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혜인수녀님이야기>
계단오르기
나는 강원도 양구에서 1945년 6월7일(음력:4월27일)에 태어났고 난 지 3일만에 가톨릭 세례를 받았다. 고모와 삼촌들도 함께 살았던 그 시절을 생각하니, 나는 조그만 라디오를 들고 골방에 숨어 어떻게 사람 목소리가 기계 안에서 들려오는지 보이지 않는 원리를 캐내려고 고민했던 기억도 새롭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가장 친하게 지낸 친구로는 안현숙(지금은 배우 최민수의 장모)이 있는데 지금도 종종 연락을 주고 받고 있으며 나는 이 친구의 이야기를 ‘튤립꽃 같은 친구’라는 제목으로 <사랑할 땐 별이 되고>에 쓰기도 했다.
강원도출신인 어머니는 오히려 좀 무뚝뚝한 편이었고 인천 출신인 아버지는 매우 다정다감한 성격이어서 나는 아버지를 매우 따랐던 것으로 기억된다. 아버지가 회사에서 돌아오실 무렵이면 늘 밖에 나가 기다렸고 그 때 저녁마다 사다주신 모나카 과자 맛을 잊지 못한다.
달리아 꽃이 가득한 정원에서 아버지가 나를 바라보던 그 그윽한 눈빛이 아직도 얼마나 그리운지! 금융조합 사택인 청파동에서 우리 사남매가 한창 행복하게 살 무렵 한국전쟁이 일어났고 아버지가 납치를 당하시는 바람에 우리 가족에겐 안팎으로 어려움이 닥쳤다.
전쟁이 나고 우리 가족은 부산으로 피난을 갔고 나는 부산 성남초등학교에 입학했다가 다시 서울로 가 2학년 1학기부터 창경초등학교에 다녔다. 이 무렵 언니, 오빠들이 읽는 <학원> 등의 잡지를 읽고 일찍이 문학 소녀가 되었다.
나는 늘 조용하고 새침한 모습으로 상상 속에 사는 아이였고 공부는 곧잘 했지만 조금은 우울한 편이었다. 형편이 어려워져 어머니는 삯바느질을 하셨고 어머니가 만들어 준 꽃골무나 노리개를 친구들에게 자주 갖다 주곤 하였다.
초등학교 시절 한번은 ‘학교가는 길’이란 글짓기로 큰 상을 받은 적이 있는데 겨울길의 플라타나스 나무와 내가 주고 받는 이야기를 그린 순수하고 아름다운 이야기였다고 기억된다.
대학을 중퇴하고 어머니 대신 살림을 꾸려가던 언니가 친한 친구들과 함께 가르멜 수녀원에 들어간 것도 이 무렵이었는데 어린 나는 엄마보다 엄격했던 언니가 두려웠기 때문인지 집을 떠나 멀리 간다는 그 사실을 슬픈 줄도 모르고 받아들였던 것 같다.
그 후, 방학 때 수녀원에 놀러 가면 수녀님들이 주는 쵸콜릿이나 예쁜 카드들이 나를 황홀하게 했으며, 숲에서 들려오는 새 소리가 너무도 정답고 사랑스러워 잠을 이루지 못할 지경이었다.
돌이켜 보면 나는 이미 그 때 나를 부르는 어떤 목소리에 매료되었고 수도 생활에 대한 동경을 어렴풋이 지닌게 아닌가 싶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처음으로 중학 입시 무시험 제도가 생겼고 나는 학과 성적이 꽤 좋은 편이었는 데도 경기, 이화, 숙명을 가지 못하고 담임 선생이 써 주는대로 풍문여중에 안정적으로 입학하게 되었다.
입학식 날 만나 계속 친하게 된 벗들 중엔 후에 가수 박인희가 있고 그 후에 친하게 된 친구 중엔 지금 'fine'이라는 화랑을 운영하는 김혜숙, 독일에서 사는 윤광순 등이 있다.
영어담당 안오신 선생님이 수업시간 틈틈이 읽어주던 신지식의 <감이 익을 무렵>
< 하얀 길>은 나도 그런 글을 쓰고 싶다는 갈망을 심어 주었고 문예반에서 임영무 선생님을 만나 많은 격려와 인정을 받게 되었다.
제일 처음으로 써서 교지에 실린 시가 '들국화' 라는 시였는데 중학교 소녀의 사색 치곤 제법 잘 익은 시 같아서 나는 근래의 시집에도 넣어 두었다.
나의 중학교 시절이 나에게 좋은 선생님과 친구들을 만나게 해 주었음을 늘 감사히 여긴다. 얼마전 LA에 출장갔을 때 풍문여중 졸업 앨범까지 들고 나와서 우리의 옛모습을 확인시키며 즐거워하던 친구들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http://youtu.be/21Nrrdmvz0c
오늘을 위한기도
게시일: 2013. 8. 20.
