Ⅱ. 경제개발, 자주국방, 국민총화의 시대
현대미술의 실험기에 해당하는 이 당시는 우리민족이 온갖 시련을 극복하고 서구문명의 근간인 과학기술과 자본주의를 위주로 유수한 산업 국가로 발돋움하는 고도성장을 이룩하였지만 한국현대사에 있어서 어느 시기, 어느 때보다도 치열한 역사를 살아온 시기였다.
1960년 3. 15 부정선거 결과 일어난 4.19 학생혁명은 제 2공화국의 정치체제의 한계로 말미암아 결국은 군사적 권위주의체제 성립의 배경이 됨으로써 미완의 혁명이 되었다. 하지만 학생과 대중들이 더 이상 역사에 종속되지 않고 주체로서의 역량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귀중한 역사적 사건이기도 하다.
이후 “무능한 현정권과 기성 정치인에게 더 이상 국가와 민족의 운명을 맡겨 둘 수 없다”는 대의 명분아래 일단의 군인들이 1961년 5월 16일의 군사쿠데타를 일으키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후 대한민국은 높은 경제성장력을 배경으로 우리 민족사에 일대 전환점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민족적 역량을 내외에 과시했지만 경제성장의 성과에도 불구하고 황금만능주의 풍조를 만연시켜 사회불신과 함께 도덕적 타락을 불러일으킨 매우 암담한 시기이기도 했다.
그 가운데 군사정권은 1972년 ‘유신’을 단행함으로써 공화당은 패권정당이 되고 군부정치라는 틀을 이룩하였고 이를 통해 1979년 4공화국이 마감 될 때까지 20여 년간 한국의 정치 경제 문화를 실질적으로 주도하였다. 군부가 정치적 입지를 굳히는 과정에서 그들은 정치자금 마련을 위해 소위 증권조작, 새나라 자동차 사건, 워커힐 건설, 빠징코 도입사건 등 ‘4대 의혹사건’과 밀가루, 시멘트, 설탕과 관련한 ‘3분 사건’을 일으켰고 6.3사태 등으로 지연되었던 한일협상을 통해 한일 국교 정상화가 이루어지고 1963년 12월 17일 박정희 대통령 취임식을 거행함으로써 군정은 종료되고 정식으로 제 3공화국이 출범하였다.
이후 1969년 3선 개헌안을 통과시켜 장기집권기틀을 마련하였고 이에 재야에서는 ‘민주수호국민협의회’를 결성하여 박정희 당선 저지 운동을 벌였으나 그는 1971년 제 7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제 3공화국은 제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62∼1966)을 시작으로 조국근대화사업을 전개하였고 이후 2차, 3차 경제개발계획으로 이어져 갔다. 한일협정 비준으로 일본의 자본, 기술, 상품이 진출하여 한국의 산업화에 큰 역할을 하였고 결과적으로 외국에 의존하여 국가가 주도하는 성장위주의 산업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미국의 주한미군 철수와 원조삭감 등을 이유로 파병을 요구하자 비 전투요원의 파병으로 시작된 월남파병은 1964년 9월 본격적으로 전투요원 파병으로 이어졌고 1973년 3월 완전 철수 시까지 8년 5개월 동안 공식적으로 5차에 걸쳐 파병이 이루어져 약 5만 명이 넘는 한국군이 월남에서 대리전쟁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이는 한국 정치경제에 심대한 영향을 미쳐 장병들의 외화획득·국내기업의 월남진출· 한국인의 월남취업 등으로 국제수지에 막대한 기여를 하였고 이는 경제계발 5개년 계획을 성공시킬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한국군의 월남파병은 국제공산주의 연대를 강조하는 북한의 남한 침투를 가속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는 1·21 무장공비 사건과 뒤를 이은 북한의 푸에블로호 납치사건, 칼(KAL)기 납북사건 등으로 이어졌고 향토예비군 설치와 주민등록증제도 도입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남북관계도 1970년대 들어서면서 유엔에서 제3세계의 발언권이 강화되고 한반도 문제를 더 이상 유엔에 맡겨 놓을 수 없다는 판단과 미국의 월남전에서의 패배, 닉슨 독트린, 미국과 중국의 핑퐁외교와 화해 등 주변여건의 변화에 따라 남북한도 그 대응책을 마련하기에 이르렀다.
남북은 적십자 회담에 이은 7.4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하고 남북조절위원회를 발족시키는 등 자주통일의 물꼬를 트는 듯 하였으나 결국은 남쪽은 유신으로, 북한은 사회주의 헌법을 제정함으로써 통치기반을 강화하고 스스로의 체제를 굳히는 방편으로 활용되고 말았다.
1970년대로 들어서면서 박정희 정권은 경제개발의 여파로 심한 인플레이션과 지속적인 국제수지 악화, 경기침체 등에 노출되기 시작하였다. 이 과정에서 전태일 분신사건(1970.11.13)으로 대표되는 노동자들의 저항이 일어나면서 노동운동이 격화되고 경기도 광주단지의 주민폭동을 비롯한 도시민들의 생존투쟁도 치열해졌다. 1972년에는 ‘경제안정과 성장에 관한 긴급명령 제 15호’에 의해 사채가 동결되고 아랍석유수출국기구와 석유수출국기구의 원유가격인상과 생산제한으로 오일쇼크가 닥치면서 한국경제도 대외 의존적 수출주도형 경제체제의 취약성을 그대로 노출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년 10% 이상의 경제성장률을 주도한 경공업 중심의 수출주도형 산업화 정책은 이미 1960년대 말부터 점차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했고 70년대 초 박정희 정권은 중화학공업화 정책으로 전환하였다.
이러한 경제적인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장기집권을 위한 ‘한국적 민주주의 토착화’를 위한 ‘유신’을 단행하였으나 이에 대한 반대는 중단 될 줄 몰랐고 김대중 납치사건 이후 장준하 등을 중심으로 지식인 30인이 주도한 유신헌법개정 청원을 위한 100만인 서명운동 등이 펼쳐졌고 이에 정권은 긴급조치를 통해 비상 군법회의를 설치하여 압제를 강화하여 ‘전국 민주 청년학생 총 연맹 사건’·‘고대 휴교령’으로 대응하였으나 재야에서는 ‘자유언론실천선언’·‘자유실천문인협의회 101인 선언’에 이어 1976년 ‘3·1 구국선언’으로 이어가면서 정권과 팽팽한 긴장관계를 유지하였다.
박정희 정권은 군사 쿠데타 성공이후 농촌근대화를 위한 ‘중농정책’을 통해 농민의 지지를 얻고자 했으나 공업중심의 산업정책으로 인해 60년대 말부터 도시와 농촌의 경제적 격차는 더욱 심화되었다. 1971년 제 7대 대통령 선거결과 박 정권의 거의 유일한 지지층은 농촌임을 확인 할 수 있었고 이에 농촌경제의 회복은 경제적인 이유 뿐 만 아니라 정치적인 이유에서도 당면한 과제로 대두되었다.
이 과제해결을 위해 ‘새마을 운동’이 나타났다. 넓은 의미에서 농촌재건운동이자 자조·자립정신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농촌 마을 가꾸기 사업은 70년대 초 실험기간을 거쳐 1973년부터 ‘새마을 운동’이란 이름으로 본격화되었다. 이 운동은 농촌사회에 많은 질적 양적 변화와 발전을 가져왔으나 정부 주도적 성격으로 이룬 농민의 조직화는 정권의 변화와 함께 쉽게 와해되었고 전통적인 마을의 공동체적 성격도 퇴색되었다.
또한 박정희 정권은 1960년대 중반부터 제기된 식민사관의 비판과 민족주의 사관의 등장에 맞추어 ‘자주국방’과 ‘국민총화’로 집약되는 군사주의 및 국가주의를 강화하려는 목적으로 전통과 역사를 선택적으로 활용하였다. 이러한 대표적인 예는 호국유산의 집중적인 복원과 충효사상과 같은 전통적인 윤리의 부활, 박정희를 민족사적 영웅으로 부각시키기 위해 문무를 겸비한 대표적인 인물인 세종대왕과 이순신의 집중적인 부각 등이다. 이와 함께 불국사, 부석사, 김정희의 고택 복원, 항일의사들의 사당건립과 1971년 부여박물관을 시작으로 1972년 국립중앙박물관 신축이전에 이어 공주, 경주박물관 등을 개관하고 공주의 무령왕릉, 경주 천마총의 발굴과 <한국미술 2천년>전을 개최하는 등 민족전통문화에 대한 확산을 도모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이러한 정책의 일환으로 히피족과 장발단속은 그 강도를 더해갔고 새로운 문화로 등장한 미니 스커트에 대한 단속도 강화되어 1970년 급기야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성이 광주에서 즉심에 회부되는 일까지 일어났다. 이러한 한국의 변혁기는 국민소득이 높아지고 전통사회가 붕괴되어감에 따라 사회적 지위는 곧 경제적 능력으로 평가되면서 높은 교육열로 나타났다. 따라서 동시대의 세계적인 문화 조류에도 눈을 돌리고 이에 공감할 수 있는 여지들을 가질 수 있었다.
