학적 제자들을 지도했고 지금도 작가 박완서씨는
그때 이영도 시인으로부터 선물을 받은 만년필을 깊이 간직하며
70년대 말과 80년대 언저리까지 그 만년필이 닳아 없어질 때까지
오직 그 만년필로 수많은 육필 원고를 썼다는 진술을 자랑삼아 하고 있으니
시인의 인간관계의 폭이 만만치 않았던 것을 알 수 있다.

 

청마 사후 9년 뒤

 1976년. 여류시인도 결국 뇌일혈로 급서한다.

강 건너(남산모랭이 산자락 어디인 듯)
오라버니 무덤이 있는 경주이씨 선영에 묘를 썼다고 한다.
이호우 시인은 그 보다 앞선 1970년에 사망했고---.


여기 한 시인이
비로소 잠들었도다

뼈에 저리도록
인정에 울었으니

누구도 이러니 저러니
아예 말하지 말라

(이호우의 자작시조 ‘묘비명’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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