오늘을 위한 기도 - 이해인
기도로 마음을 여는 이들에게
신록의 숲이 되어 오시는 주님
제가 살아 있음으로 살아 있는
또 한 번의 새날을 맞아
오늘은 어떤 기도를 바쳐야할까요
제 작은 머릿속에 들어찬
수천 갈래의 생각들도
저의 작은 가슴속에
풀잎처럼 돋아나는 느낌들도
오늘은 더욱 새롭고
제가 서 있는 이 자리도
함께 살아가는 이들도
오늘은 더욱
♧가깝게♧
항상
하루하루를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야지 되겠다.
말을 위한 기도/이혜인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수없이 뿌려 놓은 말의 씨들이
어디서 어떻게 열매를 맺었을까
조용히 헤아려 볼 때가 있습니다
무심코 뿌린 말의 씨라도
그 어디선가 뿌리를 내렸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면
왠지 두렵습니다
더러는 허공으로 사라지고
더러는 다른 이의 가슴 속에서
좋은 열매를 또는 언짢은 열매를 맺기도 했을
언어의 나무
주여
내가 지닌 언어의 나무에도
멀고 가까운 이웃들이 주고 간
크고 작은 말의 열매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습니다
둥근 것 모난 것
밝은 것 어두운 것
향기로운 것 반짝이는 것
그 주인의 얼굴은 잊었어도
말은 죽지 않고 살아서
나와 함께 머뭅니다
살아 있는 동안 내가 할 말은
참 많은 것도 같고 적은 것도 같고
그러나 말이 없이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는 세상살이
매일매일 돌처럼 차고 단단한 결심을 해도
슬기로운 말의 주인 되기는
얼마나 어려운지
날마다 내가 말을 하고 살도록
허락하신 주여
하나의 말을 잘 탄생시키기 위하여
먼저 잘 침묵하는 지혜를 깨치게 하소서
헤프지 않으면서 풍부하고
경박하지 않으면서 유쾌하고
과장하지 않으면서 품위있는
한 마디의 말을 위해
때로는 진통 겪는 어둠의 순간을
이겨 내게 하소서
참으로 아름다운 언어의 집을 짓기 위해
언제나 기도하는 마음으로
도(道)를 닦는 마음으로 말을 하게 하소서
언제나 진실하고
언제나 때에 맞고
언제나 책임있는 말을
갈고 닦게 하소서
내가 이웃에게 말을 할 때에는
하찮은 농담이라도
함부로 지껄이지 않게 도와 주시어
좀더 겸허하고
좀더 인내하고
좀더 분별있는
사랑의 말을 하게 하소서
내가 어려서부터 말로 저지른 모든 잘못
특히 사랑을 거스른 비방과 오해의 말들을
경솔한 속단과 편견과
위선의 말들을 주여 용서하소서
나날이 새로운 마음, 깨어 있는 마음
그리고 감사한 마음으로
내 언어의 집을 짓게 하시어
해처럼 환히 빛나는 삶을
당신의 은총 속에 이어가게 하소서
아멘
말의 빛
쓰면 쓸수록 정드는 오래된 말
닦을수록 빛을 내며 자라는
고운 우리말
"사랑합니다"라는 말은
억지 부리지 않아도
하늘에 절로 피는 노을 빛
나를 내어주려고
내가 타오르는 빛
"고맙습니다"라는 말은
언제나 부담 없는
푸르른 소나무 빛
나를 키우려고
내가 싱그러워지는 빛
"용서하세요"라는 말은
부끄러워 스러지는
겸허한 반딧불 빛
나를 비우려고
내가 작아지는 빛
말과 글
글은 오래오래 종이에 남는 것이고
말은 그냥 사라지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한 마디의 말 또한
듣는 이의 마음속에 오랫동안 간직된다
한 사람의 펜으로 씌어진 글은
그 사람 특유의 개성을 지닌 작품이 되듯
한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 사람의 인격을 드러내는 하나의 작품이다
그러므로
끊임없는 노력으로
참으로 선하고 진실하고 아름다운
말의 작품을 빚을 일이다
여름일기
- 이혜인 수녀 -
아무리 더워도
덥다고
불평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차라리
땀을 많이 흘리며
내가 여름이 되기로 했습니다
일하고 사랑하고
인내하고 용서하며
해 아래 피어나는
삶의 기쁨 속에
여름을 더욱 사랑하며
내가 여름이 되기로 했습니다
아침 향기/이해인
아침마다
소나무 향기에
잠이 깨고
창문을 열고기도합니다
오늘 하루도
솔잎처럼 예리한 지혜와
푸른 향기로
나의 사랑이 변함없기를
찬물에 세수하다 말고
비누 향기 속에 풀리는
나의 아침에게 인사합니다
오늘 하루도
온유하게 녹아서
누군가에게 향기를 묻히는
정다운 벗이기를
행복한 8월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