당시 반정부적인 입장과 진보적인 관점으로 정권을 질타했던 『사상계』에 이어 1966년 창간된 『창작과 비평』그리고 『문학과 지성』등은 서구의 진보적인 역사관이나 최신 철학을 소개하여 당시 대학에 재학중인 청년층들에게 세상을 보는 새로운 눈을 갖도록 하였다. 시인 신동엽과 신경림 그리고 김지하로 이어지는 실천적이고 민족적인 성향의 비판적인 문학은 사회저변에 깔린 저항의식을 일깨웠다. 한편으로는 이렇게 정치적으로 암울했던 시기를 넘기 위해 소위 청바지, 생맥주와 통기타로 상징되는 “청년문화”가 등장했다. 이들은 나름대로 터득한 방법으로 당시의 시대상황에 저항하는 동시에 적응하였다.
한국현대미술이 폭발적인 실험의지를 구가하던 시기는 세계적으로는 저항과 반항의식이 폭발적으로 분출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베트남 전쟁의 분수령이 되었던 구정공세는 물론 체코슬로바키아를 휩쓸었던 프라하의 봄, 프랑스의 5월 혁명, 서독에서의 학생봉기, 콜럼비아 대학의 점거사태, 멕시코 시티에서의 올림픽 이전에 벌어진 대학살도 이후 등장한 이탈리아의 ‘뜨거운 여름’에서, 미국의 1970년 5월 그리고 중공의 문화대혁명(1966), 중동전쟁 발발(1967)을 이어 가장 격동적인 변모와 위기의 시기였다.
당시 세계는 흔히 주류 사회학이나 정치학에서 부르는 ‘신 사회운동’·‘정체성의 정치’혹은 ‘반 문화’의 시대로 ‘문화와 정치의 거대한 융합’의 시대였고 한국도 경제개발에 따라 변화하는 사회상에 따라 이러한 경향에 휩쓸리기 시작하던 시기이다.
프랑스의 실존주의, 고다르의 영화들,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부활한 카프카, 재즈와 블루스, 락과 팝아트, 여성해방운동의 시작 그리고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이론 등과 같은 풍부한 자양분을 토대로 벤야민의 말처럼“어떤 위험의 순간에 섬광처럼 스쳐 지나가는 것과 같은 어떤 기억”을 포착해 내었으며 이를 “억압된 과거를 위한 투쟁에서 나타나는 혁명적 기회의 신호”로 인식했던 시기이며 이러한 세계적인 저항과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한 저항적 인식의 틀은 1970년대 중반까지도 우리에게 유효하다.
따라서 한국현대미술사에 있어서 실험정신으로 무장한 일군의 젊은이들이 폭발적으로 운동적 차원에서 전개했던 현대미술운동은 학계의 충분한 논의가 필요하다는 전제아래 정치적으로 군사정권의 정통성 확보를 위한 ‘정부주도형 경제발전’ 그리고 국민적 총량강화를 위한 ‘새마을 운동’, 민족주의적 성격 강화를 통한 ‘유신의 합리화’ 남북 분단상황의 완급조절을 통해 정권안정을 이루고자 했던 시기이다.
한편 문화적으로는 경제적 발전에 따른 라이프 스타일의 변화와 중진국형 소비행태, 국제적인 대중문화 유입의 가속화, 국민교육수준의 향상 등으로 삶이 양에서 질로 변화하던 시기로 사회 어느 분야에서 건 간에 새로운 것을 창조해야 한다는 분위기와 이에 적응하고 동화하는 한편 여기서 파생되는 가치관의 혼돈에서 고민하고 세계적으로는 학생운동을 중심으로 한 젊은이들의 역사에 대한 전위의식이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타나던 시기이다.
Ⅲ. 새로운 실험의식의 발현
한국현대미술사에 있어서 처음으로 등장한 현대적 미술운동으로 일컬어지는 앵포르멜 운동은 당시 대한민국미술전람회의 고답적인 제도와 천편일률적인 미술형식에 대한 반발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조형적·미술사적 입장과 함께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할 부분은 다름 아닌 당시 화단의 주류세력을 이루고 있었던 국전 출신작가들과 신진작가들간의 화단의 주도권 확보를 위한 화단정치의 이면이다.
이후 한국화단의 주요 미술운동과 항상 연계되어 나타나는 화단의 주도권 다툼은 사실, 한국현대미술의 기점을 형성하는 중요한 모티브였을 뿐만 아니라 70년대 미술을 주도하는 눈에 보이는 않는 하나의 원동력이 되고 있기도 하다. 50년대 후반 한국화단은 국제적인 조류에 노출되기 시작하면서 앵포르멜 열기로 충만했던 청년작가들은 해외로 눈을 돌리기 시작하였고 이에 미술협회가 국제전에 참가하는 작가와 작품을 선정하면서 국전의 운영권에 이은 또 하나의 권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당시 추상미술을 대표하는 앵포르멜 세대는 국제전 참가권을 얻어내면서 나름의 화단의 중심세력으로 자리하기 시작하였다.
물론 당시의 뜨거웠던 앵포르멜 열기는 새로운 미술에 목 말라하던 젊은 작가들에게는 물론 미술대학교 재학생들에 까지도 ‘현대’라는 이름으로 신선하게 받아들여졌다. 이러한 상황은 앵포르멜의 선두에 섰던 신진작가들의 발언권을 강화시켰을 뿐 만 아니라 당시 화단의 중심적인 화풍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고 어느 정도 양식화하면서 1962년과 1964년에 개최된 앵포르멜 작가들의 연합적인 성격이 강한 ‘악뛰엘’전을 중심으로 지속되었으나 점차 그 세가 약화되었다. 이후 실험적인 다양한 경향들이 급속도로 팽창하자 1968년 2월 <한국조형작가회>를 발족시켜 앵포르멜 2세대 양성에 나섰으나 실험적인 젊은 작가들의 혈기와 열기에 눌려 침체상태에 빠져들었다.
이 당시의 앵포르멜 회화가 화단에 지배적이고 주도적인 사조로 자리했던 시기인 1964년 새로운 미술을 희구하던 젊은 작가들에 의해 발족한 <논꼴>의 선언문을 보면 당시 현대미술의 상황에 대한 새로운 세대의 인식의 일단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이들은 일절의 타협과 형식을 벗어나는 시점에서 우리는 항상 자유로운 조형의 기치를 올린다.
1. 새 시대에 참여하는 “자유에의 의식”을 우리는 조형조건으로 한다.
2. 우리는 극단적 시대의 창조적 변화를 조형윤리로 삼는다.
3. 기성의 무분별한 감성에서 벗어나 지성의 발판에서 형식의 모랄을 추구한다.
고 선언함으로써 당시 앵포르멜 회화가 이미 현대회화의 하나의 조건으로 자리잡았고 또한 앵포르멜의 감성적인 경향으로부터 지성적인 경향으로 나가고자 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뜨거웠던 앵포르멜 풍의 추상표현주의 열기는 하나의 양식으로 타성과 안일에 빠지기 시작하고 또한 하나의 문화권력으로 자리잡아가면서 일련의 젊은 작가들은 새로운 미술의 하나로 옵티칼 한 화풍이나 기하학적인 작풍의 그림, 네오 다다이즘이나 누보 레알리즘류의 물신주의·물성과 관련한 일련의 작품들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개념적이고 사변적인 작품들을 비롯해서 해프닝이나 시각적으로 매우 감각적인 경향의 작품들을 통해 비교론적 입장에서 서구현대미술과의 시대적 격차를 단숨에 극복하려는 의지를 시대적 특징으로 지니고 있었다.
50년대 후반의 앵포르멜 운동이 유럽의 앵포르멜이나 미국의 액션 페인팅의 한국적 수용과 조합 또는 근대성의 발현과 전 근대적인 자연주의·소재주의·인상주의적 화풍에 대한 반발과 이에 대한 자폭적인 상황이 더욱 설득력을 갖는 것이긴 하지만 전통의 부재와 부재한 전통의 정형화 등에 대한 반발과 부정을 통해 또 하나의 새로운 미학을 전개하고자 하였다. 반면에 60년대 후반과 70년대 이루어진 일련의 새로운 세대에 의한 기하학적인 화풍과 옵티칼 한 회화 그리고 네오다다, 프라이머리 스트럭쳐나 미니멀 아트적 경향은 전통적인 미술 즉 시각예술(Fine Art)이라는 전통적인 개념이 붕괴되면서 행위와 환경적인 요소, 자연, 음향 등등 미술외적인 요소들이 미술 속에 포함되면서 등장한 현상으로 이제 예술의 전반적인 요소들을 모두 아우르는 총체적인 의미의 미술(Arts)의 시대가 한국에도 등장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한국현대미술의 새로운 경향도 전 근대적인 유화 풍으로부터 자유롭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으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러한 시대적 성과를 담보해 낸 일련의 젊은 예술가들은 “아방가르드”라는 이름아래 그들의 새로운 화풍과 미적 경험들을 토로해 놓기 시작하였다.
아방가르드란 ‘현대성’의 완성이자 ‘탈 현대성’의 시작이다. 계몽주의 이후 태동된 미완의‘현대의 완성’이라는 기획은‘절대성’에 이르고자 하는 욕망의 소산이었으며, 아방가르드는 ‘예술’을 통해 현대성을 이루는 동시에 탈 현대로 진입하기 위한 하나의 시론이었다. 그들은 다소 급진적인 방법과 시각으로 탈 현대로 나아가고자 하였다. 이 점에서 아방가르드는 소위 ‘심미적 현대성’의 완성인 것이다. 그들은‘실험적’사유방식을 통해‘실험성’에 기초를 두고 있다.
그러나 현대성의 완성과 탈 현대성의 시작이라는 독특한 모순으로 인해 ‘절대성’과 ‘심미성’을 등가의 가치로 상정함으로써 스스로 모순을 드러낸다. 이러한 아방가르드의 정체는 우리의 이해와 접근을 상당히 복잡하고 어렵게 만든다. 이의 해결방안으로 이 들은 이성적인 기획을 주장하는 전통적인 현대성의 입장을 차용하여 꿈, 무의식, 동경, 급진적인 실험 등을 내세운 아방가르드를 비 합리주의적 맥락 속에 설정하면서 아방가르드를 극복의 대상으로 간주하기도 하고, 이와 달리 때로는 아방가르드의 비 합리주의적인 측면을 지금까지 진행된 서구의 합리주의 전통에 대한 비판으로 해석하면서 아방가르드에서 현대성의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기도 한다.
이러한 아방가르드를 표방했던 당시의 한국의 미술운동은 주로 그룹운동의 형태로 전개되었는데 그 중심에서 활동했던 그룹은 《무(Zero)동인》(1962. 6)·《오리진》(1963. 9)·《원형회》(1963)·《논꼴》(1964. 11)·《신전동인》(1965. 6)·《회화 68》(1968) ·《공간회》(1969. 6)·《한국아방가르드협회》(1969)·《한국현대조각회》(1969. 9)·《제4집단》(1970. 6. 20)·《한국 공간과 시간 조형예술학회(S.T)》(1971. 4)와 부산지방의 실험적인 작가들로 구성된 《이후》(1968. 4)·《혁동인회》(1969. 5)와 《습지》(1969), 광주지역을 중심으로 호남지역의 실험적인 작가들이 모인《에포크 현대작가회》(1964. 2) 등이다.
그리고 이들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모임《오리진》·《무동인》·《신전동인》들로 구성된 1967년 12월 개최된 《한국청년작가연립전》과 1969년 창립되어 1970년 첫 전시회를 갖게되는 《한국 아방가르드 협회》(이하 A.G로 약칭)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들 그룹은 앵포르멜의 열기를 피해 새로운 예술에 대한 열망으로 예술의 이분법적 사유의 근본을 이루고 있는 정치성·예술성·자율성·총체성 그리고 합리주의와 비합리주의, 이성과 무의식 등의 적대적인 개념들을 통해 더 이상 흑백논리로 배제 할 수 없는 긴장된 관계를 유지하면서 나름의 새로운 미술실험의 최전선에서 활약하였다.
(1) 실험 Ⅰ: 지성적 시각과 한국성의 구현
한국현대미술의 시원을 비 정형화된 앵포르멜 풍의 회화라 상정한다면 60년대 중반 등장하는 기하학적인 추상은 이러한 경향에 대한 반발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기하학적인 추상은 선배들의 폭발적이다 못해 격렬하기조차 했던 회화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과 실험적인 경향이 배제된 제도화한 앵포르멜에 대한 반감, 새로운 예술에 대한 무조건적인 경도 등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 참여했던 작가들은 거의가 일제 강점기 말에 태어나 일본의 식민지 초등교육을 받지 않은 세대로 나름대로 그 선배들과는 다른 의식과 자부심 그리고 자주적인 문화창조라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던 세대이다.
새로운 세대들은 이미 교조적인 강령으로까지 자리한 앵포르멜로부터 자유로이 작업해야겠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선배들과는 다른 새로운 미술을 전개하고 지성인으로서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관점에서 사물을 보고자 하였다.
당시 이러한 경향의 젊은이들 중 가장 먼저 기하학적인 경향의 미술로 행동에 옮긴이들은 1963년 당시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에 재학 중이던 권영우·김수익·서승원·신기옥·이상락·이승조·최명영·최창홍 등이다.
이들은 “모든 질서는 근원적인데 있고 이에 환원된다. 그러나 과거의 그것은 역사의 유전에서 이루어진 자연적 유산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다. 이 타성과 시대적인 혼돈, 빈곤에 대한 반발, 이는 우주적인 시점에서 응시할 수 있는 공간을 더욱 절실한 필연성으로 부딪치게 했다. 이에 우리는 일체의 인간사적 조건에 구애됨 없이 자신이 물려받은 유전자의 순수성과 삶을 구축할 수 있는 소지를 마련하고 심화된 평범을 구현한다.” (1962) 고 선언하면서 《오리진》을 결성하고 기하학적인 순수평면을 바탕으로 색과 면을 기본으로 하여 회화적 조형성을 탐구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한국현대미술사에서 대개 기하학적인 경향의 작품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으로 《오리진》을 상정하고 있으나, 《오리진》은 기하학적인 경향과 앵포르멜, 서정적인 추상경향 등이 혼재된 그룹으로 발족당시부터 기하학적인 작품을 발표한 것은 아니었다. 《오리진》은 기하학적인 추상의 본질적인 접근이라기보다는 새로운 회화를 모색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자 기성의 앵포르멜회화와는 다른 경향의 새로운 양식을 일구어 내고자 하는 몸짓이 더 강했다. 따라서 이들도 작업 초기에는 앵포르멜회화의 강령에 따랐으나 1967년 《청년작가연립전》을 계기로 많은 작가들이 기하학적인 경향으로 이끌려져 갔다.
따라서 이들의 기하학적인 추상이나 옵티칼한 작품은 논리적 일관성이나 나름의 특성을 충분히 파악하지 못하고 감각적으로 동시에 수용하고 있었던 것으로 이 일은 기록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추상에 대한 강한 의지는 형식적으로 차가운 추상 즉 하드에지적 면 분할이나 기하학적인 추상 그리고 옵티칼 한 평면회화 등으로 나타났다. 물론 이러한 경향에 앞서 1966년 조선일보가 주최한《제 10회 현대작가 초대전》에 출품된 하종현의 〈탄생 A〉와 <탄생 B> 그리고 전성우의 〈향토만다라〉, 이 일은 각각 기하학적인 추상과 색면추상으로 분류하면서 이를 주목하였다. 즉 당시 무기력하게 형식적인 답습을 하고 있는 기성세대로 전락한 일군의 앵포르멜 작가들을 질타하면서 현대미술의 새로운 가능성으로 지적한 것이다.
《청년작가연립전》이후 대거 본격적인 기하학적인 추상으로 전향한 ‘오리진’들은 서구미술에서 나름대로 암시를 받고있었으나 다만 앵포르멜의 부정확하고 무계획적인 회화로부터“밝고 명확한 형태”를 추구함으로써 모든 고정관념으로부터 탈피하여 새로운 세대에 의한 새로운 미의식을 추구하기 시작하였다. 이외에도 순수한 기하학적인 조형언어와 화면 구성으로 그리드를 통한 전면회화를 추구했던 이태현은 〈공간시리즈〉통해 회화의 근원으로 회귀하고자 하는 태도를 보여준다. 〈인테리어 시리즈〉를 통해 원색적인 기하학적인 화면을 보여주었던 김한은 이후 형상과 기하학적인 구성, 르네상스 이후 회화의 주요 요소로 등장한 원근법에 대한 반어적 태도를 통해 회화의 근본에 대한 회의와 기하학과 팝적인 요소가 교차하는 화면을 통해 당시 개발도상국가로 진입하고 있는 도회적 환경과 시대상을 표현하고자 하였다.
이후 1968년 결성된 《회화 68》은(곽훈·김구림·김차섭·박희자·유부강·이자경·차명희·하동철·한기수) 옵티칼한 회화나 오브제를 사용한 릴리프 형태의 옵티칼한 작품, 형태와 기하학이 공존하는 팝적인 요소가 짙은 회화작품들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이들의 작품이 기하학적인 추상으로 전이되어 가는 과정에서 눈에 띄는 것은 ‘한국적’이라는 현대미술에 있어서의 ‘우리 것’에 대한 자각과 이의 구현이라는 화두이다. 서구문물의 도입과 함께 이 땅에 도래한 유화가 우리의 정서와는 거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것, 서구의 것이라는 이유만으로 받아들여지고 익숙해져 가는 과정에서 늘 석연치 않은 것은 우리 것, 우리정서를 반영한 우리미술, 현대미술이라는 테마였다. 따라서 이들이 관심을 가졌던 것은 전통적인 화구에 비해 다양한 색채를 지니고 있는 유화의 특성을 살릴 수 있는 ‘단청’등은 한국적인 정서를 담아내기에 적절한 소재였다. 따라서 단청 등 우리의 원색적인 색채와 구성적인 요소나 한국의 전통문화를 상징하는 오브제를 이용해서 현대미술에 원용한 기하학적인 작품을 제작하는 많은 젊은 작가들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경향으로는 《청년작가연립전》을 통해 작품을 발표한 김인환의 〈단청시리즈〉와 문복철의 바가지를 캔버스에 붙인 〈상황〉그리고 1969년 개인전을 통해 〈단청과 콘크리트〉를 발표한 한영섭, 단청에서 모티브를 차용한 함섭의 〈초혼시리즈〉등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원형질시리즈〉로 앵포르멜의 선두 그룹을 형성했던 박서보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앵포르멜 이후 ‘아방가르드의 합창에서 이탈하고 싶다.’고 심정을 토로하면서 1966년 10월경 신세계화랑에서 “무제(巫祭)”를 주제로 개인전을 준비했다. 이때 그는 앵포르멜로부터 벗어나 또 다른 변신을 시도하기 위해 조형적 실험을 시도하였다. 당시 그는 굿·신풀이·서낭당 같은 민속적이고 민족적인 성향이 강한 주제를 목탄·크레파스·파스텔등 가벼운 재료를 가지고 드로잉적 요소가 강한 표현을 함으로써 한국적인 풍토와 정서를 현대미술에 어떻게 반영할 까 고심하였다. 이러한 당시의 작품은 개인전이 취소됨으로써 세상에 발표될 기회를 잃었으나 현존하는 작품들을 통해 한국현대미술의 상황과 앵포르멜을 주도했던 세대들의 조형적 방황과 고민의 일단을 읽을 수 있다. 그의 현대미술에 대한 한국성의 구현에 대한 집착은 이후 1968년에 이르면서 기하학적인 추상회화와 팝적인 경향의 〈유전질시리즈〉로 접어들면서 사라지게 되었다.
아무튼 이들은 화면에 여백과 기하학적인 단청문양을 도입한 회화를 통해 서구 현대미술의 틀과 내용을 벗어버리고 한국적인 현대미술을 이룩하고자 노력하였다. 따라서 한국적인 소재와 색채를 포함하고 있는 단청은 이들에게 좋은 모티브가 되었다. 그러나 현대미술을 추구하면서 한국적인 정서를 담아내고자 했던 이들의 당시 작품을 통해 우리는 오늘날 우리에게 대두되고 있는 우리미술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2) 실험 Ⅱ: 실험을 위한 실험, 행동하는 실험
한국현대미술에 있어서 새로운 세대에 의한 실험과 시도가 폭발적으로 등장하는 기점은 《청년작가 연립전》이다. 이들 전시회가 열렸던 국립중앙공보관은 해프닝과 오브제가 도입된 네오 다다류의 작품 그리고 경제성장에 따른 소비가 미덕인 시대를 반영하는 작품과 대중문화를 반영하는 작품 등 실로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동시에 인습을 거부하는 전위적인 작품들이 현대미술이라는 이름아래 실험되고 전시되었다.
이들은 ‘가 보나마나 그게 그것인 타성과 안일에 빠져있는 한국미술의 위기와 전위를 자처하는 추상작가들이 예술본래의 목적을 떠나 사회적 타협만을 일삼는 작품태도에 반발하여 오늘의 새로운 물결을 타고 감성의 혁신을 시도했던 《무동인》(홍익대학교 미술대학 1963년 졸업생들로 김상영·김영남·김현태·김영자·문복철·석란희·설영조·이태현·최붕현·황일지로 구성)은 이러한 정신을 그대로 반영한 전시로 이목을 집중시켰다.
1962년 재학당시 결성된 《무동인》은 1회전에서는 앵포르멜 경향의 작품들이 주류를 이루었으나 이 당시에도 이태현의 경우 조개껍질을 붙이고 김영남은 캔버스에 구멍을 뚫고 최붕현은 물감이 칠해진 캔버스 위에 비닐을 붙여 요철을 만들기도 하는 등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작품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이들은 군복무로 인해 두 번째 전시를 1967년 7월에서야 갖게된다. 두 번째 전시를 통해 “우리의 작업은 실험, 무에서 출발. 창조만을 위한 행동이다.”(1967)고 선언하면서 <현대미술 실험〉이라는 부제로 폐품·의료기구·고무주머니·고무장갑·방독면 등 일상적인 오브제를 동원하여 누보레알리즘적 경향의 작품들과 정크아트와 유사한 작품들을 선 보였다.
같은 해 겨울 이들은 《청년작가연립전》에 참여하면서(김영자·문복철·이태현·임 단·진익상·최붕현)더욱 확장된 개념의 실험적 작품을 선보였다.
이들이 작품에서 가장 우선 한 것은 실험적이고 도발적이며 파격적인 형태와 작품의 스케일이었다. 그리고 내용적으로는 산업화, 근대화로 인한 도시문명의 비인간적, 비문화적인 시대상황을 반영하는 동시에 산업화 이후 공해 등 새롭게 대두된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지면서 작품을 구성하는 재료로 산업화의 잔해인 폐품을 이용했다. 물론 여기서 재료는 실험성과 스케일을 만들어 가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 되기도 했지만 이들의 다소 과격하고 파격적인 작품들은 환경예술로까지 확장되면서 다다이즘에 가까운 일련의 퇴폐주의적 경향으로까지 발전한다.
최붕현의 ‘색 연통’,이태현의 ‘방독면’·‘고무장갑’을 이용한 작품 그리고 김영자의 ‘연탄’·‘성냥’그리고 진익상의 쇠를 ‘깎아내는 소리’·‘전화벨 소리’ 등 일상의 소음으로 구성된 구체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이렇게 오브제를 사용하는 작품은 당시로서는 도발적인 “기성화단의 무기력한 패배주의에 도전하는 용기”로 받아들여졌다. 이들의 작품의 주조는 당시의 시대상과 근대화, 산업화 과정에서 빚어지는 전통과 현대의 갈등 그리고 근대화와 함께 몰락해 가는 유교적 전통을 반영하는 것이자 개인의 창조성과 개성, 사회에 반응하는 주체로서의 인간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대학시절 《논꼴》을 결성했던 작가들이 견해차이로 결별하면서 구성된 그룹은 《신전동인》이었다. 강국진·김인환·양덕수·심선희·정강자·정찬승등으로 구성된‘신전동인’은 더욱 파격적인 가운데 당시 시대적인 조류와 흐름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현대적, 도회적 감각을 토대로 작품을 전개하였다.
투명한 유리병을 거울 앞에 쌓아 올린 강국진의 〈시각의 즐거움〉, 베니어판으로 태극문양을 반 입체적으로 재구성했던 정찬승의 〈작품〉, 여성작가로 파격적으로 신체를 확대시켜 노골화함으로써 성적 의미를 탈각시키는 페미니즘적 성향이 짙은 작품〈키스 미〉를 출품한 정강자, 〈미니〉시리즈를 통해 제목부터 당시 대중문화의 흐름을 즉자적으로 반영한 심선희의 팝적인 요소와 여성적 관점을 적절하게 반영한 독특한 작품들이었다.
그러나 이 들의 실험적이고 파격적인 작품은 미술사적으로 그 의미가 크지만 이에 못지 않게 《청년작가연립전》은 국내최초로 해프닝을 전개했다는 점에서 사건적 의미를 동시에 지닌다. 《청년작가연립전》이 열리는 중에 미술평론가 오광수가 각본을 만들고 《무동인》과 《신전동인》들에 의해 시도된 〈비닐우산과 촛불이 있는 해프닝〉은 행위와 사물과의 만남, 행위와 공간사이에서 일상의 예술화를 시도했던 것으로 우연한 행위와 대상과의 충돌에서 일어난 아름다운 현상을 경험하도록 하는 미적 사건이었다. 이후 해프닝은 정찬승·강국진·정강자등 《신전동인》들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 〈화투놀이〉와 〈색비닐의 향연〉 세시봉에서의 〈투명풍선과 누드〉, 1968년 한강변 백사장에서의 열린 〈한강변의 타살〉등 일련의 해프닝은 ‘현대인의 억압된 욕망과 권태를 표출하려는 의도’로 실현되면서 한국사회의 문화적 몰이해와 기성 미술계의 타성에 경종을 울리는 하나의 도전이자 고발이며 자각을 촉구하는 형태로 나타났다.
《청년작가연립전》을 통해 가장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동시에 대중적인 이목을 집중시킨 이들은 아마도 ‘신전동인’들일 것이다. 이후 해프닝은 물론 보디페인팅 등 일반에게는 생소한 작업으로 일관하여 선세이션을 불러일으켰던 이들은 정강자, 정찬승 그리고 김구림 등이었다. 이들은 파격적인 행동을 거듭함으로써 현대미술에 대한 대중들의 호기심을 집중시켰다. 이들은 해프닝을 시도하는 한편 《청년작가연립전》 개막일인 12월 11일 저녁 10시에 피켓을 들고 가두행진을 단행하였다. 이들은 미술과 문화정책전반의 개선을 촉구하는 시위를 통해 현대미술의 전위대로서 새로운 문화환경을 건설할 것을 촉구함으로써 미술외적·대 사회적인 발언을 하기에까지 이르렀다. 그리고 스스로 현대미술에 대한 이해와 확산을 위해 세미나를 열었으며 이를 지방으로까지 확대하여 실시하면서 그 역량을 강화해 갔다.
또한 이들의 실험은 현대미술의 영역을 영화로까지 확대시켰다. 1969년 김구림에 의해 감독, 편집되고 정찬승, 정강자 출연, 반대규가 촬영하고 최원영 등이 함께 만든 실험영화 <1/24초의 의미>가 서울의 아카데미 극장에 위치한 아카데미 음악실에서 실제로 상연된 것이다. 컬러와 흑백으로 편집된 16밀리 필름으로 일상적인 장면이 빠르게 다시 지루하게 계속되면서 하품하는 정찬승의 모습 등이 천천히 반복되는 이 작품은 작품에 일상성을 도입했다는 점 외에도 시간성에 주목하고 있다는 점에서 개념적인 작품들의 탄생을 예고하고 있기도 하다.
김구림과 김차섭은 메일아트에도 관심을 보여 〈매스 미디어의 유물〉이라는 작품을 발표하였다. 두 사람의 지문이 찍힌 한 장의 종이를 둘로 나누어 각각 우송한 후 “귀하는 매스 미디어의 유물을 1주일 전에 감상하셨습니다.”라는 간결한 메시지를 우송함으로써 받아 본 이들이 하나의 프로젝트에 참여하도록 계획하였고 이를 실천하였다. 이들의 실험은 다중을 현대미술의 장으로 유인하고자 하는 의도와 본래의 의사소통 방식인 문자나 우편에 대한 희화적 성격을 갖는 것이었으나 반공을 중시하는 시대적 상황과 동백림 사건 등 간첩사건의 여파로 받아본 이들이 혹시 간첩의 소행이 아닐 까 의심할 정도로 도발적이기까지 했던 이 작업은 당시의 현대미술에 대한 사회의 이해와 이를 수용하고자 하는 제 조건이 얼마나 열악했는 가를 잘 드러내 주는 하나의 사건이기도 했다.
또한 시각을 자극하여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옵티칼한 작품은 물론 일렉트릭 아트에도 관심을 가져 전기 등 동력을 이용하여 움직이는 작품이나 네온사인 등을 이용한 작품들을 발표하면서 현대미술의 영역을 넓혀 나갔다. 그러나 이들의 파격적인 행동과 해프닝 등 도발적인 행위 그리고 회화의 근간을 흔드는 진보적인 태도들은 현대미술의 다양한 실험을 통한 탐색과 확산의 시대를 열어갔으나 당시의 침체된 정치적 분위기와 조국근대화의 과업에 사회전체가 몰입되어 있던 시대적 상황에서 이해를 구하기에는 역부족인 상황이었다. 따라서 이들의 작업은 ‘실험예술’ 또는 ‘전위예술’로서 60년대 후반 고속도로가 개통되고 여행이 빈번해 짐에 따라 여행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발행되었던 《선데이 서울》《주간 경향》등의 황색 저널리즘의 독자들에게 흥미를 제공하는 이상의 반응을 얻어내기는 어려웠던 것이 현실이다.
이들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자신들의 작업을 이해시키고 그 장을 확대하고자 노력하였다. 이들은 실험미술에 대한 이해를 구하고 <청년작가연립전>을 개최하기 1개월 전 《청년작가연합회》 명의로 세미나를 개최한 (1967. 11. 15) 이후 지방순회강연을 개최하는 등 저변확대를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일반의 현대미술에 대한 이해를 얻기보다는 새로운 미술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미술인 들에게 정보를 제공하거나 자신들의 작업이 현대라는 시대적 상황과 궤를 같이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시키는 소극적인 성과에 만족해야만 했고 일반관객들의 참여를 유도하는 등 관객과의 소통을 위한 일련의 작업들도 병행하지만 이들을 현대미술의 장으로 끌어들이는데는 많은 한계를 안고 있었다.
이후 이러한 실험적 의지는 1970년 미술을 비롯하여 음악·연극·무용·문학 등 장르를 망라하는 총체예술을 표방한 《제 4집단》으로 표출되었으나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행동과 발언수위로 인해 단명하고 말았다.
“우리는 인간을 본연으로 해방함과 순수한 한국문화의 독립을 선언한다. 무체의 원리로서 모든 예술을 통합시키며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과학, 종교등 각 분야에 직접 참여로서 일체의 체계를 이룬다.
이에 우리는 다음의 행동강령을 정한다.
1. 우리는 인간을 본연으로 해방한다.
1. 우리는 순수한 한국문화의 독립이 세계문화의 주체임을 확인한다.
1. 우리는 참여로서 모든 체계를 통합한다.
1. 우리는 무체로서 일체를 이룬다. (1970)”
고 선언하면서 1970년 6월 20일 정오 을지로의 희림다방에서 ‘무체(無 )사상’을 이념으로 강석희(음악), 김구림, 방태수(연극), 손일광(의상), 이익태, 정찬승 등에의해 결성된 《제4집단》은 이들은 한국현대사회와 정치, 경제, 문화현상에 관심을 가지고 실험미술을 통해 자신들의 대 사회의식을 표명하고, 새로운 시대상에 독창적이고 주체적인 한국문화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그 의지를 구체화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이들은 광복 25주년을 기념하는 1970년 광복절을 기해 <기성문화예술인의 장례식>을 거행하였다. 한국의 문화적 자주와 독립성을 강조하는 선언서를 발표하고 한국문화가 사이비로 흐르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기존의 문화예술에 대한 장례식을 갖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가두행진은 경찰에 의해 제지되고 말았다.
이 들의 실험미술은 정부에 의해 정책적으로 시도된 충효사상 등 전통문화에 대한 진흥과 육성책으로 인해 “퇴폐적인 문화”로 인식되기도 하고 현대미술이란 기괴하고 우스꽝스러운 것이라는 인식을 낳기도 하였다. 또한 당시 이러한 행위중심의 미술은 일반의 이해를 얻지 못하였고 당국으로부터 불온한 세력으로 낙인찍혀 기관으로 연행되거나 때로는 전시장이 폐쇄되거나 작품이 철거되는 경우도 발생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작품이나 작품의 저변에 반정부적인 내용을 담고있었기 때문이거나 작가들이 의식화되었던 것이 아니라 당시 시대적으로 민감했던 집권층의 과민한 반응이 이러한 결과를 낳았다.
또한 예술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불러일으키지 못 했을 망정 작가들에게는 새로운 것, 뜻밖의 것들을 추구해야 한다는 의지를 심어주기에 충분하였다. 이들은 1970년 <기성문화예술의 장례식>이후 정강자의 <무체전>을 통해 ‘제 4집단’은 ‘무체는 예술로서 가능한가’라는 주제의 세미나와 판토마임 등 부대행사를 준비하고 또한 파격적인 해프닝을 함께 준비하였으나 당국이 사회질서 유지차원에서 장소사용 허가를 취소함에 따라 무위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러나 이러한 실험의지는 굽힐 줄 몰라 《제 1회 서울국제현대음악제》에서 백남준에 의해 기획된 〈피아노위의 정사〉가 정찬승과 차명희에 의해 시연되었고 이러한 해프닝 열기는 김점선에 의해 〈홍씨 상가〉(1975)로 이어졌고 또한 매체로서의 영화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면서 이화여자대학교 출신 여성작가 6인에 의해 실험영화 집단인《카이두》(1974)가 결성되어 <제 1회 실험영화 페스티벌>이 열림으로써 미술의 영역은 경계를 넘어 현대예술을 총체적으로 지칭하는 포괄적인 의미로 사용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들의 실험의지는 한마디로 여건이나 상황보다는 행동이, 생각보다는 행위가 앞섰던 것으로 보인다.
(3) 실험 Ⅲ : 개념으로 또는 개념화하는 미술
이러한 새로운 미술에 대한 열기는 1969년 《한국아방가르드협회(A.G)》의 출범으로 귀결되었다. 명칭에서부터 강력하게 현대미술에 대한 실험의지를 표방했던 이들은 <청년작가연립전>을 계기로 실험적인 미술에 관심을 가진 젊은 작가들을 중심으로 몇 차례의 준비모임을 거쳐 출발하였다.
“전위예술에 대한 강한 의식을 전제로 비전 빈곤의 한국화단에 새로운 조형질서를 모색 창조하여 한국미술 문화발전에 기여할 것”을 선언하면서 출범한 《한국아방가르드협회(A.G)》는 김구림, 김차섭, 김한, 박석원, 박종배, 서승원, 이승조, 이승택, 최명영, 하종현 등 기존의 작가들과 함께 김인환·오광수·이일 등 이론을 갖춘 미술비평가와 연대하여 이루어짐으로써 현대미술에 있어서 행동과 생각의 일치를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그간 무조건적으로 새로움에 경도 되었던 현대미술운동에 대한 반성으로 보다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모습을 갖추고 협회지를 발간하는 등 나름의 새로운 실험미술의 기풍을 진작하였다. 이론이 뒷받침되는 실험미술단체로 등장한 《A.G》는 그간의 미술동인그룹과는 다른 조직과 예술의지로 새로운 실험미술의 폭과 깊이를 더해가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도전과 부정의 역사로 이어 온 현대미술을 ‘반 예술’로 정의하고 독자적인 창작논리를 창출하고자 오브제, 평면, 설치미술 등 다양한 미술형식을 통해 프라이머리 스트럭처, 개념적인 미술, 기하학적인 추상, 옵 아트를 시도하였고 그리고 《무동인》 《신전동인》들이 보여주고 도입하였던 일상의 오브제, 기성품으로서의 사물이 아닌 자연으로서의 사물, 보다 원초적인 사물, 물적 상태로서의 본질에 가까운 대상을 선택하였다. 이들의 작품은 공간과 조우하면서 사물의 나름의 실존적 근거를 제시하거나 앵포르멜 경향의 역동성 대신 공간과 시간과 장소성에 대한 탐구적 자세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새로운 미술적 전통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새로운 의식의 전환에도 불구하고 발족 당시인 1968년 12월 21일 남포집에서 개최된 발기위원 회의록에 의하면 《무동인》의 최붕현(재정)과 이태현(운영)등도 포함되어 있으나 당시 국제전 참가작가 추천권을 가진 미술협회 이사장 선거와 맞물려 입장을 달리함으로써 이들의 최종적인 참가는 실현되지 못하였다. 이런 점에서 이들 또한 화단의 일정한 세 다툼으로부터 자유로웠던 것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1969년 결성되어 1970년 5월 1일부터 5월 7일까지 처음으로 개최한 《한국아방가르드협회(A.G)》의 <확장과 환원의 역학>전에는 김구림·김차섭·김한·박석원·서승원·신학철·심문섭·이승조·이승택·최명영·하종현 등이 참가하고 있다.
이들에게는 더 이상 앵포르멜이 현대미술이 아니었다. 이 들은 회화의 본질, 회화의 원초적 기능을 탐구하는 일련의 기하학적 경향과 다소 개념적인 설치미술, 공간과 사물의 관계, 사물의 존재의 근원, 미술과 사물 등의 문제를 실재적이고 구체적인 대상을 통해 드러내고자 하였다.
작가와 사물, 존재와 조건 등의 새로운 관계규명을 위해 선택된 사물은 자연과 인간을 매개하는 매개체로써 역할을 수행한다. 자연에 순응한다는 것은 잘못 이해하기에 따라서는 자연에 함몰된다는 의미로도 통용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의 자연의 관계는 철저하게 타자로서의 존재를 상호인정하고 교접한다는 것이다. 즉 ‘존재의 없음은 있음과 같다.’는 동양철학의 비 논리성으로부터 출발한 것이다. 존재의 설정부터 부정하는 것에서 출발함으로써 자연에는 본시 정체가 없으며 음양의 위치나 상태에 따라 끊임없이 유동하면서 변화하는 것이 생성의 법칙이며 새로운 미술이다. 단지 꾸밈을 덜어내고 아는 것, 행위의 최저치를 가지고 자연을 대하고 환경을 대함으로써 공간 속에 사물을 위치시키지만 그 사물은 바로 존재이자 동시에 자연의 일부로 화한다는 생각으로 작업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1971년 경복궁의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개최된(1971. 12. 6-12. 20) 《한국아방가르드협회(A.G)》의 두 번째 전시인 <현실과 실현>전을 통해 더욱 강화되었다. 부산의 ‘혁동인’으로 활동하던 김청정과 김동규를 영입하고 송번수·이강소·이건용·조성묵 등이 추가로 참가하면서 ‘현실의 실체와 구조의 탐구 그리고 그 실현을 미술의 과제’로 삼았다.
이들은 이후 3회전인 <탈 관념의 세계>전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개최(1972. 12.11-12.25)한다. 이들은 ‘구체적이요 직접적인 지각대상으로서의 세계를 지향한다. 그리고 그 세계는 인간과의 관계에 있어 항상 열려 있고 또 새롭게 발견되어야 하는 세계’를 모색하였다.
당시 이들의 작품은 흙이나 얼음, 가공되지 않은 사물이나 나무와 목재 등 자연물들이 주를 이루는 작품들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이들은 발견되고 선택된 오브제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간의 현대미술이 이성보다는 감성적으로 접근했던 데 반해 순수한 하나의 조형언어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1974년 《한국아방가르드협회(A.G)》가 주최한 <제 1회서울 비엔날레>는 김구림, 김동규, 김한, 박석원, 서승원, 신학철, 심문섭, 이강소, 이건용, 최명영, 하종현 등 11명의 《A.G》회원과 평론가 이 일에 의해 선정된 58명의 현대작가들이 참여한 당시 전위적인 실험미술운동의 결집체였다. 이 전시회는 1회전을 끝으로 막을 내렸으나 이듬해 한국현대미술의 전위를 형성했던 일군의 작가들을 결집시킨 <에꼴 드 서울>전으로 이어지면서 70년대 후반 한국현대미술의 집단화 현상을 주도하게 되는 동시에 전국적으로 ‘현대미술운동’이 확산되는 <현대미술제>로 확대되면서 한국현대미술의 중심세력으로 부상하기에 이른다.
이 전시회 끝으로 실제적인 해체로 이어지는 《A.G》그룹은 1975년 12월 덕수궁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김한, 신학철, 이건용, 하종현 등 네 사람에 의해 전시회를 개최하면서 한국실험미술의 전위를 형성했던 《한국아방가르드협회(A.G)》는 그 막을 내리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가운데 같은 장소에서 <제 1회 서울현대미술제>가 개최되고 있어 현대미술의 주도권 행사를 위한 작가들의 알력과 이해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한국아방가르드협회(A.G)》에 참여했던 작가들은 당시 산업화와 도회화가 이루어지던 시기에 전통을 규범화하려는 시도에 반항하며, 또 규범적인 것인 모든 것에 반항하는 경험을 존재의 방식으로 삼았다. 그러나 이러한 반항은 도덕성과 유용성의 기준을 중립화하려는 한 방법으로 선택되면서 조용하고 차분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다. 또한 이들의 현대미술에 대한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접근방식과 태도는 본질적인 의미를 되묻고자 하는 행위로 이어지고 서양현대미술의 물신주의적 오브제와는 다른 동양적인 사유의 세계와 자연관을 중심으로 재해석하고자 하는 노력이 동시에 수반되는 것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작가들은 공간과 물질 및 인간과의 관계를 통해 공간을, 또 다른 눈에 보이지 않은 곳을 어떤 질(質)을 가진 존재(物)로 변용 시키고자 하였고 미술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 진 것이지만 일반적으로 ‘조형’ 이라고 이해되는 관념적인 틀로부터 벗어나고자 시도하였다.
새로운 감성과 욕구는 새로운 표현형식을 낳는다.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 종래의 언어로 구현하기 어렵다고 판단되면 새로운 방법론을 추구하고 제시하는 것이 순서이다. 이들은 전통적인 회화나 조각이라는 조형적 방식을 넘어 해프닝이나 설치 등의 작업을 감행하였으며 회화나 조각이라는 종래의 개념보다는 보다 포괄적인 조형 또는 아트(Art)라는 총체적인 개념으로 확장하였고 어떤 작가들은 ‘행위’의 의미를 중시하고, 어떤 미술가는 ‘관념’을, 그 밖의 다른 미술가들은 ‘물질’에 착안했다. 이들은 각각 중시하는 것은 다르지만 전체적으로 작품이라는 일관된 형식으로 정리되고 구체화되기보다는 아이디어 차원이나 또는 ‘실험’으로서 미술을 통한 의식의 모험에 더 관심을 두었다. 이들 중 물질에, 공간에, 물질과 공간 그리고 물질과 인간과의 관계에 관심을 기울였다.
이들은 평범한 사물들을 이례적인 상황에 가져다 놓음으로써 발생하는 물질과 물질들 사이의 예기치 못한 관계를 보여 주거나 물질과 공간간의 괴리, 물질과 인간의 관계를 주체와 타자의 관계로 설정해 나가고자 했던 것이다. 다만 서구의 물질에 관심을 두는 작가들의 경우 과학이나 합리성을 통해 자연과 문화와의 관계 등에 주목했다면 일본과 한국의 이러한 경향은 자연주의, 신비주의, 비 역사주의적 입장에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구별된다.
1971년 《공간과 시간조형예술학회》(이하 S.T로 약칭)가 출범하면서 그 성격을 창작과 조형예술에 관한 이론을 조화롭게 연구하는 단체임을 표방하였다. 이들은 미술이론을 심화시켜 개념적인 미술이 한국화단에 정착하도록 하는데 일조하였고 자체 세미나를 통해 역량을 강화해 나갔으며 서구의 최신 미술사조와 미술이론들을 번역하여 돌려서 읽고 토론을 전개하면서 작가들을 의식화하였다.
예술개념의 본질규명이라는 주제를 통해 개념미술을 심화시킨 이들은 사진, 오브제, 행위를 통해 사건의 언어화와 사물의 사건화를 통해 매체의 본질을 규명하고자 하였고 언어학적인 측면에서 기표와 기의에 관한 토론과 소통과 그 구조에 문제를 삼기도 하였다.
이들은 미술평론가 김복영의 예술철학을 중심으로 하여 현대미술의 즉자성과 실험을 위한 실험을 극복하고 새로운 미술에 대한 논리적 근거를 마련하고자 하였다. 이때부터 행동에 앞서 생각하고 그 생각을 구체적인 미술언어로 표현하는 창작방식이 일반화하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현대미술에 관심을 가진 작가들은 당시 유행했던 언어학이나 현상학, 개념적인 미술경향에 빠져들기 시작하였다.
《S.T》그룹의 이러한 진지한 학습적 분위기는 이건용의 이벤트 <장소의 논리>나 <이리 오너라>등을 통해 잘 나타난다. 이건용은 그들 스스로 이벤트라 명명한 <장소의 논리>를 통해 일정한 장소에 서서 자신을 중심으로 원을 그린 다음 원안에서 ‘여기’라고 세 번 외친 다음 원 밖 걸어나와 다시 그곳에서 원을 그린다음 먼저 서있던 원을 가르치면서 ‘저기’라고 세 번 외친다. 이렇게 개념적인 작업은 당시의 인식론적 세계관에 대한 의문과 인간의 관념과 언어에 대한 문제로까지 관심의 영역을 확대시켜 표제와 표제어에 관한 언어학적 입장을 미술로 끌어들였다.
물론 이러한 경향은 당시 한국과 일본의 현대미술 상황과도 관련이 깊다. 양국의 현대미술은 현대미술을 양식적인 측면에서 전개해 온 때문에 실험적이고 다소 어수선한 분위기와 계속적인 미분화과정을 통해 양적으로는 풍부하지만 그 내용에 있어서는 서로 흡사한 일면을 지닌 채 무조건적으로 미술에서 현대성, 새로운 것만을 추구하는 하던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70년대의 한국의 주체적 현대미술은 이미 1960년대 중 후반 일본에서 활동했던 곽인식의 실천적 행동과 이우환의 사변적 글쓰기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러한 현상은 일본도 예외는 아니어서 이 두 사람은 한국적 환원주의의 기틀을 만드는데 그리고 60년대 말부터 본격화 한 일본의 모노하(物波)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한일 국교 정상화 후 일본과의 교류가 빈번해 지면서 한국작가들의 해외미술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창구로 일본이 등장하였고 이들 일본에서 활동하고 있던 두 한국인 작가의 존재는 당시 한국 작가들에게는 국제적인 현대미술의 중심으로 진출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해 주었다. 이들의 사변적인 작업은 외형적인 측면에서 뿐 만 아니라 내용적인 측면에서도 많은 변화요인을 제공하였다.
특히 일본의 현대미술을 열어간 모노하의 이론적 틀을 제공한 재일작가 이우환은 한국현대미술의 사변적인 경향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는 1969년 일본의 현대미술을 소개하는 글을 국내잡지를 통해 기고하였고 1971년 출간된 좬만남의 현상학 서설좭과 좬만남을 찾아서좭등을 통해 일본과 한국의 미술 특히 좬한국아방가르드협회좭의 미술운동과 《S.T》그룹의 작업과 이를 이어 등장하는 한국의 단색회화 등에 대해 이론적 배경을 형성 해 주었다.
그의 이론의 독특한 관점은 ‘신체성’과 ‘장소성’에 대한 특별한 해석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의 신체성이란 “인간이 세계를 대상으로 인식하기 전에 이미 지각할 수 있는”능력을 의미하며 따라서 인간의 이러한 선천적인 능력으로 인해 세계가 직접경험의 장소로 열리고 그 지각의 자각을 통해 세계가 “있는 그대로”의 세계와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만남을 구체화시키는 곳이 바로 ‘장소’이다. 이때의 ‘장소’는 세계와 인간의 만남이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접촉을 제공하는 장소가 아니라 주체와 타자의 개념이 미분화된 상태에서 주객의 이원적 대립을 초월하는 만남, 시공을 초월하는 무념무상의 상태, 진공과 같은 상태 즉 ‘무의 공간’에서 만남을 이루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만남의 장은 겉과 안, 주체와 타자의 구분이 없는 속에서의 궁극적인 자아, 진정한 실재를 서로 확인하는 장을 이룬다.
그의 이러한 이론은 옵아트와 기하학적인 추상 그리고 행위중심의 도발적인 예술 쪽으로 기울던 한국현대미술을 개념적이고 사변적인 방향으로 전환하는데 큰 역할을 담당했다.
70년대 문턱을 넘어서면서 출범한 한국현대미술의 전위대인 《A.G》는 본질적으로는 반 회화적인 운동을 표방했으나 다양한 유파가 집단을 이루면서 일정한 한계를 노정하고 있었으나 《A.G》가 전개했던 미술운동은 그린다는 목적성을 포기함으로써 회화적 허구로부터 사물의 구체성, 사물의 실재성을 구하고자 하였다.
Ⅳ. 글에서 나오면서
이들이 현대미술이라는 화두를 통해 젊음을 소진했던 시대는 한국사에 있어 단언하기 어려운 평가를 내릴 수밖에 시기이다. 경제발전과 그 발전의 궁극적 목적인 참다운 삶 중 하나를 포기하고, 유보하고 살아야 했던 시기, 이 당시를 풍미했던 ‘실험미술’의 열기는 이렇듯 모순된 현실을 애써 외면하거나 아니면 당시의 금지된 영역을 범하지 않는 가운데 나름대로 시대에 저항하는 하나의 방식이기도 했다.
정치적으로는 암울하고 답답한 현실이 지속되고, 국제적인 정세는 우호적이지 않았던 시절 젊은 청년작가들의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는 행동은 ‘반 예술적’ 행동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이러한 시각예술의 근간을 의심하는 흔드는 ‘반 회화적’운동을 통해 그리기를 포기하고 사물과 대상, 환경과 공간에 주목하면서 미술의 영역을 확장시켜 나갔다. 이러한 당시의 미술운동은 일제기 한국현대미술의 전(前) 모더니즘기의 서정적이고 문학성 짙은 모더니즘으로부터 비롯된 추상의지가 앵포르멜 시대를 거쳐 60년대 중반에 이르면서 평면이라는 회화적 한계상황을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의 산물이다. 그러나 당시의 미술운동을 단순하게 앵포르멜과 70년대 중반부터 한국회화의 전면에 나선 “단색회화”와의 교량적 역할로 한정하는 태도를 보여왔다.
불과 10년 남짓한 사이에 이렇듯 다양하고 격렬한 때로는 폭발적이리만큼 다양한 미술의 형식을 실험하고 의문을 던지고 스스로 답을 구하며 행동했던 시대는 현대미술사상 그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다. 이들의 다소 거칠고 때로는 이론적 무장이 미흡한 생각보다는 행동이 앞섰던 ‘미술운동’을 어떻게 정의하고 규정하느냐에 따라 오늘의 한국현대미술의 의미를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 그룹운동은 한국현대미술사의 공백을 메워 줄 중요한 사건인 동시에 한국현대미술의 폭을 넓힌 일대 사건이었다. 이들은 앵포르멜 운동이 집단화하면서 어느 정도 성과를 얻어냈던 것처럼 그룹을 지어 현대미술운동, 실험미술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추상이후’라는 정의에도 불구하고 추상이후의 어떤 대안을 마련해 낸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이들이 이룩해낸 성과는 현대미술이라는 이름아래 펼쳐질 수 있는 다양한 미술형식을 실험하고 이를 사회적으로 쟁점화 했다는 점일 것이다. 즉 2차 세계대전이후 유럽과 미국의 현대미술에서 드러났던 모든 현대미술의 실험을 총체적으로 경험했던 시기이자 현대적, 모더니즘적인 의식의 학습기이자 다양한 사조의 탐색과 모색을 통해 특정한 어떤 미술형식이 주를 이루는 것이 아닌 현대미술의 다양한 모든 존재방식을 실험 해 본 실험기라는 평가가 가장 타당할 것이다.
이들은 나름대로 그룹의 출범과 함께 조형의지와 지향점을 선언문형식을 빌어 발표하였다. 아마도 서구의 실험적인 미술운동이 선언문을 발표하고 이를 기조로 하여 작품 활동을 전개해 나간 점과 일부 미술평론가들을 영입 이를 기초하고 초안을 작성하여 작품의 이론적 배경에도 관심을 두었다는 점은 당시로서나 오늘날에도 매우 획기적이다. 행동하는 미술을 표방하면서 거리로 뛰쳐나가 피켓을 들고 시위를 하는 등 미술가들의 사회적 발언의 기회가 강화되었다는 점도 매우 의미가 있다. 미술발전의 저해요소와 미술행정의 취약성을 지적하고 이의 개선점을 제시하는 한편 기성화단의 전근대적인 태도를 비난하며 새로운 시대, 새로운 미술을 주창하였다.
이들은 현대미술에 대해 호기심이상의 관심을 주지 않는 대중들을 미술현장으로 이끌어들이고자 일반 관객들을 위한 현대미술에 대한 강연회를 서울과 지방에서 열고 작가들 스스로 현대미술을 학습하는 기회를 갖는 한편 전시장을 찾은 관객과 작가들이 함께 참여하는 작품을 연출하기도 하는 등 현대미술의 저변확대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임으로써 한국현대미술의 사회적인 수용태도를 조성하는데도 일조 하였다.
미술사에 획기적인 사건인 당시의 작품들은 매우 실험적이고 일회성이 강한 작품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따라서 현존하는 작품이 부재하고 또한 당시에 참여했던 작가들이 70년대 중반 화단의 거대한 흐름이었던 ‘단색회화’로 대거 전환하면서 한국현대미술사에서는 지엽적인 “실험을 위한 실험”으로 당시를 규정하여 왔으나 이들의 실험은 한국현대미술의 토양을 만들어오고 토양에 맞는 작물을 실험 배양했던 시기라고 정의 할 수 있을 것이며 새로운 미술을 위한 젊은 작가들의 몸부림이자 돌파구라고는 없던 암울한 시절을 향한 청년들의 절규를 담는 것이기도 했다.
2∼30대 청년작가들이 주축을 이루었던 실험미술의 현장은 매우 뜨거운 것이었다. 이들은 80년대에 들어서면서 예술을 위한 예술과 추상예술을 지지하는 이들과 예술은 사회적으로 유용하거나 그 목적을 도와주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간의 격렬한 대립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지만 철저하게 예술을 위한 예술에 경도되어 있었다.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문구는 물질주의 시대가 얻을 수 있는 진정한 추상의 관념이다. 그것은 유물론과, 모든 것은 유용성과 실질적인 가치를 가져야 한다는 요구에 반대하는 무의식적 저항이다. 따라서 이들은 자신과 내면의 삶에 몰두하도록 방향을 설정하였고 미술작품은 그 자체가 근본적으로 정신적인 본질을 갖고있는 순수한 창조된 독립된 세계라고 보았다. 이러한 태도는 더 이상 확언 할 수 없는 사회현실에 대한 예술가의 필수 불가결한 반응이라고 할 수 있다. 산업이 발전하고 사회가 복잡해지면서 한국의 중산층은 경제력을 위주로 삶에 적응하는데 필요한 역할로서 그 자신을 확인한 반면 현대미술가는 그가 수용하려들지 않는 역할을 제시한 사회에 반대함으로써 그의 정체성을 찾았다.
아방가르드의 본래의 의미는 심미적 혁신(aesthetic innovation)과 사회적 저항(social revolt)의 이중과정을 포함한다. 그것은 사회의 주류로부터 일탈하여 들러리로 살기를 작정한 미술가와 소외된 또는 스스로 소외시킨 지식인 엘리트로 구성되어있었다. 초기의 한국현대미술의 전위대는 자기 반영적 형식주의를 통해 이를 극복하고자 하였다. 표현의 혁신은 오직 심미적인 것으로 미술은 오직 미술이 하는 것만을 하는 상태로까지 나아가 작품은 화면에 물감이 칠해져 있는 그 이상의 아무 것도 아니며 그것의 실존적 주체로서의 의미는 전적으로 미학적인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들에게 새로운 것이란 있는 그대로의 것, 가공되지 않은 것을 의미했으며, 삶의 기본적인 조건처럼 현대미술의 조건으로 공간과 장소에 강한 미련을 가졌다.
부정이 가능한 역사는 없다. 또 역사를 부정 할 수도 없다. 그러나 변하지 않은 역사도 없다. 한국현대미술의 실험의 시대를 어떻게 볼 것인가는 전적으로 보는 이의 견해에 달려있다. 경우에 따라 부정적으로 본다는 치더라도 보지 않고 넘어 갈 도리는 없다. 이 시대를 다시금 되돌아봄으로써 한국현대미술사에 있어서 의미를 새롭게 부여함으로써 늘 타자의 시각에서 머물렀던 우리미술사를 주체적으로 이해하고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첫댓글 이건 몇시간 공부해야될것 같군요. 나중에 시간내서...
감사합니다.